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고르의 중매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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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앉으니 생각이 막힌다. 그래도 뭔가는 남기고 싶고, 처음 해보는 100자평을 눌렀다. 남미의 마르케스나 이사벨 아옌데 혹은 이탈노 칼비노의 `마술적(?)` 기법이 떠오르는데, 그렇게 본격적은 아니고 드레싱처럼 살짝 뿌려놓은 것 같다. 유쾌하고 따뜻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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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 스완 댁 쪽으로, 특별한정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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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스완댁 쪽으로

 

 

마르셀 프루스트

1913~1927 (전 7권)

 

펭귄 클래식 2013

옮긴이 이 형식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약 15년간에 걸쳐, 총 7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참고로 1권이 700쪽이 넘습니다. 깁스를 한다거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거나 심심해서 죽어버릴 지경이 된다면, 우리는 과연 이 책을 읽어보게 될까요? SNS라는 강력한 매체가 우리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비유는 그 자체가 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아무튼 그만큼 읽기 힘든 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책이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소설’ 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인용되며 우리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방송되었던 <내이름은 김삼순>에도 나왔었죠. 물론 삼순이 역시 프랑스 과자의 대명사라 할 마들렌이 나온다는 말에 파티시에로서 당당히 책을 펴들었다가 곧바로 던져버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는 사실 책 이름만 잠깐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관점에 따라 그 드라마의 주제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 마들렌과 콩브레가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들렌’ 하면 이 책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프랑스에서도 그런다니 다만 우리의 논술지향 독서 교육이 가진 문제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엄두는 못 낸다고 해도, 적어도 마들렌과 꽁브레가 나오는 대목만은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독서회의 이번 주 선정 책인,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을 발제하면서 드디어 미루어만 두었던 것을 하게 되네요. 다행히 그 부분은 1권 앞쪽에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게까지 지루하거나 읽기 힘들지는 않습니다. 취향에 맞으면 한번 도전해 볼만합니다. 우리 회원들도 마들렌과 꽁브레과 나오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옮겨 적습니다.

 

 

1부 꽁브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밤중에 깨어나 꽁브레를 회상할 때면, 나는 그것 중, 희미한 암흑 한가운데에서 오려낸 듯 두드러진 일종의 반짝이는 조각 하나밖에 보지 못하였고, 그 조각은, 다른 나머지 부분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건물 벽에 오색 꽃불의 섬광이나 전기 조명이 구획지어 놓은 조각들과 유사했다. 그 조각의 상당히 넓은 하단부에는, 작은 거실, 식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슬픔의 장본인이 되곤 하던 스완씨가 도착하던 오솔길의 초입, 올라가기에 그토록 가혹했고 그 자체로 불규칙한 피라미드의 몹시 좁은 동체를 구성하던 층계의 첫 계단을 향하여 내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던 현관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각의 상단부에는, 엄마가 들어오시던, 유리 끼운 문이 있는 작은 복도와 나의 침실이 보였다. 한마디로, 항상 같은 시각에만 보이고, 그 주위에 있을 수 있었을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었으며, 스스로 분리되어 어둠 위에 홀로 떠 있는, 내가 잠자리에 드는 비극에만 필요한 최소한의 치장물이었다. 그리하여 꽁브레가 마치 가느다란 층계로 이어진 두 층으로 구성되었고, 그곳에는 오직 저녁 일곱 시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꽁브레가 그것 이외에도 다른 것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다른 시각에도 존재하였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내가 꽁브레에 관해 뇌리에 떠올렸을 것은 오직 의식적 기억, 즉 지성의 기억에 의해 제공되었을 것인데, 의식적 기억이 과거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은 기실 과거의 그 무엇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지라, 나는 그 나머지 꽁브레에 대해 생각할 욕구를 영영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나에게는 죽은 것들이었다.

영영 죽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 p83~4 」

 

이 책의 화자는 불면증이 있습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면 자주 어린 시절에 살았던 꽁브레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화자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꽁브레는 늘 딱 하나뿐입니다. 혼자 보내야만 하는 침실에서 불안에 떨며 밤을 기다리는데, 단 하나의 위안이 엄마가 해주는 굿나잇 키스입니다. 화자는 오후부터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거나 만찬이 있는 날이면 엄마가 오시지를 않고 화자는 절망적인 밤을 보냅니다. 하루는 불안을 견디다 못한 화자가 밤늦게 손님을 배웅하고 자러 가는 엄마의 앞을 막아서서 굿나잇 키스를 요구합니다. 화자의 심신을 굳건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엄격함을 고집하던 엄마에게는 비난을 살 일이며, 굿나잇 키스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날 일이지요.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자의 곁에서 자라고 하십니다. 아이가 몹시 슬퍼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요. 엄마는 화자의 옆에서 책을 읽어주시며 함께 밤을 보냅니다. 그런데 화자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내가 당연히 행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고통스러웠을 최초의 양보를 엄마가 이제 막 나에게 하신 것 같았고, 나를 위하여 품으셨던 이상 앞에서 엄마가 보이신 최초의 체념 같았으며, 그리하여, 그토록 꿋꿋하신 엄마가 당신께서 꺾이셨음을 처음으로 시인하신 것처럼 여겨졌다.” “나의 유년시절에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던 그 느닷없는 부드러움보다는 엄마의 노기가 나에게는 덜 슬펐을 것이다. 또한 그 순간 내가 불경스럽고 은밀한 손으로 엄마의 영혼에 최초의 주름을 그었고 그 속에 최초의 백발 한 가닥을 솟게 한 것 같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품었던 기대를 체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으로 이 기억은 화자에게 항상 따라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화자가 여태껏 꽁브레에 대해 가진 기억의 모든 것이었지요. 물론 다른 기억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의식적으로 기억해 내어야만 하는 것들이고, 그렇게 떠올려진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잠자리에 드는 비극’ 외에는 정말 꽁브레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불면의 밤에 늘 떠오르는 꽁브레의 추억과도 다르고, 아무 의미 없이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기억되는 과거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꽁브레가 출현합니다. 마들렌과자와 함께!

 

 

「꽁브레 중 내 잠자리의 비극과 그 무대가 아니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어느 겨울날, 내가 집에서 돌아오자,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그것이 내 습관이 아니건만, 차를 조금 들어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처음 싫다고 하였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가리비 조개껍질처럼 가는 홈들이 패인 판에 찍어낸 듯한, 작은 마들렌느라고들 부르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게 하셨다. 그리고 이내, 흘려보낸 음울한 하루와 서글픈 다음날에 짓눌린 채,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늘렌느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애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아니, 그 진수가 내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나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보잘것없고 우발적 산물이며 필멸의 존재라고 느끼기를 멈추었다. 그 강력한 희열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희열이 차와 과자의 맛에 연관되어 있으되 그것을 까마득히 능가하며, 그것들과 같은 본질일 수 없음을 막연히 감지하였다. 그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어디에서 포착하여 인지한단 말인가? p85~6」

 

 

 

마들렌도 아니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 화자는 경이로운 희열을 느낍니다. 그런데 충만으로 가득한 그 경이로운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화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차를 두 모금, 세 모금 째 마셔 보지만 알 수 없습니다. 분명 마들렌 부스러기 차와 연관이 있기는 한데, 그 희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언가 잡힐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달아나 버립니다. 화자는 자신의 오성에게 좀 더 노력하여 도망치는 느낌을 붙잡아 오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 따위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의 근심거리와 내일의 욕망에 대해서나 생각하면서 차를 마시라는 비겁한 목소리를 쫒아내며, 오성을 닦달합니다.

 

그러다 문득 추억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맛은, 꽁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숙모님의 침실로 아침 문안을 가면, 숙모님께서 홍차나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곤 하던 작은 마들렌느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8」

 

그리고, 숙모님께서 보리수 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그 추억이 나에게 왜 그토록 큰 행복감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또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은 훨씬 훗날로 미루었지만),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때까지 유일하게 내가 다시 보곤 하던 그 오려낸 듯 한 조각이다.) 그리고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 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도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또한 일본인들이, 서로 분별되지 않는 미세한 종이 부스러기들을 물 가득 채운 도자기 그릇에 담근 다음, 그것들이 즉시 기지개 켜듯 늘어나고, 형체를 이루고, 색채를 띠고, 분화되어, 꽃들과 건물들, 견실하여 식별할 수 있는 인물들로 변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그 놀이에서처럼,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작은 집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p89」

 

화자는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마구 닦달한 끝에 드디어, 엄마가 주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서 꽁브레에 살던 시절 레오니 숙모님이 일요일 아침마다 주던 마들렌과자의 맛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리고 숙모님의 마들렌 과자 맛으로부터 꽁브레 전체가 견고하게 살아납니다. 마치 일본인들의 종이놀이처럼, 엄마가 주신 찻잔 속에서 꽁브레가 활짝 피어납니다. 이렇게 되찾는 시절은 자발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끌어낸 비자발적인 기억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오성을 강제하였던 것일까요?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어떻게 화자의 오성을 닦달하여 꽁브레 전체를 기억에서 살려내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왜 화자는 차 한 모금에서 그토록 강력한 희열을 느꼈던 걸까요? 화자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을 훗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훗날의 이야기는 마지막권인 7권 <되찾은 시절>에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7권은 구경조차 못한 저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제목으로 보아,『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7권까지의 긴 여정 끝에, 화자는 마침내 그 시절을 되찾고 그 원인을 밝혀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아마도 이 고난에 찬 독서의 행군을 시작하여야겠지요. 물론 편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듣는 ‘유목, 탈주, 차이와 반복’ 따위의 개념들이 들뢰즈의 것입니다. 제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읽은 때가,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방송가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여하튼 그 때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딱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삼식이가 옛 사랑 희진을 버리고 삼순이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이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거지요. 그 때 드라마 감상문도 썼는데, 이제는 사라진 사이트여서 그 글이 공중으로 흩어졌는지 넷 상을 유령처럼 떠도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도 제가 뭐라고 아는 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읽으면 부끄럽겠지만 말입니다.

 

 

 

 

「본질 자체는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로도 환원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은 애인으로도,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덧없는 상태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07> 」

 

이 문장에 꽂혔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콩깍지가 씌었다느니, 벗겨졌다느니 하는 말들로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대상인 애인으로도, 우리 자신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호’라는 말이 나오지요 :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 기호란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기호’라고 합니다. 특히 7권에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은 없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 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23> 」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화자에게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했던 것입니다. 희진이나 삼순 역시 기호를 방출한 것이지요, 삼식을 매혹시킨 기호를 말입니다. 프루스트의 책은 수많은 대상들이 방출하는 여러 유형의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과정이지요. 이 배움을 통해 프루스트는 진리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본질적인 것은 기억과 시간이 아니라 기호와 진실이라고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화자에게 소중한 인물들은 해독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물들에게서 더 이상 기호가 방출되지 않을 때, 그들은 잊히고 죽은 사람이 됩니다. 돌아온 희진에게 더 이상 삼식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렇습니다. 삼식이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대상은 이제 삼순입니다. 희진에게는 해독해야 할 기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과거의 희진와 돌아온 희진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희진은 삼식에게 강렬한 희열을 주는 기호를 방출했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는 아무것도 방출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 특유의 통찰이 있다. 이 통찰은 우선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가공되지 않은 물질도 아니고 자발적인 정신도 아니다. 물리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철학은 참을 원하는 정신의 소산인 직접적 언표, 명백한 의미를 전제한다. 물리학은 실재의 제약들에 순응하는, 애매성이 없는 객관적 물질을 전제한다. 사실들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기호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진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해석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호란 항상 불분명하고 함축적이며 내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어떤 꽃의 냄새와 어떤 살롱의 광경을 연결시키는 것, 마들렌의 맛과 사랑의 감정을 연결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기호이며, 배움이란 이 기호를 배우는 것이다. 기호로서의 꽃의 향기는 물질의 법칙들과 정신의 범주들을 동시에 뛰어 넘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37~8> 」

 

프루스트는 아무것도 해석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것들, 철학과 물리학은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기호들은 불분명하고 함축적입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는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해독해야 할 것입니다. 배움이란 이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기호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적 기호.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는 것은 예술입니다. 예술에서만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여, 본질이 표현되고 포착됩니다. 그러나 하위의 다른 기호들을 해독하는 과정이 헛되기만 한 시간은 아닙니다. 그 실패가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가 그토록 지루하게 인물들을 관찰하고 소묘하고 온갖 잡다한 것들의 인상을 그려내는 것은, 그것들이 기호를 해석하는 소중한 단서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루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아마도 그 배움의 과정을 함께 밟아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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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3-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주만에 <읽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권을 다 읽었다. 결론은 깁스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수십줄 혹은 몇 페이지에 걸친 묘사를 읽다보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잊어버리기 일수이지만, 사랑과 거짓말, 질투와 의심에 관한 그 섬세한 묘사는 어떤 소설에서도 보지 못했던 매력을 갖고 있다. 꽁브레와 마들렌 차가 문제가 아니라, 스완이 오데뜨에게 빠져 들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퍼득이는 그 참혹한 심정에 관한 묘사가 압권.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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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온 :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조국보다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조금도 존중하지 않소이다.  ..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조국 땅이며, 조국이 무사히 항해해야만 우리가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오. 이런 원칙에 따라 나는 이 도시를 키워나갈 작정이오.

 

 

안티고네 :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아무튼 하데스는 이런 의식을 요구해요.

 

하이몬 : 아버지의 눈초리가 하도 무서워 일반 시민은 아버지의 귀에 거슬릴 만한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 소녀를 위하여 도시가 이렇게 비판하는 소리를 어둠 속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죄 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

 

클레온 : 나는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하니?

하이몬 : 한 사람에 속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레온 : 국가는 그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

 

 

『안티고네』는 오디푸스 3부작 중 내용상으로는 가장 나중의 이야기지만, 가장 일찍 쓰여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 7편은 대부분(혹은 모두?) 소포클레스 자신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전설로 전해져 오거나 역사상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들을 비극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오디푸스도 이미 있던 있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고네』 - 『오디푸스왕』 - 『콜로노스의 오디푸스』 순으로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앞뒤가 딱딱 맞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용상으로는 오디푸스가 스핑크스의 비밀을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어서 신탁의 불길한 예언대로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 『오디푸스왕』이 첫 번째이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 후 테바이에서 쫒겨나 방랑하던 오디푸스가 콜로노스에서 죽음을 맞는 『콜로노스의 오디푸스』가 두 번째다. 아버지 오디푸스를 끝까지 수발하던 안티고네가 테바이로 돌아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려다 클레온에 의해 산채로 무덤에 갇히는 이야기인 『안티고네』가 마지막 작품이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비극 경연대회를 보고 있던 아테나이의 시민들은 아마도 익히 알던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뒤 세세한 설명이 없어도『안티고네』의 두 오빠들이 왜 싸움을 하다가 한날 한시에 죽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500년 후의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이야기가 일어난 순으로 읽어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안티고네』는  『오디푸스왕』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철학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헤겔같은 근대 철학자도, 라캉이나 들뢰즈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언급하고 있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통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비하고 있다.

  당시 아테나이 시민들에게는 신들의 불문율과 인간의 도리를 주장하는 안티고네가 더 큰 정당성을 얻었던 듯 하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고 조국을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하고 국가의 법을 주장했던 클레온이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고 파멸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눈에는 안티고네의 주장이 더 막무가내로 보인다. 클레온은 합리적인 반면 안티고네는 아무튼 신이 그렇게 원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여전히 '근대성'의 정신을 갖고 있다. 합리성이 판단의 절대 기준이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란 표현이 있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뜨게 한 이성 역시 또 하나의 신앙이다. 그 맹목적인 신앙으로부터 1,2차 대전이라는 대파국이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성의 신앙 속에 산다. 또 다른 신을 찾아내기 이전에는 아마도 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유일신으로 혹은 올림푸스의 신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안티고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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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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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유원의 『인문古典강의』는 제목 그대로 강의록이다.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10개월 동안 진행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말하듯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워낙 입담이 구수하고 지식이 해박하여 막걸리처럼 술술 넘어간다.

  12권의 고전을 강의했는데, 이 책들은 명성이나 취향에 따라 무작위로 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신중하게 골라낸 것이다. 한 권 한 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서양 고전 11권을 연대순으로 세우면 우리 인간의 가치관이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뒤섞여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긴밀한 연관을 가진 이 고전들의 조합은 인간과 세계의 총체적 모습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왜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가? 를 질문해 본 적이 있다면 이 강의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모든 것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따진다. 우리는 먼저 “그것이 너한테 무슨 이익이 되니?” 라고 묻는다. “그것이 정말 고귀한 일이니?” “그것이 신이 바라는 것이니?” 라고 묻는 법을 잊어 버렸다. 희랍 시대에 삶의 기준이 되었던 것들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무엇이 우리의 정신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한 사회의 준거틀로 작용하는 텍스트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저자가 선택한 서양 고전 11권은 각 시대의 패러다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누구나 느끼다시피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를 요구하는 지루한 작업이다. 더욱이 아무 맥락 없이 고전에 덤벼들다가는 별 다른 가치도 찾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 이 고전이라 해도 한편으로 고전은 그 책이 쓰인 특정한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준거틀’ 을 그 사회와 무관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 고전은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을 가진 텍스트이다.

  『인문古典강의』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우리가 각각의 고전을 직접 읽는 것만으로는 쉽게 알기 힘든, 시대적 배경과 역사 속의 맥락을 짚어줌으로써 전체 역사 속에서 각 고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전들을 살펴보노라면 자연스럽게 인간 정신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 과거의 삶의 방식은 현재 우리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는 것도, 그리고 미래의 우리 삶은 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마지막 고전은 앞의 11권과는 달리 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공자의 『논어』이다. 저자는 정치사상가로서의 공자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자가 평생 동안 묻고 답한 주제는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 이었다. 공자는 정치는 올바름을 세우는 것이며, 올바름은 의이고, 의가 겉으로 드러난 형태가 예라고 말했다. 서구 근대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정치철학이다. 11권의 서양 고전들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낳은 인간 정신의 변화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공자의 사상은 우리가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 뭐 나는 공자의 사상에 그다지 공감하지는 않지만, 서구 근대정신의 몰락과 함께 ‘물건으로 변해 버린 인간’ 에 대한 저자의 한 가닥 위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 그리고 단테의 『신곡』이다. 근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텍스트들이다. 고대 희랍 세계에서는 ‘고귀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유용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고귀함이 가치 판단의 기준인 것이다. 중세적 삶의 기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의 뜻이다.

 

 

  둘째 부분은 근대적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일곱 권의 텍스트들이다. 근대적 사고의 신호탄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세운 주체성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적 이익을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만든 로크의 『통치론』, 로크를 토착적으로 수용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근대 국가를 폭력의 독점적 지배조직으로 바라본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이익으로 계산 가능한 것만을 합리성으로 인정한 공리주의자 벤담의 『파놉티콘』, 근대 패러다임의 몰락을 통찰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있다.

  셋째는 마지막 장에 덧붙여 놓은 공자의 『논어』다.

 

 

 

  근대는 영어로 modern 이다. 그러나 modern은 현대로 번역되기도 한다. 번역자들은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까? 나는 늘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모던’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는 ‘근대’로 옮기면 적절합니다. 이를테면 ‘21세기 한국사회는 근대적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관철되고 있는 시공간’ 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역사적으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를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 -굳이 연대를 특정하자면 185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입니다. 저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있는 것입니다. p44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사실상 근대와 다르지 않다. 근대가 만든 패러다임 안에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연대기 상으로 근대와 현대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modern은 근대이자 근대 안의 현대이다. 우리에게 약 600년 전의 고전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우리 시대정신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패러다임, 근대의 정신은 무엇일까? 근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통일국민국가, 자본제적 생산양식, 개인주의 혹은 합리주의 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으로 느껴지지만,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물론 근대사회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 600년 전에 처음 등장하여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전환기를 살았던 인간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변화는 아마도 신의 몰락일 것이다.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던 신이 쫓겨나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근대는 인간이 중심인 세계이다.

 

 

 

  15세기 이후에 쓰인 7권의 고전들은 근대적 패러다임이 정치와 경제, 사상에 가져온 변화의 방향을 뚜렷이 가리켜 준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준거틀인  근대적 패러다임이 이 7권의 고전들에 어떻게 나타나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몽테스키외는 몇 마디로 정리할 내용이 보이지 않아 생략하고 실제로는 6권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신이 사라졌다. 『군주론』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학 교과서이다. 도덕과 신을 철저히 배제한 이 현실성이 바로 근대적 사고의 맹아이다.

  데카르트는 주체성의 철학자이다. 코기토를 통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 정신 이외의 모든 것은 심지어는 인간의 육체마저도 동물, 자연 등과 함께 대상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인간의 ‘소유권’ 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로크는 인간을 이성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규정했다. 로크는 17세기에 새롭게 대두한 상업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하는 사상가였다. 영국의 입헌군주국은 개인의 소유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시킨 자유주의국가였다. 로크의 사상은 미합중국의 건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를 지배한 영국과 미국의 통치 기반이 된 이 자유주의 사상은 전 세계에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베버는 이렇게 틀이 잡힌 근대국가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한지, 정치가 어떻게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지를 암울하게 설파한다.

  한편 벤담의 파놉티콘은 이익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세계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인간을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을 설계함으로써 감옥 운영과 수감자의 노동력 착취에 최대한의 효율성을 도입했다. 벤담은 감옥뿐 아니라 학교와 병원 등 사회의 모든 기관에 파놉티콘을 적용하여, 감시의 내면화를 통해 경제성을 획득하려 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몰락과 서구 근대 문명의 파산 과정을 샅샅이 탐색했다. 폴라니가 볼 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상품화가 불가능한 토지, 화폐, 노동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다. 자기조정 시장은 파산하고 서구 열강은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식민지 침략에 나섰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를 둘러싼 쟁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데카르트적 근대 인간의 몰락을 처참하게 보여주었다.

 

 

  「개인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가족, 국가, 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오롯이 독자적인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 중심주의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명제에서는 나의 생각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개인의 주체성을 내세운 철학자입니다. 그가 천명하는 근대적인 주체성은 모든 공동체적 연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유산과 전통을 끊어낸, 말 그대로 독자적인 개인입니다. 내 몸과 내 정신은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적 자아의 사회적 함의입니다. 이것과 사적 이익이라는 로크의 사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인간의 신체와 그 신체의 산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적 자아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적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노동의 산물이 오로지 개인의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개인의 소유권' 위에 세워진 자유주의 입헌국가 역시 허구적인 것입니다.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의 붕괴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근대 세계는 ’데카르트적 자아‘ 라는 형이상학적인 토대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자적인 개인을 강조했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시스템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개인을 집단 속에 무자비하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폴라니의 말에 따르면 “사람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파시스트 체제로 귀결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폴라니의 분석을 통해서 데카르트적 자아의 몰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p512~3」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 구 공산권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전 세계적 저항이 줄을 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체제에 대한 그 어떤 청사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유토피아를 꿈꾸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그 어떤 근본적인 변혁도 기대할 수 없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이 디디고 있는 발판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가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애써 불안을 누르고 행운에 삶을 기대어 산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버텨낼 수 있을까?    "안녕들하십니까? "  란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인문古典강의』의 교훈은 인간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신을 쫒아낸 오만한 자신감도 인간의 것이고, 국왕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린 것도 민중의 힘이다. 인간은 역사의 거대한 고비마다 진보의 방향을 틀고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우리 사회의 준거틀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 낡은 틀이 우리 모두의 삶을 치명적으로 옥죄고 있다면 그 틀은 깨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패러다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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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이 끝났다. 총 55회로 1년이 살짝 넘게 방송했는데, 나는 몇 달 전부터 팟캐스트로 들어왔다. 구수한 말솜씨에 끌려 심심풀이 삼아 듣기 시작했는데, 고전을 읽는 깊이가 만만치 않다.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했다. 1주일에 1회, 한 회에 20여분 정도로, 한 권의 책을 많게는 10회까지 읽기도 하니, 줄거리만 쓰윽 훑고 가는 피상적인 독해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들어 본 인문학 강의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되풀이 해 들어도 지겹지 않고 좋은 공부가 된다.

 

“라디오 인문학”이란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맥베스>, <걸리버 여행기>, <오디푸스 왕>,<유토피아(이것도 소설인가?)> 등의 문학, 철학서로는 플라톤의 <향연>, 역사 분야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갈리아 원정기> 등을 읽었고 그 외에도 <군주론>, <판옵티콘>, <직업으로서의 정치> 등을 읽었다.

 

진행자는 항상 “거리의 철학자 강유원 박사님” 이라고 소개하는데, 헤겔 철학을 전공했고, 학교 보다는 주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모양이다. 정치철학을 하며, 역사와 전쟁사, 무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에도 강의를 해 주면 좋겠지만 지방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한 번 제의해 보려고 한다.

 

방송을 마친다는 말에 아쉬워 검색을 해 보니 몇 권의 책이 있다. 그 중 『인문 고전 강의』를 빌려 왔다. 이 책 역시 2009년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묶은 것이다. 매주 두 시간씩 40주간 진행한 강의에는 <라디오 인문학>의 내용과 겹치는 것도 있지만 주로 다른 책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가 있는데, 마침 내년 초 독서회에서 읽을 책으로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이 있어, 참고가 될까하여 그리스 비극에 관해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라디오 인문학>에서도 들은 내용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니 정리하기가 훨씬 쉽다.

 

 

 

 

고대 그리스하면 우리는 도시국가, 폴리스를 떠올린다. 그런데 폴리스는 단지 도시 혹은 도시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인민을 의미하기도 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뜻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정확하게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란 의미이다. 정치적 공동체는 물론 학문, 예술, 운동, 규율까지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정치가 폴리스의 삶 전체를 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때의 정치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의미했다. 운동, 전쟁, 연극 관람까지도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과 같다. 동물적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 공동체의 삶이 없다는 의미에서 아감벤이 새롭게 유행시킨 로마의 ‘호모 사케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비극 역시 폴리스에서 상연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연극으로 상연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극 작가 혼자만의 작품도 아니다. 고대의 예술작품은 집단 창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고독한 예술가’ 라는 이미지는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최근의 개념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무 때나 상연되는 것이 아니다. 매년 3월과 4월 사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행해지는 연극 경연대회에서 공연된다.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고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해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폴리스의 주요한 행사다. 돈 많은 시민들 몇 명을 뽑아 돈을 대게 하면, 코레고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합창단원인 코로스를 뽑고 시인과 배우를 모집한다. 이 때 경연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시인과 배우는 제비뽑기로 추첨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돈이 가장 많은 코레고스가 가장 좋은 시인과 배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부에 관계없는, 기회의 평등, ‘공정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이런 원칙이 실현된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민회의 추첨을 통해 뽑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물론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폴리스의 구성원들 즉 2~3만 명의 남자 시민들이다. 지금의 평등 개념과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공동체적 삶에 포함되지 못했다.

 

여하튼 이렇게 한 팀이 짜이면, 시인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써야 했다. 비극 3부작을 트릴로기Trilogy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3부작, 3부작 하는 것도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 3부작이 되어야 ‘완성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극 Tragedy 의 어원은 트라고디아 Tragodia다. ‘염소의 노래’란 뜻이다. 트라고스 Tragos가 염소, 오디 Odie가 노래다. 비극을 공연할 때 디오니소스 신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부정을 씻기’ 위해서 이다. 부정을 씻는다는 말이 바로 카타르시스 Katharsis 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이 해소되어 개운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아~ 깨운하다” 는 느낌이다.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는 목적도 바로 이 카타르시스에 있다. 희생제물을 바쳐 부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개운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비극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은 코러스다. 코러스 사이사이에 대사가 부차적으로 끼어들어 있을 뿐 대사가 중심이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대사를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이라 불렀고, 이것이 에피소드 Episode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가 책으로 읽을 때 코러스 부분을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자세히 읽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러스의 역할은 다양하다. 코러스는 극의 전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고,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며 감정을 쏟아 붓기도 하고, 등장인물과 대립하며 함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코러스를 통해 우리는 비극의 줄거리와 비극을 관람하는 그리스인의 입장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를 기억해 보자. 시험에 잘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름도 생소하게 들린다.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그리고 별칭이 없는(?) 에우리피데스가 있다.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경험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에서도 신이 주역을 맡으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신에 귀의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비극의 주제를 이룬다. 신이 내린 운명에 발목 잡혀 있으나 신의 의지 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된다.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뿐만 아니라 그에 뒤이은 조국 아테나이의 전성기를 맛보았고, 뒤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조국을 덮쳐 오는 불안한 시기를 두루 겪었다. 한편 조국의 영광에 대해서 소문밖에 듣지 못했던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며, 신에 대한 믿음도 인간에 대한 믿음도 굳건하지 않다. 이들 3대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을 이어서 읽는다면,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따라 어떻게 작품의 서사 양식이 달라지는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이 확신에 차 있을 때와 그 가능성이 포기되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음미해 보는 재미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로 아주 유명해 졌고, <안티고네>는 헤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철학자들도 끊임없이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는 'less than nothing'으로, 모든 것을 잃고 눈을 찔러 nothing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something인 된 인물로 지젝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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