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국 주방장 보름달문고 38
정연철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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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다. 순식간에 읽게 된다.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다.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임에도 이야기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또 경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무거운 내용에 빠져들어 허우적대지 않고, 그럴 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그 웃음 뒤에는 물론 쓰디쓴 현실이 자리잡고 있고,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결코 밝지만은 않음을 생각하게 하지만.

 

총 여섯 편의 소설(동화)이 실려 있다.

 

주병국 주방장, 외계인 친구 1호, 독립 만세, 쑥대밭, 껌, 쿵쿵

 

아이의 꿈과 부모의 희망이 일치하지 않을 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때, 물질만능주의-허영에 들뜬 삶을 살아갈 때, 도시개발로 인해 삶터가 파괴될 때, 아이들의 그 아련한 설렘-사랑, 그리고 요즘 문제가 되는 아파트 층간 소음.

 

다루고 있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모두 아이들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어린아이인 옥희의 눈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또 결론을 내지 않는다. 이야기를 과감하게 끝는다. 그래서 일종의 해피엔딩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

 

주방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 왕따임에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친구를 만들겠다는 아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개발단지의 건물들이 흉물스러움을 발견하는 아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이 등등.

 

여기서 결말이 좀 다른 것은 '독립 만세'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허영에 들뜬 사람을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을 통해, 아이의 천진해보이는(보이는 이다. 결코 천진하지 않다. 이 아이는 엄마를 그대로 따라하기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아이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행동들을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읽는이로 하여금 알게 한다. 그러니 역시 결말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가게 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바로 층간 소음이다. 층간 소음 문제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곤 했는데, 우리나라 주거 형태의 중심을 차지하는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 문제는 심각하다. 

 

소음을 방지할 수 있도록 법이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아파트라는 건물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 '쿵쿵'이다.

 

먼저 김훈이 했다는 말을 보자.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중략)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김훈의 "자전거 기행"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최우용, 다시, 관계의 집으로, 궁리. 2013년 1판. 157-158쪽에서 재인용)

 

이것을 심각하게 풀어가지 않고, 아래층과 윗층 아이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국 이 두 집은 서로 교류를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상대방이 어떤 처지인지 서로 모르게 된다. 물론 중간에서 아이가 메모지를 없애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상대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냥 불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 또 한 층이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나는데, 역시 소음은 한 집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현명한 방법이 무엇인지 각 층의 다른 방식을 아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잘못하면 얼마나 감정이 상하는지 윗층 아이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얼핏 오정희의 '소음공해'라는 작품과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고 볼 수 있지만, 어른의 관점이 아닌 아이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또 결말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하여 다음에 이 층간 소음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무거운 주제들, 그러나 무겁지 않은 진행. 무리하게 끌지 않은 결말.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을 재미있게, 빠르게,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그리고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 웃음 뒤에 우리의 현실을 깨닫도록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 그 세상이 어떤지, 아이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동화)이다.

 

동화는 아이들만의 문학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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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문학과 미술의 상호작용
김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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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근대 문학에서 어떻게 미술과 만나고, 어떤 점에서 분화가 일어났는지를 연구한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최근에 그림과 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학술적인 측면보다는,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한국 근대에서 문학과 미술의 만남과 분화를 다루는 책을 읽었다. 한국 근대문학이 이식문학이라고 한 임화의 논의가 어쩌면 미술에서 비롯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미술과 문학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어짜피 조선시대에는 시,서,화라고 하여 문인이 그림, 글씨, 시를 다함께 했으니 이때는 예술이 전문화되지 않았을 때라고 하고, 이것이 근대를 통과하면서 서양의 전문화된 예술이 도입되게 된다.

 

이런 도입을 당시에는 이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독자적인 미술 장르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나라에는 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이식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양 또는 일본의 미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양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을 우리것으로 채우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한다.

 

즉, 미술 분야에서 이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만의 미술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그런 성과를 거두게되기까지는 미술에 관련된 화가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소설가로, 시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대의 예술단체였던 카프(KAPF)만 하더라도 미술분과와 문학분과에 걸쳐서 활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태준은 미술평론으로 데뷔를 했다는 점, 자신의 소설을 미술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문학인과 미술인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임화의 이식문학론은 미술 분야에서 이식 문제의 논쟁을 보고 나름대로 문학분야에 적용하여 우리 문학의 본질을 탐구한 것이라고 한다.

 

이식문학론이 우리문학의 사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의 서양성을 넘어서 우리 문학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식문학론 하면 악명 높은 문학론, 우리나라 문학을 외국의 수입품으로 전락시킨 이론 등으로 매도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서양과 조선의 만남에서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라는 얘기다.

 

1930년대에 미술계나 문학계에서 나타난 성과들을 보더라도 문학의 식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민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좀 학술적인 책인데..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 이태준, 이상, 박태원과 같은 구인회 멤버들과 화가들 중에서 그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구본웅(이는 이상의 친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중섭, 박수근 등도 등장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 책이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다.

 

통섭, 통합, 융합이 말해지고 있는 시대, 이 책은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덧글

 

년도의 오류. 이는 별것 아닌데, 별것으로 다가온다.

 

201쪽. 문단 역시 1925년 카프(KAPF)의 해소로 ~ 하는 문장에서 카프 해소는 1935년이다.

239과 240쪽에 나오는 인물 암함광은 혹시 안함광이 아닌지... 문학평론가 안함광은 알겠는데, 암함광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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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 1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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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번역된 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작품이기도 하고.

 

그 때는 읽지 않았는데, 갑자기 읽게 된 이유는?

 

상상력에 관한 책들을 읽다가 이 책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아니면 그 그림을 가지고 상상력을 풀어헤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보고.. 어, 그래? 하면서 한 번 읽어봐야겠네, 그 부분을 가지고 어떻게 소설을 썼지? 하는 호기심이 발동.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니, 이상하게 정말로 여자로 볼 수 있는 제자가 있고, 그림이 참,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예수의 제자 중에 여자가 있다는 얘기는 없으니... 요 부분이 어디쯤 나오나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추리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모험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소설은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연상시키고 있었고,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 역시 인디애나 존스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고 되어 있으니...

 

2권에서야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름 설득력있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그 이유는 앞 부분에서 살인사건에 주인공이 연루되면서 이미 많은 힌트를 주고 있기 때문에 뒷부분의 이 이야기 전개가 개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인데..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 너무 답이 보이는 설정에 또 지나친 비약이 있는 점이 거슬리게 되었고...

 

종교 문제는 어떻게 다루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묘하게 그 부분을 정면에서 약간 빗겨나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에 깊은 종교 토론으로는 나아가지 않게 되기도 한다.

 

소설이 허구로 그린 세상의 모습이라면 이 작품을 통해서 단지 흥미만을 주려고 하지 않고, 기존의 서양 종교가 가지고 있던 어떤 문제를 드러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간혹 종교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양념에 지나지 않고, 가볍고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 진행을 통해 깊은 탐구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상상력과 그 상상력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능력에는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작품이 이 작품 뿐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이런 식의 상상력은 많이 발휘되지 않았던가.

 

역사의 메워지지 않은 작은 틈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들어낸 경우는 많다. 그것이 또 나름 작품 속에서 현실성을 지닌 작품도 많고.

 

이 책은 재미있다. 순식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수많은 기호학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나열되기도 하지만, 작품 전개 속에서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한다. 다만,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진실의 틈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상상력이 다시 삶의 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냥 그럴 수도 있겠네...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까지 나아갈 수 있게 좀더 고민할 수 있는 틈을 작품에서 만들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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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137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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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다. 사실 시 읽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도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 땅에서 시인을 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에 시를 쓸테니...

 

서점에서 시집을 전시해놓은 장소가 점점 줄어들더니 요즘은 시집 찾기 힘들고, 따라서 새롭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조차 힘든 때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예전에는 시집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꽤 있었다. 지금까지도 시집을 편찬해내는 창비와 문지를 비롯해서 실천문학사, 민음사, 문학동네, 미래사 등등...

 

그럼에도 이런 출판사들의 시집들조차도 서점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힘드니, 다른 출판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또 이름없는 시인들의 시집이야 더할 나위 없이 전시되기 힘든 노릇이다.

 

예전에 사놓은 시집들을 가끔 들춰본다. 새롭게 읽을거리가 떨어졌거나, 아니면 머리가 무거워 무언가 안정을 취하고 싶을 때 이 시집, 저 시집을 뒤척거리는데...

 

그만큼 시집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 좋은, 또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시집이다.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를 보자.

 

물고기에게 배우다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2002년. 15쪽

 

아마도 시의 화자는 몸이 아프기보다는 마음이 아팠으리라. 그간 세파에 찌들리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며 살아온 나날들 속에 마음은 지치고, 이런 상태에서 몸 역시 좋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그는 잠시 개울가로 쉬러 나온다. 의식적으로 쉬러 나왔든지, 아니면 우연히 개울에 머무리게 되었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의 화자가 잠시 쉴 틈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쉴 틈,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유가 된다. 그 여유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쉼은 활동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개울 속... 물은 나를 비추는 거울 역할도 한다. 이 시에서는 단순한 물이 아니다. 물 속 세상이다. 물 속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물고기들이다. 그 물고기들이 나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 물 속엔 길도 없는데, 그들은 한 번의 부딪힘도 없이, 서로 갈등도 없이, 또 죽어라고 먹이만을 쫓지도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자기 길을 가되, 그 길을 남겨두고 그 길이 옳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인지, 내 길만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없다. 또한 그들 세상에선 정당한 길은 없다. 모든 길이 정당하다. 그리고 그 길은 간 다음에는 지워진다. 지워져야 한다. 지워지지 않고 남겨져 있으면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옳음을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기에.

 

갑자기 내가 살아온 길이 생각난다.

 

'약한 자의 발자국'

 

약한 자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또한 그 길만이 옳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던가. 약한 자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길 속에서 길을 잃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자꾸 슬픔만을 남겨 놓지 않았던가.

 

발자국은 길이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자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만의 길이 아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이 모두 길이다.

 

그래서 내가 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되고, 그 길은 나만의 길이고, 또 그 때의 길일 뿐이라는 사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길로 얽매여진 삶이 아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또한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광장이 나온다. 그것을 물고기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시다. 그래, 어쩌면 집착에 빠져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무엇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어디 숨어있어서 그 숨어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답이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 시는 마음에 쏙 들어온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과 비슷하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게 바로 시의 효용성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런 마음을 가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하여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플라스틱 스티로폼 시멘트말고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처럼 창창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발표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은 살았을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것이네

 

그 나무만큼 나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찼으면 좋겠네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안경이 되고

신발이 되고

부엌칼이 되었으면 좋겠네

 

나의 시가

한 그루의 나무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네

 

맹문재, 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2002년. 101-102쪽 

 

이런 시 말고도 마음에 와닿은 시가 참 많다. 특히 이 시집의 30쪽에 있는 '풀'이란 시는 김수영의 '풀'에서 나온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는 김수영의 풀이 자꾸 생각나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기도 했으니...

 

더워진다. 시를 읽어보자. 아님 휴가지에서 시집 한 권. 얼마나 좋은가.

 

덧글

 

안타깝게도 이 시집은 품절이라고 나온다. 아마도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 듯. 굳이 이 시집이 아니어도 좋다. 시들은 서로 서로 통하니,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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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위의 소설들 - 소설과 영화 사이 사이 시리즈 5
송기정 지음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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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소설의 세기였고, 한 때는 영화의 세기였다. 소설이 많이 퇴조해서, 문자언어의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소설은 문학 장르에서 대표적인 장르로 군림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소설을 축출해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텔레비전의 등장이 영화를 몰아내지 못했듯이 영화 역시 소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요즘에는영화가 소설을 살려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와 소설의 관계만 보더라도,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 더 유명해졌으며,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영화로 만들어진 다음에더 유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영화가 소설의 판매를 촉진하는 경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소설과 영화가 내용이 똑같지는 않더라도(사실 똑같으면 안된다. 영화나 소설이나 둘 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표현방식에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다가 영화를 망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바란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설을 읽고 싶어 하며,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은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어떻게 변형되어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고, 나라면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을텐데, 또는 와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기회로 삼고 싶은 욕구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여 최근에는 영화와 소설이 서로 넘나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추세를 기반으로 영화와 소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서사장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하여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소설은 설명이나 묘사가 충분히 작품을 이끌어간다면, 영화는 대사나 인물의 표정, 행동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든지, 그런 차이에서 작품이 어떻게 변형이 되는지, 소설이 어떻게 영화로 창조적 탄생을 하는지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오는데... 이 책도 그 중의 하나다.

 

1부는 프랑스 소설을 중심으로 영화로 표현된 경우, 소설이 영화에 어떻게 변용되어 나타나는지, 또 같은 영화라고 하여도 감독에 따라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라는 소설이 영화로 많이 창작되었는데, 그 중에서 외국영화 두 편과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영화와 소설의 차이, 그리고 비슷한 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위험한 관계"란 소설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세계 각국에서, 또 시대를 넘어서 영화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담은 소설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겠다.

 

즉, 소설은 소설로서 끝나지 않고 다른 장르로 변형, 변용되어 자신의 존재를 계속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면 특수한 경우를 통해서 인간 삶의 보편적인 면을 포착하고 표현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이청준의 소설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이어도","서편제","벌레 이야기"를 들고 있다.

 

이 중에 "벌레 이야기"가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 말고는 모두 이청준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어내었으며, 각 영화는 감독의 표현방식에 따라 조금씩 소설과 다른 모습을 지닌다고 한다.

 

물론 소설과 영화가 똑같을 수 없고, 또 똑같아서도 안된다. 하여 영화는 소설의 주제의식을 빌려온다든지, 인물들을 빌려온다든지, 갈등 상황을 빌려온다든지 하지만, 표현방식에서는 영화 장르의 특성과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살려 창조적 변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려다 실패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영화감독은 소설을 기반으로 하지만 영화라는 토대 위에 서 있기에 영화라는 장르를 늘 의식하면서 소설을 변형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소설도 살고 영화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소설인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잘 설명해내고 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지금. 소설은 영화에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이야기 기러들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재구성, 창조적인 표현... 그것이 바로 소설과 영화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이런 창조적인 관계맺음이 잘 되었을 때 영화와 소설은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이 책에 예를 든 "서편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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