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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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부부가 된다고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한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을 전제로 부부를 이야기 한다. 언제까지 변치 않을 사랑을 간직해야만 하는 관계.


당위다. 의무다. 상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래야만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세월이 흘러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고 왜 함께 사는지 모른다고 느낄 때도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소위 '쇼윈도 부부'라고 해서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보여지는 부부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이 경우에 사랑은 없다. 그리고 부부 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도 없다. 부부 간에 상대에게 무한히 헌신하는 사랑도 없다.


무한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신이 피조물들에게 주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치고, 자, 부부들 간에 사랑이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지내야 함께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위기를 겪는 부부 두 쌍과 이미 아내와 사별한 식료품점 주인, 그리고 자식을 잃은 노부부, 여기에 두 쌍의 부부 모두의 친구가 등장한다. 부수적인 인물로 가정부가 등장해서 사랑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정부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을 강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이탈리아 휴양지로 여름 휴가를 떠나온 다섯 친구. (사라/자크, 지나/루디 두 쌍은 부부고 다이아나만 남편이 없다) 이들은 더위에 지쳐 권태로움에 빠진다.


늘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만 서로를 떠나보낼 수 없는 부부인 지나/루디 부부는 이 소설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들의 다툼은 결정적인 위기로 치닫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로 치닫는 부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해지고 있는 사라/자크 부부다.


한 남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사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자크.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렇지만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


소설은 '사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쩌면 사라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부 생활을 하면서 흔히 겪게 되는 일, 그런 일을 겪어가는 사람. 사라.


누가 부부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하겠는가. 이 소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부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 아마 그게 제일 형편없는 지식일걸." (52쪽-다이아나의 말)


아마, 자신이 부인에 대해, 남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서로에 대한 증오로 치닫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감출 수 있고 또 감춰진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지 않고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순간,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 (295쪽 - 루디의 말) 


이런 말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에게 갇혀 있는 관계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갇힘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무뎌지는 관계. 사랑이 없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는 관계.


"세상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 갇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90쪽 - 자크의 말)

"커플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야. 어느 커플이든." (263쪽 - 자크의 말)


피곤하지만, 사실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모험이 바로 결혼 아니겠는가. 상대와 함께 살기로 한 것, 나와 남이 합쳐져 우리가 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237쪽 - 자크의 말)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평생을 살아가면서 처음에 느꼈던 사랑이 평생을 지속하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만들어가는 관계. 처음 느꼈던 사랑에 더하기를 하는 관계. 상대를 구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하는 사랑. 


어쩌면 이 소설은 부부의 사랑 형태를 보여주면서 부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 번쩍하는 황홀한 감정에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함께 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소설의 말미에 에트루리아 고분에 있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러 가기로 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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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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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제목을 보면서 '나'가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 아니면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존재가 바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는 대부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좋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나도 저런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지금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다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면서 '나'를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임을,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를 지워가는 과정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설을 읽는 중간에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는 가해자가 다른 사람이고, 여성에게는 남성이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게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이 여성을 다른 사람으로 여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섬뜩하게 시작한다.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본다. 그렇다면 피해자로 지내기보다는 다른 존재로 지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비난을 받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잘 일어난다.

 

그렇게 데이트 폭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자, 이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데이트 폭력을 공개한 피해자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대략 예상은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피해자를 두둔하는 댓글과 피해자는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그런 댓글들이 동등하게 달리지는 않는다. 동등하게 달리더라도 피해자의 눈길을 끄는 댓글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다.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피해자의 눈에는 그런 비난 댓글이 더 잘 들어온다.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다.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최근에 읽은 시, 이소호가 쓴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을 보라.)

 

이런 전개는 상투적이다. 이런 피해자가 비난 댓글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힘을 잃을 것이다.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물들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 맺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로 진아, 수진, 유리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강현이 등장한다. (이 이강현은 생물학적인 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삶의 양태로 보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남성 인물로는 류현규와 김동희가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의 서술자인 진아를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게만 만들지 않는 단아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는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느 당찬 젊은이인 김이영, 서술자인 진아를 서술로 이끈 이진섭이라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서술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진아, 수진, 유리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겪은 일들이 그렇고 대응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들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나'를 지우고 이 '나' 위에 '다른 사람'을 덧씌우려 했다.

 

물론 성공하기도 한다. 수진은 언뜻 보면 성공한 삶을 사는 듯하다. 그렇지만 아니다. 수진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수진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임을 의식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삶. 이런 삶에서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존재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관계맺기에 실패한다. 바로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 때문이고, 이런 '나들'이 바로 자신을 나약한 존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진도, 유리도 서술자인 진아의 '나'에 해당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나'가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역시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강간당하는 사람보다는 강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해결책일까? 이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가 가해자처럼 군다고 해서 내 피해가 사라지는가? 아니다.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해는 내 속에 더 깊이 남아 있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을 규정한다. 내 행동, 내 말투 등등을.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피해를 당한 것을 내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잘못한 일을 왜 피해자에게 돌리는가. 잘못은 가해자가 했고, 책임도 가해자에게 돌려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아왔다.

 

바로 피해자들의 '나'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나 피해의식 있어.'라는 말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도돌이표.

 

이 도돌이표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나'로 살아가는 길을 찾았을 때 멈출 수 있다. 이는 바로 피해의식이 있다고 하는 그 말들이 바로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가 또다른 '나'와 연대할 때, 비로소 '나'와 대척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가 '나들'로 굳건하게 연대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소설은 유리를 통해서 이런 '나'가 '나들'이 되는 과정, 그리고 젊은 세대인 김이영이라는 학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진아는 뒷세대인 김이영을 통해 '나들'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이제 과거의 인물이었던 유리가 현재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다음부터는 우리들의 몫이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다. 소설은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가해자는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너 피해의식 있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소설을 읽어보자. 서술자인 진아의 처지에서 읽어도 좋지만, 거꾸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희의 처지에서 읽어보아도 좋다. 왜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긍정적인 면이 류현규라면 그 반대 얼굴이 바로 김동희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 우리는 또다른 김동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설은 중반을 지나면서 추리소설의 면모를 띠기도 한다. 문체의 박진감과 사건 전개의 속도, 그리고 누가 누구를 괴롭혔을까 하는 추측으로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렇게 끝을 향해 소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이끈다. 끝에 도달했을 때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유리의 보고서 제목이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알게 된다.

 

소설에서 남자가 한 말을 진아가 돌려주는 장면이 있다. 끝부분에서 진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23쪽- 이진섭의 말)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329쪽-진아의 말)

 

도돌이표인가? 아니다. 이는 앞의 말을 이겨낸 '나'의 말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다른 사람'의 그늘을 벗어난 '나'의 말. 그러니 이제 소설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그런가? 소설 읽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여행이다. 이 소설 읽기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바로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이제 그 길은 소설 밖에 있다. 새로운 길로 우리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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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지음 / 아작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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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읽기로 결심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사람은 늙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늙어감을 추함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추하게 늙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소설집 제목이 된 이 소설에서는 늙어서도 젊은이들과 비슷해지려는 노인 둘이 나온다. 그들은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구입하고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추하게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젊은이들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추하게 늙지 않게 될까? 오히려 젊은이들과 같아지려 하는 모습이 추한 모습 아닐까?


늙어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젊은 세대와 차이가 있음을 알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보여주는 늙음이 추하게 늙지 않은 삶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소설은 젊은이들과 비슷해지려는 행동을 하려는 노인을 통해서 그것으로는 추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추하게 늙지 않는 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도 젊은 세대의 삶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하니.


가볍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임에도, 읽고 나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추하게 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추하게 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와 반대로 늙어가는 것이 과연 추함과 멀어지는 일일까 생각도 하고.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늙은 세대는 자신의 삶만을 고집하지 않고 젊은 세대의 삶을 인정해주는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자신들의 삶을 젊은 세대가 잘 살아가도록 하는 발판으로 만들 수 있는 행동을 해야 추하게 늙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외에도 독특한 발상을 한 소설들이 꽤 있다. 유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 나가는 소설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를 읽으며 지금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불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과연 불멸이 축복일까? 하지만 우리는 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소설은 그 항해에 성공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기 전에 어느 정도 과학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고, 또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니...


이 소설 외에도 재미 있게 읽은 소설들이 꽤 있다. 독특한 발상에 읽는 재미를 선사하고, 또 반전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있는데...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처럼 중성화 수술을 받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인 '저 길 고양이들과 함께', 마치 채만식의 '미스터 방'을 읽는 느낌을 주는, 'SF클럽의 우리 부회장님'같은 소설.


여기에 로봇과 인간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 식량 문제와 기후 문제를 해학적으로 풀어가고 있는 '한 터럭만이라도', 인공지능 문제, 과연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감정을 감정하기'라는 소설도 재미 있다.


이 외에도 몇 편이 있지만 생략하고, 대체로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어서 읽기에 편하다. 또 굳이 SF소설이라고 하지 않아도 그러한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는 소설들이다. SF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들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들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심너울의 소설은 SF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도 해도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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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3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ㅜ 제목이...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텍스트T 2
정연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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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돈다.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엄마가 돌아가신다. 충격. 아빠가 돌아왔다. 아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빠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원망만 있다.


이제 아빠 고향으로 가게 된다. 처음으로 가게 된 아빠 고향. 왜 그럴까? 소설은 여기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왜 아빠는 밖으로 돌았을까? 그는 왜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왜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부모의 죽음은 충격이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남남처럼 지내던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낯선 곳에서. 어쩌면 낯선 곳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늘 웃는 표정의 아이로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자신의 슬픔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아이. 이런 아이는 슬픔이 안으로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슬픔은 어느 정도 고여 있다가도 밖으로 흘러야 한다.


슬픔을 가둬두었다간 언젠가 댐이 터지듯 터져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슬픔의 둑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무엇이 할까? 언제까지 슬픔에 갇혀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슬픔을 내보낼 구멍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온 시. 시는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슬픔이 나갈 구멍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아이가 시를 만나면서 시를 쓰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면서 피해가지 않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시가 곳곳에 나온다. 주옥같은 시라는 표현이 식상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시들은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그런 시들을 읽는 재미, 소설의 상황에 맞게 등장하는 시는 우리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여기에 여자 등장인물, 은혜. 그야말로 은혜다. 축복이다. 이 은혜로 하여금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주인공과 반대인 듯하지만, 그런 은혜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 그 상처를 은혜는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자신에게도 현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아빠와 화해하는 장면까지 가지 않는다. 아니, 갈 필요가 없다. 그 이후는 이제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녹록치 않음을 회피로 가게 하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시를 통해서 또 은혜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본 주인공은 이제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긍정하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이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후회 속에서 사는가? 후회는 앞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면 좋지만, 과거에 나를 머물게 하면 안 된다. 주인공인 아빠, 이 사람은 후회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과거에 잡혀 있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현재를 살지 못했다.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면서 아웅다웅 하면서 살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나약함, 한때 시를 썼다는 사람이 시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현재가 다가왔다. 현실이 그의 앞에 떡 나타났다. 그 역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자식과 같이 살아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선택지가 없기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떨치고 떠난 곳. 새로운 시작은 자신이 버린 곳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현재 속에서 길고도 긴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식과 함께 하는 삶을.


이런 삶. 자식은 시를 통해서 자기 슬픔을 내보내는 길을 찾았고, 은혜라는 친구를 통해 현실에 충실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더 성숙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슬픔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 또 그 슬픔에 함께 하는 시들. 시를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


소설은 한 아이의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시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도 있고, 소설 속 시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아이는 시를 통해 슬픔을 위무하고, 슬픔을 내보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이런 시들을 곁에 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이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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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갇힌 남자 스토리콜렉터 8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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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우선 보통사람과 다르다. 대학 때 미식축구를 한 거한이다. 덩치가 다른 사람을 압도한다. 여기에 미식축구 경기 중에 다쳐서 뇌의 한 부분이 특수한 작동을 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뇌를 지니게 된다.


잊지 않는다는 일, 축복일까? 저주일까?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좋은 기억이 있으면 그것을 잊지 않으니 축복이겠지만, 마찬가지로 안 좋은 기억을 잊을 수가 없으니 저주이기도 하다. 이런 기억 능력은 양날의 검이다. 어떤 쪽으로 제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행복이 달려 있다.


데커라는 인물. 기억과 덩치. 그는 형사로 일한다. 형사, 사소한 단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직업. 정의를 실현하는 직업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형사로서 덩치와 기억은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데커는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했다. 이처럼 치명적인 사건을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견디기 힘든 기억이다. 최소한 데커에는 망각이 없으므로. 이 기억 속에서 그는 허우적 댈 수밖에 없다.


딸의 생일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와 무덤에 꽃다발을 놓는 데커에게 13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암으로 인해 가석방이 되었다고 찾아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무죄임을 밝혀달라고.


데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재수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무죄라고 주장한 사람이 살해당한다. 뭔가 이상하다? 다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한다. 반전에 반전,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들. 범인은 누구인가? 그 범인을 추론하는 재미로 소설을 계속 읽기 시작한다. 뜻밖의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그리고 그들이 또 살해당하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데... 여기에 반전이 또 일어난다. 범인에 대한 윤곽, 13년 전 살인사건에 대한 윤곽이 점점 뚜렷해진다. 범인에게 한 발 더 다가가게 된다. 


그래, 이 소설은 그런 재미로 읽어야 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왜 그런 살인을 저질렀나? 미국이라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갱단, 마약, 그리고 돈... 결국 돈이라는 생각으로 사건이 정리되어 갈 무렵. 아니다. 돈이. 더 다른 문제가 있다.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미국 사회와 갈등관계에 있는 나라까지 끌어들인다. 좀 너무 나갔다 싶기도 하고, 007시리즈를 소설로 읽는 듯한 느낌도 들고.


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소설을 전개했으면 훨씬 좋았겠단 생각을 하는데... 지금은 냉전 시대가 아니니까. 그러니 오히려 살인과 경제를 연결짓고, 그 매개가 되는 돈이 사람들을 어떻게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서술했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런 국가간의 음모까지 나아간 점이 좀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전까지 추리를 해나가고, 범인의 윤곽을 밝혀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범인이 누구일까를 추론하는 재미까지 있는데... 결말을 감안하고 읽으면 그런대로 흥미로운 추리소설이다.  


데커가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잊지 못할 자신의 아픈 기억을 극복해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어서, 그 부분에 중심을 두고 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열린 결말이다. 아마도 데커라는 인물을 통해 다른 추리소설들이 계속 나오리라는 예상을 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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