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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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 현실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한강 소설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의 열망을 환상을 통해서 보여준다. 너무도 참혹했기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들을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서 서술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환상과 현실이 넘나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우리 삶에 끌어왔다. 단지 그 시대에 머물지 않고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광주민주화운동'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지만, '4,3사건' 역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다. 나라에서 이제는 반국가 활동으로 여기지 않고 기념식도 인정해서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려진 진실은 여전히 있다.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한다. 4.3세대가 아닌 4.3을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는 사람들. 나이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소설 속 인물이 모두 제주도 출신은 아니니까. 소설은 서술자인 경하를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경하는 작가다. 소설 속에서 알 수 있고, 또 이 소설 앞부분에서 [소년이 온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의 1부에서는 이런 작가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20여 년을 알고 지낸 인선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빨리 와 달라고.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를 당한 인선. 그런 인선과 만나고 함께 했던 시절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인선이 부탁한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가 달라고. 자신의 집에. 새를 살려달라고.


이건 소설 장치다. 경하는 어떻게든 제주도로 가야 한다. 그의 꿈속에 나왔던 장면들을 인선과 함께 작업하려고 했던 경하. 그것은 바로 4.3에 대해 쓰고 인선이 영상으로 담았으면 하는 경하의 제안이었다. 인선은 받아들였지만 어느 순간 경하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경하는 제주도에 간다. 폭설, 길 잃음, 간신히 도착한 인선의 집, 이미 죽어 있는 앵무새. 이렇게 1부는 끝난다. 경하의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172쪽)의 말과 함께. 그러나 죽음은 망각이다. 4.3은 망각이어서는 안 된다.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아니, 기록이 남겨져야 기억이 된다.


2부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4.3을 맨정신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 참혹했던 역사적 장면을 어떻게 맨숭맨숭하게 만날 수 있을까? 또 그 사건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우리는 어떤 상태여야 하는가? 우리 마음 역시 그날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과 비슷할 정도의 절망과 좌절 상태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경하가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상태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 전기가 나갔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난방이 되지 않는다. 물도 끊긴다. 무엇을 해볼 수 없는 칠흑같은 어둠과 추위, 그리고 끊이지 않는 눈들. 


여기서부터 소설은 무엇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죽은 자가 누구일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정도 상태에서야 가려진 진실을 알 수 있다. 인선이 생각했던 자신의 엄마가 4.3때 희생당한 오빠를 찾아 헤매고 자료를 모은 장면이 2부가 전개될수록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엄마에게서 그런 끈기와 힘이 있다니, 그것은 진실을 알고 싶은 엄마, 그 일을 겪은 엄마의 몸부림이었다. 제주도에 나타난 인선을 통해서 경하는 인선의 엄마와 아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4.3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에게 4.3을 보여준다. 말해준다고 하기보다는 보여준다는 말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경하가 인선이나 새들의 그림자를 벽에 그리듯이,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 하지 않고 벽에 그려진 그림자처럼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


경하가 벽에 그리는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4.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언제든지 겹쳐지고 (소설에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경하가 인선을 찾아 제주도에 갔던 과거와 또 한번은 지금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장면에서) 지워질 수 있는 그런 역사. (경하가 벽에 그림을 그릴 때 연필(샤프)로 그린다. 지울 수 있는 도구다. 역사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록되지만 또 반대로 지워질 수도 있고 덧씌워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강은 소설의 2부를 환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4.3의 희미한 그림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밝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지지 않더라도 희미한 그림자로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기억되어야 할 역사라고. 그렇게 진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기록 속에 남아 있게 된다고.


소설 끝에 작가의 말에서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328-329쪽)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은 이 지극한 사랑이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번지게 하고 있다. 우선 동갑내기인 경하와 인선의 사랑.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지지해주는 그런 사랑. 그래서 경하는 인선이 신분증을 챙겨오라고, 제주도에 당장 내려가 달라고 할 때 자신의 몸이 안 좋아질 수 있음을, 약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고 제주도로 내려간다. 인선 역시 경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사랑이 우리에게 4.3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엄마의 가족에 대한 사랑. 어쩌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사랑은 바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일을 자식인 인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인선의 진실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인선의 영화 3부작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베트남 전쟁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또 하나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담은 영화, 그리고 하나가 4.3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렇게 소설은 사랑이 중첩되면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든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우리는 소설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가 없다.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되고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별은 없다. 우리 삶에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에 답하고 싶다. 이 소설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이렇게 나는 [소년이 온다]에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꼭 읽어야 할 소설 목록에 추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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