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대량살상 무기인 을 실전에 사용한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미국은 1945 8 6일과 9일 일본의 히로시마(Hiroshima)와 나가사키(Nagasaki)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원자폭탄 투하는 미국의 최신식 폭격기인 B-29 폭격기가 수행했으며두발의 원자폭탄으로 16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즉사했다이러한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는 별개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그 이유는 이러한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다.)

 

미국의 원자폭탄 실전 사용은 사실상 냉전(Cold War)’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당시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이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한 이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다포츠담 회담 당시 미국은 이미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킨 상태였고당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신무기의 존재를 은근슬쩍 알려줬다따라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 소련의 지도부가 이를 경계했던 데에는 미국이 자신들을 견제하려고 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으며이에 따라 냉전이 시작됐다이 냉전은 1990년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끝났으나미국과 소련 양측의 군비 경쟁은 45년간 지속됐다이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많은 부분에 재정을 투입한 무기는 바로 핵무기였으며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경우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1962년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터졌을 때인류는 실제로 멸망을 두려워했었으며흐루쇼프와 케네디가 합의를 보았을 때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소련의 핵 미사일, 냉전 시기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퍼레이드 할 때도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경우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주로 미국의 입장에서만 보지만실제로 가장 많은 위협과 협박을 행한 주체는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사실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한 이유에는 미국이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었다터키에 배치된 핵 미사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따라서 소련 입장에선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쿠바에 핵 미사일을 설치하는 맞대응을 한 것이다일종에 전략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쿠바 미사일 위기는 지나치게 미국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있으며오히려 미국이 더 많은 위협과 협박을 자행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1)

 

사실 미국은 냉전 초기부터 핵전력 우위를 점했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 섬에서 핵실험을 단행했다당시 소련은 핵무기가 없던 시점이었다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자소련의 보리스 이자코프는 <프라우다(Pravda)>에 미국이 진심으로 군축을 원한다면 원자탄 성능 향상에 그토록 목을 매눈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기 1년 전 미국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에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당시 커티스 르메이의 목적은 분명했다바로 전략공군사령부를 소련과 전쟁하여 승리할 수 있는 부대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2, 미국은 비키니 섬에서만 23번의 핵실험을 했다.)

 

커티스 르메이는 이제 전쟁이다!”라고 선언하며소련과의 전쟁 시 원자폭탄 133개를 소련의 70개의 도시에 투하하여 방어망을 단번에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했다이럴 경우 소련 산업의 40%가 파괴되고 27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했다르메이가 설계한 전략공군사령부 비상전쟁계획은 원자폭탄 보유량 전체를 단 한 번의 대량 집중 공격에 쏟아 붓도록 했다사실상 민간인 피해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학살 계획이었다그랬기에당시 미국의 육군과 해군 모두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했을 정도다그러나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공군 편을 들었으며, 1948년 말 SAC의 비상전쟁계획을 승인했다무엇보다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이 이 결정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더글라스 맥아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하자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실전에 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미국은 소련보다 핵무력에서 앞선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소련의 핵무장과 중국의 공산화가 미국 사회에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를 불러왔지만미국의 핵무력 우위라는 전제를 깨뜨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 이유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참전 이후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핵무력을 사용을 강력히 주장하다 해임되었기 때문이다물론 트루먼이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맥아더를 해임시켰으나어디까지나 확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전할 위기에 직면하자미국은 핵폭탄 투하를 실제로 고려했었다이는 미국의 덜레스와 닉슨 그리고 레드퍼드 등이 논의했었다물론 베트민이 미군 개입 이전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켰기에미국의 실질적 군사적 개입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냉전 시기 미국은 항상 소련보다 핵무력을 우위에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쿠바 미사일 위기 전후로 흐루쇼프가 핵무장을 보다 더 강화한 데에는 비대칭전력의 격차를 줄이려 했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은 힘의 불균형을 생각해 보았을 때냉전의 실질적인 책임은 소련이 아닌 미국의 책임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본다따라서 냉전의 책임론은 미국 책임론이 보다 현실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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