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깃발 - 노부인이 전하는 어느 도시 이야기 그들의 노동에 3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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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의 노동에' 3부다. 1부는 땅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땅에서 어떻게든 생명을 얻으며 살아간다. 2부에서는 땅에서 떠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히 땅을 떠나지는 못한다. 이제 3부는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사람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은 부모세대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쥬자와 수쿠스는 땅과 더불어 살아본 적이 없다. 물론 쥬자는 약간 다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염소 젖을 짜고 닭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은 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쥬자는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땅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여성은 땅과 관련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이 소설 인물 중 한 사람인 헥토르는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경감으로 퇴직을 앞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즉 땅과 함께 살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땅과 유리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아내가 알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헥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이다. 생명력을 상실한 삶.

 

수쿠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고향에 가고자 하지만 결국 가지 못한다. 그에게 돌아갈 고향은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뿌리뽑힌 삶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 오게 된 사람들의 자식인 2세대들은 이제 돌아갈 고향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든지, 부랑자나 범법자가 되든지 한다. 마치 땅과 붙어 있으면 누구도 죽일 수 없지만, 땅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게 되는 안타이오스처럼, 그들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땅에서 떨어져 나온 삶들이 온전하지 못함은 남녀를 구분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존 버거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한다. 죽은 이들이 모두 배에 모여 자신들의 삶을 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소설의 환상적인 마지막 장면... 작가는 이렇게라도 뿌리뽑힌 삶들을 위로하고 싶었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 도시화 되면서 사람들 삶이 땅과 점점 멀어지고, 그런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몇 십 년에 걸쳐 사람들이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존 버거는 '그들의 노동에' 3부작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땅에서 멀어지는 삶이 우리들에게 고난을 준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으니, 다시 땅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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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로파에서 그들의 노동에 2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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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 [그들의 노동에]3부작 중 2부다. 1부가 '끈질긴 땅'이라는 이름으로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였고, 그들이 땅에서 분리되기 시작함을 루시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2부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서서히 땅에서 멀어지며 도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 우리나라 60-70년대에 농민들이 땅에서 분리되어 도시로 와서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빈민이 되어가는 모습을 버거의 소설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다.


1부가 이문구 소설을 연상시킨다면 2부는 이문구 소설에서 벗어나 조세희 소설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산골에서 살지만 도시의 삶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시와 산골의 삶에 다리를 걸치게 되는데, 곧 이들은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2부의 제목이 된 '한때 유로파에서'이다.


산골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뿜어내는 유독가스들로 인해 숲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을 사람에 비긴다면 오딜이 사랑했던 사람이 공장에서 죽어가고, 또다른 사람은 다리를 잃게 된다.


산업노동이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거나 장애로 만들고 있는데, 자연 파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피폐하게 함을 그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시대 변화는 어쩔 수가 없다. 오딜은 아버지와 자신이 자란 환경을 사랑하지만 도시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은 도시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벗어나 도시로 간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는 아직 돈이 전부는 아니다. '보리스, 말을 사다'라는 소설에 그 점이 잘 드러나 있는데, 비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보리스지만, 그는 도시라 할 수 있는 카페에서 차값을 대신 내주는 등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이용하는 사람은 도시 사람들이다. 그를 이용해 집을 얻으려는 도시 출신 부부가 나오는데, 이렇게 땅과 유리된 삶은 결국 이용당하고 만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게 되거나 (아코디언 연주자), 산골에 들어와 살지만 결국 도시에서 가게를 차려 살아가게 되는 삶(우주비행사의 시간), 도시 부부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되는 삶(보리스, 말을 사다)이 2부에서 펼쳐진다.


땅과 유리되어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사람들. 세상은 그렇게 변해왔다. 지금은 도시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땅과 유리된 삶, 흙을 밟아본 기억이 산에나 가야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이 소설에서는 아직도 풋풋한 풀냄새, 흙냄새가 나고 있지만, 그런 냄새와 더불어 매캐한 공장 냄새도 함께 나고 있다. 그 매캐한 냄새가 풋풋한 냄새들을 누르기 시작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3부는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겠지. 씁쓸하게도 우리는 땅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버거의 3부작 소설은 어쩌면 우리가 땅을 잃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러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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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땅 그들의 노동에 1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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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이다. 여러 단편이 묶여 있는데, 배경은 농촌이고, 인물들은 농민들이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벗어나지 못하는 이라는 말보다는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땅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땅을 통해 생명은 지속된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땅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농민이 되지 않는다.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땅에서 벗어난 농민. 버거의 이 소설에서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대도시의 파리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이들이 살아야 할 장소는 땅을 일구며 사는 곳이다. 땅과 같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이들은 살고 죽는다. 죽음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병원으로 가는 도회지의 삶과는 다르게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죽음을 자신에게 친숙한 곳에서 맞이하고 싶어한다. 죽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오게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땅과 함께 사는 삶은 자연의 일부인 삶이다. 돈을 앞세우는 삶이 아니라 생존을 우선하는 삶이다.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기르는 가축을 도살하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렇게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여기에 어떤 수사는 필요없다.

 

이런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루시 카브롤의 세 가지 삶', '루시 카브롤의 두 번째 삶', '루시 카브롤의 세 번째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삶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 루시 카브롤, 소설에서는 별명으로 더 불리는데, 코카드리유라고 한다. 그녀의 삶을 보면 동생들에 의해 쫓겨나 살지만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간다. 그러고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루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들보다 작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이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농민(통칭 농민이라고 한다)들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회에서 비중이 더 작아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루시는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동생들에 의해 쫓겨난다. 쫓겨나지만 땅과 더불어 계속 살아간다. 땅에서 나는 것들이 루시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루시가 땅을 떠나려 할 때, 결혼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고 할 때 더이상 루시의 삶은 없다.

 

그런 삶을 위해서 루시는 돈을 모아놓지만, 돈은 도시의 속성, 자본의 속성이고, 땅과 유리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더이상 루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는 농민들이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더이상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루시의 세 번째 삶에서 환상적인, 귀신이 된 사람들이 등장해 집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이제 현실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삶은 환상 속에서 계속된다.

 

이렇게 존 버거의 '끈질긴 땅'은 땅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큼 존 버거의 소설은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모습이 지금은 많이 낯설지만 원초적인 우리들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노동에]라는 제목으로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2,3부가 남았다. 2,3부 역시 땅과 함께 살아가는 땅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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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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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여운이 남는다.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는 순간,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속에 여러 생각들이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작가, 특히 어슐러 르귄과 카프카가 생각난다. 생뚱맞게 왜 카프카?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에서 버려지는 사람, 세상이 변했다고, 이익이 남지 않는다고 이미 있던 관계들을 무시해버리는 사회. 그런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다.


우리는 당연히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세계로 갈 때 너무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서양의 유토피아는 좀 다르지만, 우리 동양에서 무릉도원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무릉도원에서 며칠 보내고 오면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는 몇 세대가 흘러가고 만다.


그래서 다시는 무릉도원을 찾아갈 수 없다. 그곳은 그곳으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머나먼 우주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마련했다면? 그곳으로 이주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그곳까지 가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면? 우주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더 빠르고 더 값싼 방법이 발견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은 폐기되고, 그곳에 가는 길이 없을 때는 가차없이 그 노선을 가차없이 폐기하고 말 것이다. 마치 궁벽한 마을에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교통편을 없애는 일과 같이.


그렇다고 가지 않을까? 그곳에 가족이 있다면? 지금 속도로 빛의 속도로 가도 만날까 말까 한데,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래도 그곳으로 가려고 할까?


당연히 가려고 한다. 얼마가 걸리든 가지 못하든 상관없다.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소설에서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182쪽)


그렇다. 루카치가 창공의 별을 보고 길을 찾고 떠날 수 있던 시대는 아름다웠다고 했듯이, 비용과 효율을 넘어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가는 이의 모습. 안나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지만, 이윤 때문에 버려지는 모습에서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의 효용가치가 변하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데,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 그레고리 잠자는 죽음에 이르렀지만, 이 소설의 안나는 죽을지라도 그곳을 향해 가고자 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카프카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이제 우리는 효용을 위해서 사람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함을 안나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사람은 효용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임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SF소설이 바로 우리 현실을 빗대어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이 소설집 처음에 실린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도대체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여겼던 세상이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사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삶. 그런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이고, 그런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다. 르귄의 소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스펙트럼'이란 소설을 보면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외계인과 아직 조우하지 못했는데, 과연 우리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만날까?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외계 생명체와 만나는 장면을 그렸는데, 거기에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낯선 존재를 우리의 사고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점에 의문을 제시한다.


우리가 문자언어로 생각을 정리하고 의사소통을 주로 하지만, 외계 생명체도 문자를 통해서 그런 활동을 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는 색채를 통해서 소통을 하는 외계 생명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만큼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자세로 다가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다른 소설들에서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라는 소설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SF소설이라는 특성으로 지금은 불가능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에서 차별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게 된다.


SF소설이 지닌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 미래의 가상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 결국은 현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따라서 SF소설이라고 해서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SF소설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상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하여 우리는 그 가상 공간에서 현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초엽의 소러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현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읽고 나서 깊은 여운을 주는 소설.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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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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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희 시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났는데, 고학력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을 보아도,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보아도 여학생이 많다. 그런데 정규직의 비율을 보면 여성의 비율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조금씩 비중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낮은 편이다.


이 소설에서 똑똑한 여학생들은 한국어 강사로 일한다. 비정규직 강사. 그들에게는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온갖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들에게는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더 강요된다.


그나마 대학강사라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수업을 계획할 권리도, 학생들을 재량껏 평가할 권리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매뉴얼대로만 해야 한다. 마치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이들은 거대한 기계를 이루는 한 부속품일 뿐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이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학교에서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교육 장사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베트남 학생들은 배움이 목적이기보다는 한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려 한다. 학교와 그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많은 수의 베트남 학생들이 등록을 하게 되고, 그들을 가르칠 강사가 필요해서 많은 수의 강사가 채용된다.


학생 수에 따라서 다음 학기 계약이 되느냐 한 되느냐가 걸려 있는, 그 많던 여학생이 언제 계약이 만료될 지 알 수 없는 시간 강사로 살아가게 된다. 박사과정을 밟은 한희조차도 책임강사라고 하지만 계약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육 장사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이 소설 [코리안 티처]다.


2. 여성을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한국인 강사들이 이 소설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그 많던 여학생들이 비정규직으로 삶을 이어가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여성이기도 하다. 몸으로서의 여성.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공유한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런 면에서는 동서양 학생들이 차이가 없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 차이보다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한다.


학생들은 강사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예쁘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공유한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선이가 그렇다. 


자신은 선의를 다해 가르치는데, 그들은 선이를 교사이기 전에 여자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꼭 외국인 학생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교사의 사진을 찍어 올리고 공유하는 사례가 많이 문제가 되었으니.


여성을 능력보다는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그것이 이 소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선이뿐이 아니라 그 점에서 벗어나려는 미주에게서도 그렇게 소비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 면에서 부작용으로 작동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생들과 친하고 잘 지내던 가은 역시 몸으로 소비되는 자신을 보면서 강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3.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선이로 시작해, 미주, 가은, 한희의 이야기로 봄학기, 여름학기, 가을학기, 겨울학기가 서술되고, 마지막에 겨울단기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학교에서 베트남 학생들이 집단으로 도망을 가니,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중국인 학생들을 단기로, 그것도 학교 측에서 비용을 거의 대주는 식으로 받으들여 전체 정원을 늘린다. 그러면서 다시 단기로 강사들을 채용하는데, 이때 처음에 등장했던 선이가 등장한다.


물론 결과는 행복하지 않다. 선이는 계약이 만료되었다가 단기에 다시 등장하고, 미주는 내용 증명을 받아 재계약이 안 될 처지에 있으며, 가은은 충격을 받고 강사직을 그만두었으며, 한희는 책임강사 직을 휴직하고 아이를 낳게되면서 다시 자기에게 주어졌던 가은의 자리로 갈 수 없게 된다. 단기 강사직을 다시 했던 선이가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던 폭죽으로 기숙사가 불타버리고 마니 선이는 다시 계약하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한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희는 한국어에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가, '한국어의 미래시제 교수법'이라는 글을 쓰려고 한다. 미래는 있어야 한다. 바로 한희에게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희는 영국으로 가자는 제이콥의 제안을 거절한다. 한국에서 자신은 버티겠다고 한다. 이제 한희에게 미래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와야만 하는 시제가 된다.


여기에 소설의 끝에 다시 가은이 등장한다. 지방의 다문화언어강사 면접 대기실에 있는 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에 열심히 살았고, 현재에도 충실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미래는 불확실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시제였다.


그렇게 끝나면 문정희 시 제목처럼 된다.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다. 갔는가로 끝나지 않고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겠다로 소설을 맺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한국어 강사들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삶과 교육으로 장사를 하는 대학의 행태들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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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6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로 뽑혀서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kinye91 2021-10-06 12:06   좋아요 2 | URL
이 소설 읽으면서 ‘82년생 김지영‘도 생각났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은데, 그것을 조금씩 깨뜨려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