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2일 쓴 글입니다.

 

 

‘ 1박2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만든 손두부... ’

‘두부마을’은 내가 가끔 두부나 콩물을 사다 먹는 집이다. 주인 총각(?)은 3,000원짜리 두부 한모에도 거의 배꼽 인사를 하는 아주 예의바른 청년인데,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 눈매며 짧게 자른 머리가 범상치 않아 전직이 살짝 궁금해지게 만드는 청년이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드나드는 그 가게에서 저 광고가 눈에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게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어 하루에 세 번 두부 나오는 시간을 정해 놓고 있는데, 내가 갈 때 마다 주인 총각은 두부 물을 젓고 있거나 콩을 씻고 있거나 커다란 솥을 닦고 있었다. 1박2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두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고소한 두부 맛을 보면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1박2일’은 몰라도 ‘정성을 다하여’는 아마도 수사(修辭)일 것이다. 사실 ‘정성을 다하여’란 말은 그 자체가 수사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짜피 정성을 다했는지 안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길을 지나다 우연히 저 문구를 보게 된 사람은 ‘1박2일’ 조차도 단순한 수사로 읽을지 모른다. 예능프로 1박2일의 인기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또 어떤 단골 할머니는 ‘정성을 다하여’에 진짜로 공감하실 지도 모른다. 낯설고 건조한 ‘1박2일’이란 말 보다는 ‘정성을 다하여’란 말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사실일 수 있다, 그 할머니에게는.

 

그렇다면 수사란 혹은 rhetoric이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 아버지 묘 어떻게 할 거야? 공원묘지로 옮길 거야? "

  "안그래도 내가 저기 외할머니랑, 외갓집 묘 모셔 놓은 OO 공원을 갔는데.....흙 아래에 묻는 게 아니고 시멘트로 이렇게 저렇게 발라서 ...... ......... 거기 모셔 놓은 XX 친구가 전화가 와서 물어 봤는데 ..... ........ ...... 네 아버지는 자기 묘를 왜 그런데다가 썼는지....... 그런데 거기 옆에 신성일이가 묘를 크게 ......."

  "엄마! 옯기겠다는 거야? 안 옯기겠다는 거야?"

  "그것이아니고....... 너희 오촌 아저씨들이 왜 거기다가 묘를 안 쓰는지..... 아버지 자리는 왠만해도...내 자리는 ....."

  "엄마!!! 그 얘기는 저번에도 했잖아! 그래서 어쩔건데!!!!" 」

 

엄마와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끝난다. 나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요점만 말하라고 다그치고(?),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안부 전화를 해도 이런 식이다. 아픈데 없냐고 물으면, 엄마는 그 대답은 없이, 내가 운동을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다리가 아팠다든가 허리가 좋아졌다든가 하는 결론이 나오려면 30분은 족히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 그 30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엄마 그래서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갑자기 말문을 중단당한 엄마는 황급히 괜찮으니 걱정마라며 전화를 끊는데, 엄마의 풀죽은 목소리가 멀어지면 벌써 후회가 시작되지만 번번이 나는 소리를 지르고 또 후회를 되풀이한다. 남편은 왜 그렇게 유독 장모님에게만 못되게 구냐고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다. 엄마니까 그렇지 뭐 ㅡ.ㅡ;;

 

정신분석학 입문서를 보면 욕망과 요구와 욕구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라캉의 공식이라는데,

욕망 desire = 요구 demand - 욕구 need

요구는 말로서(혹은 울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 때 정확히 그 상대가 말해진 요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고 해도 즉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고 해도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망 desire이다. “나는 너에게서 이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네가 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생트집을 잡는다고 하는 것이 있다. 애들이 뭘 달라고 막 떼를 쓸 때, 정확히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주면 오히려 그것을 집어 던지고 더 크게 울면서 뒹구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아이가 말로서 요구했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관심일 수도 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욕망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대개 수수께끼로 남는다. 나도 내가 욕망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틀린 설명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가 읽은 바로는 대충 이런 뜻인 것 같다.

 

엄마의 욕망은 그러니까 그 30분 동안의 끝없는 이야기 속 어딘가에 있다.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전화를 했을 때조차,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병원으로 가라든지, 어떤 약을 먹으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말을 말 그대로, 요구로서만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방법(욕구의 해소)만을 재빠르게 제시할 줄 알았지,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엄마의 욕망을 모를 것이다. 위로, 위안, 속에 있는 것들을 말로서 풀어내기 ... 이런 것들로서 엄마의 30분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따뜻한 말이 듣고 싶고, 상한 속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 진정한 욕구였을 수는 있지만, 비록 내가 그 30분을 애정으로 응대했다고 하더라도 엄마에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콕 집어서 이걸 원한다,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번번이 운동화 끈을 조이는 것에서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30분이 의미 없음 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0분은 오히려 빼앗겨서는 안 될 30분, 내가 귀 기울여 들어 주어야 할 30분일 수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욕망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 히스테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라캉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일단 나는 여기까지만 풀어 보기로... 뒤는 너무 어려워서...)

 

예전 글들에서 선생님의 ‘레토릭에 관하여...’란 글을 발견했다. 간간히 ‘인간의 언어’를 주장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인 것 같았다. 레토릭이란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에 따라 그 글은 찬반양론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말 할 때는 쉽게, 현학적이지 않게가 원칙이란 말로 이해하면 일단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 글을 읽고 두부를 사러 나갔다가 ‘1박2일 정성을 다하여..’란 문구를 읽고 문득 ‘레토릭’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레토릭이 되는지는 수신자 각자에게 모두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정보(지식, 주장 등)의 정확도’라는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말(요구)인지, 어떤 것이 단순 레토릭인지의 기준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릎 쓰고 한 발 더 나아가면 레토릭이야 말로 욕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장황한 혹은 화려한 혹은 현학적인 수사修辭 속에, 말하는 자의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과녁을 맞출수 없는 발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흘러넘치는 레토릭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표적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엄마는 딸의 무안쩍은 고함 소리를 번번이 예상하면서도, 그 장황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멈출 수 없듯이..... 그러므로 결론도 없고 요점도 없는 엄마의 길고 긴 이야기는 차라리 레토릭의 강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레토릭을 듣(읽)는 사람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레토릭에 욕망이 있다면, 레토릭에 ‘요구- 욕구 = 욕망’ 인 잔여가 있다면,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그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젝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도 칸트도 라캉도 프로이트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지젝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문체가 매혹적이었고, 그의 말하는 방식이 독특했고, 그래서 아마도 그것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강한 느낌, 강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젝의 책은 어렵고 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지만, 내게 왜 지젝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는 여전히 그 끌림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전달하는 지식 보다는 그의 레토릭에 대한 끌림이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그 레토릭 속에는 무엇인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있는 듯도 하고, 그 물음 주위를 계속 맴돌게 하는 자력 같은 것이 있는 듯도 하다. 그러니 레토릭이란 현학적인 태도, 젠체하는 우월감이 전부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 같은 것,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 효율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게 하는 동력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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