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6일 쓴 글입니다. 씨네21의 <독자 영화 클럽> 에 응모한 글입니다. 여러명이 함께 쓴 글입니다.

 

 

말리는 기가 막혔다. 카페에 올라 온 세 편의 글은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친절한 설명도 없고, 각자의 장(場)에서 통통 치고 올리고 받으며 놀려 본, 날 것 그대로를 던져 놓았다. 이리 저리 뜯어 붙여 형태나마 잡아 보려고 해도 도대체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멋을 낼 수 없을 바에야 덕지덕지 분칠 보단 맨 얼굴이 상책이다. 그래서 이 글은 40여년만의 대설로 전국이 얼어붙은 2010년 1월의 첫 째 수요일, 칼바람을 뚫고 기어이 강남에 모여야 했던 사연에서 시작한다.

 

 

1.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이 재결성(?) 되기까지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2월의 독자 영화 클럽 응모에서 떨어진 것이다. 넉넉한 망년회 회식비는 고사하고 영화표 1장도 얻지 못했다. 당선자 발표까지의 열흘 남짓의 기간은 5,000원짜리 로또가 주머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마도 내상의 형태는 각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소리 내어 물어 보지 않았다. 단지 ‘1월에는 기필코!’를 외쳤을 뿐이다. 마플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우리의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위안인 동시에 소통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1월의 선정 영화는 전우치였다. 말리가 1등 전우치, 2등 나인을 외쳤고, 뒤이어 겁사가 전우치를 재청했다. 마플은 1등 아바타, 2등 셜록 홈즈를 들고 나왔다... 약간의 긴장이 흘렀다고 해야 할까? 모두 갈매를 기다렸다. 그러나 갈매는 역시 평화주의자인 듯하다. 산뜻하게 그럼 1월의 영화는 전우치라고 선언해 주었다. 우리 셋은 전우치가 갈매의 기호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갈매의 선택 또한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7년 가까이 조금씩 서로를 알아 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기상(氣象) 역사에 남을 2010년 1월의 첫째 주, 두텁게 쌓인 눈과 칼바람 속에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강동원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2. 주점에서 난상 토론?

 

“어땠어요?” “ 뭐 할 말이 없는데요.” “도대체 영화 선택은 누가 한 것이야?” 대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간장 종지만한 술잔이 한 순배씩 돌아가도 별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잖아요?” 라고 말리가 1등으로 전우치를 외친 죄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저는 엄청 지루했어요” 라는 겁사의 말에 또 입이 닫히고 말았다. 겁사는 판타지 애호가인데, 전우치는 도대체 판타스틱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우치를 영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갈매가 문득 말했다. 갈매는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문득 문득 화두를 던지는 신묘함이 있다. 우리는 잠깐 동서고금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홍길동과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까지 이야기가 번졌으나, 불행히도 말리의 귀에 쏙쏙 들어오지 못했다. 말리는 이해력이 뛰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참 모자란달 수도 없지만, 이 클럽의 회원들은 각자의 분야에선 때때로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평범한 말리로서는 따라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은 늘 말리의 몫이기 때문에 (말리는 안타깝게도 백수다), 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글이 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또 장자를 거쳐서 표훈 대덕과 초랭이가 여자라는 것의 전복성(?) 혹은 진부함과 현대의 신선이 스님, 신부, 무당으로 묘사된 것의 의미, 국회의원과 돈 다발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딴나라당을 요괴로 그린 것이냐라든가, 화담이 요괴이면 결국 유가 보다 도가가 더 높다는 것이냐는 등등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인지 전 모르겠어요. 일단 각자 하신 말씀을 카페에 올려 주세요. 그것 보고 글을 써 볼께요.” 드디어 말리가 소리쳤다. “아니, 왜 못알아 들어요?” “나는 십이지신들이 나온 병풍도 못 봤고, 송영창이 왜 스님이란 건지도 모르겠고, 전우치전이라는 설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여튼 내일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올려야 되죠?” 겁사가 물었다. “아, 오늘이나 내일 기억이 생생할 때 써야 좋죠 ㅋㅋ" 마플이 대답하고, 갈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쨌든 씨네21 정훈이 만화는 꼭 보셔요. 전우치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죠.” “정훈이 만화 시리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훈이는 아직도 씨네21에 연재하나 보죠?” 다들 보았다는 정훈이 만화를 혼자만 못 본 말리는 기어이 한번 퉁퉁거리고 말았다.

 

3. 각자가 카페에 올린 글

 

(클럽 ‘화사’는 독서 토론을 위해 자체 비공개 카페를 갖고 있다)

 

맨 처음 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은 갈매였다. 말은 없지만 행동은 의외로 민첩하다. 항상 말은 많은데 행동은 굼뜬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갈매는 혼자 속이 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조선 시대 설화 속 인식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왕이었다. 왕이 현명하면, 백성은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런 인식 아래서 어리석은 왕을 희롱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아 흉년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전우치는 영웅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없고 기업가들이 일자리를 만드는 현대사회에서 전우치가 영웅일 수 있을까?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호그와트 학교뿐만 아니라 마법사 사회가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들이 해리포터와 같은 영웅은 아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대로 불려온 전우치가 영웅이 되려면 화담이나 그와 관련된 세력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기와 자기 주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미리 상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없었다. 이 부재가 영화 전우치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이 영화를 영웅, 전우치란 면에서 본다면 함량 미달이라는 결론인 것 같다. 난세에 영웅인데, 난세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니 영웅이 하고 있는 짓도 무슨 짓인지 도통 요령부득이란 말을 하는구나, 말리는 갈매의 글을 이렇게 해석해 버린다.

 

다음은 겁사다. 평소의 습관대로 절대로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갈매의 글에 댓글을 길게 길게 달아 놓았다. 본 글 보다 훠얼씬 긴 댓글이다.

「 혹시 다른 맥락이 있을까 싶어서 제 딸에게 <전우치전>의 결말에 대해 물어 봤어요. 그런데 원래 얘기에 따르면 전우치의 위치가 손오공과 약간 유사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우치가 신통력을 뽐내려다가 실패한 다음에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 자기가 선택한 스승 화담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이 부분만 보면 영화에서 화담이 악당으로 묘사되는 것은, 스승의 부재 또는 권위의 부재를 목 놓아 부르는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어제 보았던 드라마 <추노>가 훨씬 낫습니다. 특히 장혁이, 자신이 쫒는 여종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잔디 아버지를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요. 소현 세자가 어떠니 제주도에서 어떤 학살이 벌어졌느니 하는 나라의 일이 그리고 조정의 일이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모든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라고?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를 그 원인으로 하는 단순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부 구조와 전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다시 말해 시차적 관점을 가진 것이라고? 씨네21에서 최동훈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는데도, 도대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만들고 싶었다는 말만 기억이 나요. 정말 마플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화 정훈이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적어도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니까요. - 우리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똑 같은 하나들인가? 아니면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등등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욕망을 가진 하나들인가?

이번 주 씨네21에서 김소영 교수가 쓴 ‘전영객잔’에는 요런 구절이 있습니다. “해적이 난무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참혹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자 격분한 전우치는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 결단한다. 전우치의 둔갑술과 도술은 도적의 토벌, 가난한 선비의 구제, 가난한 백성을 원조하는 데 쓰인다. 반면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장난질과 망나니 사이를 오갈 뿐이다. 홍길동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를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하는 시대성은 무엇일까? 그 반시대성은 어떤 것일까?”

정말 반가웠어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서요. 특히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는 대목을 읽는데 갑자기 너무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요새 화두가 백성 개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어떤 정치 원리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그 형식은 기울어진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요. 백성을 향해서, 없는 자들을 향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이유로 드라마 <추노>가 너무 기대됩니다. 홈페이지에 가보니, 장혁은 요런 인물이래요. - 나라 또는 정치와 상관없이 살고자 했으나 결국 휩쓸리고 마는. 영화 <전우치>에는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추노> 만쉐이~ 」

 

헉헉... 기~ㄹ다. 뭐 읽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그대로 다시 옮겨 입력하자니 엄청 길다.(왜 ‘복사하기’를 안하고 미련하게 자판을 두드렸는지에 대한 구구한 사연은 접어두고 싶다;;) 일단 말리도 전우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실존 인물이긴 한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썰(說)일 가능성이 많고, 여튼 도술을 부려 백성도 도와주고, 임금도 골탕 먹이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는 것이 여러 이설(異說)들에서 공통점인 듯하고, 어쨌거나 결국 도통의 경지는 아득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화담 서경덕을 싸~부님으로 모시고 입산수도 했다는 얘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담은 요괴가 아니라 사부님이다. 그런데 왜 영화는 스승을 요괴로 만들었는가? 겁사의 질문은 여기서 씨네21 김소영 교수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신물 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서 스승 따윈 필요 없어, 권위 따윈 필요 없어는 이제 의로움 따윈 필요 없어와 동의어가 되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마저 시대착오를 넘어 반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처한 곤경은 이제 이런 낙인쯤이야 말로 오히려,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그러니 전우치 전설의 정치적 배경을 한낱 장난질의 배경으로 바꿔 버린 영화 <전우치> 보다는, 비정치적이고자 했으나 정치적인 것 속으로 휩쓸리고 마는 또 하나의 전설적 인물을 그리고자 하는 드라마 <추노> 가 진정 ‘새로움’이라고 겁사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정리해 두고, 어려운 말들은 늘 그렇듯 흘러 보냈다. 그런데 가끔 말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한 귀로 들어 와서 한 귀로 내보냈던 말들이 어느 날 문득 대화 속에서, 책 읽기 속에서, 글쓰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나타나 말의 아귀를 맞춰 주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삼년이면 읊는다는 서당 개의 풍월도 이렇게 어느 날 문득 터진 말문이 아닐까?

 

마플이 소식이 없다. 제일 먼저 올릴 줄 알았는데, 기어이 쪼아야 할 판이다. 사실 글쓰기 전공은 마플이다. 마플의 글은 독특한 향취가 있지만, 읽기 쉬운 친절한 글은 아니다. 언젠가 김연아의 트리플 점프에 자신의 글을 비유한 적이 있다. 순식간에 회전하는 트리플 점프는 보기에 무척 아름답지만, 정확한 동작 하나하나를 읽어 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부적은 환상의 아이맥스 3D, 아니 온갖 색이 만발한 매트릭스의 세계로 사람들을 홀리는 안경 같은 것이렷다. 그러니깐두루 전우치는 오늘날로 치면 제임스 카메론이나 아키텍터일진데, 문제는 모시냐. 이놈의 전우치가 애시당초 정통이 아니라 그것이여. 나랏님을 홀려서 함경도 빈민을 구제해 봐야, 본시 삐딱한 사고뭉치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로다.

그렇다면 진정 바람을 다스리고 기후도 다스리는 도사는 어떠한 것인가? 전우치는 하나 남은 부적의 힘으로 여인을 구한 뒤 청계천 바닥에 코를 박는다. 그러고는 갑자기 네오처럼 부적 없이도, 이 현실 세계 자체가 환상인 비밀을 알고는 신출귀몰 몸을 놀리게 되나니,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로다. 유가의 입신양명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쫒던 미천한 계급 출신인 주인공은 “사랑”으로 타자를 살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환상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진정한 도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로서 그림을 바꿔야 할 터? 나랏님이 다스리건, 장사치들이 먹여 살리건, 그림은 수묵화에서 미술관 유화로 바뀐 것 뿐이러나, 그렇다고 허허하면 그것도 가짜 사도, 아니 도사라 이말이시. “사랑”하면 통하고, 그래야 그림이 바뀐당께로. 활동사진으로, 3D로, 리얼디 4D 등등. 영화 속 영화도 바뀌었자너. 일단은 코디가 주인공이 된거지만. 그래서, 인제야 말이지 전우치가 내 아바타라면, 영화를 들어 엎겄다 이 말이여. <정훈이 만화>가 잘 보여 주더만. 전우치 전문, 무한 아바타 생성 신공으로다가, 합법적인 일자와 다수의 차이는 무엇인지, 누가 정한 그림의 법도인지 물음을 던져서 떡하니 웃음보에다가 꽂아 버리는 거. 초랭이와 표훈대덕이 모두 여자라고 하면 뭘해. 바다 갖고 되냐 이 말이여, 바다. 인연의 실이 얽힌거나 뒤집힌 거, 옛날과 오날이 뫼비우스의 띠이며 반복인거 이제 누가 몰러.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

 

말리는 단순하다. 늘 이 쪽인가 저 쪽인가를 갈라놓고 시작한다. 우리 편인가? 적군인가? 또는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일단 대세 판단이 틀리지 않으면, 상세한 것의 잘잘못을 모른다 해도 결정적으로 오판할 위험은 그 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말리의 처세술 중 하나이다. 그런데 겁사와 마플은 이런 말리를 두고 늘 웃는다. 말리는 결과가 중요한 응용과학 전공이고 (전공이라고 하기에 좀 쑥스럽긴 하다. 대학 4년간 별로 배운 것도 없다), 겁사와 마플은 결과에 이르는 ‘길’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그러니 마플에게 그래서 결론이 뭐요? 라고 묻는 것은 또 한번 웃음을 짓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말리는,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에서 답을 찾는다. 말리가 주목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바보’다. 일단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우리 영화 클럽은 영화 <전우치>가 졸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과감하게 단언한다.

 

4. <전우치>, 정훈이 만화 속에서 완성되다!

 

아무래도 말리는 정훈이 만화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글을 끝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우치>가 폼나게 그렸으나 진정으로 보여주지는 못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영웅 전우치는 씨네21의 <정훈이 만화> 속에서 비로소 그 막강한 도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이란 가면을 쓴 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영웅은, 서울 광장에서 오십만으로 분신(分身)한 바로 그 소박하지만 무시무시한 전우치(들)이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고!’를 외치는 오십만 전우치(들)! 그것이야말로 텅 빈 법의 야만성과 눈먼 폭력성을 통쾌하게 고발하고 사정없이 농락하는 신통방통 오묘신묘한 진정한 도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은 피리 부는 표훈 대덕이 아니라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빵꾸똥꾸 해리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세 회원의 글 속에서 말리가 읽어 낸 일종의 맺음말이지만, 그들이 꼭 그렇게 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읽은 자는 말리이고 혹은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있다면, 독자들일 것이니 말이다...

 

2010년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에 응모할 글은 이렇게 완성 되었다. 그냥 이런 저런 수다를 재미있게 배치하면 간단할 것을 불행히도 클럽 <화사>에는 그런 오묘한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의 쓰라림이 되풀이 될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다시 이렇게 길고도 까탈스런 길을 걷는 것은 떡고물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려니와 소통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읽히고 이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욕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