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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일 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은 말도 어렵게 할까? 일정한 법칙 따윈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칠일밤』을 펴들기가 편안치는 않았다. 『칠일밤』은 일흔여덟의 눈먼 노인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극장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글이 아니라 말이다.
눈먼 노인은 종종 예언자, 현인들을 상징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테이레시아스가 그렇고,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렇다. 스스로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눈을 떴다. 그렇다고 보르헤스의 실명이 그의 강의에 아우라를 더해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눈먼 노인의 생각 깊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어느 밤에 대한 상상은, 슬프고 아름답다.
보르헤스의 강의는 편안하고 풍부하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단편집들을 생각한다면, 놀라우리만큼 쉽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그를 수식하던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모든 것? 내가 조악하게 이해한 대부분의 것들이라 하자. 보르헤스는 일곱 번의 강의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거의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어제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카톨릭 청년대회’에서 그럴법한, 온화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사랑한 책과 작가들, 관심 깊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들은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들의 책과, 불교와 카발라 같은 종교, 그리고 꿈과 시와 실명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보르헤스 자신이 평생 사랑하고 깊이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청중들은 그리고 말-글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보르헤스의 난해한 책을 읽어내는 법과 보르헤스 글쓰기의 방법과 사상의 단편들을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1일 밤 : 신곡
보르헤스는 단테(신곡 속의 단테) 나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 같은 중심인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많은 일화적인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일화, 한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서 오백이나 육백 페이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단테에게는 한순간으로 족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작중 인물은 영원히 규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중심 순간을 찾습니다. 나는 여러 단편소설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하고자 했고, 중세 때 단테가 발견한 방법 때문에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암호로서 한순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작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지 짧은 3행연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원합니다. 그들은 한 단어나 하나의 행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래의 일부이지만, 그 일부는 영원합니다.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고, 기억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다시 새로워집니다. p29」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보고 울던 갑돌이, 눈빛으로만 사랑하다 이별한 연인의 절절한 아픔은 이 한 순간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우리 삶의 단 한순간, 그것만이 우리의 삶이다. 그 한순간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우리는 그 한순간이 없이 산다, 잘 산 것이리라. 보르헤스가 단편만을 고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신곡』에서 율리시스의 일화가, 단테가 만든 가장 멋진 전설이라고 한다. 율리시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늙고 지친 몸이지만, 새로운 모험을 향해 떠난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서 남반구를 탐험하기 위해서다. 율리시스는 동료들에게 그들은 남자이지 짐승이 아니며, 용기와 지식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다섯 달의 항해 후 드디어 육지에 도달하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한다. 그곳은 연옥이다. 율리시스는 불길의 고통을 받는 형벌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왜 율리시스가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 절정의 순간에 연옥에 떨어진 이유는, “절정의 순간은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면서도 대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율리시스에게 절정의 순간은 트로이의 목마가 성공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남반구의 탐험에 성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신에 의해 금지된 순간이다. 보르헤스는 단테가 이 일화를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단테가 율리시스를 자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단테는 『신곡』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단테 스스로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단테는 『신곡』을 통해 그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리시스란 인물은 그토록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리시스는 단테의 거울이고, 단테는 아마도 자기 역시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든 나쁘든 시를 쓰면서 그는 밤의 법칙, 즉 하느님과 신성의 신비로운 법칙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p48」
이것은 아마도 보르헤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절정의 순간, 그 한순간을 포착하여, 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다. 작가는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고 대담한” 신성모독자이다. 율리시스가 단테이며, 단테는 보르헤스이다. 보르헤스가 그의 첫 강의에서 단테의 『신곡』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신곡』의 수많은 일화들 중 율리시스를 최고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일 밤 : 악몽
보르헤스가 늘 꾸는 악몽은 미로와 거울, 혹은 거울이 만든 미로다. 꿈이란 무엇일까? 악몽이란? 보르헤스는 영어 nightmare와 독어 märchen의 연관성을 추측하며, 악몽을 ‘밤의 허구적 작품’ 즉 ‘밤의 소설’ 이라 말한다. 악몽은 fiction 이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미로와 거울의 이미지를 변주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보르헤스는 꿈을 ‘가장 오래된 미학 행위’로 결론짓는다.
그런데 꿈은 신적인 어떤 것이다. 보르헤스는 던이란 작가의 『시간 경험』을 인용한다.
「그 책에서 던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것보다는 작지만 개인적인 영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매일 밤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꿈속에서 이미 개인적인 영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영원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미래를 보게 합니다. 하느님이 광활한 영원에서 우주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듯이, 꿈꾸는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라봅니다. p57」
꿈은 어떤 사람에게는 소망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다. 꿈에 대한 도전은 정신분석학, 심리학, 문학 등 다양하지만, 여전히 꿈은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꿈을 일종의 신적 응시로 생각한다.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에는 정신없이 바쁜 신이 나온다. 지구 곳곳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기도를 듣느라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신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한번 응시로, 단 한 순간으로, 신은 모든 것을 본다. 꿈 역시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보르헤스의 대표적 단편 <알레프>의 응시이기도 하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편 <알레프>는 두 번이나 읽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컴컴한 지하실에 드러누워 2~3cm의 좁은 구멍을 통해 화자는 한순간 모든 것을 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어느 모퉁이 가로수의 잎맥, 해변의 모래알 하나하나, 심지어는 자신의 뱃속 창자까지. 한순간에 우주의 모든 것을 본다. 그 <알레프>가 바로 신의 응시이고, 꿈이며, 그리고 픽션들이다.
역자 송병선은 “그는 우리가 문학을 통해 여행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시간여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모든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알레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p280” 라고 ‘옮긴이의 말’ 에서 전하고 있다.
문학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한 자리에서 수 천 년 전의 이야기와 바로 오늘 만들어진 이야기, 그리고 아르헨티나 어느 극장의 눈먼 노인의 모습에서 소년 동호의 굳은 얼굴까지, 이 모두를 생생히 볼 수 있다. 보르헤스 자신은 꿈이 알레프라 말하지 않지만, 내가 읽은 보르헤스는 꿈이 바로 그 <알레프>라 말하고 있다.
3일 밤 : 천 하룻밤의 이야기
지금까지 ‘천일야화’가 千日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설마 千一이라고는... ‘천’은 무수히 많다, 무한하다는 의미다. 거기에 더한 하루, 一은 무한이라는 추상에 순간적 현실성을 더해준다. 千日이 은유라면, 天一은 현실이다. 이건 내 생각이고, 보르헤스는 '영원히'의 영어식 표기인 ‘forever and a day' 떠올리며, “무한의 사상은 『천 하룻밤의 이야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생각” 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카이로에서 편찬되었지만, 핵심은 인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 소아시아를 거쳐 마침내 아랍어로 씌어져 이집트에서 발행되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번역판들이 있다. 이 판본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내용이 살짝 변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기도 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거나 재창조되고 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의 무한한 시간은 계속해서 길을 갑니다. 18세기 초에 이 책은 번역되었고, 19세기 초 혹은 18세기 말에 드 퀸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번역자들에 의해 또 다시 번역될 것이고, 각 번역자는 이 책의 서로 다른 판본을 출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제목을 지닌 수많은 책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p116 」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모든 책들 혹은 보르헤스의 책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은 상호텍스트성 혹은 메타픽션에 관한 비유로 읽혀진다. 번역에 의해, 판본에 의해, 독자에 의해 텍스트는 끊임없이 변한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통해 보르헤스가 극명히 보여주려 했던 것이 이것이다. 어떤 텍스트도 ‘죽지 않는다.’ 텍스트는 무한성을 갖고 있다.
4일 밤 : 불교
서양의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조금 웃는다. 그들의 이해가 일천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해박한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나는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불교 그 자체다. 우리는 딱히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불교의 정신과 관습에 어쩔 수 없이 물든 부분을 가지고 있다. 염화시중처럼. 어쨌든 보르헤스의 픽션들에는 불교사상 특히 선불교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보르헤스가 보는 선불교의 핵심은 자아가 없고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란 환영이며 꿈이고, 인생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깊이 느껴야만 하고, 명상을 통해 그것에 이르러야 합니다.p150」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이 그 대표작일 것이다. 나는 꿈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5일 밤 : 시
보르헤스는 시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직접 읽는 것이다. “참고 문헌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 비평에 대한 참고문헌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p171” 아마도 보르헤스 자신의 픽션들에 대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주석에 신경 쓰지 마세요, 쇼펜하우어나 라이프니츠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냥 읽고 낄낄 웃으세요...
시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읽고도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 작가는 여러분을 위해 그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럼 그 책은 그냥 버려두라. 문학작품은 너무도 많고, 당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작가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급하다. 패션처럼 작가들의 이름을 좇는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르헤스라는 명품 혹은 사치품.
「에머슨은 도서관을 보고, 마법에 걸린 수많은 책들이 있는 마법의 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부를 때에만 잠에서 깨어납니다. 우리가 책을 열지 않으면, 그 책은 글자 그대로 기하학적인 종이더미, 즉 수많은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열면, 그 책은 독자를 만나게 되고, 미학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심지어 동일한 독자가 읽었다 하더라도 그 책은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그는 어제의 인간이 오늘의 인간이 아니며, 내일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바뀌고 있으며, 하나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리고 다시 읽은 책을 기억할 때마다, 작품을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도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p162 」
리뷰를 쓰는 것도 작품을 고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가능하면 리뷰를 쓰려고 한다. 처음에는 단지 내용을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리뷰를 쓰다보면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들 그리고 처음 떠올렸던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새로운 생각이 덧붙여진다. 책이 변하고, 나도 변한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읽으며 과거에 썼던 리뷰를 떠올리고, 이전의 생각들을 수정하거나 더 깊게 하기도 한다. 과거의 리뷰가 지금의 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작가들의 글쓰기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리뷰 놀이에도 작용한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다.
6일 밤 : 카발라
유대교 신비주의. 더 이상 아는 것도 없고, 강연 내용에서 특기하게 이해되는 것도 없다.
7일 밤 : 실명
실명한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한 작가, 아니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든지,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p255 」
과연 그럴까?
보르헤스의 실명은 유전병이었고, 쉰 무렵에는 혼자서 읽기도 쓰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87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