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피터 래빗 전집 - 190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구자언 옮김 / 더스토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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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동심을 파괴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동심, 순수한 마음.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잔혹 동화는 동심을 파괴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 시대에 아이들을 온갖 매체로부터 막을 수는 없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매체들은 아무리 나이 제한을 두어도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어떤 경우에는 나이 제한을 두면 저 잘 그 나이 제한에 걸리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 호기심이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면 더 하고 싶어지지 않나, 왜 세계 신화나 전설을 보면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하면 꼭 뒤를 돌아봐서 돌이 되는 사람들, 또는 헤어지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그러니 아무리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아직 이것을 볼 나이가 안 되었어 해봤자, 그건 몰래 보라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봐라, 봐라 할 수도 없으니 참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럴 때 정말로 아이들의 호기심도 자극하고, 정서에도 좋은 작품을 소개하면 어떨까?


마음이 따스해지는 동화도 좋고, 마음을 울리는 동화도 좋다. 우화라면 더 좋다. 왜냐하면 아이 때는, 꼭 아이 때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이 때는 더더욱 동물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인간의 언어로 소통을 하지는 못해도, 소통이 되는 때가 아이 때 아니던가. 


그러니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기도 하고,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서 아이들의 생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동화가 그렇다. 피터 래빗 전집이라고 해서 피터라는 토끼가 계속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피터라는 토끼 이야기가 처음에 나오지만 그 마을, 또는 다른 마을에 사는 여러 동물들이 나온다.


이 책은 그런 여러 동물들의 이야기를 마치 아이가 앞에 있는 듯이 말해주는 어조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겐 읽어주면 좋을 이야기 책이고, 글을 아는 아이에게는 직접 읽게 하면 좋을 책이다.


착한 동물도 있고, 말썽꾸러기 동물도 있고, 또 다른 동물을 괴롭히는 동물도 나오지만, 이 온갖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은연 중에 습득하게 된다. 이게 동화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어서, 또 그 그림들이 따스한 느낌을 줘서 더 좋다. 한 쪽 한 쪽 이야기들을 읽고, 장면을 보면서 또 그 장면에 더해서 다른 장면을 더하면서 다음 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어서 좋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물들을 서로 돕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어서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임을 몸에 익게 한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피터 래빗]과 같은 이런 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어린이가 읽으면 좋을 책이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좋겠고, 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더더욱 좋을 책이다. 


소리내어 읽으면서 이 책에 있는 따스함들이 우리들 마음 속으로 들어와 우리들을 훈훈하게 해줄테니 말이다. 읽는 사람이든, 듣는 사람이든. 또 소리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도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에서 이런 책을 읽으면 읽는 순간만큼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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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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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라는 말. 숲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지구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다른 SF소설들에서도 지구는 푸른색과 동격으로 나온다. 즉 지구는 푸르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행성이다. 그리고 지구를 푸르게 하는 두 요소는 바다와 숲이다. 바다와 숲이 없으면 이 지구에 과연 생명체들이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종족들을 애스시인이라고 하는데, 애스는 어스(earth)이고, 시(sea)는 바다니, 땅과 바다, 즉 숲과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종족들에게서 숲을 파괴하려고 하는 지구인들은 그들의 삶을 없애려 온 외계 종족일 뿐이다.


이를 우리 지구로 가져와 이야기한다면 원주민 또는 선주민들이 잘살고 있던 곳에 들어온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선주민들에게 강요해서 선주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파괴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자자손손 살아왔던 터전을 파괴당한다면 가만히 있어야 할까? 그들에게는 같은 종족을 죽이는 법이 없었다고, 살인의 방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침략자들에게 그냥 순종해야 할까? 


이런 순종적인 종족에게 전쟁을, 폭력을, 살인을, 강간을 가르친 이주민들, 외계 종족들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소설에서 애스시 종족인 셀버는 지구인인 데이비드슨에게 아내가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복수에 나선다.


복수는 피에는 피로 대응하는 방식. 셀버를 구해주고, 그와 함께 했던 류보프는 이들 종족이 평화적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셀버를 중심으로 애스시 종족은 지구인들을 공격한다. 그것도 가차없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 여자들을.


전쟁에서 피해를 입는 집단이 주로 여성과 아이들인데, 평화를 유지했던 종족이 전쟁을 하면서 여자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이들로 인해서 지구인들이 이 행성에서 자손을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평화의 선을 넘어 전쟁으로 나아갔고, 거기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


왜 평화로운 종족이 이렇게 변할까? 바로 이들을 이끄는 신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존재 역할을 셀버가 하는데, 그는 통역자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통역. 이는 다른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이자, 바꾸는 존재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통역자는 신이다.


  그는(셀버) 환영의 중심적인 체험을 각성해 있는 삶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두 실재란 애스시 인이 동등하게 여기는 꿈 시간과 세계시간으로서 둘의 관계는 긴밀하지만 분명치가 않았다. 연결 고리, 다시 말해 무의식이 지각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 언어를 '말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바꾸거나 바뀌는 것이다. 근본으로부터 철저히. 근본은 꿈이다.

  그래서 통역자는 신이다. 셀버는 새로운 단어를 그의 사람들의 언어 속에 들여왔다. 그는 새로운 행위를 해내었다. 살해라는 단어, 그 행위를. (111쪽)


이런 셀버로 인해 그들은 전쟁을 한다. 살인을 저지른다. 이제 이들에게는 새로운 말, 새로운 행동이 도입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들이 지녀왔던 문화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들을 도발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데이비드슨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들을 공격했기에 이들은 데이비드슨의 기지를 공격해서 그들을 몰살시킨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항복을 하는 적을 죽이지 않는, 즉 살려달라는 표시를 하는 상대는 죽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살려달라는 표시를 할 줄 아는 지구인은 거의 없다. 


셀버와 함께 지내고 애스시 종족의 문화를 어느 정도는 아는 류보프는 알고 있고, 그로 인해서 데이비드슨 역시 그 방식을 알고는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에게는 우리나라 전통에 의하면 유배라는 형식의 처벌이 남겨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전개된다. 지구인들이 떠날까? 과연 이 행성에 평화는 올까? 선주민들이 원시적인 무기로 최첨단 무기를 지닌 지구인들을 이길 수 있을까? 소설과 현실은 다르니, 소설 속에서는 이들 선주민들이 제 행성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전쟁을 겪은 그들은 과거 그들과 같을 수가 없다. 씁쓸한 진실이 여기에 있다.


선주민들이 이주민을 물리쳐도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해 그들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이주민들이 선주민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려 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그들이 저지른 해악이다. 그들은 선주민들의 현재를 힘들게 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도록 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셀버의 마직막 말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류보프는 여기 있을 거예요. 데이비드슨도 여기 있을 겁니다. 두 사람 다.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당신들이 오기 전 모습대로일지 모르죠.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것 같지 않네요." (173쪽)


무섭다. 선주민에 대한 이해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는 이주민들의 태도는 이렇게 미래까지도 바꿔놓기 때문이다. 결코 그들은 과거의 그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는.


르 귄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서로 다른 종족들이 만나서 갈등하고 융합하는 과정이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이 행성에서 지구인들이 완전히 물러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이 행성에 지구인이 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미 한번 알려진 행성은 어떻게든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때의 연결이 폭력이 아니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융합으로 나아가야 함을 이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종족과의 만남뿐만이 아니라, 지금 지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벌목 현장들을 보라. 이소설에서 지구에서도 숲이 사라졌기에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목해 가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70년대에 나온 소설에서 벌목의 위험성, 숲이 사라지면 인간 세상도 존재하기 힘듦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숲이 계속 사라지고 있는 이 현실이...


다른 행성, 다른 종족들의 갈등과 해결로 이 소설을 읽어도 좋지만, 지금 지구에서 숲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비유로 이 소설을 읽어도 좋겠다. 50년 전에 쓰인 소설이 지금도 유효하다니...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이 아직도 이렇게 큰 울림을 주다니...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라는 이 말. 마음에 새겨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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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물레 환상문학전집 33
어슐러 K. 르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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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발한 상상력이다. 읽으면서 처음에는 영화 '인셉션'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가 생각을 훔친다는 발상의 영화. 그런데 계속 읽어가면서 그 영화와는 다름을 알게 됐다. 이 소설은 개인의 꿈이 사회, 세계를 바꾸는 이야기이고, 과연 그렇게 사회를 바꾸는 일이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하게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계를 바꾸는 신의 자리에 선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1970년대에 쓰인 소설에 이런 상상력이 나오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다보니,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 데우스]가 떠오르게 됐다.


그래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이제는 '호모 데우스'가 되려는 인간들의 모습. 어쩌면 이 소설은 '호모 데우스'의 모습을 미리 경험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 어떤 인간에게 신의 능력이 부여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그 능력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또다른 영화 '브루스 올 마이티'가 생각난다. 신의 능력을 받은 사람. 그 영화는 덜 심각했지만, 이 소설은 심각하다.


세상에서 인류를 파멸시키기도 하고, 외계인을 불러오기도 하니까. 조지 오르는 자신이 세계를 바꾸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안 다음에 잠 자기를 두려워한다. 잠을 자면 꿈을 꾸게 되는데, 이 꿈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마음을 지녔기에, 신의 위치로 올라설 생각이 없었기에, 온갖 약들을 복용한다. 그러다 하버라는 박사에게 치료를 받게 된다. 자, 하버는 처음에 오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오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이제 어떻게 될까? 하버는 치료에만 전념할까? 아니다. 그는 그 능력을 쓰기를 바란다. 오르를 조종한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이 지점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나타난다. 


'권력을 향한 의지의 특징은 정확히 성장이다. 성취는 성장을 해소시킨다. 따라서 권력을 향한 의지는 그것의 충족과 함께 증대하므로, 충족된다는 것은 오로지 더 큰 충족을 향한 한 걸음일 뿐이다. 점점 더 막대한 권력을 얻을수록, 그것을 향한 욕구도 점점 더 막대해진다. 하버가 오르의 꿈들을 통해 휘두르는 권력에는 아무런 가시적인 한계가 없었으므로, 세계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그의 결심에도 끝이 없었다.' (204쪽)


권력의 속성이다. 한 사람에게 절대 권력이 쥐어지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에 빠져, 자신만이 할 수 있고, 또 자신만이 옳다는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함정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추종자들을.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이 세상을 자기 멋대로 바꿀 권리는 없다. 오히려 인간은 이 세계의 일부다.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조지 오르는 그 점에서 하버 박사가 자신을 조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세계를 창조할 권리가 없으니... 조지 오르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지, '호모 데우스'가 아니라고.


'우리는 세상에 맞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존재해요. 상황의 바깥에 선 상태로 상황을 관리하려고 하는 것은 효과가 없어요. 정말 효과가 없어요. 그건 삶을 거스르는 거예요. 박사님이 따라야 하는 길이 있어요. 세상이 어때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세상은 존재해요. 당신은 그것과 같이 존재해야 해요. 세상을 놔둬야 한다고요.' (216쪽)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이어야 한다. 신의 자리에 올라서려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려는 인간. 조지 오르는 그런 인간이고, 하버는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인간이다. 조지 오르를 통제하는 것을 넘어 직접 자신이 꿈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권력의 맛에 취한 사람이 그 맛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이때 오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버 박사를 멈추는 일. 그리고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 뒤죽박죽인 세상, 복합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 


소설 중간에 만나는 여인 '헤더 르라세'를 만나 다시 시작하는 결말 부분에서 우리는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자신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만든 세상,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세상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얽히고 설킨 세상에서 실타래를 풀어가는 일은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늘의 물레'라는 제목이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물레를 '선반'으로 바꾸면, 그 선반은 다른 물품을 만들어내는 틀을 제작하는 도구니, 결국 '하늘의 물레'는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누가 창조하냐? 신처럼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특정 존재가 해야 하느냐, 아니면 불완전한 인간들이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소설이다.


하늘은 결코 인자하지 않다고, 노자가 말했다고 했던가. 이 소설에서도 이런 노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하늘이 인자하지 않다고 하는 말은, 하늘이, 신이 인간의 삶에 전적으로 개입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게 하지 않고, 인간들이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즉, 기쁨만 있는, 제 뜻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실연, 용기와 두려움 등 수많은 감정들, 또 수많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


꿈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무의식인 꿈을 통해서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상상력. 그 능력을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과 받아들여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갈등을 통해 우리들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상상력을 1970년대에 소설로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소설. 물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설정이지만, 그 설정을 통해 우리들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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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의 도시 환상문학전집 7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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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이 쓴 '헤인 우주 시리즈'라고 하는데, 같은 행성이야기는 아니다. 이번 소설은 웨렐이라는 행성에서 지구로 온 사람이 겪는 일이다.


과거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지구 사람들에게 발견된 사람. 지구인들과 생김새가 달라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과 지내면서 잘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이를 이름 찾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이름은 존재를 인식하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름을 바로 잡겠다고 했지만, 과연 어느 이름이 바로 '나'인가는 문제가 된다. 이 소설에서 팔크와 라마렌이라는 두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가 주인공이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찾아 떠난다.


떠나면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 지구인들이 두려워하는 싱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싱에게 가야지만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싱이 살고 있다는 에스 토치로 간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과거에 라마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로 인해서 과거 기억을 되찾는다. 이때 과거 기억을 되찾으면 그 이후에 경험한 팔크의 경험은 사라지게 된다. 왜 싱이 라마렌의 기억을 되살리려 할까? 그들은 과연 평화주의자일까?


여기서 소설은 싱과 팔크 또는 라마렌의 대결로 나아간다. 라마렌의 기억을 찾았지만 마찬가지로 팔크의 기억도 잃지 않은 그는 싱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행성인 웨렐로 행한다.


팔크 또는 라마렌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다시 이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느 이름이 자신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팔크일까, 라마렌일까? 아님 둘 다일까? 소설은 여기서 노자를 불러낸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라고 하는. 어쩌면 이름을 짓는 순간 그 이름에 갇혀 살게 될지로 모른다는.


모든 이름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싱의 이름들은 그렇다. 그들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이름을 통해서 위장하고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끌어내야 하고, 그런 두려움만으로는 통치하기 힘드니, 자신들의 이념을 언어를 통해 내면화하게 해야 한다.


이런 모습들을 싱은 언어를 통해서 하고 있는데, 그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의도를 찾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 소설이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이것 또는 저것으로 정리될 수 없다. 진실도 마찬가지다. 팔크의 기억을 잃지 않은 라마렌이 지구에서 겪은 일들을 웨렐에서 이야기할 때는 다시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언어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존재들을 웨렐로 데려가기로 한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여럿인 법이지'(252쪽)라고 하면서. 


결국 르 귄 소설은 다양한 존재들의 인정이다. 어느 하나로 규정하고 재단하지 않는. 복합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임을 여러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야 함도. 그 점이 비록 우주의 여러 행성과 그곳에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그들을 통해서 이 지구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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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행성 환상문학전집 6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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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행성이다.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행성에서 외인으로 살아간다.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계에서 온 이들도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가 자신들은 사람이고, 다른 존재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서로 전쟁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다른 공간에서 살아갈 뿐이다. 서로의 도시를 방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같은 행성에 살지만 다른 존재들. 이들에게 가알이란 종족이 침략해 온다.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가알들은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고, 남자들을 학살한다.


처음에 외인과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연합해서 가알을 막으려 했지만, 외인과 만나는 여인 롤레리로 인해서 동맹이 깨지고 만다. 그리고 가알들의 침략에 속수무책.


원주민들의 도시는 파괴되고, 그들을 외인들이 받아들여 피신하고, 함께 싸운다. 혹독한 겨울추위로 가알들이 물러가고, 이들은 도시를 지켜낸다.


단순히 전쟁 소설로 읽을 수 있지만, 아가트와 롤레리를 중심에 놓고 보면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외계에서 온 존재도 사람, 원래 살고 있던 주민들도 사람. 피부색이 다르고, 생각과 행동이 다를지 몰라도 이들은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 가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사람이다.


그러니 이 행성에서 살아갈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서로 다른 종이라고, 이종교배가 불가능하다고 지금까지 여겨왔던 사고방식이 소설 뒷부분으로 가면 변하게 된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이종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그래서 함께 살면서 자손을 낳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외계에서 온 존재들이 이주한 행성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우월한 기술을 포기하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통해서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야만 함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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