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으러 들어와 습관적으로 TV를 켜니, YTN 속보라는데, '통진당 내란음모죄' 로 법석이다. 시끄럽다... 놀랍기 보다 시끄럽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총기를 준비하라는 녹취록을 확보했단다. 전쟁이 일어나면 경기남부의 통신, 유류 시설을 파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저껜가  "김정은, 동북아서 위험한 일은 없을 것' 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정작 위험은 위험을 조장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트윗도 대충 놀림거리 하나 만났다는 분위기다. <정원이와 정은이> 라는 '본격냉전콩트' 제목도 나왔다. 정원이가 누군가? 국정원장 이름은 아닌데 갸우뚱거리며 검색을 하는 순간 알았다. 아, 국 정원이! 성을 빼고 부르니 생판 처음 듣는것 같구나 호호.. 국정원 정치개입이 내란음모에 가까운지, 통진당 똘아이들의 쑥덕공론(이런게 있기는 할까;;)이 내란음모에 더 가까운지, 그거라도 이 참에 한번 밝혀보면 좋겠다.

 

 

오후 2시 현재, 다음 실시간 이슈에 '내란음모죄' 같은 것은 없다. 이석기, 김재연이 3위와 5위를 찍고 있고, 1위는 단연 '태풍북상' 이다.  태풍 '콩레이'는 일본 쪽으로 갈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왔는데도, 인기가 내란음모 뺨을 친다. 아마 작년 태풍 '볼라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은 유난히 태풍이 잦았다. 그리고 우리집은 유난히 태풍에 취약했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아파트에, 한 번도 손본적이 없고, 세입자들만 들락거린 험한 집, 거기다 앞은 훤하게 트였고, 결정적으로19층 고층이었다. 평소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19층엔 회오리바람이 '피용~ 피쉬쉬식' 비명을 지르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태풍 소식에 박스테잎을 사다 붙였지만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테잎자국 지운다고 힘만 썼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테잎 붙이고, 신문지 붙이라고 광고를 하더니만, 태풍이 지나고 나니, 그거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벌써 수십년 전에 해본 짓인데, 효과는 없고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유리창이 문제가 아니라 창틀이 문제라는 보도도 나왔다. 오래된 창틀은 그 자체가 휘거나 덜컹거려서 창도 깨지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볼라벤이 지나자 창틀이 휘어진 집들이 TV 화면에 위험스레 보도됐다. 그런 기사들을 보면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낡고 건들거리는 우리집 창틀이 그 거센 비바람을 이겨냈다는 것에 감사했다. 감사를 잘 못하는 성격인데, 정말 감사했다. 나는 그나마 볼라벤이 서해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네로 도망갔다. 평소에도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덜컹거리는 소리를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남편이 데려다 줬다. 볼라벤이 수도권에 근접하던 그 날 밤, 남편은 한 숨도 못잤다고 한다. 덜컹거리거나 퍽하는 소리가 아니라 뜯겨나가는 괴상한 소리에, 이제 깨졌나 싶어 나가서 확인하고, 또 나가서 확인하며 밤을 샜다고 한다. 겁 없는 남편인데, 도저히 잠잘 수 없었다고, 무서웠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이사를 왔다. 3년된 새집이고, 7층이라 그리 높지도 않다. 그런데 오고나니, 여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닷가라 바람이 세고, 높은 산이 없어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닥친다. 4월에 이사를 왔는데, 정말이지 봄바람이 작은 태풍처럼 불었다. 바람때문인지 남쪽인데도 수도권보다 더 추웠다. 지역 주민들 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바람 때문에 좀 고생한다고 한다. 

 

여름이 되고, 혹여 태풍이 올라올까 조금 신경을 썼다. 그전까지는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건, 농작물을 쓸어버리건, TV 속의 일로만 알았는데, 19층 낡은 아파트에서 태풍을 겪고나니 남의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올해는 아직까지 태풍이 없다. 북상하는 콩레이는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 한다.

 

 

한반도 태풍의 진로는 '북태평양 고기압' 이 결정한다. 태풍은 '북태평양 고기압' 의 가장자리를 따라 북상하는데, 올해는 이 고기압이 워낙 동서로 길게 뻗쳐서 중국-한반도-일본을 뒤덮는 바람에 태풍의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서서히 위축하고 있어 한반도 쪽으로 태풍의 길이 만들어 지고는 있다. 9월까지 강력한 태풍이 올라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기압이 빨리 수축해서 일본쪽으로 오그라들면 우리나라는 태풍을 피해갈 수도 있다.

 

사실 콩레이 기사를 보다가, 북태평양고기압의 분포에 따라 월별로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관한 그림이 있길래 복사해 두려고 한 것인데, 또 말이 길었다. 왜 자판 앞에 앉으면 자꾸 말이 길어지는 지 모르겠다.

 

 

 

이 기사를 통해 오늘 새롭게 안 사실은, 태풍은 지구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자구 노력이라는 것이다. 열나면 우리는 해열제를 먹는데, 지구는 높은 곳의 열을 낮은 곳으로 옮겨 '열적 균형'을 맞춘다. 적도 부근은 당연히 열을 많이 받는다. 이 뜨거운(?) 공기가 바다에서 수분을 공급받아서 덜 뜨거운 고위도 지방으로 이사하는 것이 소위 태풍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바람과 비가 동반된다.  왜 태풍은 항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지 이제 알겠다. 저위도에서 고위도로 열을 보내, 지구의 열적균형을 회복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올해는 태풍없이 잘 지나가면 좋겠다. 이 태풍 대신 내란음모죄라는 태풍이 불까? 싶기도 하지만, 열대저기압이라고 전부 다 태풍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이 어찌 태풍인가?   

우리가 이미 볼라벤을 겪어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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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내려 오면서 적적할 것이라 생각했다. 워낙 혼자 노는 편이라, 어디 있든지 마찬가지지 하면서도, 말하자면 사고무친인 고장이라 ... 

 

5개월째, 언니라 부르는 사람들이 10여명이나 된다. 독서회에 가입했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닉네임이 아니라 본명으로 부르며 그것도 나이 따져 언니, 동생이다. 아직 이름도 다 못외웠지만, 좁은 고장이라 마트에서, 카페에서,도서관에서 느닷없이 반갑게 부딪힌다. 뒤늦게 이런 친밀한 문화가 약간 낯설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든든하다. 

 

독서회 두달,  다들 부지런하고, 다들 말을 잘 한다. 말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말을 표현하는데는 한결같이 뛰어나다. 재주도 많다.

 

 

 

집에서 작은 오븐으로 만든 케잌이다. 얼그레이 타르트.  사진을 전공했다는, 이젠 두 아이의 엄마지만, 재주가 참 다양하다. 가방도 만들고, 커피도 뽑고, 케잌이며 쿠키도 굽는다. 베란다는 제라늄 화원이다. 애들 키우며 저 일을 언제 다 하나 싶은데, 그러고도 책 읽고 독서회도 참가한다. 손을 보니 참 길쭉하다. 저러니 손재주가 그렇게 좋은가...짤뚱한 손가락에 여전히 아기손 같은 나는 손으로 하는 것은 젬병이다.

 

 

 

딸기 타르트. 통째로 얹은 딸기가 참 통통하고 고슬하니 싱싱해 보인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드는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어 봐도 신기하다. 저 작은 주방에서, 저렇게 작은 오븐에 이런 타르트가 .. 

 

 

 

 

 

그린 게이블즈의 앤이 먹었을 것 같은 당근케잌. <앵무새 죽이기>의 그 작은 마을, 앞 집 아줌마가 구워줬을 것 같은 투박하지만 깔끔한 케잌. 우리 문화는 아니지만, 앞치마 두르고 걸어서 작은 통나무 학교를 다니던 그 누구라도, 먹었을 것 같은 케잌이다. 앤이든, 스카웃이든, 삐삐든...

 

 

 

 

 

호두파이. 예쁘다...   

  

이 사진들, 직접 집에서 찍은 건데, 이렇게 올려 놓고 보니 어디서 퍼온 것 같다 ㅎ.  타르트 만드는 솜씨도, 사진찍는 솜씨도 참 좋다. 또 부럽다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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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8-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만 해도 군침이^^;; 이런 아기자기하고 예쁜 독서회에 저도 가입하고 싶네요. 같이 책 얘기도 하고 맛난 것도 나누고.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아요.

말리 2013-08-2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먼저 인사를 ^^ 반갑습니다. 알라딘 서재 만든 이후 첫 '댓글' 을 주셨네요. 기쁘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기 사시지는 않으시지요? 혹시 지역분이시면 언제라도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2010년 8월 12일 쓴 글입니다.

 

 

‘ 1박2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만든 손두부... ’

‘두부마을’은 내가 가끔 두부나 콩물을 사다 먹는 집이다. 주인 총각(?)은 3,000원짜리 두부 한모에도 거의 배꼽 인사를 하는 아주 예의바른 청년인데,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 눈매며 짧게 자른 머리가 범상치 않아 전직이 살짝 궁금해지게 만드는 청년이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드나드는 그 가게에서 저 광고가 눈에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게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어 하루에 세 번 두부 나오는 시간을 정해 놓고 있는데, 내가 갈 때 마다 주인 총각은 두부 물을 젓고 있거나 콩을 씻고 있거나 커다란 솥을 닦고 있었다. 1박2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두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고소한 두부 맛을 보면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1박2일’은 몰라도 ‘정성을 다하여’는 아마도 수사(修辭)일 것이다. 사실 ‘정성을 다하여’란 말은 그 자체가 수사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짜피 정성을 다했는지 안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길을 지나다 우연히 저 문구를 보게 된 사람은 ‘1박2일’ 조차도 단순한 수사로 읽을지 모른다. 예능프로 1박2일의 인기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또 어떤 단골 할머니는 ‘정성을 다하여’에 진짜로 공감하실 지도 모른다. 낯설고 건조한 ‘1박2일’이란 말 보다는 ‘정성을 다하여’란 말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사실일 수 있다, 그 할머니에게는.

 

그렇다면 수사란 혹은 rhetoric이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 아버지 묘 어떻게 할 거야? 공원묘지로 옮길 거야? "

  "안그래도 내가 저기 외할머니랑, 외갓집 묘 모셔 놓은 OO 공원을 갔는데.....흙 아래에 묻는 게 아니고 시멘트로 이렇게 저렇게 발라서 ...... ......... 거기 모셔 놓은 XX 친구가 전화가 와서 물어 봤는데 ..... ........ ...... 네 아버지는 자기 묘를 왜 그런데다가 썼는지....... 그런데 거기 옆에 신성일이가 묘를 크게 ......."

  "엄마! 옯기겠다는 거야? 안 옯기겠다는 거야?"

  "그것이아니고....... 너희 오촌 아저씨들이 왜 거기다가 묘를 안 쓰는지..... 아버지 자리는 왠만해도...내 자리는 ....."

  "엄마!!! 그 얘기는 저번에도 했잖아! 그래서 어쩔건데!!!!" 」

 

엄마와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끝난다. 나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요점만 말하라고 다그치고(?),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안부 전화를 해도 이런 식이다. 아픈데 없냐고 물으면, 엄마는 그 대답은 없이, 내가 운동을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다리가 아팠다든가 허리가 좋아졌다든가 하는 결론이 나오려면 30분은 족히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 그 30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엄마 그래서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갑자기 말문을 중단당한 엄마는 황급히 괜찮으니 걱정마라며 전화를 끊는데, 엄마의 풀죽은 목소리가 멀어지면 벌써 후회가 시작되지만 번번이 나는 소리를 지르고 또 후회를 되풀이한다. 남편은 왜 그렇게 유독 장모님에게만 못되게 구냐고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다. 엄마니까 그렇지 뭐 ㅡ.ㅡ;;

 

정신분석학 입문서를 보면 욕망과 요구와 욕구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라캉의 공식이라는데,

욕망 desire = 요구 demand - 욕구 need

요구는 말로서(혹은 울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 때 정확히 그 상대가 말해진 요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고 해도 즉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고 해도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망 desire이다. “나는 너에게서 이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네가 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생트집을 잡는다고 하는 것이 있다. 애들이 뭘 달라고 막 떼를 쓸 때, 정확히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주면 오히려 그것을 집어 던지고 더 크게 울면서 뒹구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아이가 말로서 요구했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관심일 수도 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욕망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대개 수수께끼로 남는다. 나도 내가 욕망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틀린 설명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가 읽은 바로는 대충 이런 뜻인 것 같다.

 

엄마의 욕망은 그러니까 그 30분 동안의 끝없는 이야기 속 어딘가에 있다.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전화를 했을 때조차,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병원으로 가라든지, 어떤 약을 먹으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말을 말 그대로, 요구로서만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방법(욕구의 해소)만을 재빠르게 제시할 줄 알았지,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엄마의 욕망을 모를 것이다. 위로, 위안, 속에 있는 것들을 말로서 풀어내기 ... 이런 것들로서 엄마의 30분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따뜻한 말이 듣고 싶고, 상한 속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 진정한 욕구였을 수는 있지만, 비록 내가 그 30분을 애정으로 응대했다고 하더라도 엄마에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콕 집어서 이걸 원한다,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번번이 운동화 끈을 조이는 것에서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30분이 의미 없음 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0분은 오히려 빼앗겨서는 안 될 30분, 내가 귀 기울여 들어 주어야 할 30분일 수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욕망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 히스테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라캉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일단 나는 여기까지만 풀어 보기로... 뒤는 너무 어려워서...)

 

예전 글들에서 선생님의 ‘레토릭에 관하여...’란 글을 발견했다. 간간히 ‘인간의 언어’를 주장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인 것 같았다. 레토릭이란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에 따라 그 글은 찬반양론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말 할 때는 쉽게, 현학적이지 않게가 원칙이란 말로 이해하면 일단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 글을 읽고 두부를 사러 나갔다가 ‘1박2일 정성을 다하여..’란 문구를 읽고 문득 ‘레토릭’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레토릭이 되는지는 수신자 각자에게 모두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정보(지식, 주장 등)의 정확도’라는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말(요구)인지, 어떤 것이 단순 레토릭인지의 기준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릎 쓰고 한 발 더 나아가면 레토릭이야 말로 욕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장황한 혹은 화려한 혹은 현학적인 수사修辭 속에, 말하는 자의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과녁을 맞출수 없는 발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흘러넘치는 레토릭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표적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엄마는 딸의 무안쩍은 고함 소리를 번번이 예상하면서도, 그 장황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멈출 수 없듯이..... 그러므로 결론도 없고 요점도 없는 엄마의 길고 긴 이야기는 차라리 레토릭의 강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레토릭을 듣(읽)는 사람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레토릭에 욕망이 있다면, 레토릭에 ‘요구- 욕구 = 욕망’ 인 잔여가 있다면,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그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젝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도 칸트도 라캉도 프로이트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지젝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문체가 매혹적이었고, 그의 말하는 방식이 독특했고, 그래서 아마도 그것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강한 느낌, 강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젝의 책은 어렵고 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지만, 내게 왜 지젝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는 여전히 그 끌림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전달하는 지식 보다는 그의 레토릭에 대한 끌림이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그 레토릭 속에는 무엇인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있는 듯도 하고, 그 물음 주위를 계속 맴돌게 하는 자력 같은 것이 있는 듯도 하다. 그러니 레토릭이란 현학적인 태도, 젠체하는 우월감이 전부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 같은 것,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 효율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게 하는 동력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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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6일 쓴 글입니다. 씨네21의 <독자 영화 클럽> 에 응모한 글입니다. 여러명이 함께 쓴 글입니다.

 

 

말리는 기가 막혔다. 카페에 올라 온 세 편의 글은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친절한 설명도 없고, 각자의 장(場)에서 통통 치고 올리고 받으며 놀려 본, 날 것 그대로를 던져 놓았다. 이리 저리 뜯어 붙여 형태나마 잡아 보려고 해도 도대체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멋을 낼 수 없을 바에야 덕지덕지 분칠 보단 맨 얼굴이 상책이다. 그래서 이 글은 40여년만의 대설로 전국이 얼어붙은 2010년 1월의 첫 째 수요일, 칼바람을 뚫고 기어이 강남에 모여야 했던 사연에서 시작한다.

 

 

1.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이 재결성(?) 되기까지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2월의 독자 영화 클럽 응모에서 떨어진 것이다. 넉넉한 망년회 회식비는 고사하고 영화표 1장도 얻지 못했다. 당선자 발표까지의 열흘 남짓의 기간은 5,000원짜리 로또가 주머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마도 내상의 형태는 각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소리 내어 물어 보지 않았다. 단지 ‘1월에는 기필코!’를 외쳤을 뿐이다. 마플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우리의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위안인 동시에 소통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1월의 선정 영화는 전우치였다. 말리가 1등 전우치, 2등 나인을 외쳤고, 뒤이어 겁사가 전우치를 재청했다. 마플은 1등 아바타, 2등 셜록 홈즈를 들고 나왔다... 약간의 긴장이 흘렀다고 해야 할까? 모두 갈매를 기다렸다. 그러나 갈매는 역시 평화주의자인 듯하다. 산뜻하게 그럼 1월의 영화는 전우치라고 선언해 주었다. 우리 셋은 전우치가 갈매의 기호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갈매의 선택 또한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7년 가까이 조금씩 서로를 알아 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기상(氣象) 역사에 남을 2010년 1월의 첫째 주, 두텁게 쌓인 눈과 칼바람 속에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강동원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2. 주점에서 난상 토론?

 

“어땠어요?” “ 뭐 할 말이 없는데요.” “도대체 영화 선택은 누가 한 것이야?” 대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간장 종지만한 술잔이 한 순배씩 돌아가도 별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잖아요?” 라고 말리가 1등으로 전우치를 외친 죄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저는 엄청 지루했어요” 라는 겁사의 말에 또 입이 닫히고 말았다. 겁사는 판타지 애호가인데, 전우치는 도대체 판타스틱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우치를 영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갈매가 문득 말했다. 갈매는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문득 문득 화두를 던지는 신묘함이 있다. 우리는 잠깐 동서고금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홍길동과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까지 이야기가 번졌으나, 불행히도 말리의 귀에 쏙쏙 들어오지 못했다. 말리는 이해력이 뛰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참 모자란달 수도 없지만, 이 클럽의 회원들은 각자의 분야에선 때때로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평범한 말리로서는 따라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은 늘 말리의 몫이기 때문에 (말리는 안타깝게도 백수다), 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글이 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또 장자를 거쳐서 표훈 대덕과 초랭이가 여자라는 것의 전복성(?) 혹은 진부함과 현대의 신선이 스님, 신부, 무당으로 묘사된 것의 의미, 국회의원과 돈 다발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딴나라당을 요괴로 그린 것이냐라든가, 화담이 요괴이면 결국 유가 보다 도가가 더 높다는 것이냐는 등등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인지 전 모르겠어요. 일단 각자 하신 말씀을 카페에 올려 주세요. 그것 보고 글을 써 볼께요.” 드디어 말리가 소리쳤다. “아니, 왜 못알아 들어요?” “나는 십이지신들이 나온 병풍도 못 봤고, 송영창이 왜 스님이란 건지도 모르겠고, 전우치전이라는 설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여튼 내일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올려야 되죠?” 겁사가 물었다. “아, 오늘이나 내일 기억이 생생할 때 써야 좋죠 ㅋㅋ" 마플이 대답하고, 갈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쨌든 씨네21 정훈이 만화는 꼭 보셔요. 전우치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죠.” “정훈이 만화 시리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훈이는 아직도 씨네21에 연재하나 보죠?” 다들 보았다는 정훈이 만화를 혼자만 못 본 말리는 기어이 한번 퉁퉁거리고 말았다.

 

3. 각자가 카페에 올린 글

 

(클럽 ‘화사’는 독서 토론을 위해 자체 비공개 카페를 갖고 있다)

 

맨 처음 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은 갈매였다. 말은 없지만 행동은 의외로 민첩하다. 항상 말은 많은데 행동은 굼뜬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갈매는 혼자 속이 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조선 시대 설화 속 인식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왕이었다. 왕이 현명하면, 백성은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런 인식 아래서 어리석은 왕을 희롱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아 흉년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전우치는 영웅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없고 기업가들이 일자리를 만드는 현대사회에서 전우치가 영웅일 수 있을까?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호그와트 학교뿐만 아니라 마법사 사회가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들이 해리포터와 같은 영웅은 아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대로 불려온 전우치가 영웅이 되려면 화담이나 그와 관련된 세력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기와 자기 주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미리 상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없었다. 이 부재가 영화 전우치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이 영화를 영웅, 전우치란 면에서 본다면 함량 미달이라는 결론인 것 같다. 난세에 영웅인데, 난세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니 영웅이 하고 있는 짓도 무슨 짓인지 도통 요령부득이란 말을 하는구나, 말리는 갈매의 글을 이렇게 해석해 버린다.

 

다음은 겁사다. 평소의 습관대로 절대로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갈매의 글에 댓글을 길게 길게 달아 놓았다. 본 글 보다 훠얼씬 긴 댓글이다.

「 혹시 다른 맥락이 있을까 싶어서 제 딸에게 <전우치전>의 결말에 대해 물어 봤어요. 그런데 원래 얘기에 따르면 전우치의 위치가 손오공과 약간 유사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우치가 신통력을 뽐내려다가 실패한 다음에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 자기가 선택한 스승 화담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이 부분만 보면 영화에서 화담이 악당으로 묘사되는 것은, 스승의 부재 또는 권위의 부재를 목 놓아 부르는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어제 보았던 드라마 <추노>가 훨씬 낫습니다. 특히 장혁이, 자신이 쫒는 여종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잔디 아버지를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요. 소현 세자가 어떠니 제주도에서 어떤 학살이 벌어졌느니 하는 나라의 일이 그리고 조정의 일이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모든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라고?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를 그 원인으로 하는 단순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부 구조와 전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다시 말해 시차적 관점을 가진 것이라고? 씨네21에서 최동훈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는데도, 도대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만들고 싶었다는 말만 기억이 나요. 정말 마플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화 정훈이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적어도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니까요. - 우리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똑 같은 하나들인가? 아니면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등등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욕망을 가진 하나들인가?

이번 주 씨네21에서 김소영 교수가 쓴 ‘전영객잔’에는 요런 구절이 있습니다. “해적이 난무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참혹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자 격분한 전우치는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 결단한다. 전우치의 둔갑술과 도술은 도적의 토벌, 가난한 선비의 구제, 가난한 백성을 원조하는 데 쓰인다. 반면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장난질과 망나니 사이를 오갈 뿐이다. 홍길동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를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하는 시대성은 무엇일까? 그 반시대성은 어떤 것일까?”

정말 반가웠어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서요. 특히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는 대목을 읽는데 갑자기 너무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요새 화두가 백성 개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어떤 정치 원리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그 형식은 기울어진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요. 백성을 향해서, 없는 자들을 향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이유로 드라마 <추노>가 너무 기대됩니다. 홈페이지에 가보니, 장혁은 요런 인물이래요. - 나라 또는 정치와 상관없이 살고자 했으나 결국 휩쓸리고 마는. 영화 <전우치>에는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추노> 만쉐이~ 」

 

헉헉... 기~ㄹ다. 뭐 읽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그대로 다시 옮겨 입력하자니 엄청 길다.(왜 ‘복사하기’를 안하고 미련하게 자판을 두드렸는지에 대한 구구한 사연은 접어두고 싶다;;) 일단 말리도 전우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실존 인물이긴 한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썰(說)일 가능성이 많고, 여튼 도술을 부려 백성도 도와주고, 임금도 골탕 먹이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는 것이 여러 이설(異說)들에서 공통점인 듯하고, 어쨌거나 결국 도통의 경지는 아득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화담 서경덕을 싸~부님으로 모시고 입산수도 했다는 얘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담은 요괴가 아니라 사부님이다. 그런데 왜 영화는 스승을 요괴로 만들었는가? 겁사의 질문은 여기서 씨네21 김소영 교수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신물 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서 스승 따윈 필요 없어, 권위 따윈 필요 없어는 이제 의로움 따윈 필요 없어와 동의어가 되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마저 시대착오를 넘어 반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처한 곤경은 이제 이런 낙인쯤이야 말로 오히려,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그러니 전우치 전설의 정치적 배경을 한낱 장난질의 배경으로 바꿔 버린 영화 <전우치> 보다는, 비정치적이고자 했으나 정치적인 것 속으로 휩쓸리고 마는 또 하나의 전설적 인물을 그리고자 하는 드라마 <추노> 가 진정 ‘새로움’이라고 겁사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정리해 두고, 어려운 말들은 늘 그렇듯 흘러 보냈다. 그런데 가끔 말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한 귀로 들어 와서 한 귀로 내보냈던 말들이 어느 날 문득 대화 속에서, 책 읽기 속에서, 글쓰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나타나 말의 아귀를 맞춰 주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삼년이면 읊는다는 서당 개의 풍월도 이렇게 어느 날 문득 터진 말문이 아닐까?

 

마플이 소식이 없다. 제일 먼저 올릴 줄 알았는데, 기어이 쪼아야 할 판이다. 사실 글쓰기 전공은 마플이다. 마플의 글은 독특한 향취가 있지만, 읽기 쉬운 친절한 글은 아니다. 언젠가 김연아의 트리플 점프에 자신의 글을 비유한 적이 있다. 순식간에 회전하는 트리플 점프는 보기에 무척 아름답지만, 정확한 동작 하나하나를 읽어 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부적은 환상의 아이맥스 3D, 아니 온갖 색이 만발한 매트릭스의 세계로 사람들을 홀리는 안경 같은 것이렷다. 그러니깐두루 전우치는 오늘날로 치면 제임스 카메론이나 아키텍터일진데, 문제는 모시냐. 이놈의 전우치가 애시당초 정통이 아니라 그것이여. 나랏님을 홀려서 함경도 빈민을 구제해 봐야, 본시 삐딱한 사고뭉치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로다.

그렇다면 진정 바람을 다스리고 기후도 다스리는 도사는 어떠한 것인가? 전우치는 하나 남은 부적의 힘으로 여인을 구한 뒤 청계천 바닥에 코를 박는다. 그러고는 갑자기 네오처럼 부적 없이도, 이 현실 세계 자체가 환상인 비밀을 알고는 신출귀몰 몸을 놀리게 되나니,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로다. 유가의 입신양명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쫒던 미천한 계급 출신인 주인공은 “사랑”으로 타자를 살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환상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진정한 도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로서 그림을 바꿔야 할 터? 나랏님이 다스리건, 장사치들이 먹여 살리건, 그림은 수묵화에서 미술관 유화로 바뀐 것 뿐이러나, 그렇다고 허허하면 그것도 가짜 사도, 아니 도사라 이말이시. “사랑”하면 통하고, 그래야 그림이 바뀐당께로. 활동사진으로, 3D로, 리얼디 4D 등등. 영화 속 영화도 바뀌었자너. 일단은 코디가 주인공이 된거지만. 그래서, 인제야 말이지 전우치가 내 아바타라면, 영화를 들어 엎겄다 이 말이여. <정훈이 만화>가 잘 보여 주더만. 전우치 전문, 무한 아바타 생성 신공으로다가, 합법적인 일자와 다수의 차이는 무엇인지, 누가 정한 그림의 법도인지 물음을 던져서 떡하니 웃음보에다가 꽂아 버리는 거. 초랭이와 표훈대덕이 모두 여자라고 하면 뭘해. 바다 갖고 되냐 이 말이여, 바다. 인연의 실이 얽힌거나 뒤집힌 거, 옛날과 오날이 뫼비우스의 띠이며 반복인거 이제 누가 몰러.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

 

말리는 단순하다. 늘 이 쪽인가 저 쪽인가를 갈라놓고 시작한다. 우리 편인가? 적군인가? 또는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일단 대세 판단이 틀리지 않으면, 상세한 것의 잘잘못을 모른다 해도 결정적으로 오판할 위험은 그 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말리의 처세술 중 하나이다. 그런데 겁사와 마플은 이런 말리를 두고 늘 웃는다. 말리는 결과가 중요한 응용과학 전공이고 (전공이라고 하기에 좀 쑥스럽긴 하다. 대학 4년간 별로 배운 것도 없다), 겁사와 마플은 결과에 이르는 ‘길’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그러니 마플에게 그래서 결론이 뭐요? 라고 묻는 것은 또 한번 웃음을 짓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말리는,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에서 답을 찾는다. 말리가 주목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바보’다. 일단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우리 영화 클럽은 영화 <전우치>가 졸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과감하게 단언한다.

 

4. <전우치>, 정훈이 만화 속에서 완성되다!

 

아무래도 말리는 정훈이 만화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글을 끝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우치>가 폼나게 그렸으나 진정으로 보여주지는 못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영웅 전우치는 씨네21의 <정훈이 만화> 속에서 비로소 그 막강한 도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이란 가면을 쓴 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영웅은, 서울 광장에서 오십만으로 분신(分身)한 바로 그 소박하지만 무시무시한 전우치(들)이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고!’를 외치는 오십만 전우치(들)! 그것이야말로 텅 빈 법의 야만성과 눈먼 폭력성을 통쾌하게 고발하고 사정없이 농락하는 신통방통 오묘신묘한 진정한 도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은 피리 부는 표훈 대덕이 아니라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빵꾸똥꾸 해리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세 회원의 글 속에서 말리가 읽어 낸 일종의 맺음말이지만, 그들이 꼭 그렇게 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읽은 자는 말리이고 혹은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있다면, 독자들일 것이니 말이다...

 

2010년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에 응모할 글은 이렇게 완성 되었다. 그냥 이런 저런 수다를 재미있게 배치하면 간단할 것을 불행히도 클럽 <화사>에는 그런 오묘한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의 쓰라림이 되풀이 될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다시 이렇게 길고도 까탈스런 길을 걷는 것은 떡고물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려니와 소통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읽히고 이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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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5일 쓴 글입니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삽시간에 야구 열풍에 휩싸였던 것이. 나는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면서도 늘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곤 했는데, 삼성 라이온스의 승률은 물론 장효조와 이만수 등의 타율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구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기록들 뿐 아니라 선수들의 이름도 잊어갔다. 내가 열광했던 것은 사실 야구 그 자체는 아니었다.  

  열심히 TV화면을 보면서도 여전히 혼자서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지 못했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TV 앞에 나를 붙들어 매었던 것은 야구 그 자체의 묘미도, 선수들의 순수한 기량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승부에 대한 열광과 환희였다. 대구 삼성과 광주 해태의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버스가 불타오르고 선수들은 운동장을 도망쳐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생각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해태를 미워했고 무조건 해태는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경기에서도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왜 하필 해태인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이유 따위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뉴튼 이전에,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단지 아이스 쇼였다면 나는 진정 그 점프에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또 그렇게 안도하며,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트리플 악셀의 아사다 마오가 자빠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즐기면서, 그렇게 심술쟁이가 되어, 스무살 앳된 얼굴을 적시는 진짜 눈물을 가증스럽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SBS를 켜기만하면 넘쳐 나는 광고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따위 광고들에 넌더리를 내다가도, 막상 이승훈이 모태범이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냈다는 해설자의 비명 소리에 덩달아 으악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있었던가? 나는 여전히 소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알지 못하는 자’, 혹은 ‘나는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믿는자)’ 란 말인가?

 

  벤쿠버 올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 학생 한 명이 러시아에서 스킨해드 족의 테러에 희생당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러시아의 인종주의에 관한 심층 보도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도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 우려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했다. 신나찌란 말이 심심찮게 나도는 것도 벌써 오래 전부터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구동구권의 인종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이 책은 1990년대에 씌어 진 것이지만, 지금도 동구권의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적 복수주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이 지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종족 긴장의 원인에 대해 좌파가 제안한 표준적 분석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테제는 종족 긴장이 집권당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할 수단으로서 집권당 관료에 의해 선동되고 조종되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적 강박, 위대한 루마니아의 꿈, 헝가리 및 여타 소수민족의 강압적 흡수는 차우세스쿠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하는 항상적 긴장을 만들어냈다.....그렇지만 이러한 가설은 최근의 사건을 통해 매우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논박되었다. 일단 공산주의 관료지배가 무너지고 나자, 종족 긴장은 한층 더 강력하게 출현했다. 왜 종족적 원인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것을 낳은 권력 구조가 붕괴한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

 

  보통 간간이 들려오는 동구권의 종족 분쟁에 대한 느낌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종족 따위에나 매달려 있으니 자기들끼리 총질이나 하고 있지. 공산당 독재가 무너졌으면 열심히 일해서 경제를 살려야지 츳츳츳, 뭐 그런 것. 그런데 저자의 분석은 완전히 거꾸로다. 인종주의 때문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즉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변화 그 자체가 인종주의를 한층 더 강화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불균형을 낳는다.” 지극히 심란하고 피곤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사실이다. 취업을 포기한 청년 인구가 사십만, 구조 조정, 중산층의 몰락, 기타 등등은 우습게도 1인당 GNP라거나 세계 몇 번째 경제 대국이라거나 하는 소위 경제 발전 지표와 비례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은 내속적인 구조적 불균형, 그 최심중의 적대적 성격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문장이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적은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인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파시즘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파시스트의 꿈은 단순히 “과잉”없는, 구조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적대가 없는 자본주의를 갖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에서 한편으로 사회적 직조의 안정과 균형을 보증하는, 즉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에서 다시금 우리를 구해주는 주인-지도자의 형상이 복귀하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이 불균형에 대한 이유가 “과도한” 축적과 탐욕으로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귀속되는 것이다.... 주인의 기능은 과잉의 원인을 분명하게 한정된 사회적 작인에 위치시킴으로써 과잉을 통제하는 것이다..... 주인의 형상과 더불어 사회적 구조에 내속적인 적대는 권력의 관계로, 우리와 그들, 적대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저들 사이의 지배 투쟁으로 변형된다.」

 

  초기 자본주의의 참상은 올리버 트위스트라든가 기타 소설이나 역사서, 채플린의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히틀러가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속성이라는 것을 알았던 몰랐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터질 것 같은 불만을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빈곤은, 자본주의적 결실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유대인’, 우리의 것을 도둑질해 간 ‘유대인’ 이라는 외적 대상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다. 내적 적대는 봉합되었고, 외부의 적은 그럴듯하다.

  “집 안 싸움을 하다가도 도둑이 들어오면 합심해서 도둑을 잡아야한다”는 의 말은, 집 안 싸움은 집 밖에 도둑을 만듦으로써 봉합되어야 한다는 주인의 주문에 다름 아니다. 현명하게도 혹은 고지식하게도 그녀는 “그런데 집 안 사람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도둑으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진짜 도둑은 원래 집 안에 있었다는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도요타 사태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는 미국 경제가 공공연하게 쇠퇴하는 단계에서 징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90년대 초반에 벌써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점차로 유대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즐길 줄을 모른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미국의 미디어를 보라. 일본이 점점 더 미국보다 경제적 우월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너무 많은 부를 축적한다는 다소 불가사의 한 사실에 놓여진다...」

  도요타 사태에 열광(?)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 미디어의 태도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기지 대출 사태로 격발된 모든 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갑자기, 광적으로 도요타를 상대로 분출하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 자신은 도요타 사태의 이 과잉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인종적 뿌리에 관한 이야기는 애초부터 “기원들의 신화”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현재의 적대를 흐려놓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창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화석이 아니라면 “민족유산”이란 무엇이겠는가? .... 민족주의로의 이와 같은 반전의 충격적인 신속함 때문에 외상적 방향 상실을 겪으면서 놀라는 대신... 이 외상적 방향상실을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의 열쇠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리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초래한 외상적 방향상실로부터, 발밑에서 근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붕괴는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혼란과 상실을 겪게 되는지는 솔직히 미루어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사회들의 자본주의 적응기는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난폭하게 날뛰는 신흥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그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를 드러내는 부정적 증표인 동시에,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가치를 반증하는 긍정적 증표이기도 하다. 여전히 레닌주의자인 저자의 지향점이 무엇인건 간에,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차적 관점을 제공한다.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어떤 특이한 지점, 어떤 결정적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를 은폐하는 장막이지만,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해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시차적 관점인 것 같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국가대표>가 벤쿠버의 성화와 함께 OCN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진 않지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무난한 영화인 것 같다. 콧물 찍, 눈물 찍은 촌스럽다는 통념이 오래되어서인지 몰라도 국가대표라는 제목 자체의 중압감에 비해서는 다행히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딱 그만큼이 좋은 성동일의 연기 덕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태극마크와 애국심의 상관관계를 애초에 단절하고 들어가는 전제에 힘입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태릉선수촌의 그 누구도 애국심 따위를 고된 훈련의 동력으로 삼을 리 없는 시대에 그 정도야 기본이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 네 명(혹은 다섯)의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조직위(?)까지도 철저히 개인적이고 정념적인 이유로 국가대표를 꾸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던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던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 여기서는 오히려 국가에 의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국가에 대한 너의 애국심과 능력을 증명해 보라! ...라는 식의 무엇이 있다.

  하정우는 엄마에 의해 버려진 해외 입양 고아이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자식을 버린 것은 엄마이다. 귀책 사유는 엄마에게 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하정우는 자신을 버린 국가, 혹은 엄마(보통은 아버지가 국가를 은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진정한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코치 성동일은 대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정우에게 너를 버린 국가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국가에게 너의 능력을 먼저 인정받아야 비로소 국가를 혹은 엄마를 되찾을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과 같다. 매주 되풀이 되는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는 여전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물론 목적을 위한 수단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단지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의 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국 구구한 개인적 사연으로 얽힌 선수들과 코치 사이에 화합과 형제애(혹은 민족애?)가 싹트는 과정을 보며주며, 국가대표 혹은 태극마크 안에서 하나됨을 대단원의 막으로 그리고 있다. 어쩌면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핏줄에 대한 강박 관념 자체가 하나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화 <국가대표>는 첫 인상과는 달리, 그 제목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애초에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예찬하는 참으로 솔직한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해 그 흥행 성공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에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은 무엇일까? 대답을 위해 다시 김연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김연아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는 언론의 집요한 물음(오히려 추궁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에도 3월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중함일 수도 있지만 거부의 느낌이 더 강한 침묵이다. 나는 그녀에게 동의하지만 어쩌면 동의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열되어 있다. 자연인 김연아와 피겨퀸 혹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나는 김연아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만 스케이트를 신는 진짜 전설이 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트리플 악셀을 훌륭하게 구사하여 4년 뒤에도 아사다 마오를 납작하게 이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김연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해야 옳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끼어든다. 김연아는 이미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 막대한 광고 수입을 흔쾌히 동의한 까닭은 김연아가 국가대표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분열되어 있다. 국가대표, 국가대표로 대표되는 국가주의를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도, 혹은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그 국가주의에 열광하고 있다. 그 민족적 자부심에 은근히 뿌듯해 하고 있음을 들키고 만다. 김연아 효과가 몇 조인가를 몇 일째 되풀이 보도하는 뉴스는 물론 한심하다. 벤쿠버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거나, 우리 민족이 더 잘 살 수 있다거나,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물론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벤쿠버의 성공을 마치 정부의 성공인양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것만 같은 정부를 생각하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같기도 하다. 나는 믿지 않지만,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스포츠를 이용한 우민화 정책이 먹혀들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국가 대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니 어쩌면 올림픽 자체가 거대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적대를 은폐하는 전 지구적 우민화 정책일지도 모른다. 100일 뒤에 빨간 셔츠를 입고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 외칠 월드컵 응원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나는 안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나는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민족주의에는 그 모든 기만에 이용당하고도 남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주는 어떤 잔여가 있는 것일까?

 

 

 

** 인용문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 따온 것이다. 벤쿠버 올림픽과 영화 <국가 대표>와 러시아 등 유럽의 신흥 인종주의와 이 독서가 함께 맞물려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 왔지만, 지젝의 책이 여전히 어렵게 읽히는 것만큼이나 이 글은 산만하고 어쩌면 오독에 기인한 틀린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무엇보다 국경별로 뚜렷한 빈부 격차와 국가에 의해 존재가 보장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 산 죽음 (호모 사케르)으로 취급받는 이 냉혹한 세계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등에 대한 일관된 의견을 가질 수 없음이 혼란스럽다. 그것은 물론 S1과 대상a, $의 개념에 대한 여전한 혼돈의 탓도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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