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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 첫소설집을 읽는다. 알라딘 온라인중고에서 구입한 책. 최근에 읽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한강 소설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 읽은 소설이 몇 권 있지만 이참에 한강 소설을 독파해보자 하는 마음.
등단작을 실은 첫소설집이다. 제목은 등단작이 아닌 다른 작품으로 삼았는데, '여수의 사랑'에서 여수는 지역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소설 본문에서 나오는데,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가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여수의 사랑'. 39쪽)고 하니, 소설 속 인물들은 한 곳에 머물렀어도 머무르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인물의 고향이 여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 떨어져 나와서 근근이 생활을 해나가는데, 그럼에도 한 인물은 여수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다른 인물은 여수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면서 그리워한다. 여수로 가기를 희망하고 표를 끊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진다. 여수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다른 인물은 그래서 여수로 가는 기차에 타고 여수에 내리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여수에서 출발해 여수로 돌아오는 과정, 회귀라고도 할 수 있지만, 회귀라기보다는 옴쭉달싹(옴짝달싹-몸을 아주 조금 움직이는 모양)이라는 부사어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의 행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바로 '옴쭉달싹'이라는 말을 들 수 있겠다. 이 말은 뒤에 부정어와 함께 쓰이니,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지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참 힘들게 산다. 부모 잃고 경제력 없이 그래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니 없던 병도 생기게 된다. 인물들은 나름대로 병을 앓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견딜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다. 이런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병이다. 위통이든 신경질환이든,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병을 앓는다.
옴쭉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상황. 독해지고자 해도 독해지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으로 독해지자고 하는 사람들이 병을 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나타나는 독한 마음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어둠의 사육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함께 사는 고향 언니에게 배신당하고 더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인물이 독기를 품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지내온 나날들을 생각할 때 나오는 말.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어둠의 사육제'. 251쪽)
그래서 이 소설집 인물들은 아프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로 자신이 아프지 않으면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다. 자신을 대신해서 아파해야 할 존재들이 있다. 이렇게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삶에는 아픔이 있다. 병이 있다. 이 병을 한강은 우리에게 들여다보라고 한다.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이런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보라고, 눈 감지 말라고.
그렇게 옴쭉달싹 못하는 인물들. 그러나 이들은 움직이려 한다. 남들에게는 비록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들은 최선을 다해서 움직인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지만 아직 죽음의 세계에 가지 않기 위해. 이 소설집 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여수의 사랑'에서 떠나왔던 여수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다. 다시 돌아온 여수는 예전의 여수와는 다를 것이다. 비록 삶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한강은 이 소설집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희망보다는 그냥 현실을 보여준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려 아등바등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등바등대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고. 그렇다고 이들이 열심히 살지 않냐 하면 아니라고. 또 이들이 비도덕적이냐고? 아니라고. 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도덕적이라고. 그래서 삶이 더 힘들다고.
이렇게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초상, 풍경화라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밝은 색으로 채색이 되지 않은, '저녁빛'에서 재헌이 그리는 그림처럼 어둑어둑한 느낌을 주는 소설.
그렇다고 사회 비판을 하는 소설은 아니다. 한강 소설에서 사회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물이 인물을 둘러싼 환경에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고민하고 대응해 가는 과정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으니...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과 갈등과 고민이 이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