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말부터 도서관 신간코너에 꽃혀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지 그림이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누구의 그림인지 모르겠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매일 도서관 앞 작은공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고 또 도는 그녀의 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철학으로 유명한 그 비트겐슈타인이다.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광고문구를 보며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라는 파울이 실존인물일까 궁금했다. 위키 백과에는 진짜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아니라 형이다.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오른팔을 잃었지만, 왼팔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유명하다는데, 음치인 나는 물론 들어본 적이 없다. 여하튼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파울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어쩌면 동명의 조카가 실제할 수도 있는데, 확인을 못했다).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면에서 진짜 파울이  ('자전적' 이라는 말을 논픽션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파울, 진짜 조카 파울일 수도 ;;) 모델이아닐까 싶지만, 하릴없는 추측일 뿐이다. 

 

파울은 천재이며 광인이다. 그의 발작은 전조 증세와 함께 시작된다. 갑자기 손을 떨고, "문장을 끝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의 말을 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p60"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단 하나의 문단으로 되어 있다. 단락 나누기 없이 파울의 친구인 '나'의 독백이 끝없이 이어진다. 잠깐 덮어놓으려면 도대체 어디에서 중단해야 할지 난감하다. 파울은 정신병으로, 나는 폐병으로 같은 병원의 다른 병동에 나란히 누웠지만, 나 역시 또 다른 광인이다.

 

"파울은 오직 광기 하나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 광기로 인해 존재했지만, 나는 내 광기에 더해서 폐질환까지 덤으로 안고 있었고, 광기와 폐질환 그 둘을 똑 같이 이용했다. 즉 두 가지 병 모두를 어느 날 이후부터 일생에 걸친 내 존재의 원천으로 삼아 버렸다.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로 살았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환자로 살았고, 파울이 수십 년 동안 정신병자 연기를 해 왔듯이, 나는 수십 년 동안 폐병 환자의 연기를 해 왔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재산이나 어느 정도 위대한 예술을 얻고 싶어하고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면서 일생 동안 최대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상황에서라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마침내는 자기 삶의 유일한 내용으로 만들려고 욕심내듯이, 파울은 자신의 광기를 일생 동안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확실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철저히 이용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삶의 내용으로 삼아 버렸다. 나 또한 내 광기를, 그리고 내 폐병을 내것으로 삼아 마침내 거기에서 내 예술이란 것을 탄생시켰다. p33"  

 

현대인은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널리 유포되어 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강박증이 있다. 그 강박증이 적절한 상황과 결합하면 치밀하고 빈틈없는 직장인이 되지만, 현관문을 열다말고 가스렌지 앞에 되돌아와 몇 분을 붙박히게 되면 정신질환자가 된다. 정신증과 광기는 의학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기준이 그렇게 분명한 걸까? 광기말고 라캉의 죽음충동은 어떨까? 인간만이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에 존재 전체를 걸 수 있다. 광기가 예술을 탄생시키고 삶의 내용을 만들어 낸다. 돈이 그렇듯이, 광기도 그렇다. 그런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은 자신의 정신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파울의 정신병에 끊임없이 새롭고 자극적인 명칭을 붙였지만 그 어느 것도 올바른 병명이 아니었다. 하나의 병명이 나오면 늘 이전의 다른 병명과 완전히 모순되었다.  

 

"소위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친구의 병명을 한 번은 이렇게, 한 번은 저렇게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다른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가진  바로 그 질병에 들어맞는 올바른 명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잘못된, 항상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병명만을 붙여 왔음을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p13"

 

용기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정신병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지문처럼 사람들마다 다 다른 그 정신의 결을 몇 가지 분류만으로 어떻게 이름붙일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갑부였다. 실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모르겠지만 ,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 많은 유산을 다 줘버리고 시골학교의 선생을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파울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펑펑 줘버리고 가난 속에 홀로 죽는다. 파울은 삼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딱 한번 파울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의 삼촌 루트비히는 가족 중에서 가장 심각한 미치광이였다고, 억만장자가 시골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다니. 그게 도착증이 아니고 뭐겠어? p90"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넘어갔어.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버렸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p91"

 

실제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실제와 허구가 섞인데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이라는 말이 더해져,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어쩌면 삶이 그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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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5-02-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를 보니 작가의 친구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책 내용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실존인물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만약 삼촌과 조카가 동명이인으로, 두명의 파울이 있었다면, 작가가 한번은 언급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루트비히의 형인 파울은 엄청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런면에서 조카 파울이 실존했다면 이름뿐만 아니라 음악 천재라는 동일성을 공통으로 가졌는데, 사람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