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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소송』을 읽은 김에 카프카의 『성』도 읽었다. 몇 년 전에 『변신』을 읽었으니, 유명한 작품은 대충 훑었나 싶지만, 『시골의사』가 남았다. 그런데 작가 소개를 보니 카프카의 고독 3부작이란 것이 있다. 『소송』 ,『성』 그리고 제목도 처음 보는 『아메리카』가 그것인데, 3편 모두 미완성이라고 한다. 『성』은 누가봐도 미완성이지만, 『소송』도 그런지는, 읽어 놓고도 몰랐다. 요제프 K가 처형당하는 10장< 종말> 다음에 미완성 원고들이 6편 실려 있기는 하다. 제목이 <종말>이고, 요제프가 죽었으니 당연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부록처럼 실려 있는 짧은 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성』은 마치 카프카가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끝난다.
"그녀는 K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기 옆에 앉게 하고는 힘들여 말했는데,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녀가 한말은. p453"
그녀는 게어슈테커의 어머니인데, 게어슈테커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거나 어쩌면 처음 등장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그녀가 한 말에 대한 궁금증을 영원히 풀 수 없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다지 궁금한 것도 아니다. 그녀에 의해 뭔가 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K의 운명도 『소송』의 요제프 K 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카프카에 대해서는 무수한 연구와 해석들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소송』과 『성』은 무척 비슷해 보인다....를 너머, 같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요제프 K와 K를 둘러싼 사회는 안개와 같다. 내가 가진 알라딘 책베개에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 안개에 관한 구절이 빼곡이 적혀 있다. 마지막 한 문장은 이렇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는 실체일까? 존재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다가갈수록 흩어져 사라지고, 그러면서도 모든 삶을 지배하는 것. K와 요제프 K가 안간힘을 다해 들어가려는 사회는 그렇게 오리무중이다.
카프카는 1924년에 폐결핵으로 죽고, 『소송』과 『성』은 그의 유언을 어긴 친구에 의해 사후에 출간되었지만, 정작 집필은 각각 1914년과 1922년에 시작되었다. 20세기 초에 그린 카프카의 세계는 100년 간의 비약적 변화로 탄생한 21세기 초의 현대 세계와 분명히 다르다. 현대는 무엇보다 '투명사회'다. 밥먹는 것은 물론 혼잣말과 무의식적 탄성까지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다. 투명사회가 유리알처럼 반사한 투명한 빛은 옅은 안개의 가능성마저 날려 버린다. 그런데도 카프카의 이름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포스트모던이 따라 나오는 것 같다.
옮긴이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카프카의 『성』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근대적인 소설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카프카의 '모더니즘'은 문학형식상의 근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따라서 카프카는 '모더니즘'이란 말조차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 역설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카프카의 작품은 읽을수록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해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후기구조주의의 해체주의적 글 읽기에 모범적 범례가 되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의 문맥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p456"
말하자면 옮긴이조차 '이해불가능'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불가능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일치, 완벽한 공감, K에 대한 독자의 절대적 감정이입인 것 같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 성에 들어갈 수 없지?, 클람은 있기는 한거야?, K는 진짜 측량사이긴 한거야? 등등의 의문은 독자의 답답함이자 그대로 K자신의 의문이기도 해 보인다. 독자의 답답함은 『성』의 독해에 대한 답답함이지만, 또한 삶 자체에 대한 답답함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투명사회인 동시에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안개사회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안개사회의 이해불가능성을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현시함으로써 감추려 애쓰는지 모르겠다. 칸트의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도 없고 루카치가 그리워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도 없다. 카프카는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p455" 고 했지만, 이 시대에 과연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목표도 없고 길도 없고, 별도 없고 도덕도 없다. 있는 것은, SNS의 투명성과 IS다. 극단적인 일상과 극단적 일탈이 삶을 해체한다. 한편에는 눈만뜨면 아멘처럼 찰칵대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열하고, 한편에는 도시락 폭탄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한다. 투명사회는 안개사회의 외설적 이면이다. 대의는 사라지고 일상의 현시를 거부하는 자들은 실재를 찾아 요르단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