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2일 쓴 글입니다.

 

   비가 오면 하지원과 현빈의 영혼이 몸을 바꿔치기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나는 네가 되고 싶어.”로 요약되는 연애하는 자들의 욕망을 결정(結晶)한 판타지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첫 목련의 개화나 혜성의 꼬리를 목격하며 “당신이 여기 함께 있다면!”(그 많은 카드에 새겨진 “Wish You were Here”)이라고 안타까워할 일 따위는 없어지겠지. 나는 때때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내릴 때의 기분과 사랑의 감정을 또렷이 구분하는 데에 곤란을 겪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진 대상한테서 미를 찾아내는 것일까.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처럼 아름다움도 복제의 충동을 부른다. 예쁜 소녀를 보면 연필을 들어 그리고 싶고, 카메라로 찍어두고, 글로 옮겨놓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은 그걸 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 시각은 그처럼 촉각으로 전이된다. 현빈과 하지원은 시선으로 더듬던 상대의 피부 안에서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는 일은, 아름다움을 복제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 이르는 극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가깝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쓴 대로, 사랑은 제약 속에 있다. “의례 때문에 억제된 사랑을 찾으려는 건 쓸모없는 일이다. 사랑의 일체는 그 의례들 속에 있다.” 그가 지금 여기 없기에,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글이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를 읽으며 나는 불현듯 영화 <아바타>를 떠올렸다. 그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비족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이크란이 서로를 교감하는 방식이다. 나비족의 긴 머리채와 이크란의 꼬리(같은 것)를 서로 잇대면 그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서로를 직관할 수 있다.

  언어가 없이도 서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언어는 우리를 충분하게 대변해 주지 못한다.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하는 언어는 늘 나를 넘어서 있거나 혹은 뒤쳐져 있어 한 번도 나를 명중하지 못한다. 더구나 생각이란 것 자체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니 나의 생각이 온전한 나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잘 해봐야 왜곡된 그 무엇을 전달할 뿐인 언어라는 굴절판 없이 나와 네가 직관으로 통한다면 세상에는 오해나 거짓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어 없는 세계는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신 철학자도 있단다. 인간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시로 쓰여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도 들은 것 같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언어 없는 인간은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하고 또 말하고 진짜로 다 드러내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우리는 도저히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언어가 우리를 대표하는(represent) 한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랑의 불가해함은 바로 그것,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함에 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지만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를 매혹하는 그 미지의 X에 기인한다고 한다.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결혼한 남녀면 누구나 3개월에서 3년 사이에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 있던 그 미지의 X가 결국 방구나 트림, 똥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연인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승화된다.

 

 

   그러므로 영혼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온전한 그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온전한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 보다 더한 어떤 X’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영혼을 바꾸어 그녀가 된다고 해서, 그가 그녀 안의 X와 온전히 합일할 수 없다. 그 X는 오똑한 그녀의 콧날이나, 귀엽고도 슬픈 동그란 그녀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월세 30의 깨진 문짝과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이 바뀐 후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작 당신이 그가 되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이다.”의 불길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이 그 안의 X를 X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므로, 우리는 판도라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교감, 직관적 지성이 궁극적 행복인 그 곳에는 미지의 X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투명성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다. 나비족과 이크란은 교감할 수 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비족들 역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홈트리를 통한 완벽한 상호교감이지 않은가     ... 다행히도 혹은 나비족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 그 홈트리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판도라는 없다.  인간이 그들을 발견한 한 혹은 이미 말씀이 있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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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17일에 쓴 글입니다.

 

 

나는 내가 잉태되는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터미네이터, 백튜더 퓨처 같은 벌써 오래된 영화들이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형태를 가끔 볼 수 있다.

 

 

  작년에 나는 지인과 함께 방자전을 보았다. 대체로 야한 영화였음에도 팝콘이 떨어지자 지인은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송새벽의 독특한 대사를 키득거리는 맛으로 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대기만 하고 뭐가 어쨌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이 끝나 갈 즈음, 나는 이 영화가 기원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 양반 자제 이몽룡이 기생 딸 성춘향을 오매불망 사랑하여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그 속에서는 뭐든지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글자 그대로의 ‘이야기’- 허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속의 non-fiction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기원 설화 같은 것으로 말이다. 춘향전의 잉태를 지켜보는 방자전이라고나 할까. 방자는 자신의 사랑 혹은 삶에 의미meaning를 주기 위해,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춘향전을 만들어 낸다. 춘향전을 비틀어서 탄생한 것이 방자전이 아니라, 방자전이 낳은 것이 춘향전이다. 춘향전의 방자가 잉태되는 것을 지켜보는 방자전의 방자, 그것이 영화 방자전의 구조이다.

.... 라는 허무맹랑하지만 또 그럴 듯도 한 것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 여왕은 조금 더 분명하게 자신의 잉태를 지켜보는 눈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그림을 보여 주었다. 드라마의 마지막, 막 신라에 도착한 어린 덕만은 슬픈 눈을 한 어떤 여인과 마주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어린 덕만이 거쳐야 할 무수한 고난의 길은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바로 선덕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라는 생각도 했었다.

 

 

  어제 종방한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회 지도층과 소외된 이웃의 불꽃같은 사랑도 아니고, 심지어는 애 셋을 주렁주렁 낳고도 서로 좋아 죽는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저렇게 묘하게 현실화시키는구나....라고. 그 마지막은 그냥 내용 그대로 주원이 라임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준다고 봐도 되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하이틴 로맨스물에 푹 빠진 여고생 라임의 한바탕 꿈이었다는 암시로 봐도 되고,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듯이 작가는 그렇게 선심을 쓰는 듯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파리의 연인’에서 이미 뻥이요!를 써먹은 작가가 그걸 그대로 자기 표절하기는 아무래도 거시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하기도 민망할 터인 참에 꽤나 훌륭한 샛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원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뭔가 우리를 설명해 줄 그럴듯한 서사가 없이는 삶이 너무 어리둥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어디선가 뚝 떨어졌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이건 너야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선고받은 대로 그저 살았을 뿐이야, 씨앗이 자라서 열매가 되듯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아니다. 어쩌면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로봇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무의식이라는 것도. 설령 로봇의 것이라 해도 이 의식은 프로그램과 별개의 것이다. 매트릭스 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버그처럼.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유전자나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뭔가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나의 자리가 있다. 내가 선택했다는 것, 나의 자유 의지였다는 것, 비록 그것이 운명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어느 때에 나는 나의 탄생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나의 운명은 나의 책임이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다. 왜 나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대답은 칸트와 셸링에게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 삶은 실제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고, 선택한 후에 그 선택의 행위 자체가 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아직 나는 접수하지 못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이 과연 누구의 책임일 수 있을까, 나말고?

 

 

  .......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이런 연상을 줄줄이 했다. ‘내 삶의 자유로운 선택’ 은 나의 오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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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5일에 쓴 글입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놈이 진짜 ‘개자식’ 이라는 걸 알았다.

 

  '개자식 이지훈’은 황정음이 핸폰에 저장한 이지훈의 이름이다. 연애초반의 아웅다웅이 끝나고 본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는데도 황정음의 핸폰이 울리면 어김없이 거기엔 ‘개자식 이지훈’이 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조금 지나선 왜 아직 ‘개자식’일까, 단순 애칭일까 슬쩍 궁금하기도 했는데 드라마의 후반부에 가자 왜 그가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인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지훈의 배신이다. 지훈은 뒤늦게 깨달은 세경의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흔들리기만 했을 뿐 끝내 세경의 손을 잡지 못했지만 말이다.(그래서 더 나쁜 놈이기도 하다) 어쨌든 집은 쫄딱 망했고, 아빠는 쫒겨다니고, 엄마는 갈 곳도 없는 정음이 밤낮으로 알바를 뛰어 다니는 그 상황에 애인 지훈의 작태는 ‘개자식’ 의 그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정음이 사실을 숨기고 일방적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말이다. 연인에게 모호한 이유로 이별을 당한 남자가 식음을 전폐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것 같은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에 다른 여자의 사랑에 시선이 머문다는 것 자체가 어쨌든 정음에게는 개자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퍼붓는 비속에 세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아저씨는 개자식이예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멋지고 따뜻한 키다리 아저씨를..

 

  늦은 밤 어두운 부엌에 홀로 서서 자신을 맞는 세경을 지훈은 늘 안쓰러워한다. 세경은 영화 속의 프리티 우먼처럼은 아니지만, 지훈이 사 준 옷과 목도리, 핸폰 그리고 따뜻한 눈길 속에 사랑을 느낀다. 밥을 하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세경은 지훈을 생각하며 붕 뜬 마음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훈의 따뜻함은 거기까지. 세경을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는 동료 의사들에게 지훈이 화를 내며 말한다. “자신 있어? 그 애 우리 집 가정부야. 동생 데리고 어렵게 사는 애야. 불쌍한 애 제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냅둬.” 세경은 현실을 차갑게 깨닫는다. 물론 지훈은 여전히 따뜻하다. 세경의 검정고시를 도와주고, 세경에게 열심히 노력해서 신분 상승을 하도록 격려한다. 그러다가 문득 지훈은 깨닫는다. 세경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자신 역시 세경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지훈은 세경을 붙잡지 못한다. 아이티로 이민을 가겠다는 세경을 붙잡으려던 지훈은 내밀던 손을 멈춘다. 아마도 지훈이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식모 세경을 책임지고 함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경이 자신의 세상으로 편입되지 않는 한 세경과 함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세경은 말한다. 그 신분의 사다리를 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타지 않겠다고. 비록 패배자의 자기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세경은 자신의 의지로 지훈의 세상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자기가 그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사다리의 아래 칸에 남게 될 것이라고. 세경은 사다리로 이루어진 세상 대신 가진 것 없이도 신애가 자신처럼 쪼그라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아이티를 선택한다. 그것이 아이티로 가야할 이유다. 그러나 아이티로 가지 않을 가장 큰 이유인 아저씨 지훈이 여기 남아 있다. 그래서 세경은 말한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마지막에 또박또박 쏟아내며 스스로 조금 자랐다고 웃는 세경은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지훈에게 말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춘다.

 

 

  지훈은 이른바 PC, Political Correctness 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정음의 서운대도 서울대와 차별하지 않고(따라서 정음이 학교를 속인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신애의 도둑질(해리의 인형을 훔쳤다)도 약자에 대한 배려로 감싸주고, 세경을 식모라고 차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계급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검정고시를 위해 공부를 가쳐준다) 그런데 이러한 PC적인 태도에는 완강한 하나의 고집이 있다. 자신의 위치, 자신의 태도가 표준이고 기본이라는 고집이 그것이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비판한 글을 잠깐 인용하면 이렇다.

 

「...정치적 올바름 속에서 타자의 폭력은 그것이 아무리 잔인하고 괘씸한 것이라도 그들을 추방하고 억압했던 우리 자신의 ”기원적 죄“(백인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다. 우리 백인들은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타자는 단지 희생자로서 대응한(reaction)것뿐이다. 우리는 벌 받아 마땅하며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도덕의 세계에(도덕적 책임) 살고 있지만 타자는 사회학적 세계에(사회적 이유) 산다. 물론 이런 자기 책임과 자기 비하의 가면 뒤에 뭐가 있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와 같은 참으로 윤리적인 마조히즘의 입장은 바로 그 형식 안에서 인종주의를 반복한다. 우리 백인은 부정적인 ‘백인의 짐’을 지고 있지만 그런 만큼 역사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타자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반응할 뿐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도덕적 자기 비하의 진정한 메시지는 만약 우리 백인이 민주주의와 문명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악의 모델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C적 태도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전제는 자신이 주체이고 역사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때 타자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re-action일 뿐 action이 될 수 없다. 지훈이 아무리 사려 깊고, 따뜻하고, 관용적이라고 해도 지훈은 세경에게 사다리를 올라와야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지훈은 사다리가 없는 아이티 같은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그 곳은 세경이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넌 무엇을 할 거야?”라고 묻는 지훈은 세경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을 가는 것 외에는 의미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세경은 자기 말대로 그 동안 좀 자랐다. 사다리 없는 세상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지훈은 “개자식 이지훈”이 맞다. 엄친아 같은 PC적 태도의 이면은 바로 “개자식” 인 것이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개자식적인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 지훈의 세계는 끝이 났다는 듯 세경은 시간을 멈추고 지훈은 안경 아래 눈물을 흘린다. 그 정지된 화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지훈의 눈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볼 것이지만 말이다.

  지훈에게 너무 억울한 것일까? 그렇다면 시크릿 가든의 주원으로 돌아가 볼까? 그 전에 다시 인용문을 하나 가져와 보자. 알라딘의 로쟈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니 못생긴 슈렉과 아름다운 공주는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다. 못생긴 슈렉이 아름다운 왕자로 변신한다면 완벽한 조정이 되겠지만 이 영화에서 좀 비틀어서 아름다운 공주를 슈렉에게 어울릴 만한 못생긴 소녀로 만들었다. 덧붙여 슈렉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과 대중문화에 대한 풍자와 여러 가지 뒤집기도 시도한다. 하지만 지젝의 평가는 냉정하다. “우리는 이런 전치와 재기입을 전복이 가능한 것으로 너무 쉽게 칭송하는 대신에 또한 슈렉을 또 하나의 저항 장소로 격상시키는 대신에 이런 모든 전치를 통하여 동일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전치와 전복의 진정한 기능은 정확히 전래의 이야기를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와 관련시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요점은 슈렉을 전복적이면서 저항적인 영화로 칭송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과 뒤집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낡은 이야기를 똑 같이 반복하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구닥다리 이야기를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재조정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새로운 서술로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서사다.」

 

가난한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들기를 거부하는 남자, 자신이 그 여자의 인어 공주가 되겠다는 남자, 그 여자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 ‘왜 지구의 절반은 가난한가?’를 읽는 남자.... 는 여전히 슈렉만큼도 못된다. 여자의 가난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가난한 여자의 머리속으로만 들어갔다가 다시 안전하게 자신의 부유한 세계로 돌아오는 왕자가 아닌가, 주원은. 그러니 그 변형과 뒤집기조차 진정한 전치와 전복이 될 수 없고, 그러니 또한 여전히 낡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단지 조금 색다르고 감미롭게...

 

그러므로 지훈을 끝까지 “개자식 이지훈”으로 만들어 버린 지붕 뚫고 하이킥이야말로 어쩌면 낡은 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은 아닐까? 왕자와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도 아니고, 괴물과 뚱뚱한 소녀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도 아니고, 거품처럼 인어공주만 사라진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개자식 이지훈은 자신이 가르치려던 식모의 손에 이끌려 알 수 없는 어둠의 세계로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혹은 끌려갔습니다로 끝이 난 이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성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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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29일 쓴 글입니다.

 

 

  지난 여름 나는 처음으로 변비가 주는 극심한 고통을 체험했다. 위장약 때문이었다. 평소 변이 묽은 편이라 처음에는 변이 뭉쳐지는 것이 오히려 위가 정상화되는 신호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이 넘어가자 너무 단단하게 뭉쳐진 변이 좁은 문(항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도 커질 대로 커진 덩치를 밀어내지 못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피를 보고도 모자라 관장약을 넣고 참 별별 짓을 다했다. 급기야 병원에 가려했지만 관장을 해주는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짐이 좋지 않으면 더러울 것 같은 음식도 가끔 먹는다. 위가 나빠서 맵고 짠 음식은 물론이고 밀가루 음식도 먹지 않았더니 꼭 약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순한 음식이 장을 강하게 자극하지 못하여 장의 운동능력이 떨어진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요구르트나 채소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자장면 같은 약간 비위생적일 것 같은 음식들이 장을 더 잘 자극한다는 것을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위장관이라는 것도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순한 것, 자극적인 것 등이 적당히 섞여야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강렬한 체험이었다.

 

 

  “빵꾸똥꾸‘ 해리는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난리를 치른다. 엄마 현경이 야채를 먹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해리가 찾는 것은 오로지 갈비다. 해리는 갈비만 먹을 뿐 아니라 그 갈비는 해리만 먹어야 한다. 신애가 한 대라도 손을 대면 내꺼야를 외치며 사납게 빼앗는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해리는 갈비를 포기하지 않는다. 날마다 먹어도 또 먹어야 하고 모든 갈비는 해리의 것이어야만 한다. 갈비뿐만이 아니다. 신애가 조금이라도 먹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어김없이 해리가 빼앗아 버린다. 심지어는 해리가 버린 것조차 신애가 가지려하면 도로 빼앗아 버린다. 아빠가 분홍색 가방을 사오자 해리는 쓰고 있던 노란색 가방을 버리지만, 버린 노란색 가방을 신애가 매고 나오자 기어이 도로 빼앗아 버리고 만다. 그래서 신애는 보석이 쓰던 서류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그것도 모자라 해리는 우유에 금을 그어 두고 자기가 없는 사이 신애가 몰래 먹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는다. 해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빵꾸똥꾸”와 “내꺼야”다. 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빵꾸똥꾸”이고 해리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내꺼야”다.

  해리는 미움 받을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기 보다는 해리를 보며 더 많이 웃는다. 해리역의 진지희가 입이 딱 벌어지게 연기를 잘 하기도 하지만, 해리를 통해 보여 지는 ‘자본의 욕심’에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실소이며, 그 풍자가 주는 웃음이다. 항문이 찢어져도 혼자만 먹으려는 그 욕심, 행여나 모르는 새 누가 먹을까 우유에 금을 그어 놓는 그 그악함. 해리는 원색적으로 나쁜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는 만큼 측은해한다. 혼자 다 가졌지만 늘 혼자인 해리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가족들 중 누구도 해리와 놀아주지 않고 살갑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해리는 종이컵과 빈 박스만으로도 재미있는 신애와 세경을 부러워하고 부러운 만큼 심술을 부린다. 종이컵도 빼앗고 빈 박스도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해리에게는 그 빈 박스로 손님 놀이를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 그래도 해리는 그 박스를 “내꺼야”로 만들고 만다.

 

  해리의 “빵꾸똥꾸”는 징계를 받았다. 할아버지 친구와 엄마 친구에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에게 심히 마음이 상하신 한나라당 어르신들이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미루어 짐작컨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해리를 징계했다. 이후 한 동안 해리는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로 부르지 못했지만 우리의 김PD님께서 그 억압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대형 “빵꾸똥꾸”를 목놓아 외치게 해 주셨다.(지금 해리가 뭐라고 외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 때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한나라당 꼰대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마도 “빵꾸똥꾸”라는 버릇없는 비속어가 아닐 것이다. 해리가 보여주는 자본의 욕망. 먹기만 하고 내놓지는 못하는 무지막지만 자본의 탐욕. 전부 다 “내꺼야”여야 직성이 풀리는 소유욕. 가난한 자의 마지막 속옷까지 벗겨야 속 시원한 자본의 이기심.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변비현상. 해리가 보여주는 분칠하지 않은 자본의 맨얼굴에 심히 상하신 심기가 만만한 “빵꾸똥꾸”를 향해 터진 것일 것이다.

  그래봤자 어짜피 우리나라의 자본은 별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마트 피자를 거쳐 통큰 치킨에 와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분칠을 원하지 않는 자본의 얼굴을 솔직하다고해야할까 뻔뻔하다고 해야할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논쟁은 5000원짜리 치킨의 가능성과 체인점의 폭리 여부로 흘러갔다.

  SSM과 이마트 피자, 통큰 치킨은 신애의 갈비 한 대마져 빼앗아버리는 해리의 탐욕이다.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도 허용하지 않는 해리에게 지친 신애는 급기야 해리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절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던 해리는 신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친구인 적이 없으니 절교할 것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혼자가 된 해리는 자신 보다 덩치가 더 큰 남자 아이들에게 타이거 마스크도 빼앗기고 얻어 터져서 학원에 가는 것도 무서워하게 된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혼자가 되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본 보다 더 무서운 자본은 없다는 것인지 주저 없이 신애의 갈비 한 대를 빼앗고도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문제는 순환이다. 변비가 계속되면, 똥구멍이 궁극적으로 막히면 죽을 수밖에 없다. 동네 슈퍼, 피자가게, 치킨가게가 모두 문 닫고 나면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그 많은 물건, 삼성과 LG의 그 많은 제품들은 누가 사 줄 수 있을까. 88만원 세대가 취직을 못하고 가게도 못하고 계속 88만원 알바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스마트폰을 언제까지 사 줄 수 있을까?

  시크릿가든의 김주원이 운영하는 백화점은 VVIP 라운지를 운영한다. 일 년에 1억(?) 이상 팔아 주는 VVIP 1명이 일 년에 100만원 쇼핑하는 떨거지 100명보다 낫다는 계산이다. 계산상으로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틀어 한번 계산해 보면 어떨까? 그 백화점 하나가 아니라 전체 우리나라 쇼핑 시장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면? 그러면 일 년에 1억 구매자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아니면 100만원 떨거지들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떨거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VVIP들만 구매하는 세상이 온다면 김주원의 백화점은 나날이 번창하고 행복할까? VIP니 VVIP니 하는 발상은 마케팅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피라미드의 아래쪽을 받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떨거지들이다. 이 떨거지들이 모두 구매력을 잃고 사라진다고 해도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그렇게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날 수 있을까? 명퇴해서 마지막으로 한다는 동네 치킨집 가족들이 그 떨거지인데, 동네 슈퍼 아줌마가 그 떨거지인데, 그것들이 다 망해서 떨거지들이 다 죽어버리면 도대체 그 백화점은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잉여가치는 원칙적으로 총자본의 관점에서 자신이 생산한 것을 다시 사는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맑스는 이렇게 조금 더 어렵게 말했다. “ 자본주의를 주인-노예 관계와 구별시켜 주는 점은 노동자가 교환가치의 소비자이자 소유자인 자신과 대면한다는 점, 그리고 화폐 소유자의 형태로, 화폐의 형식 안에서 그는 순환 과정의 분명한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무한히 많은 중심들 중 그 중심은 노동자로서의 특성이 소멸되는 중심이다. ”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가 곧 노동자이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순환되는 돈이 없이는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구매력을 가질 수 없으므로 자본 역시 아무런 잉여 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순환하지 못한다.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창조된다. 그러나 거기서 생산된 가치는 잠재적인 것일 뿐이고 상품이 판매되어서 M-C-M`의 순환이 완결될 때만 가치로 현실화 된다”

  빌 게이츠 같은 거대 자본가들의 기부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올 여름에 읽은 어떤 책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자선 행위-공익을 위한 그들의 엄청난 기부-는 단지 개인의 특이한 성격에서 나온 게 아니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그것은 자본주의적 순환의 논리적 정점이며, 엄격히 경제적 관점에서도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기부행위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치명적인 덫에 빠지지 않고 진정으로 필요한 빈자에게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균형을 재조정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 덧붙이면 그것은 균형을 재확립하고 주권적 소비를 통해 티모스(용기)를 주장하는 전쟁과 같은 또 다른 방식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우리가 처한 슬픈 곤경을 암시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스스로 재생산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재생산 사이클을 지탱하기 위한 경제 외적 자선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골치 아픈(나는 경제는 늘 골치 아프다;;) 이야기까지는 들어가지 않더라도, 일단 빌 게이츠의 자선 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의 논리적, 필연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최종 소비를 통하여 생산품의 가치를 현실화시켜 줄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입에 달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우리에게는 그런 논리를 갖추고 있는 자본가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여덟 살짜리 해리처럼 천진한 맨 얼굴을 하고 있다. 내일 똥구멍이 막히더라도 오늘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치우겠다는 천진한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천진함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나는 아직 별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지만,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도 모른다. 원희룡이나 남경필 보다 때로는 보온 상수가 고마운 것처럼.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 만큼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울 때 새벽이 온다는 말처럼.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해리는 신애와 함께 성장한다. 산골 소녀 신애는 해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질서를 배우며 쪼그라들고 혹은 성장하고, 해리는 신애와 더불어 함께 나누는 기쁨을 배운다. 어쩌면 우리 소박한 서민들의 꿈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 부자들이 조금 더 나누어 주면, 일자리를 조금 더 늘려 주면, 서민의 상권을 보호해 주면, 비정규직 정규직 차별을 없애주면, 재개발로 쫒아내지 않으면.... 거꾸로 서민들이 쟁취해 나갈 수 있다면. 일 자리를 지키고, 상권을 지키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교육의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안에서의 가망 없는 몸짓과 비굴한 콩고물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자기 터전을 뒤엎을 준비가 못된 (뒤엎지 않으려고 하는) 서민들의 꿈은 해리처럼 그렇게 우리의 자본이 성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낱 시트콤의 몽상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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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1일 쓴 글입니다.

 

 

오늘은 호수공원을 산책할까 합니다.

호수공원의 가을은 참 좋습니다.

가을이야 어디라도 안 좋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두어 시간을 물과 나무와 하늘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 작은 도시들마다 모두 있는 것은 아니니 조금은 자랑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싶습니다.

저희 집은 호수공원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아파트 입구를 나와서 똑바로 걸어 내려가면 호수공원 제1 주차장이 나옵니다.

여기는 고양시 노인 종합복지관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길에서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 앞에 네댓 분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할아버지가 혼자 할머니들 틈에 끼어 있기가 부끄러우셨는지 어쨌는지 신호를 무시하고 간간이 차가 지나는 차로로 앞질러 걸어가십니다.

뒤에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이 화를 내십니다.

“저러니까 노인들이 욕을 먹지. 저런 영감 때문에 우리가 다 욕을 먹어!”

“사고라도 나면 어쩌누.”

“글쎄 말이야.”

할머니들이 제 각각 거드십니다.

혀를 끌끌 차는 할머니들의 입성이 은근 품위 있고 조금은 화려해 보이기도 합니다.

고급스런 질감에 살짝살짝 들어간 반짝이 실과 반짝거리는 단추를 보니 백화점의 누구누구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의 옷은 보기보다 굉장히 비쌉니다.

지난 추석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 구경에 나섰는데 매장에 정상가격으로 팔리는 옷들은 죄다 7~80만원이 넘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재고로 팔아 치우는 블라우스 하나를 선물해 드렸습니다.

엄마는 굳이 본인이 사겠다고 하셨지만, 딸이 백수로 놀고 있다고 용돈도 받지 않으시니 7만원하는 재고라도 사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엄마는 저 보다도 옷이 많습니다.

그러고도 늘 틈만 나면 쇼핑을 하러 다니십니다.

물론 엄마도 정상가격에 파는 옷들은 꿈도 못 꾸지만, 친구 분들과 쇼핑을 다녀오시고 나면 가끔씩 부럽기도 한가 봅니다.

누구는 닥스를 누구는 버버리를 샀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리시는데 저는 못 들은 척 합니다.

제 눈에는 노인이 아무리 잘 차려 입어봤자 노인이지 싶은데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엄마도 노인대학이나 모임에 가실 때는 한껏 모양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어울리는 할머니들의 수준에 비하면 턱도 없다고 하십니다.

너무 추레하게 하고 나가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염려하십니다.

사실 저희 엄마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도 영리하신 편이라 혼자서 영어 알파벳도 깨쳐 영어 간판도 더듬거리며 읽습니다.

엄마는 늘 배우기만 좀 더 배웠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좀 많이 배운 할머니들하고 어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시지요.

엄마 친구분들이 엄마를 국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넌지시 자랑도 하십니다.

학력을 속이기라도 한 걸까요? ㅎㅎ

 

일산은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물론 분당도 그렇다고 합니다만 사실, 수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분당이 강남이라면, 일산은 강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강남에 집을 가지기 힘든 것처럼, 부자 노인이 아니면 분당에 집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산에는 진짜 노인들이 많습니다.

일산이 신도시다 보니 토박이 빈민층은 없습니다만, 아파트 평수의 차이만큼이나 여러 계층의 노인들이 살고 계십니다.

진주 목걸이와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다니는 부자 할머니들이 있는가하면,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의 작은 공원에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장기를 두며 소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그 한쪽 옆으로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까서 파는 할머니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이 분들은 대체로 끼리끼리 노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대로 노는 세상이라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냥 그렇게들 사실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늙으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일까요?

어쩌면 하루 종일 도라지를 까고 마늘을 까서 용돈을 버는 할머니들이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고 복지관에 앉아 한나라당 성향의 교수가 주입시키는 좌파 빨갱이 교육을 듣는 할머니들 보다 더 건강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저는 마음이 조금 언짢습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쪼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다듬는 갈라터진 손과 알 굵은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번갈아가며 마주칠 때면 마음이 오소소합니다.

좌판을 벌인 할머니는 욕도 잘하고 소리도 잘 지르십니다.

굵은 반지를 낀 할머니는 생전 들어보지도, 해보지도 못한 욕인지도 모릅니다.

한 줌만 더 달라는 손님들과 매일 승강이를 하는 통에 인상도 조금 찌그러져있습니다.

얼굴 한번 찌푸린 적 없어 보이시는 품위 있는 할머니는 인상도 온화합니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 제 얼굴에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합니다.

쪽파를 파는 할머니는 한평생 무얼 그리 잘못하신 걸까요?

값비싼 반지를 낀 할머니는 얼마나 훌륭하게 사셨길래 저리도 고우신 걸까요?

얼굴이 정말로 그 사람을 말해 줄 수 있는 걸까요?

그건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과 다른 것일까요?

 

사람들은 동안을 참 좋아합니다.

동안이라고 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누가 빈말이라도 새댁이라 불러 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십시오.

하루 종일 햇볕 아래 일을 하는 농부가 동안일 수는 없습니다.

고생모르고 살고, 좋은 화장품을 쓰고, 정기적으로 피부 마사지를 받고, 노화 방지 식품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누구나 동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동안이란 경제적 여유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동안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타고난 행운일 뿐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나이를 먹은 만큼 나이 값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겠지요.

 

 

정작 호수공원에는 아직 발을 디디지도 못했는데 너무 오래 신호등 앞을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호를 몇 번이나 흘러 보냈을까요.... 이제 차로를 지나 호수공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호수공원에 있는 인공 호수는 마치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처럼 생겼습니다.

바가지의 물을 담는 넓은 부분이 커다란 호수라면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은 조그만 호수라고 할 수 있고, 그 둘을 잇는 좁다란 목 부분에 정자가 있는 작은 섬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리로 이어져 있지요.

설명이 복잡하고 요령부득이라고요?

하하... 맞습니다.

사실 하나의 호수가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요, 게다가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정작 호수의 모양은 조롱박 바가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이 반대쪽 끝에도 하나가 더 달려있는 모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일테면 수능을 위해 조카에게 선물하는 기다란 엿을 생각해 보면요, 이걸 예쁜 포장지로 길다랗게 포장해 놓고는 양쪽 끄트머리를 리본으로 묶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리본 밖으로 튀어나온 포장지 가장자리가 양쪽 끝에 앙증맞게 보일 텐데요.

호수 모양이 대충 이것과 비슷합니다.

전체는 삼등분이 되는데, 가운데의 길고 큰 호수와 양쪽 끝의 작은 호수 이렇게 세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호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호수공원을 묘사하려고 하면서 조롱박 바가지를 먼저 떠올린 것은 왜일까요?

그건 제가 딱 조롱박 바가지만큼만 호숫가를 산책하기 때문입니다.

반대편 끝의 작은 호수 부분은 너무 멀어서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답니다.

그쪽의 호수는 사실 제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 눈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면 있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안내하는 호수공원은 사실 호수공원의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여드리는 호수공원도 호수공원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제 아무리 발이 단단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호수공원을 샅샅이 훑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호수공원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제가 보았던 어떤 것을 그는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 불성실한 안내자의 산책길이 영 미덥지가 않으시다면, 고양시 홈페이지에서 살짝 복사한 아래 지도를 잠깐 보시는 것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호수 오른쪽 편으로 녹색으로 칠해진 작은 섬 같은 곳이 보이시나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산책길은 바로 그 섬의 오른쪽으로 이어진 작은 호수 길 입니다.

여기는 봄과 여름에는 그다지 볼품이 없는데, 딱 지금 이 가을에 가장 걷기 좋은 길입니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이어진 풀밭에는 버드나무가 기다란 잎을 늘어뜨리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버드나무들은 하나같이 호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올리려는 걸까요? 아니면 햇볕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일까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네댓 시 무렵이면 호수는 부드러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넓은 돗자리를 깐 연인들이 드러누워서 책을 보거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그 자리로 제가 걸어 들어간다면 그 그림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이제 작은 섬을 통과해 큰 호숫가로 난 가로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정자 옆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호수공원 관리사무소 조끼를 입은 젊은 청년이 자전거 안장에 버티고 앉아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뻥튀기 한 보따리를 손에 쥔 초로의 남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며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네요.

“아저씨, 빨리 나가세요! 안 나가려면 그 뻥튀기 저 주시고요”

“아, 글쎄...”

“왜 말을 안 들으세요! 이건 제 일이예요. 아저씨 때문에 제가 왜 욕을 먹어야 해요! 나가시라니까요”

“뭐....”

 

호수공원은 제가 보기에도 참 관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굴러다니는 패트 병도 없고 그 흔한 과자 봉지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큰 행사가 있다거나 이런 때는 예외로 하고 평소의 산책길에 말입니다.

현장 학습 나온 유치원생, 멀리서 구경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유모차 엄마들, 산책 나온 강아지들까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공원인데도 길바닥에 뒹구는 쓰레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잡상인도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으레 모여드는 김밥장사도 떡장사도 솜사탕장사도 뻥튀기장사도 아이스크림장사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자판기 안에 깔끔이 정돈되어 있습니다.

저 운수 나쁜 뻥튀기 아저씨는 호수공원 관리사무소의 이 빈틈없는 일 처리 능력을 몰랐던 것일까요.

저는 멀찌감치 서서 관리사무소 청년과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일방적인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마치 비밀을 보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호수공원이 이런 깨끗함을 유지해 온 비밀을 말입니다.

일산구의 주민들은 쓰레기가 없는 호수공원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더군요.

저 뻥튀기 아저씨는 이 호수공원에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니 말입니다.

저 역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꼭 깨끗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저는 어떤 찜찜함 속에서 그 자리를 비켜났습니다.

 

 

네, 저는 그냥 지나쳐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로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은행나무들이 줄 지어 있습니다.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은 아니지만 일산 신도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한 이십여 년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은 나무들입니다.

오늘은 벌써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많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아직은 짙푸른 나무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은행잎들은 노랗게 물들자 말자 떨어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떨어진 은행잎들은 발 아래로 밟히고, 무성했던 나무 가지는 잎을 잃으며 조금씩 여윈 팔을 드러냅니다.

마치 제 머리카락 같군요.

아침마다 저는 조금 우울합니다.

머리를 감을 때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시커멓게 뒤엉켜 있습니다.

이렇게 빠지다가는 곧 대머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엄마를 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여자라서 다행히 완전 대머리는 아니지만 앞머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 유전자를 타고 난 저 역시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 보다 먼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언니는 두피 마사지를 받고 여러 종류의 헤어 케어 제품을 씁니다만, 저는 그 보다는 간편한 방법을 쓰려고 합니다.

원래 제가 좀 게으릅니다.

그냥 웬만큼 빠지고 나면 가발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별로 좋지 않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척추분리증도 있고, 치아도 나쁘고, 위장도 약하고, 자궁도 좋지 않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부터 시달리고 있는 만성 두통도 아마 유전적 소인이 클 것입니다.

어떤 날은 이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우울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걸요.

이럴 땐 인간은 과연 평등한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평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요?

 

어쨌거나 평등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참 요즘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저는 정말이지 우리나라가 교육에 있어서만은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시민운동이나 뭐 그런 것들을 하게 된다면 저는 무엇보다 평등한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대학까지 무상교육만 된다고 해도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occupy' 사건 이후 세계의 금융자본주의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될지, 어떤 대안 사회를 만들어 내게 될지, 이 엄중하고 역사적인 시기에 너무 소박해서 반동적인 소망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심정적으로 그렇습니다.

졸업도 못한 대학생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일 년을 휴학하고 알바를 해야 일 년 등록금을 벌 수 있는 이 현실은 진정으로 참혹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대학생들이 그 어처구니없는 거마대의 다단계 조직원이 될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저희 때만 해도, 과외해서 등록금에 하숙비와 용돈까지 벌어가며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뭐 그다지 공부를 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여하튼 졸업하고 취직하고 먹고 살만했습니다.

지금은 사회 체계 자체가 그런 것들마저 원천 봉쇄를 하고 있지만, 그런 사회를 눈 뜨고 용인한 저희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많은 세대입니다.

 

 

저기 강아지 몇 마리가 보입니다.

단체로 산책을 나왔나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만한 크기의 강아지들이 앙증맞은 옷을 입고 여기 저기 킁킁거립니다.

저렇게 조그마한 강아지들은 사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개라고 불러야 할 만큼 나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덩치 하는 복실이나 누렁이와 함께 자라나서 그런지 한 주먹도 안 되보이는 조그만 강아지를 어른 개라고 부르기는 차마 이상합니다.

호수공원에는 심심찮게 덩치 큰 개들도 보입니다.

작은 강아지 열 댓 마리 보다 더 덩치가 커 보이는 듬직하고 잘생긴 놈이 나타나면 산책하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놈에게 쏠립니다.

옛날 마당에서 기르던 똥개나 복실이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혈통이 있어 뵈는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거추장스런 치장도 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그대로 아름다운 털과 장대한 기골을 뽐냅니다.

작은 강아지들이 맞춰 입은 형형색색의 때때옷은 그것들에 비하면 누더기처럼 보입니다.

단연 호수공원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아무나 기를 수 있는 개는 아닐 것입니다.

호수공원에는 사람들만큼이나 개들에게도 빈부의 격차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유모차에도 있습니다.

한 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들은 일단 차체 자체가 매우 높습니다.

보통의 유모차에 비해 수십 센티는 높아 보이는 곳에 덩그렇게 앉아 있는 아기들은 마치 세상을 굽어보는 듯합니다.

주로 바퀴는 세 개이고, 네 개일 경우도 앞바퀴 보다 뒷바퀴가 훨씬 튼튼하고 커 보입니다.

낮은 유모차들 사이에 키 큰 유모차는 마치 벤츠나 BMW 같은 위용을 자랑합니다.

유모차만큼이나 키가 크고 늘씬한 젊은 엄마는 까만 썬글라스에 눈을 가린 채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높은 유모차의 아이가 자라나면 멋진 시베리안 허스키를 기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벤츠를 몰겠군요, 세월이 흘러 곱게 늙어 갈 때쯤이면 우아한 목걸이에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노인 대학을 드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편의점 알바도, 거마대 다단계도 해 본적이 없겠지요.

제가 너무 삐딱한가요?

가을의 낭만이 넘쳐흐르는 이 아름다운 공원에서 빈부 격차 같은 우중충한 생각만 하고 있다고요?

 

 

아, 이런 저런 생각을 떨치고 이제 메타세콰이어 길을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전에 한석규가 “핸드폰은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든가 하면서 이동통신 광고를 찍던 그 메타세콰이어 길 만큼 울울창창 멋지진 않습니다만, 나름대로 풍취가 있습니다.

특히 이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호수공원은 호수를 끼고 맨 안쪽의 길과 중간 길 그리고 맨 바깥쪽의 길이 겹겹이 나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는 길이 두 겹으로 끊기기도 하지만 여하튼 같은 방향으로 돌아도 이 길, 저 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 중 메타세콰이어 길은 맨 바깥에 있으면서 바닥도 흙길 그대로여서 삼림욕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 요즘 SBS 수목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십니까?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재밌습니다.

송중기가 청년 세종을 멋지게 해냈지만, 연기하면 또 뒤지지 않는 한석규가 훌륭하게 세종역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저건 뭐지요?

메타세콰이어 길로 접어들기 전, 가로등에 달려 있는 저 그림을 한 번 보시지요.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지나갑니다.

 

 

 

가로등을 따라 이렇게 그림들이 주~욱 걸려 있습니다.

주로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아니 이게 왠일입니까?

‘나는 꼬추다’!!

왼쪽 그림은 방향이 거꾸로 인데 ‘나는 꼬치다’ 이네요.

'나는 XX다' 유형의 진술을 보면 저는 먼저 ‘나는 꼼수다’가 생각납니다.

‘나는 꼼수다’와 ‘나는 가수다’는 누가 원조이고 누가 패러디일까요?

역시 패러디하면 딴지 김어준 선생이겠죠.

‘나는 가수다’는 3월 초에, ‘나는 가수다’는 4월 말에 시작했습니다.

저도 ‘나는 가수다’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꼬추다’에는 ‘나는 꼼수다’의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단지 ‘ㄲ’ 돌림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는 꼬추다’가 불러 오는 웃음은 다분히 그것의 외설스러움에 있겠지요.

‘나는 꼼수다’에도 어떤 외설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감히 가카를 상대로 온갖 치부를 들쳐 내며 낄낄거리는 악동들의 그 외설스러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나는 남근이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남근은 지배의 상징이지만, 사실 그 남근은 거세당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꼬추도 구멍이 뚫려 있군요.

그 구멍을 누군가의 얼굴이 가리고 있습니다.

마치 완전한 꼬추인양 말입니다.

저게 우리의 가카일까요?

가카의 나라는 이미 가카의 그 야비한 얼굴로는 다 메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남근, 거세, 빗금친 대타자....이런 것들은 까다로운 개념인데 저는 어느 책에서 읽은 그런 개념들을 그 개념의 정의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연상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면서 금방 들통 날 얄팍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 귀여워 보이기에는 제가 너무 늙어 버린 것이 맞겠지만, 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그냥 즈려밟고 가시오길 바라옵니다.

 

 

이제 다리가 아픕니다.

배도 슬슬 고프네요.

오늘은 저기 굴다리를 지나 애수교를 돌아오기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겠습니다.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작은 호숫가 풍경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길이라도 걷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길도 공원 안쪽으로 들어 올 때 보다는 나갈 때의 경치가 더 운치 있습니다.

특히 오후 서너 시 경이라면 말입니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는 아름답지만 왠지 헛헛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느낌이 저는 언제나 좋습니다.

 

저쪽 잔디밭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이컵에 차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거나 따뜻함이 그리웠던 사람들이 종이컵을 하나씩 건네받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세요?”

“성당 다녀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아하, 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중이군요.

가만, 그런데 왜 단속하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뻥튀기는 팔면 안 되고, 차는 팔아도 된다는 걸까요?

제 눈에는 공짜로 나눠주는 저 종이컵이 전혀 공짜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뻥튀기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가의 상품인걸요.

교회를 사고판다는 것, 교인의 수에 따라 권리금이 책정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닙니다.

저분들이 하고 있는 것이 선교인지, 장사인지 저는 정말 의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북한의 삼대 세습이 어이없는 봉건적 작태라면, 대를 이어 교회를 물려주는 세습 목사들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훌륭한 소명의식인가요?

대를 물리는 장인 정신인가요?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이 혼란하고 어려운 세상에 몸소 실천해 보여줄 때, 우리는 기꺼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 다시 제1 주차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늘의 산책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호수공원 근처의 아람누리 도서관도 보여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합니다.

아마 어제 늦은 밤까지 이탈리아의 어느 기호학자의 책을 읽느라고 잠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저녁에는 A4 10매를 채워야 하는 과제물도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안내가 별로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고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다시 정신 맑은 날이 오면 정말 멋지게 호수공원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는 호수공원이 가을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단풍은 짙어가겠지만, 그 만큼 쌓이는 낙엽도 늘어 가고, 더 깊고 더 쓸쓸한 호수공원의 가을이 되겠지요.

참 언제라도 직접 호수공원을 거닐어 보고 싶으시다면 살짝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길동무도 되어 드리고, 차도 한 잔 대접해 드리지요.

산적 같은 아저씨가 직접 볶아 만든 맛있는 커피가 있는 따뜻한 찻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커피가 싫으시다면 아저씨가 직접 만든 생강차도 좋고 레몬차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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