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옌 중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5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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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중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책이다. 다편소설이 11편, 중편소설이 1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편소설은 단편대로, 중편은 중편대로 읽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모옌 소설에 나타나는 중국의 모습을 이 소설집에서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중국이 한참 발전을 하려고 하던 때, 중국 인민의 생활 모습이 모옌 소설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첫소설인 '영아 유기'는 모옌 장편소설인 '개구리'를 연상하게 한다. 계획 생육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녀밖에 낳게 하지 않던 시대. 그럼에도 힘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들은 여러 아이를 낳고 그냥 벌금을 으로 끝내는 경우, 또 힘이 없는 사람들은 당국에 신고를 하지 않는 모습. 여기에 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여자 아이가 태어났을 경우에는 그 아이를 버린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와서 겪는 일이 짧은 분량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과 연결지어서 '개구리'를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다룬 소설도 있는데, 단편 소설답게 결말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웃음을 머금는 결말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출신성분에 따라서 억압을 받던,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시절을 견디어낸 민중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소설들이어서 좋았다고 할까.


반전이 일어나는 소설도 좋았지만, 가족간의 사랑, 특히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겪었던 경험을 풀 한포기를 통해서 공감으로 흐르게 하는 '큰바람'이란 소설도 좋았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라도 그 시절을 함께 겪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그 존재들로 인해 과거 경험이 환기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큰바람'이란 소설이 그랬다. 그냥 읽으면 따스해진다.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왜 풀 한포기를 가져와 남겨주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과거와 현재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런 경험, 그런 존재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집에서 어떤 소설들은 환상적인 장면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방법, 즉 현실의 어려움을 환상을 통해서 버티어나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년에게는 그런 어려움이 환상을 통해서나마 극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현실을 견뎌내겠는가... '철의 아이, 한밤의 게잡이, 후미족'과 같은 소설이 현실과 환상이 섞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모옌 소설에는 문화대혁명기의 어려운 민중들의 삶도 나타나지만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적인 장면도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이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을 소재로 삼은 모옌 소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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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09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옌 좋아해요^^
글에 유머가 있는것은 아닌데, 글의 구성이랄까 소재, 제목에서 위트가 느껴지는 작가!

kinye91 2022-04-09 10:44   좋아요 1 | URL
중국 소설가 위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소설가고, 무어라 딱 꼬집을 수 없지만 이상하게 매력을 주는 작가예요.
 
솔라리스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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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나아가는 꿈. 인류는 아마도 먼 옛날부터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우주로 나갈 기술이 안 되었을 때는, 지구 곳곳을 탐험하는 모험담을 다룬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우주에 나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우주로 나아가기도 하고. 물론 아직도 먼 미래 이야기지만. 그만큼 우주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래된 소설이다.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었는데, 막상 읽기는 지금이 처음이니...영화 제목으로 많이 들어봐서인가, 아니면 비슷한 이름들이 소위 SF소설에 많이 나왔기 때문인가?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에서는 솔라리아라는 이름으로도 나오니, 물론 같은 행성은 아니지만, 이 이름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폴란드어판을 저본으로 하는 번역본이라고 한다. 400쪽이 넘는 긴 분량의 소설인데, 읽으면 금세 읽힌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게 된다. 그만큼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다만, 읽고 나서는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잘 알 수가 없게 된다. 결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솔라리스라는 행성에 도착한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주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솔라리스에서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우리 무의식에 들어와 무의식 속에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인물을 우리에게 보낸다. 왜? 이유는 모른다. 선물일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자신이 과거에 제대로 풀지 못한 일이 다른 행성에서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까? 무한반복, 영원회귀? 아니, 이 행성에서는 성공했던 일들, 또 성공했던 관계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과거에서 불러낸 인물은 그 과거에서 실패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것도 내게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파국으로 치달은 인물.


그런 인물이 솔라리스에서 나에게 온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인물이 분명 과거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심하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될테고, 그 마음을 이겨낸다면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겠지.


이렇게 솔라리스는 우리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내준다. 솔라리스 바다는 단지 그 일만을 한다. 어떤 목적의식도 없다. 또 우리를 조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면에 있던 일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여 소설 끝부분에서는 솔라리스의 이런 일들을 아기의 장난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어떤 의도도 없이 그냥 순수하게 행동하는 아기들. 아기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른 행동으로 넘어간다. 거기에 어떤 고민도 없다. 그냥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이런 아기의 행동을 두고 어른들이 자기들 관점으로 해석할 뿐이다.


솔라리스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지구 관점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점을 주인공은 켈빈은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켈빈은 어떤 행동을 할까? 소설은 여기서 멈춘다. 


멈추고 있지만 비극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켈빈에게는 희망이 있다.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447쪽)고 되어 있으니...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우주에 관한 소설인데, 지금 읽어도 그렇게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온갖 과학지식들이 도처에 나오기 때문이고, 우리 내면에 있는 존재들을 불러낸다는 발상이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우주에서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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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30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글을 읽을 수록 더 읽고 싶어져요,,, 그런데 SF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닌데,,, 싶어서 주저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3-30 16: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잘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나중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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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죽 읽어가게 하는 소설. 박진감 있게, 결말을 기대하게,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치닫는 소설. 읽고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응어리진 채 남아 있는 소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감상을 쓰려고 하니,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는 소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데,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201-202쪽)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인한 파국을 이야기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엇에 대한 이해인가? 삶에 대한 이해. 각자 바람직한 삶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그 이해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데서 파국이 온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 사람으로부터 이해의 실패를 경험한다. 주인공 유안... 한때 유명한 무용수. 다리를 잃고 기계 의족을 단 사람. 자, 과거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인해 많은 노력을 하고 다시 무용을 하게 된다. 이게 과연 유안이 바라던 삶일까?


유안은 그 사람(한나)의 기대대로 행동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은 이렇게 남 앞에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 이 말이 나온 순간 둘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달랐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럴 때는 누구의 삶을 인정해야 하는가. 바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위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상대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도 자신의 삶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부인하고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 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뒤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동적인 삶이 된다. 자신의 삶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니 약자의 위치에 처한 사람의 삶을 자신 삶의 방식으로 끌어들이려는 행동은, 겉으로는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상대가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소설은 이런 과거의 일이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온다. 그리고 현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현재에서도 유안은 또다른 이해의 파국을 맞는다. 자신을 같은 뜻을 지니고 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믿는 레오와의 관계에서.


레오는 므레모사에서 하는 자신의 행동을 유안이 이해하고 함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오에게는 므레모사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이 혹은 자신들이 탈출해서 므레모사를 파괴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삶은 그에게는 재앙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유안에게는 아니다. 유안에게는 그런 삶이, 어쩌면 움직이지 않고 붙박혀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람직한 삶일지도 모른다. 레오는 상상도 하지 않던 그런 삶을 유안은 동경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들은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서로 다르게 이해했음에도 서로가 서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은 레오다. 그리고 레오는 자신의 이해를 의심하지 않는다. 유안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즉, 유안이 처한 삶에 대해서 유안의 처지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안의 의족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유안에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지시한다.


자, 여기서 어떤 이해가 있는가? 저 사람도 당연히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행동하겠지라는 믿음만 있다. 그 믿음은 일방적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이해의 파국이 발생한다. 레오와 유안에게 벌어지는 파국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유안은 자신의 삶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유안이 찾은 삶이 다른 삶과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움직이지 않는 삶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선 움직임이 필요하다. 내 움직임이든, 다른 사람의 움직임이든, 또는 다른 존재의 움직임이든. 그러니 내가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려면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물질('커맨드'라고 레오가 말한다)이다. 즉 커맨드로 다른 사람을 조종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해는 없다. 일방적인 조종만이 있을 뿐이다. 유안이 선택한 삶에도 결국 이해는 없다. 유안은 자신이 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삶을 선택할 뿐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는 세 가지 이해의 실패가 나온다. 과거에서 벌어지는 유안-한나의 이해 실패, 현재 므레모사에서 벌어지는 유안-레오의 이해 실패, 그리고 유안이 미래에 관계를 맺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이해의 실패. 


앞 두 부분의 이해 실패에서 유안은 수동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 한나와 레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해의 실패에서는 유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이기는 하지만. 수동적이든, 주도적이든 모두 이해의 실패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흥미진진하게, 결말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서 한 달음에 달린 소설인데... 읽고 나서 무언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이고, 또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일텐데... 무언가가 계속 무언가로 남아 있으니, 여전히 이해의 실패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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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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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이란 제목에는 강제라는 말이 들어 있다. 희지 않은 존재를 희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백에는 자기 뜻에 반해 변화된다는 의미를 포함되고 있다. 그렇다면 희게 되는 존재는 누구일까? 세대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성세대는 아니다. 이미 기성세대는 희게 되었든, 그렇지 않든 제 색깔을 지니고 또는 잃고 살기 때문이다. 이는 제 색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제 색깔에 대해서 고민하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잇는 세대다. 젊은세대다. 젊은세대는 기성세대의 뒤를 이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자기 색깔을 지니고... 그런데 이미 사회에는 기성세대가 자리잡고 있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서 젊은세대에게 자신들의 뒤를 이으라고 한다. 어떻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세대갈등이라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젊은세대가 기성세대를 잇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의 성공사례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는가. 대다수가 그렇다면 굳이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 희소한, 뉴스 거리가 될 만한 일이어야 다룬다. 


이렇게 젊은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어려워졌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원하는 색깔에 맞춰야 한다. 자기 색깔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색깔.


그런 색깔이 무엇일까? 소설은 흰색이라고 한다. 제목이 표백이다. 하얗게 만드는 일... 하얗지 않는 존재를 인위적으로 하얗게 만드는 일이 바로 표백이다. 이 제목에 따르면 젊은세대는 결국 기성세대의 뜻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바꿔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진출하더라도 과연 제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그들 후대에게도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라고 할 수 있을까?


장강명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도 빠른 속도로 읽힌다. 그가 쓴 소설들은 망설임이 없다. 결론을 향해서 치닫기 때문에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어내게 된다. 그런 다음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왜 제목이 표백일까? 이미 표백된 세상에 나온 젊은세대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하고 있나?


소설에서는 세연을 중심으로 자살하는 청년들의 모습,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서술자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 자기 색깔을 잃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동화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려 죽음을 택하는 모습들...


읽으면서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각자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겠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색깔을 잃고 다른 색깔들과 합쳐질 수밖에 없다. 우린 빛과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회에서는 제 빛을 내지 못하고 결국 흰색으로 수렴되고 만다.


표백된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나를 잃어간다고 할 수 있는데, 반대로 색의 삼원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색, 빛을 자연이라고 신이라고 하고, 색을 인위적,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신은 흰색이 되고, 이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즉, 나를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색의 삼원색을 합친다면, 이는 인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의 세계는 검정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세계가 암담한 세상이라는 뜻일까?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 신과 인간의 대비...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대비. 흑과백. 세상은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다. 이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신의 세계인 종교가 지배적인 사회는 흰색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다른 색깔을 용인하지 않는다. 빛도 삼원색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다 합쳐진 흰색만 인정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기성세대가 짜놓은 세계에서 더이상의 변화를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젊은세대가 만나는 일은 바로 이런 흰색의 세계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흰색의 세계에 대비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려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 때, 서로 다른 삶들을 인정해주고, 그 삶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삶이라고 여겼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려고 한다. 그런 다 다른 색들을 인간세상에서도 합치려고 한다. 그럴 대 나오는 색깔은 검정색이다. 죽음의 색이다.


젊은세대가 자살로 가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흰색의 세계도 거부하지만,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인지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 가지고 있는 색들을 합쳐 죽음의 검정색을 만들어낸다.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하는듯이.


소설은 여기서 검정색이 젊은세대가 택할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서술자가 거리를 두고 자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은 각자의 색깔이 있는데, 그 색깔들을 하나로 합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흰색도 검정색도, 자신을 잃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일이므로, 자신의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야 함을, 그 삶이 비록 힘들고 비루하게 느껴지더라도 소중한 자신만의 색깔임을, 표백을 거부하고 또 검정이 되기를 거부하는 삶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세대의 좌절을 보여주고 있지만, 거기서 머물러 기성세대에 편입되거나 또는 자신의 색깔을 잃고 검정이 되는 삶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렇게, 우리 삶은 자기들의 색깔을 잃지 말아야 함을, 결코 표백되지 않아야 하고, 또 남들과 합쳐져 검정이 되지도 말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재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픈 곳들을 건드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지금까지 읽었던 장강명의 소설은 그랬다. 남은 작품들도 찾아 읽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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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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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이 법으로 옭아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국 도처에서 창조되었던 간첩들. 이들을 만들어낸 법이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참 악용되기 쉬운 법이었고,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한 법이기도 했지.


나라가 국민을 위해서 제대로 기능을 한다면 국민들에게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국민 삶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국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동을 하겠는가. 아마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이라는 이름이 작동하기 전에 국민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런 나라일수록 국가보안법같은 법은 있을 필요가 없다. 법이 많다는 얘기는 거꾸로 읽으면 위반자가 많다는 얘기고, 이는 나라가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다. 즉 사람들이 사람들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기제가 바로 법이다. 그리고 이 법을 강력하게 시행하면 할수록 사람들 삶은 퍽퍽해진다.


법이 그럴진대, 법 중의 법이라고 하는 헌법이 아니라, 헌법 위에 군림하던 국가보안법 (아직 폐지 안 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요즘은 거의 유명무실한 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 법 생명력이 질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위력도 지니고 있다)이 왕노릇을 하던 때. 독재정치가 판을 치던 때. 각종 정보기관이 이 법을 업고 온갖 사건을 만들어내던 때.


소설은 그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안정시키려 할 때, 권력을 위해서 많은 사건들이 필요하고, 또 미국에 잘 보이려 할 때, 미국에 반대하는 시위나 집회들은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행위고, 반국가적인 행위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하던 때.


그래서 소설은 어둡고 무거워야 한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는가. 죄도 없이,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혀들어가 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또 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소설 배경과 인물이 이럴진대 어떻게 소설이 무겁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소설은 무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내용은 무거운데 작가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덜 무겁게 소설을 읽게 하고 있다.


풍자, 비꼼이다. 서술자가 전면에 등장해 이렇게 읽어라, 저렇게 읽어라 잔소리(?)를 하는 각 부분의 도입부에서 이미 독자들은 무거움에 짓눌리지 않고, 그래 어디 이야기해 봐라 들어주지 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작가는 이야기꾼의 자질을 십분 발휘해 우리를 그 엄혹했던 시절로 이끌어간다. 고문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사람, 또 조작한다는 의식도 없이 믿는 사람.


글자를 모르는 이름은 복이 많은 나복만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나복만이 겪는 일에 분노하기 전에 우선 거리를 두게 된다. 서술자가 너무 드러나게 개입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 개인과 가정을 파탄내는,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게 하는 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문체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또 그런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복만의 일이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서에서는 그 사건을 종결시키지 않고 후일담을 전해주고 있는데... 어찌 끝날 수 있겠는가.


사건을 조작했던 사람이든, 당했던 사람이든, 그들에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 되었을 사건들이었을테니...


읽다가 왜 차남들의 세계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남, 둘째 아들? 이 소설에서는 이런 차남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데(내 기억으로는)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179쪽)라고 나온다.


이 말에 따르면 '차남들의 세계'는 눈먼 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눈먼은 권력에 눈 멀든, 또는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 권력의 부정을 눈 감든, 진실에서 멀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때 말하는 '차남들의 세계'는 바로 권력자(그것도 미국에 잘보이려고 하는 독재권력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차남은 장남처럼 인정받고 싶어한다. 힘들이지 않고 (물론 가부장적 세계에서 통용되던 일이다) 집안의 권위를 상속받던 장남과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차남들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간다. 


독재자들은 정당성 없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벌어지는 일들을 '차남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차남 이야기가 나오는 첫번째에 다시 이런 구절이 덧붙여진다.


'우리 이야기에는 한 가지 진실이 더 숨어 있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179쪽)라고. 그렇다면 '차남들의 세계'는 이런 권력자들의 세계만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차남들은 어떤 존재들. 그들의 세계사는 어떤 세계사? 


소설 뒷부분에 성경이야기를 끌어들여 이런 말이 나온다.


'보좌신부님은 그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 (279쪽)   


이때 차남은 바로 국민들이다. 독재자에게 핍박받는 사람들. 그들은 독재자를 두려워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추앙하게 된다.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존경할만한 대통령은? 이라는 질문에 누가 많이 뽑히는지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 소설은 두 방향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재자와 그를 추종해서 독재권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진실에서 멀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와 형에게 핍박을 받고 두려움에 떨면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래서 소설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나복만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렇다. 나복만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차남들에 의해 핍박받는, 또다른 차남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차남들의 세계사'에는 독재정치가 판치던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어느 편에 속해있든, 이들은 차남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이 소설은 이처럼 흥미롭게 술술 읽히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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