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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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첫소설집을 읽는다. 알라딘 온라인중고에서 구입한 책. 최근에 읽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한강 소설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 읽은 소설이 몇 권 있지만 이참에 한강 소설을 독파해보자 하는 마음.


등단작을 실은 첫소설집이다. 제목은 등단작이 아닌 다른 작품으로 삼았는데, '여수의 사랑'에서 여수는 지역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소설 본문에서 나오는데,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가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여수의 사랑'. 39쪽)고 하니, 소설 속 인물들은 한 곳에 머물렀어도 머무르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인물의 고향이 여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 떨어져 나와서 근근이 생활을 해나가는데, 그럼에도 한 인물은 여수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다른 인물은 여수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면서 그리워한다. 여수로 가기를 희망하고 표를 끊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진다. 여수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다른 인물은 그래서 여수로 가는 기차에 타고 여수에 내리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여수에서 출발해 여수로 돌아오는 과정, 회귀라고도 할 수 있지만, 회귀라기보다는 옴쭉달싹(옴짝달싹-몸을 아주 조금 움직이는 모양)이라는 부사어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의 행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바로 '옴쭉달싹'이라는 말을 들 수 있겠다. 이 말은 뒤에 부정어와 함께 쓰이니,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지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참 힘들게 산다. 부모 잃고 경제력 없이 그래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니 없던 병도 생기게 된다. 인물들은 나름대로 병을 앓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견딜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다. 이런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병이다. 위통이든 신경질환이든,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병을 앓는다.


옴쭉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상황. 독해지고자 해도 독해지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으로 독해지자고 하는 사람들이 병을 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나타나는 독한 마음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어둠의 사육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함께 사는 고향 언니에게 배신당하고 더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인물이 독기를 품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지내온 나날들을 생각할 때 나오는 말.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어둠의 사육제'. 251쪽)


그래서 이 소설집 인물들은 아프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로 자신이 아프지 않으면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다. 자신을 대신해서 아파해야 할 존재들이 있다. 이렇게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삶에는 아픔이 있다. 병이 있다. 이 병을 한강은 우리에게 들여다보라고 한다.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이런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보라고, 눈 감지 말라고.


그렇게 옴쭉달싹 못하는 인물들. 그러나 이들은 움직이려 한다. 남들에게는 비록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들은 최선을 다해서 움직인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지만 아직 죽음의 세계에 가지 않기 위해. 이 소설집 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여수의 사랑'에서 떠나왔던 여수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다. 다시 돌아온 여수는 예전의 여수와는 다를 것이다. 비록 삶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한강은 이 소설집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희망보다는 그냥 현실을 보여준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려 아등바등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등바등대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고. 그렇다고 이들이 열심히 살지 않냐 하면 아니라고. 또 이들이 비도덕적이냐고? 아니라고. 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도덕적이라고. 그래서 삶이 더 힘들다고.


이렇게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초상, 풍경화라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밝은 색으로 채색이 되지 않은, '저녁빛'에서 재헌이 그리는 그림처럼 어둑어둑한 느낌을 주는 소설. 


그렇다고 사회 비판을 하는 소설은 아니다. 한강 소설에서 사회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물이 인물을 둘러싼 환경에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고민하고 대응해 가는 과정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으니...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과 갈등과 고민이 이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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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03-08 17: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3-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3-08 19: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3-08 19:4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3-10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kinye91 2022-03-10 01: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3-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kinye91 2022-03-10 09: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가필드 2022-03-1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당선 축하드려요 😄

kinye91 2022-03-10 21: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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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한강 소설집이다. 소설 여덟 편을 상처를 지닌 인간들이 관통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상처 받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만,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어느 날 그는'이라는 소설에서 인물이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을 잃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다. 반지하 생활. 그러나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여자 인물 말처럼 그 순간 순간은 진실일 수 있지만 영원은 없다고. 그러니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그때그때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충실했던 감정만이 진실이라면, 사랑이 변했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아기 부처'에서도 상처받은 인물은 나온다. 겉으로는 완벽한 사람,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더 완벽하게 행동하려는 사람. 우리는 남에게 약점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러한 약점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한없이 놓아두어도 되는데, 그마저도 의식하면서 지낸다면 그 관계는 온전할 수가 없다. 저마다 상처가 있다는 말, 이는 남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파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상처라도 보듬고 가려는 모습,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딛고 새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자꾸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다. '붉은 꽃 속에서'에서는 그러한 상처를 승화시키는 인물이 나오고,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인물이 '흰 꽃'이나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도 역시 상처받은 인물이 나온다.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중에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내 여자의 열매'를 보면 관계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에서 예전 여자의 일생 - 예전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면 좋겠다. 자율적인 존재로 태어나 살아가다가 결혼과 더불어 자율성을 잃고 갇혀지내게 된, 그때부터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요즘 여자의 일생이 아닌 옛날 여자의 일생이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예전 여자의 일생에서 한 단계 나아간 작품이 바로 [82년생 김지영] 아닌가 한다. 겨우 한발짝 나아갔을 뿐이다 -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인물들과 인물들의 외적갈등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신혼초에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랑이 식고, 그냥 함께 살아가는 부부.


아내의 몸에 멍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 남편은 데면데면한다. 부딪쳐서 생긴 멍이겠지, 하지만 멍은 점점 심해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병원게 가보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출장을 갔다온 남편이 발견한 아내는 멍이 아니라 푸른 빛을 띤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였다. 나중에는 식물이 된 아내를 만나게 된다.


아내의 멍. 이는 삶에서 얻게 되는 상처, 멍이 하나 둘 늘고 넓어질수록 아내의 자율성은 하나 둘 줄어든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아내는 자신을 잃고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남편이 폭력적이어서 가부장적이어서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지만 예전의 자신은 없다. 


한강 소설집을 읽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 상처를 이겨내는 길. 상처에 머물지 않고 한발짝 더 나아가는 길.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길이라도. 이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이겨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처 속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상처와 더불어 삶은 계속된다.


멈추지 않는다. 이 점이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상처받으며, 상처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설에서 표현함으로써 한강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을,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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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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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 현실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한강 소설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의 열망을 환상을 통해서 보여준다. 너무도 참혹했기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들을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서 서술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환상과 현실이 넘나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우리 삶에 끌어왔다. 단지 그 시대에 머물지 않고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광주민주화운동'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지만, '4,3사건' 역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다. 나라에서 이제는 반국가 활동으로 여기지 않고 기념식도 인정해서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려진 진실은 여전히 있다.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한다. 4.3세대가 아닌 4.3을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는 사람들. 나이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소설 속 인물이 모두 제주도 출신은 아니니까. 소설은 서술자인 경하를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경하는 작가다. 소설 속에서 알 수 있고, 또 이 소설 앞부분에서 [소년이 온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의 1부에서는 이런 작가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20여 년을 알고 지낸 인선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빨리 와 달라고.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를 당한 인선. 그런 인선과 만나고 함께 했던 시절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인선이 부탁한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가 달라고. 자신의 집에. 새를 살려달라고.


이건 소설 장치다. 경하는 어떻게든 제주도로 가야 한다. 그의 꿈속에 나왔던 장면들을 인선과 함께 작업하려고 했던 경하. 그것은 바로 4.3에 대해 쓰고 인선이 영상으로 담았으면 하는 경하의 제안이었다. 인선은 받아들였지만 어느 순간 경하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경하는 제주도에 간다. 폭설, 길 잃음, 간신히 도착한 인선의 집, 이미 죽어 있는 앵무새. 이렇게 1부는 끝난다. 경하의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172쪽)의 말과 함께. 그러나 죽음은 망각이다. 4.3은 망각이어서는 안 된다.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아니, 기록이 남겨져야 기억이 된다.


2부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4.3을 맨정신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 참혹했던 역사적 장면을 어떻게 맨숭맨숭하게 만날 수 있을까? 또 그 사건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우리는 어떤 상태여야 하는가? 우리 마음 역시 그날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과 비슷할 정도의 절망과 좌절 상태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경하가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상태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 전기가 나갔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난방이 되지 않는다. 물도 끊긴다. 무엇을 해볼 수 없는 칠흑같은 어둠과 추위, 그리고 끊이지 않는 눈들. 


여기서부터 소설은 무엇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죽은 자가 누구일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정도 상태에서야 가려진 진실을 알 수 있다. 인선이 생각했던 자신의 엄마가 4.3때 희생당한 오빠를 찾아 헤매고 자료를 모은 장면이 2부가 전개될수록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엄마에게서 그런 끈기와 힘이 있다니, 그것은 진실을 알고 싶은 엄마, 그 일을 겪은 엄마의 몸부림이었다. 제주도에 나타난 인선을 통해서 경하는 인선의 엄마와 아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4.3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에게 4.3을 보여준다. 말해준다고 하기보다는 보여준다는 말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경하가 인선이나 새들의 그림자를 벽에 그리듯이,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 하지 않고 벽에 그려진 그림자처럼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


경하가 벽에 그리는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4.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언제든지 겹쳐지고 (소설에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경하가 인선을 찾아 제주도에 갔던 과거와 또 한번은 지금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장면에서) 지워질 수 있는 그런 역사. (경하가 벽에 그림을 그릴 때 연필(샤프)로 그린다. 지울 수 있는 도구다. 역사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록되지만 또 반대로 지워질 수도 있고 덧씌워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강은 소설의 2부를 환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4.3의 희미한 그림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밝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지지 않더라도 희미한 그림자로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기억되어야 할 역사라고. 그렇게 진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기록 속에 남아 있게 된다고.


소설 끝에 작가의 말에서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328-329쪽)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은 이 지극한 사랑이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번지게 하고 있다. 우선 동갑내기인 경하와 인선의 사랑.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지지해주는 그런 사랑. 그래서 경하는 인선이 신분증을 챙겨오라고, 제주도에 당장 내려가 달라고 할 때 자신의 몸이 안 좋아질 수 있음을, 약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고 제주도로 내려간다. 인선 역시 경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사랑이 우리에게 4.3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엄마의 가족에 대한 사랑. 어쩌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사랑은 바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일을 자식인 인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인선의 진실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인선의 영화 3부작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베트남 전쟁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또 하나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담은 영화, 그리고 하나가 4.3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렇게 소설은 사랑이 중첩되면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든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우리는 소설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가 없다.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되고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별은 없다. 우리 삶에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에 답하고 싶다. 이 소설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이렇게 나는 [소년이 온다]에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꼭 읽어야 할 소설 목록에 추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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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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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 어쩌면 지금 기후위기라는 세계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들 모습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까? 과학기술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추진한다.


기후위기를 줄일 수 있는 기술, 탄소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대체제를 개발하는 등등, 이런 과학기술 방향에 집중하게 된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3년이 되는 올해에도 강타하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는 백신과 치료제라는(물론 이는 당연히 우리가 중시해야 할 방법이고,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다른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왜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발생하고 확산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해결책일까? 전세계를 먼지가(더스트 폴) 뒤덮으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된다. 지구에서 인류는 멸망 직전까지 간다. 대응책이 여럿 있다. 돔을 만들어 돔 내부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 지하로 대피하는 사람들, 밖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람들, 자신들만 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등등.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식물들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을 때 인간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재난 상황이 인류의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소설을 통해 보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적응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내성이 강해지는 사람들. 그런 사람의 피를 얻으려는 사람들... 내성이 강해지는 사람들을 통해 연구하려는 사람들... 계속되는 혼란이다. 이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은 세 개의 회상 장면이 주를 이룬다. 위기가 사라진 다음에 식물학자로 활동하는 아영의 어린 시절,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은 두 자매 나오미와 아마라가 들려주는 그 시대 이야기, 그리고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수의 레이철에 얽힌 기록.


이 기록은 하나로 맞물리면서 위기의 본질과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꿰어맞출 수 있게 한다. 과학기술로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지구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 끝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빛을 주는 존재가 있었음을, 그 존재를 소설 제목인 '지구 끝의 온실'로 정했다. 온실... 따뜻한 곳. 그러나 외부와 차단된 곳. 하지만 온실은 가두기만 하지 않는다. 온실 밖으로 식물들을 내보내기도 한다. 온실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계속 모든 식물을 온실 속에만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온실은 이제 식물들을 내보내고 자신의 역할을 줄여야 한다.


소설 속에서 프림 빌리지가 해체되는 과정이 바로 이렇다. 이 공동체가 마냥 유지된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삶만 유지되게 된다. 즉 지구 끝의 온실이 그냥 지구 끝의 온실로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고 지구 끝의 온실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온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온실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개발한 레이철이 나누어준 모스바나란 식물이 그런 역할을 한다.


공동체가 해체된 이후에 그것을 가지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전세계 심어지고, 번식하게 되는 식물. 그 식물로 인해서 더스트 폴은 격감하는 추세로 돌아서게 되고, 여기에 세계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먼지를 제거할 수 있는 물질이 개발되어 인류는 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문명세계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식물이 한 역할은 까맣게 잊혀진다. 인간이 초래한 위기를 인간이 극복했다는 과학적 사실(?)만 남는다. 과연 그럴까? 그 너머에 진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소설은 말한다. 그래서 다시 모스바나가 등장한다. 그 등장으로 진실의 세계로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 과학기술 이전에 식물이 있었음을. 자연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런 자연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모스바나에서 볼 수 있는 푸른 빛. 이 푸른 빛이 바로 소설 속 존재들을 이끌고 연결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것은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로 희망을 준다. 


이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푸른 빛은 지구 끝의 온실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라져 남들 눈에 띠지 않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던 존재. 그리고 그런 존재에 대한 망각은 실용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필요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사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도 존재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이렇게 소설은 극한 상황을 통해서, 그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모스바나라는 식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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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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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천상천하 유아독존. 김초엽이 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말이 생각났다. 왜? 세상에 자신이 유일한 존재라고? 그렇다. 우리 모두는 유일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다. 겉모습이 어떻든, 생각이 어떻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다.


그런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선언한 말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니겠는가. 개개인이 유일하고 완전하다면, '나'가 완전한 만큼 다른 존재도 완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가 된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서 공통으로 바로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 비록 단점도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있지만, 그 점 때문에라도 함께 해야 함을. '나'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조금씩 내어놓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는 모습.


김초엽의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른 완전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인지 공간'을 떠나는 제나는 그 사회에서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 이브를 받아들이고, 결국 이브의 뒤를 이어 그곳을 떠난다. 제나가 떠난 세계가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방금 떠나온 세계"다.


"오래된 협약"에서는 그래서 자신들의 시간을 나눠주는 생명체들이 나온다. 그 생명체들과 맺은 협약을 기억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겠지만, 그것을 금기의 형태로 지켜나가려는 모습, 지구에서 온 인간들이 짧은 생명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그렇지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이 소설집에서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 결핍된 존재들이 나온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도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느끼는 그 사회에서는 좀 부족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결핍된 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도와주게 된다.


"마리의 춤"에 나오는 '마리', "로라"에 나오는 '로라', "숨그림자"에 나오는 조안, "캐빈 방정식"에 나오는 유현화 역시 그 사회에서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나온다. 당시 사회적인 관점에서 정상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


그렇지만 이런 존재들 역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고,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정상적'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이들은 결핍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창문이 있는 단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들이지만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창문이 없는 단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다. 그래서 이 창문을 통해 교류를 한다. 다른 존재를 보고 받아들인다. 완전히 합쳐지지는 않지만 스쳐지나가기만 하지 않고 서로 교류를 하게 된다. 만나고 헤어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가 된다.


인간은 이렇게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함께 함을, 이때 함께 함이 같아짐을 뜻하지 않고 함께 하지만 다름을, 다르지만 함께 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 고전에서 말하는 사자성어, 화이부동과 대동소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7편의 소설에서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서로 만났다 떨어지더라도 이들이 주고받은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모습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숨그림자"에서 더 잘 만날 수 있다. 단희와 조안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장면, 단희 세상의 언어로 바꾸면 엉뚱한 문장이 되는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는 말. 


이는 조안이 지구에 살 때 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냄새를 단희에게 선물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안이 집에서 느꼈던 냄새가 단희의 세계에서 언어로 바꾸면 양말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희나 조안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이 소설에서 두 번 나오는데, 조안이 떠나기 전에 단희에게 선물했을 때와 단희의 행성을 떠나서 다른 행성에 정착해서 다시 단희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어떻게 교류를 하게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캐빈의 방정식"에서 사고 방식의 시간이 달라진 언니 현화와 대화하는 현지의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지체가 엄청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장면. 이것이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교류하는 모습이다. 


이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교류할 때도 지녀야 할 자세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다른 행성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간섭하려 했다가 생길 수 있는 일들. 창문이 있는 단자는 상대를 자신에게 융합시키려 하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서 서로 보고 교류할 뿐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상처받고 파괴되는 단자들이 남을 뿐이다.


"오래된 협약"에서 지구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벨라타에 살고 있는 인물들에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사실 이들도 알고 있지만 - 그것을 따라하지 않으려는 벨라타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에서 더 나아가 단자들끼리 합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초엽은 우리나라의 어슐러 K. 르 귄


김초엽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슐러 K. 르 귄을 연상했다. 그만큼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르 귄 작품을 읽으면서 시공간이 다른 우주공간 또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사실에 감명받았는데, 김초엽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우리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SF소설이라는 이름을 굳이 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소설이다.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보여주는 소설. 그래서 다른 행성의 다른 우주인들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우리 삶을 살펴보게 된다.


지구가 배경일 때도 마찬가지고. 소설 "로라"를 보면 신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로라는 팔이 하나 더 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산다. 느낌이 아니라 분명 하나가 더 있다고 여긴다. 그런 팔을 인위적으로 단다.


자, 우리 세계에 팔이 셋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김초엽은 그것이 뭐 어때?라고 그냥 다를 뿐이잖아라고 여기게 만든다.


현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다름들을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팔이 셋 달린 인물을 창조해내서 그 인물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별것 아니라고, 그냥 다를 뿐이라고. 소설 속에서 그런 로라를 받아들여주는 인물을 통해 김초엽은 말한다. 이런 점이 바로 어슐러 K. 르 귄을 생각나게 했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 그럼에도 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그 역시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 귄과 비교되는 것이 김초엽 작가에게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이 유일무이하다고 여길테니... 그렇지만 나는 김초엽 소설을 읽으며 어슐러 K. 르 귄 소설을 떠올렸고, 그의 소설에 비견될 수 있는 소설이 김초엽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니,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 작가에게 누가 될 말이라도 용서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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