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5일 쓴 글입니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삽시간에 야구 열풍에 휩싸였던 것이. 나는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면서도 늘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곤 했는데, 삼성 라이온스의 승률은 물론 장효조와 이만수 등의 타율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구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기록들 뿐 아니라 선수들의 이름도 잊어갔다. 내가 열광했던 것은 사실 야구 그 자체는 아니었다.  

  열심히 TV화면을 보면서도 여전히 혼자서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지 못했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TV 앞에 나를 붙들어 매었던 것은 야구 그 자체의 묘미도, 선수들의 순수한 기량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승부에 대한 열광과 환희였다. 대구 삼성과 광주 해태의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버스가 불타오르고 선수들은 운동장을 도망쳐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생각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해태를 미워했고 무조건 해태는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경기에서도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왜 하필 해태인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이유 따위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뉴튼 이전에,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단지 아이스 쇼였다면 나는 진정 그 점프에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또 그렇게 안도하며,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트리플 악셀의 아사다 마오가 자빠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즐기면서, 그렇게 심술쟁이가 되어, 스무살 앳된 얼굴을 적시는 진짜 눈물을 가증스럽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SBS를 켜기만하면 넘쳐 나는 광고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따위 광고들에 넌더리를 내다가도, 막상 이승훈이 모태범이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냈다는 해설자의 비명 소리에 덩달아 으악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있었던가? 나는 여전히 소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알지 못하는 자’, 혹은 ‘나는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믿는자)’ 란 말인가?

 

  벤쿠버 올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 학생 한 명이 러시아에서 스킨해드 족의 테러에 희생당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러시아의 인종주의에 관한 심층 보도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도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 우려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했다. 신나찌란 말이 심심찮게 나도는 것도 벌써 오래 전부터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구동구권의 인종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이 책은 1990년대에 씌어 진 것이지만, 지금도 동구권의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적 복수주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이 지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종족 긴장의 원인에 대해 좌파가 제안한 표준적 분석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테제는 종족 긴장이 집권당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할 수단으로서 집권당 관료에 의해 선동되고 조종되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적 강박, 위대한 루마니아의 꿈, 헝가리 및 여타 소수민족의 강압적 흡수는 차우세스쿠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하는 항상적 긴장을 만들어냈다.....그렇지만 이러한 가설은 최근의 사건을 통해 매우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논박되었다. 일단 공산주의 관료지배가 무너지고 나자, 종족 긴장은 한층 더 강력하게 출현했다. 왜 종족적 원인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것을 낳은 권력 구조가 붕괴한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

 

  보통 간간이 들려오는 동구권의 종족 분쟁에 대한 느낌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종족 따위에나 매달려 있으니 자기들끼리 총질이나 하고 있지. 공산당 독재가 무너졌으면 열심히 일해서 경제를 살려야지 츳츳츳, 뭐 그런 것. 그런데 저자의 분석은 완전히 거꾸로다. 인종주의 때문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즉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변화 그 자체가 인종주의를 한층 더 강화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불균형을 낳는다.” 지극히 심란하고 피곤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사실이다. 취업을 포기한 청년 인구가 사십만, 구조 조정, 중산층의 몰락, 기타 등등은 우습게도 1인당 GNP라거나 세계 몇 번째 경제 대국이라거나 하는 소위 경제 발전 지표와 비례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은 내속적인 구조적 불균형, 그 최심중의 적대적 성격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문장이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적은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인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파시즘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파시스트의 꿈은 단순히 “과잉”없는, 구조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적대가 없는 자본주의를 갖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에서 한편으로 사회적 직조의 안정과 균형을 보증하는, 즉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에서 다시금 우리를 구해주는 주인-지도자의 형상이 복귀하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이 불균형에 대한 이유가 “과도한” 축적과 탐욕으로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귀속되는 것이다.... 주인의 기능은 과잉의 원인을 분명하게 한정된 사회적 작인에 위치시킴으로써 과잉을 통제하는 것이다..... 주인의 형상과 더불어 사회적 구조에 내속적인 적대는 권력의 관계로, 우리와 그들, 적대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저들 사이의 지배 투쟁으로 변형된다.」

 

  초기 자본주의의 참상은 올리버 트위스트라든가 기타 소설이나 역사서, 채플린의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히틀러가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속성이라는 것을 알았던 몰랐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터질 것 같은 불만을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빈곤은, 자본주의적 결실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유대인’, 우리의 것을 도둑질해 간 ‘유대인’ 이라는 외적 대상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다. 내적 적대는 봉합되었고, 외부의 적은 그럴듯하다.

  “집 안 싸움을 하다가도 도둑이 들어오면 합심해서 도둑을 잡아야한다”는 의 말은, 집 안 싸움은 집 밖에 도둑을 만듦으로써 봉합되어야 한다는 주인의 주문에 다름 아니다. 현명하게도 혹은 고지식하게도 그녀는 “그런데 집 안 사람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도둑으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진짜 도둑은 원래 집 안에 있었다는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도요타 사태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는 미국 경제가 공공연하게 쇠퇴하는 단계에서 징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90년대 초반에 벌써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점차로 유대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즐길 줄을 모른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미국의 미디어를 보라. 일본이 점점 더 미국보다 경제적 우월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너무 많은 부를 축적한다는 다소 불가사의 한 사실에 놓여진다...」

  도요타 사태에 열광(?)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 미디어의 태도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기지 대출 사태로 격발된 모든 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갑자기, 광적으로 도요타를 상대로 분출하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 자신은 도요타 사태의 이 과잉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인종적 뿌리에 관한 이야기는 애초부터 “기원들의 신화”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현재의 적대를 흐려놓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창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화석이 아니라면 “민족유산”이란 무엇이겠는가? .... 민족주의로의 이와 같은 반전의 충격적인 신속함 때문에 외상적 방향 상실을 겪으면서 놀라는 대신... 이 외상적 방향상실을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의 열쇠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리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초래한 외상적 방향상실로부터, 발밑에서 근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붕괴는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혼란과 상실을 겪게 되는지는 솔직히 미루어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사회들의 자본주의 적응기는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난폭하게 날뛰는 신흥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그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를 드러내는 부정적 증표인 동시에,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가치를 반증하는 긍정적 증표이기도 하다. 여전히 레닌주의자인 저자의 지향점이 무엇인건 간에,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차적 관점을 제공한다.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어떤 특이한 지점, 어떤 결정적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를 은폐하는 장막이지만,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해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시차적 관점인 것 같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국가대표>가 벤쿠버의 성화와 함께 OCN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진 않지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무난한 영화인 것 같다. 콧물 찍, 눈물 찍은 촌스럽다는 통념이 오래되어서인지 몰라도 국가대표라는 제목 자체의 중압감에 비해서는 다행히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딱 그만큼이 좋은 성동일의 연기 덕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태극마크와 애국심의 상관관계를 애초에 단절하고 들어가는 전제에 힘입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태릉선수촌의 그 누구도 애국심 따위를 고된 훈련의 동력으로 삼을 리 없는 시대에 그 정도야 기본이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 네 명(혹은 다섯)의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조직위(?)까지도 철저히 개인적이고 정념적인 이유로 국가대표를 꾸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던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던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 여기서는 오히려 국가에 의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국가에 대한 너의 애국심과 능력을 증명해 보라! ...라는 식의 무엇이 있다.

  하정우는 엄마에 의해 버려진 해외 입양 고아이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자식을 버린 것은 엄마이다. 귀책 사유는 엄마에게 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하정우는 자신을 버린 국가, 혹은 엄마(보통은 아버지가 국가를 은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진정한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코치 성동일은 대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정우에게 너를 버린 국가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국가에게 너의 능력을 먼저 인정받아야 비로소 국가를 혹은 엄마를 되찾을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과 같다. 매주 되풀이 되는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는 여전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물론 목적을 위한 수단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단지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의 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국 구구한 개인적 사연으로 얽힌 선수들과 코치 사이에 화합과 형제애(혹은 민족애?)가 싹트는 과정을 보며주며, 국가대표 혹은 태극마크 안에서 하나됨을 대단원의 막으로 그리고 있다. 어쩌면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핏줄에 대한 강박 관념 자체가 하나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화 <국가대표>는 첫 인상과는 달리, 그 제목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애초에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예찬하는 참으로 솔직한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해 그 흥행 성공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에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은 무엇일까? 대답을 위해 다시 김연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김연아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는 언론의 집요한 물음(오히려 추궁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에도 3월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중함일 수도 있지만 거부의 느낌이 더 강한 침묵이다. 나는 그녀에게 동의하지만 어쩌면 동의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열되어 있다. 자연인 김연아와 피겨퀸 혹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나는 김연아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만 스케이트를 신는 진짜 전설이 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트리플 악셀을 훌륭하게 구사하여 4년 뒤에도 아사다 마오를 납작하게 이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김연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해야 옳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끼어든다. 김연아는 이미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 막대한 광고 수입을 흔쾌히 동의한 까닭은 김연아가 국가대표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분열되어 있다. 국가대표, 국가대표로 대표되는 국가주의를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도, 혹은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그 국가주의에 열광하고 있다. 그 민족적 자부심에 은근히 뿌듯해 하고 있음을 들키고 만다. 김연아 효과가 몇 조인가를 몇 일째 되풀이 보도하는 뉴스는 물론 한심하다. 벤쿠버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거나, 우리 민족이 더 잘 살 수 있다거나,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물론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벤쿠버의 성공을 마치 정부의 성공인양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것만 같은 정부를 생각하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같기도 하다. 나는 믿지 않지만,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스포츠를 이용한 우민화 정책이 먹혀들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국가 대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니 어쩌면 올림픽 자체가 거대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적대를 은폐하는 전 지구적 우민화 정책일지도 모른다. 100일 뒤에 빨간 셔츠를 입고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 외칠 월드컵 응원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나는 안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나는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민족주의에는 그 모든 기만에 이용당하고도 남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주는 어떤 잔여가 있는 것일까?

 

 

 

** 인용문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 따온 것이다. 벤쿠버 올림픽과 영화 <국가 대표>와 러시아 등 유럽의 신흥 인종주의와 이 독서가 함께 맞물려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 왔지만, 지젝의 책이 여전히 어렵게 읽히는 것만큼이나 이 글은 산만하고 어쩌면 오독에 기인한 틀린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무엇보다 국경별로 뚜렷한 빈부 격차와 국가에 의해 존재가 보장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 산 죽음 (호모 사케르)으로 취급받는 이 냉혹한 세계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등에 대한 일관된 의견을 가질 수 없음이 혼란스럽다. 그것은 물론 S1과 대상a, $의 개념에 대한 여전한 혼돈의 탓도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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