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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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모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천상천하 유아독존. 김초엽이 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말이 생각났다. 왜? 세상에 자신이 유일한 존재라고? 그렇다. 우리 모두는 유일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다. 겉모습이 어떻든, 생각이 어떻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다.


그런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선언한 말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니겠는가. 개개인이 유일하고 완전하다면, '나'가 완전한 만큼 다른 존재도 완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가 된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에서 공통으로 바로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 비록 단점도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있지만, 그 점 때문에라도 함께 해야 함을. '나'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조금씩 내어놓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는 모습.


김초엽의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른 완전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인지 공간'을 떠나는 제나는 그 사회에서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친구 이브를 받아들이고, 결국 이브의 뒤를 이어 그곳을 떠난다. 제나가 떠난 세계가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방금 떠나온 세계"다.


"오래된 협약"에서는 그래서 자신들의 시간을 나눠주는 생명체들이 나온다. 그 생명체들과 맺은 협약을 기억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겠지만, 그것을 금기의 형태로 지켜나가려는 모습, 지구에서 온 인간들이 짧은 생명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 그렇지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이 소설집에서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 결핍된 존재들이 나온다. "최후의 라이오니"에서도 다른 존재들과는 다르게 느끼는 그 사회에서는 좀 부족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결핍된 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고 도와주게 된다.


"마리의 춤"에 나오는 '마리', "로라"에 나오는 '로라', "숨그림자"에 나오는 조안, "캐빈 방정식"에 나오는 유현화 역시 그 사회에서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나온다. 당시 사회적인 관점에서 정상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


그렇지만 이런 존재들 역시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고,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정상적'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이들은 결핍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유일하고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창문이 있는 단자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들이지만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창문이 없는 단자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다. 그래서 이 창문을 통해 교류를 한다. 다른 존재를 보고 받아들인다. 완전히 합쳐지지는 않지만 스쳐지나가기만 하지 않고 서로 교류를 하게 된다. 만나고 헤어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가 된다.


인간은 이렇게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함께 함을, 이때 함께 함이 같아짐을 뜻하지 않고 함께 하지만 다름을, 다르지만 함께 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 고전에서 말하는 사자성어, 화이부동과 대동소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7편의 소설에서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서로 만났다 떨어지더라도 이들이 주고받은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모습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숨그림자"에서 더 잘 만날 수 있다. 단희와 조안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장면, 단희 세상의 언어로 바꾸면 엉뚱한 문장이 되는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는 말. 


이는 조안이 지구에 살 때 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냄새를 단희에게 선물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조안이 집에서 느꼈던 냄새가 단희의 세계에서 언어로 바꾸면 양말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희나 조안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이 소설에서 두 번 나오는데, 조안이 떠나기 전에 단희에게 선물했을 때와 단희의 행성을 떠나서 다른 행성에 정착해서 다시 단희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는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어떻게 교류를 하게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캐빈의 방정식"에서 사고 방식의 시간이 달라진 언니 현화와 대화하는 현지의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지체가 엄청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장면. 이것이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들이 교류하는 모습이다. 


이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교류할 때도 지녀야 할 자세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다른 행성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간섭하려 했다가 생길 수 있는 일들. 창문이 있는 단자는 상대를 자신에게 융합시키려 하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서 서로 보고 교류할 뿐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상처받고 파괴되는 단자들이 남을 뿐이다.


"오래된 협약"에서 지구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벨라타에 살고 있는 인물들에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사실 이들도 알고 있지만 - 그것을 따라하지 않으려는 벨라타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바로 '창문이 있는 단자'에서 더 나아가 단자들끼리 합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초엽은 우리나라의 어슐러 K. 르 귄


김초엽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슐러 K. 르 귄을 연상했다. 그만큼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르 귄 작품을 읽으면서 시공간이 다른 우주공간 또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배경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사실에 감명받았는데, 김초엽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우리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SF소설이라는 이름을 굳이 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소설이다. 우리의 상상을 현실로 보여주는 소설. 그래서 다른 행성의 다른 우주인들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우리 삶을 살펴보게 된다.


지구가 배경일 때도 마찬가지고. 소설 "로라"를 보면 신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로라는 팔이 하나 더 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산다. 느낌이 아니라 분명 하나가 더 있다고 여긴다. 그런 팔을 인위적으로 단다.


자, 우리 세계에 팔이 셋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김초엽은 그것이 뭐 어때?라고 그냥 다를 뿐이잖아라고 여기게 만든다.


현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다름들을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팔이 셋 달린 인물을 창조해내서 그 인물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한다.


별것 아니라고, 그냥 다를 뿐이라고. 소설 속에서 그런 로라를 받아들여주는 인물을 통해 김초엽은 말한다. 이런 점이 바로 어슐러 K. 르 귄을 생각나게 했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 그럼에도 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그 역시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 귄과 비교되는 것이 김초엽 작가에게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이 유일무이하다고 여길테니... 그렇지만 나는 김초엽 소설을 읽으며 어슐러 K. 르 귄 소설을 떠올렸고, 그의 소설에 비견될 수 있는 소설이 김초엽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니,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 작가에게 누가 될 말이라도 용서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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