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김태연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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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시집이 있을 뿐이다. [입 속의 검은 잎] 


그 밖에 산문집도 나왔고, 전집도 나왔지만, 기형도를 우리에게 다가오게 한 작품은 바로 이 시집이다. 시들이다. 그래서 기형도는 시인이다. 그의 시들이 주는 암울한 분위기, 읽으면서 자꾸만 안개 속에서 길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는 그런 시들. 하지만, 그 시들을 통해서 기형도를 잊지 않게 된다.



이 책은 기형도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일들은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이라기보다는 기형도에 관해 친구가 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시절과 그 이후의 이야기에 국한되어 전개된다. 당연하다. 연세문학회에서 만난 기형도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형도의 과거가 조금씩 나오기는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만난 기형도 이야기를 한다.


문학회에서 만나 기형도가 죽기 전까지 만나왔고, 함께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래서 기형도를 실감나게 만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 기형도, 참 멋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좋은 시인'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좋은 시인. 유명한도 아니고 훌륭한도 아닌 좋은, 그렇다.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좋은가. 그는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씨를 지닌. 그리고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공부도 너무 잘하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에 지니고 있던 깊은 상처. 그 검은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고, 몸에서는 병을 간직하고 지냈던 사람. 불의의 죽음으로 전설이 된 시인. 그 시인과의 만남과 이별을 이 소설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전설이 된 기형도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회를 살아갔던 살아 있는 인물이었던 기형도를 만나게 해주고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도 기형도의 시에 대한 열정도 열정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것이 결국 기형도를 좋은 시인이 되고자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이라 그렇겠지만, 그래도 (양력과 음력을 모두 떠나서) 기형도가 좋아했던 시인인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날이 2월 16일인데, 기형도가 태어난 날이 2월 16일이라니... 윤동주의 죽음도 20대, 기형도도 20대에 세상을 떴으니,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이 소설이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소설적 장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일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인 허승구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기형도.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또 기형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면 좋겠다. 기형도라는 사람, 시인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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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무스와 방랑자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8
아스트리드 린드그랜 지음, 호르스트 렘케 그림, 문성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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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리드 린드그렌. 말괄량이 삐삐로 알려진 사람. 스웨덴 국민작가로 불린다고 하고, 또 우리나라 백희나 작가가 린드그렌상을 받아 알려지기도 했던 작가.


라스무스라는 고아 소년이 고아원을 탈출해 방랑자 오스카를 만나 여러 일들을 겪은 뒤에 오스카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는 내용.


어린 시절 갖게 되는 모험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소설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어서 좋다.


말괄량이 삐삐도 사실 어른들 관점에서 보면 일탈행위를 하는 아이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지니는 호기심, 모험심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라스무스도 마찬가지다. 고아원에서 입양되기를 바라는데, 자신처럼 머리 숱이 별로 없는 남자아이는 입양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겨우 아홉 살 난 아이.


개구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아이. 라스무스가 고아원을 나가 오스카를 만나 함께 하는 여정에서 오스카에게 애정을 느끼고, 결국 오스카의 집에서 살게 된다는 설정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결말이리라.


이 과정에서 강도들을 만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읽으면서 얼마나 손에 땀을 쥐겠는가. 그렇게 아이들은 라스무스를 통해서 집을 나가는 간접 경험을 하고, 또 라스무스를 통해서 자신들이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모험을 하게 된다.


문학이 아이들에게 주는 역할은 바로 이러한 대리 만족이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의 폭을 넓혀가는 일.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홉 살짜리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심성을 잃지 않는 라스무스와 돈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방랑 생활을 하는 오스카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뭐, 책을 읽으면서 굳이 윤리니 도덕이니 철학이니 궁리할 필요 없다. 재미 있게 읽으면 된다. 재이 있게 읽으면서 자연스레 마음 한 구석에 인물을 닮아가려는 태도가 깃들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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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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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하면 1930년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소설가고, 춘천에 가면 김유정문학관도 있으니, 김유정 문학상이 당연히 있을텐데, 이번 작품집으로 김유정 문학상을 처음 만났다. 한때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꼬박꼬박 사서 읽은 적도 있었으니, 이상과 김유정이 구인회 회원이었고, 이상이 김유정이라는 소설도 썼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렸다. 수상작 1편과 후보작 6편. 수상작은 한강이 쓴 '작별'이다. 마치 카프카가 쓴 '변신'을 연상시키는 작품.


첫 시작에서 어, 변신이네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13쪽) 자고 일어났더니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가 되어 있었다와 비슷하다.


그런데 장소와 변신한 대상이 다르다. 우선 카프카 작품에서는 집 안, 자기 방에서 자다 일어났고, 시간은 아침이다. 그리고 벌레로 변했다. 한강 작품에서는집 밖, 밤이고, 눈사람이 되었다. 


집 안과 집 밖은 단지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상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집 안에서 자신들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설정은 이 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결국 방 안에 가두거나 또는 죽어서 내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즉, 벌레가 된 존재가 작별하는 방식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다.


한강 소설은 이와 반대다. 집 밖에서 변신했다. 이는 작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로 집 안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눈사람으로 변햇으니, 집 안에 있기는 힘들다. 눈사람은 소멸하는 존재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 밖에 있어야 하는 존재. 그러하기에 굳이 내몰 필요가 없다. 작별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하게 된다.


비슷한 방식의 변신이지만 작별하는 방식에서는, 또 변신한 존재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소설도 그런 식으로 전개가 된다. 


갑자기 눈사람이 되었다는 설정. 눈사람은 녹을 수밖에 없다. 즉, 소멸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변신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과 작별하는가를 살필 수가 있다.


카프카 소설이 위태위태하다면, 이 소설은 비슷한 변신임에도 불구하고 따스하다. 우리는 눈사람에서 차가움을 느끼기보다는 따스하고 포근함을 느끼지 않는가. 서서히 녹아가는 존재.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알면 준비를 하고 작별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작별하는 모습이 아니라 내 의지에 의해서 그동안 사랑했던 사람들과 작별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만나게 된다. 하여 단순한 변신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을 알게 된 사람이 주변 사람들과 아름답게 작별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하면 된다.


만나면 헤어지게 마련, 생명체는 어느 순간이 되면 생명이 꺼질텐데, 그 죽음의 순간, 함께 했던 존재들과 어떻게 작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죽음을, 변신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읽으면서 마음은 따뜻해진다. 


역시 한강은 환상적인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조금씩 끼워넣어, 등장인물의 상황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하고 있는데, 가령 이런 부분, 


'... 그녀는 뉴스와 관련된 꿈을 자주 꾸었다. 노동절 시위 중에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경찰이 유족 동의 없이 부검하겠다고 발표한 날 밤에는 

... 특히 지난 삼 년 동안은 죽은 아이들의 꿈을 되풀이해 꾸었다. 겹겹이 흰 천으로 감싼 수백 명의 아기들의 시신을 차례로 종이 상자에 담으며 그녀는 벌벌 떨었다...'(57쪽)


이 서술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작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 작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이 사람들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 꾸는 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눈사람으로의 변신은 갑작스런 작별이 아니라 작별할 시간을 주는 작가의 설정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할 시간은 있으니... 그래서 더 애절하고 애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작별은 이러해야 한다고. 이런 장면들이 마음에 찡하니 남아 있다.


수상작인 한강 소설 말고도 강화길의 '손', 김혜진의 '동네 사람',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 정이현의 '언니'란 소설에서는 견고한 벽을 통해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느낀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방외인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집단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속에 끼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의 모습.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모습.


강화길 소설에서는 다문화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 이 소설에서 말하는 손은 흔히 귀신 또는 악귀라고 할 수 있다. 손 없는 날이라고, 이 날이 행사하기 좋은 날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손'인데... 마을 공동체에서 외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시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첩되어 누가 '손'일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김혜진 소설에서는 성소수자가 동네에서 배척당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고, 마을 공동체의 벽에 가로막힌 외부에서 이사온 사람들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어떻게 읽든 자기들끼리 꽁꽁 엮여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 이야기다. 그런 삶이 얼마나 힘들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다.


이승우의 소설 역시 성경에 나오는 롯의 이야기에서 빌려와 다양한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결국 롯이란 인물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정이현의 소설에서는 학벌로 지칭되는 벽과 대학원생을 부려먹는 학계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인회라는 인물을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네 소설은 서로 다르지만 견고한 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나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들이다. 수상작인 한강 소설이 작별을 하면서도 다른 존재들을 끌어안고 있다면, 이 네 소설에서는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니, 우린 다른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를 질문하는 소설들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처음 만난 김유정 문학상 작품집이 좋아서 다른 수상작들도 찾아보려는 마음을 지니게 하고 있으니... 이 책은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품집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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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캐넌의 세계 환상문학전집 5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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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환상적인 배경을 통하고 있지만, 결코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르 귄이 쓴 [바람의 열두 방향]이란 소설집에 실린 '샘레이의 목걸이'를 확장해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도 '샘레이의 목걸이'는 프롤로그에 목걸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미지의 행성으로 찾아온 로캐넌이 펼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그는 샘레이를 만난 뒤에 미지의 행성을 탐험하기로 하고, 이 행성에 와서 지낸다. 지내던 어느날 행성 연합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그의 우주선을 파괴하고 동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행성에 살고 있는 종족들을 몰살하거나 노예로 삼는다. 가공할 만한 현대 무기를 앞세워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거나 노예로 삼는 행위.


로캐넌은 그런 행위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적어도 세 종 이상에, 모두 기술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는 이 행성의 고도 지성 생명체에 대해서는 모두 무시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절멸시키거나 중에 제일 편한 길을 택할 것이다. 침략자들에게는 기술만이 문제가 될 뿐이므로.' (68쪽)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행성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존중은 없다.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그들을 종속시키려 할 뿐이다.


이런 세력이 점점 많아지면 평화란 없다. 오로지 전쟁뿐이다. 그렇게 행성 연맹은 해체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런 해체를 로캐넌의 세계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행성에 대한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로캐넌은 영주인 모지언과 그 수행원들과 함께 침략자들의 기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소설은 그런 모험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긴 여정을 떠나면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세계나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위험이나 또는 어떤 환대를 받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기지를 찾아내지만, 이미 깨지기 시작한 행성 연맹의 평화가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로캐넌은 돌아갈 곳이 없다. 이 행성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닌 별을 지니게 된다.


이름, 막대한 기술력을 지닌 존재들은 무엇에든 자신들이 알 수 있는 이름을 붙이려든다. 이 이름이 기존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든, 기존 사회에 필요가 없든 상관이 없다. 그러니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 행성에 '로캐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서술은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지는 행성 연맹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로캐넌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역시 강자의 이름짓기에 불과하다. 그 행성을 자신들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실 '아메리카'라는 이름도 그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그곳을 지칭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힘이 있는 자들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는 일들... 결국 이름은 권력이다.


이름은 존재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로캐넌은 이 말이 우리에게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땅에서 새로운 나무를 보고 네게, 혹은 너는 잘 대답해 주지 않으니까 야한이나 모지언에게 나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지. 이름을 알기 전에는 마음이 불편하거든.' (169쪽)


이렇게 이 소설을 읽으며 압도적인 기술력을 발휘하는 외계에 대항하는 이 행성의 사람들, 특히 날아다니는 말을 타고 다니는(그리폰의 후예라고 하나?) 그들의 모습에서 영화 '아바타'를 연상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로캐넌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외부에서 온 존재로 인해서 위기를 벗어나고, 그 외계 인물이 아바타들의 세계에 동화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이렇게 보면 또 다른 문명에 대한 침탈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이야기는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이주민들이 어떻게 몰아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이주민들이 그 세계를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르 귄이 쓴 이 소설 [로캐넌의 세계]는 우리가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먼 미래의 이야기도, 실현 불가능한 공상 속 우주 이야기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 삶에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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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어 서점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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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이 쓴 짧은 소설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읽다보면 서로 연결되는 소설도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김초엽은 다양한 상황,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상황들을 창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많은 작품이 실려 있지만, 외계(인)를 다룬 소설들이 제법 있다. 외계인 하면 괴물을 연상하고, 그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상황을 생각했던 과거 소설이나 영화에서 요즘은 더 나아가 외계 존재들과 공생하는 모습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그만큼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 유연해졌다고 할 수 있고, 외계 존재와 공생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외계 생명체도 나오지만,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더 넓히면 우주촌이 되기 때문에, 어차피 우주 존재들과 공생해야 하는 미래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 소설집에는 인공지능로봇도, 클론도, 외계인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간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떨 때는 외계 생물체가 지구를 잠식해 지구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는 상황도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외계 생물과 공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일방적인 침략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김초엽은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선인장 끌어안기'라는 소설에서 외부와 접촉을 하면 고통을 받는 특이한 신체를 지닌 사람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껴안기를 한다.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고통 속에서 사랑을 깨닫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삶을 돌아보게 된다.


고통을 마냥 회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 고통도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이런 내용을 '오염 구역'이란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외계 생명체로 인해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지만, 한 오지에서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간 파견원 이야기.


그곳 사람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법을 익혔다. 몸에 버섯이 돋아나고 그 버섯을 먹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비록 그것이 보기 흉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그들은 미치기보다는 그렇게 외계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관계만을 맺고 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그 상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기에,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가 주는 고통을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도 예전 삶의 방식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과 그것을 지키려는 소수의 모습도 보이도 있는데 제목이 된 '행성어 서점'이 그렇다. 우주의 모든 언어가 번역될 수 있는 시대에, 번역이 안 되는 책을 파는 서점. 


관광지가 되어 자신들은 읽지 못하지만 멋으로 책을 사가는 사람들. 그런데 어느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래,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모든 것이 다 과학기술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책을 읽는 일도 어쩌면 이런 일이 속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책 읽어주는 로봇도 나올테고, 번역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의 언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시대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언어를 배워서 그 나라,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책 읽은 행위도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책 읽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양성이 바로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다양성의 이로운 점을 잊고 획일화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하다고 느낀 소설이 '포착되지 않는 풍경'이란 소설이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광경. 사진을 찍어도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런 현상. 사진가는 어딘가에서 가장 구식의 아날로그 사진기를 구해서 찍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글로 표현해내려 한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기억하려 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그린 소설이 이 소설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 바로 다양한 삶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 다양한 삶들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하고. 소설집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설을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에서는 8편의 소설을,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에서는 6편의 소설을 싣고 있다.


이렇게 나눈 부분을 이어보면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알고 함께 살아가자가 된다.


닿지 않는다는 말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즉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짧은 분량이지만 내용은 결코 짧지 않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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