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한강 소설집이다. 소설 여덟 편을 상처를 지닌 인간들이 관통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상처 받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만,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어느 날 그는'이라는 소설에서 인물이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을 잃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다. 반지하 생활. 그러나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여자 인물 말처럼 그 순간 순간은 진실일 수 있지만 영원은 없다고. 그러니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그때그때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충실했던 감정만이 진실이라면, 사랑이 변했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아기 부처'에서도 상처받은 인물은 나온다. 겉으로는 완벽한 사람,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더 완벽하게 행동하려는 사람. 우리는 남에게 약점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러한 약점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한없이 놓아두어도 되는데, 그마저도 의식하면서 지낸다면 그 관계는 온전할 수가 없다. 저마다 상처가 있다는 말, 이는 남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파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상처라도 보듬고 가려는 모습,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딛고 새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자꾸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다. '붉은 꽃 속에서'에서는 그러한 상처를 승화시키는 인물이 나오고,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인물이 '흰 꽃'이나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도 역시 상처받은 인물이 나온다.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중에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내 여자의 열매'를 보면 관계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에서 예전 여자의 일생 - 예전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면 좋겠다. 자율적인 존재로 태어나 살아가다가 결혼과 더불어 자율성을 잃고 갇혀지내게 된, 그때부터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요즘 여자의 일생이 아닌 옛날 여자의 일생이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예전 여자의 일생에서 한 단계 나아간 작품이 바로 [82년생 김지영] 아닌가 한다. 겨우 한발짝 나아갔을 뿐이다 -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인물들과 인물들의 외적갈등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신혼초에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랑이 식고, 그냥 함께 살아가는 부부.


아내의 몸에 멍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 남편은 데면데면한다. 부딪쳐서 생긴 멍이겠지, 하지만 멍은 점점 심해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병원게 가보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출장을 갔다온 남편이 발견한 아내는 멍이 아니라 푸른 빛을 띤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였다. 나중에는 식물이 된 아내를 만나게 된다.


아내의 멍. 이는 삶에서 얻게 되는 상처, 멍이 하나 둘 늘고 넓어질수록 아내의 자율성은 하나 둘 줄어든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아내는 자신을 잃고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남편이 폭력적이어서 가부장적이어서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지만 예전의 자신은 없다. 


한강 소설집을 읽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 상처를 이겨내는 길. 상처에 머물지 않고 한발짝 더 나아가는 길.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길이라도. 이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이겨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처 속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상처와 더불어 삶은 계속된다.


멈추지 않는다. 이 점이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상처받으며, 상처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설에서 표현함으로써 한강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을,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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