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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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1월 2일, 고속버스의 TV 화면에서 '프루스트'를 보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화면에는 강신주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보였고, 간혹 홍차와 마들렌, 콩브레 따위가 뒷 배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근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는 펭귄 클래식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꽂혀 있었다. 상경 길에 만난 지인에게 내가 그 지루하다는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웃으며 물었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읽어 봐... 나는 그 유명한 마들렌은 어디쯤 나오냐고 다시 물었고, 다행히 그것은 책 앞 부분, 아주 앞 부분에 있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 도서관 신간 코너에 오랫동안 꽂혀만 있을 것 같았던 그 책의 1권이 사라졌다. 누군가 깁스를 했거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준하는 어떤 지루한 교통 수단을 이용할 일이 생겼나 보다. 나는 대신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지인의 말을 기억해 내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빌려 왔다. 표지 제목의 아래에 바싹 붙여 놓은 영어 문장은 "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다. 출판사는 알랭 드 보통에 자신이 없었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이 누군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다면 아마 대단히 지루해할 것이 틀림없겠지만, 나는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에서 프루스트와 내가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루스트는 평생동안 여러가지 질환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프루스트가 자신이 말하는 것만큼 아픈 것은 아니라며 빈정댔다. 프루스트는 생애의 마지막 16년 동안이나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했다니 그럴만도 하다.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똑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는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88」

 

  남다른 고통은 자극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게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렇다. 고통은 불편하고 우울한 감각이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은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 프루스트가 불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한 남자가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들기 전까지의 모습을 열일곱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던져버리게 했지만, 결국 그 덕분에 이 책은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푸르스트는 이웃의 소음에도 극도로 민감했는데, "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남들을 분개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생물체가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라고 했다. 이웃집의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소음에 시달리던 프루스트는 "하루에 열두 명의 노동자가 발작적으로 망치를 수개월 동안이나 두드렸다면 케오프스의 피라미드처럼 웅장한 어떤 것을 세웠음에 틀림없으며, 보행자들은 프렝탕 백화점과 생오귀스탱 성당 사이에 서 있는 그것을 보고 놀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물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았고, 이웃집의 변기와 타일이 바뀌었을 뿐이다.  

  나도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며, 층간 소음만으로도 얇은 책 한권 정도는 너끈히 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남들은 너무 신경이 날카롭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훌륭한 작가에게서 닮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좋다.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법>을 보면 프루스트는 위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친절하고 헌신적일뿐 아니라 비위를 잘 맞추었다. 프루스트의 친구들이 그것을 '프루스트하기' 라 부르며 비꼴 정도였는데, 한편 친교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만큼 신랄했다. "친교의 표현 양식인 대화란, 습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피상적인 여담일 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분의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친교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 이상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진짜 위선자일까?

 

  「이 불일치는 그다지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프루스트하기'에 대해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루스트하기'를 불러일으킨, 그 뒤에 숨어 있던 메시지에서 그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나를 좋아하길 원합니다." ...... 자랑스럽게 자신의 시집이나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친구들에게 듣기 좋은, 그러나 허울뿐인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정중함을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을  해왔음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의 한숨과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의심받을 수 있는 우리의 호감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p171~2 」

 

  우리가 매일 하는 인사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물으며, 상대방의 마음과 몸이 평안한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상대방의 안녕이 궁금하지는 않기 때문에 위선적이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만나고 나서도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지 상대의 안녕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적대적인 의사의 표현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인사의 내용이 아니라 인사를 한다는 형식 자체이다. 허울뿐인 말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이다. 프루스트하기적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 대화의 내용은 '공허함을 무한정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만, 대화의 형식 자체는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마지막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프루스트는 "친애하는 친구여, 우리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반적인 풍조와는 반대로, 나는 한 사람이 문학에 대해 매우 고결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악의 없이 비웃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 앙드레 지드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 내재한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채만식 문학기행'에 다녀 온 적이 있다. 채만식 문학관과 채만식이 주로 살았던 임피의 생가터, 학교, 역, 묘소를 둘러 보는 기행이었다. 생가터는 잡풀만 드문드문한 빈터이고, 임피역은 화물차만 드물게 지나다니는 작은 시골역이고, 묘소는 언제 벌초를 했나싶게 황폐한 봉분과 낡은 묘석만 덩그런 무덤이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콩브레 역시 다르지 않다. 콩브레는 가공의 지역으로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지만, 프루스트가 콩브레의 모델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리에라는 도시는 이름을 일리에 콩브레로 바꾸고 수많은 관광객을 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경쟁이 치열한 빵집들 중 한 곳에서 산 마들렌 봉지와 카메라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한다. 관광 안내소의 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고 씌어 있다. 그러나 정작 프루스트는 어떤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268」

 

  프루스트적인 것이 콩브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어느 곳이라도 콩브레가 될 수 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었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치우고 책에서 얻은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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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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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라딘 '블로거 베스트셀러'에 『살인자의 기억법』이 올라온 지 꽤 된 것 같다. 김영하라는 소설가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몇 년 전  "김영하 vs  조영일" 논쟁이라는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그가 꽤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밥과 김치'를 남기고 고인이 된 최고은이라는 작가 때문에 그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고, 김영하는 착잡한 마음을 피력하며 논쟁의 글들을 모두 지우고 한동안 침묵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몇 달 전 아이패드를 통해 그를 다시 만났다.

  스마트폰도 없이 지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뭔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쌉쌀한 마음에 아이패드를 샀다. 말로만 듣던, 강처럼 흐르는 트윗이라도 하게 되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도 여전히 나의 트윗은 강물은 커녕 달팽이처럼도 움직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SNS보다 뜻밖의 수확은  팟캐스트다. 집안일을 하며, 잠들기 전에 등등, 짜투리 시간에  팟캐스트를 듣는다.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은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들을 듣는 재미가 적지않다. 플라톤의 향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 거리의 철학자라는 강유원의 입담도 만만치 않다. 나꼼수류의 시시껄렁한 입담이 아니라, 곰국같이 구수한 입담이다. 설겆이 물소리 때문에 군데군데 들리지 않아도, 이방저방 돌아다니느라 드문드문 빼먹어도 그 뿐, 다음에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도 기분이 쳐질 때 들으면 상큼하다. 작가라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말솜씨만은 전문 MC에 빠지지 않는다. 약간 높은 톤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 상큼한 사과를 한입 베어무는 기분이다. 남자들도 저렿게 생기발랄할 수 있구나 싶다, 더구나 작가가.   

  그리고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이 있다. 설마 했는데, 진짜 그냥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장편소설의 한 구절을 뽑아 그대로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는데, 중저음의 침착한 목소리 하나만은 듣기에 좋다. 혼자 녹음하고 직접 팟캐스트에 올린다고 하는데, 재주도 많은가 보다. 호기심이 많거나, 부지런하거나.

 

 

  『살인자의 기억법』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왠 횡재인가 싶어 냉큼 빌려왔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는데, 한 며칠 묵히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정유정의 『28』이나 조정래의 『정글만리』등 조금 유명한 신간은 빌려 읽기가 엄청 힘들다. 도서관에 돌아오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이 빌려버리는지, 검색할 때마다 '대출중'이다. 여기 도서관에는 대출중인 책은 예약할 수 없다. 시스템이 안되어 있단다.

 

 

  예상외로 얇고,행간도 넓고, 글씨도 널널해서, 막상 읽는데는 반나절도 필요하지 않다. 술술 읽히는 것을 보니 재미가 있긴 한가보다. 그런데 이게 왜 베스트셀러인지는 모르겠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흥미롭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다만 한두가지 의문이 들뿐이다.

 

  화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연쇄살인범 노인이다. 그런데 그의 사고력은 너무 뛰어나다. 알츠하이머 화자가 과거의 기억은 또렷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대한 표현력이 이처럼 훌륭할 수 있는 걸까? 화자와 작가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화자의 생각이나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언어를 잃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망각 속에서 언어를 잃는다. 건망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말기의 알츠하이며 환자가 이런 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선입견으로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나의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부자연스러운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인터뷰에서 인물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하지만, 인물들의 말도 생각도 모두 작가의 말과 생각이지 않은가. 그래서 소설이든 드라마든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때가 많다. 재벌 회장도 주먹 깡패도 똑 같이 비유법 좋아하고, 회고하기 좋아한다. 양아치 짓을 하다가도 멀쩡하게 교사처럼 설교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야기다. 재미있고 좋은 드라마인데, 너나 할 것없이 똑같은 말투가 기분을 팍 잡친다. 여하튼 단순한 의문이다. 치매 환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  표현이 아니라 그냥 생각만이라 하더라도 가능할까? 생각 역시 언어로 구성된 것 아닌가? 언어를 잃고 사고를 또렷이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  문화센터 강사의 말이다.  킬러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은 언어를 살해했기 때문일까? 킬러가 연쇄적으로 죽여 나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언어인 것일까? 이 책은 언어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일까?  "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킬러는 살인을 계속한다. 시인도 그렇게 시를 계속 쓰는 것일까? 언어를 더 완전하게 죽여  시 속에 묻어 두기 위하여?  언어를 완벽하게 포착해 자신 속에 가두어 두기 위해?

  그러나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한다는 명제도 있다.  개체가 죽어도 유전자는 또 다른 개체 속에 살아 남듯이, 사람은 죽어도 언어는 남는다.  아닌가? 

 

  언어를 완벽하게 살해하는 것, 그것이 작가들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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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경과 반야심경에 둘러 쌓인 두 농담의 공포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from 뚜벅뚜벅 주니우 2013-08-26 12:51 
    문학평론가 권희철씨의 해설에서 인상 깊은 문구 몇 개를 가져왔다. - 잘못된 인식과 고집과 고통이 집합소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여기 남은 건 무아의 상태가 아니라 대혼란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바다 위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 하는 고통과 공포가 너의 몫이다. - - 연쇄살인범의 세계에서 주어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며 나머지 것들은 주어에 의해 부정당하기 위해 준비된..
 
 
주니우 2013-08-2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번 김영하씨는 일반인들이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화시키기 어려운 '알츠하이머 환자'인 '연쇄살인범'으로 주인공을 잡았습니다. 따라서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꼭 그렇지 말라는 보장이 또 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얘 폴더를 만들어 김영하씩 소설을 관리하실 모양이군요~ 적극 추천합니다.
저는 이 폴더에 '책 읽어주는 시간'에서 소개한 책을 넣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말리 2013-08-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남은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전히 서재지수 올리려고 ㅋㅋ(이거 은근 중독성 있음. 근데 아직 점수 규칙은 모르겠음) 걍 쓰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건 언어를 죽이는 시인에 관한 메타포구나. 근데 금강경은 모르니까, 금강경 구절로 앞, 뒤를 맞추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오겠지요. 권희철의 해설은 안 보고 반환해서 내용은 모릅니다만. 근데 언어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조금 어색해지더군요. 우리가 내뱉는 것, 표현하는 것만 언어가 아니라, 생각이나 의식 혹은 무의식까지 모두 언어로 되어있다는 전제를 인정해 보면, 언어가 죽어나가는데, 사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거지요. 언어를 죽이면서 언어를 포착하는 작업으로 보면, 표현이 달라져야 된다는 거지요. 뭐 깊이 생각한 게 아니라, 마음대로 쓰다보니 그런 생각이 설핏들었고 걍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ㅋ. 여하튼 좀 알아 보고는 싶군요.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사고나 표현은 어떻게 되는지. 근데 어쨌거나 난 언어를 살해하는 킬러라는 착상(내 맘대로 규정한 ? )은 마음에 들어요. 결국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죠. 알츠하이머에 의해 킬러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죽인 언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하는 거죠.
 
여인의 초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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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헨리 제임스가 누군지 몰랐다. 지인이 ‘제임스’, ‘제임스’ 할 때마다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랐으며, ‘제임스’란 단어가 이름도 되고, 성도 되는 그들의 문화가 영 낯설 뿐이었다. 헨리 제임스는 19C 미국의 대표 작가라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얼마 없었다. 도서관에서 찾은 <여인의 초상>은 총 세권 중 한권이 분실되고 없었다. 1997년 ‘인화’ 출판사에서 발간한 그 책은 이미 절판 상태였다. 나는 친구를 통하여 어느 대학 도서관을 통해 이 빠진 한권을 마저 구해서 어렵게 <여인의 초상> 전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한 4년인가 5년쯤인가 전이었다.

 

  작년 말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298권으로 <여인의 초상>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연이어 <레미제라블>도 5권이 완역되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열풍을 타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도 엄청나게 팔렸다. 물론 성급하게 5권을 한꺼번에 구매한 독자들이 그 길고 지루한 책을 다 읽었을지 조금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그 덕에 <레미제라블>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에 감동한 새언니와 오빠를 부추겼는데, 오빠는 아직도 2권의 워털루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걸 본 새언니는 입시공부라도 할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노라 선언했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여인의 초상>은 1881년에 출간되었다. 20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물론 프랑스와 영국(혹은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이 두 소설의 배경과 주제는 완전히 다르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혁명의 혼돈기를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인의 초상>은 대륙의 상류사회에 편입하다 좌초하는 미국 상류층 아가씨의 쓰라린 인생담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설을 가져다 놓고, 왜 이렇게 다르냐고 따진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레미제라블>을 읽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다시 <여인의 초상>을 읽으니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유럽을 휩쓸고 있는 혁명인데. 혁명이란 그저 ‘red'가 주는 숭고한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다수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분노이자 웅변인데. 1861년, 영국에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헨리 제임스가 무슨 죄가 있을까만, 하여튼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인의 초상>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인의 초상>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이렇다. 지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아름다운 미국인 처녀가 유럽에 건너가서 우연찮게 막대한 유산을 받고 거의 ‘완벽한 여인’이 되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인생을 쫄딱 망쳤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 여인은 어떤 결심을 하고 끔찍한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우리 고향 천박한 속담으로 ‘지 눈까리 지가 찔렀다.’고 하는 딱 그런 상황이다. 순진하고 착하고 똑똑한 처녀가 흔히 겪는 비극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당했다가 앗 뜨거 할 때는 대부분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환타지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는 ‘그 깨달음 이후’의 ‘여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물론 대중적이면 대중적일수록 여인은 수퍼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복수한다는 스토리에 가깝다. 어떻게 갑자기 수퍼우먼이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은 항상 궁금하지만, 뭐 어쨌든 대강 그렇게 되어 해피앤딩이 되면, 환타지든 뭐든 속이 조금 개운한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화장실 갔다가 물 안 내리고 나온 느낌은 안 드는 정도는 된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뭐가 됐든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판타지를 맞이할 수 있다. 현실은 영원히 유예된 채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기이하다. 이사벨은 남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후, 사촌 오빠 랠프의 임종을 위해 로마에서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사벨은 랠프의 장례를 치르고 난후,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구혼해왔던 워버튼경과 캐스파 굿우드를 물리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왜?

  작가 헨리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1,000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사벨은 혼란 속에 갈팡질팡하는데, 딱 두 페이지를 남겨놓고, “그녀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앞에 똑 바른 길이 보였던 것이다.” 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날 굿우드가 이사벨의 친구로부터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 긴 소설은 끝이 난다. 이사벨은 도대체 어떤 길을 보았던 것일까?

 

 물론 ‘인습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한 여인이 현실의 시련 속에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정교하게 그린 19C 미국 소설의 걸작’, ‘20C 현대 소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모범 작품’ 이니 만큼, 그 분석과 해석에 관한 엄청나게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 각각에 이사벨의 ‘똑바른 길’에 대한 모범 답안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민음사판 작품해설은 살짝 읽어보았다. 작품해설을 쓴 사람이 옮긴이인지 민음사 편집진인지 누군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이 책의 결말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성숙된 자아에 도달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 자신의 진정한 초상이 완성되는 길인 것이다.” 본문이나 해설이나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현대적 관점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의 선택은 당연히 ‘이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혼이 스스로 선택한 결혼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논지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의 선택이 ‘똑바른 길’ 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880년대와 2010년대의 차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의 태도로 볼 때, 1880년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사벨에게 로마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이사벨은 도대체 왜 돌아간 것일까?

 

 로마로 돌아간 이사벨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 싶다. 아마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벨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남편과 대립할 것이고, 남편으로부터 의붓딸 팬지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이사벨은 결코 인습으로 굳어진 유럽을 상징하는 남편 오스몬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헨리 제임스의 몇몇 소설 중 <데이지 밀러>와 <아메리칸>은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폐쇄적인 유럽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는 자유롭고 활달하고 싱싱한 아메리칸들의 실패담이다. 이사벨 역시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극소차이’라고 불리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 차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차이. 실패한 선택 속에 당황하며 좌절하는 삶과 실패한 선택임을 인정하고 싸우며 좌절하는 삶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극소차이’일 것이다. 나는 물론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가는 것만이 선택에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사벨이 이혼을 하고 독립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패한 선택에 대한 당당한 인정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드러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 태도란 타인의 눈으로는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 앞에 어리둥절한다. ‘암흑의 집, 침묵의 집, 질식의 집’ 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 이사벨 앞에, 캐스파 굿우드처럼.

  그러나 이사벨은 그 집 앞에서 아마도 다른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을. 。。。하지만 이사벨은 여전히 이해되기 어렵다, 이 시대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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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1 - 위험한 서막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서래.김옥수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2011년 10월28일 카페 과제물입니다. 과제는 '가브리엘 타르드를 소개하시오' 였는데, 이 때는 국내에 타르드(따드)가 번역되기 전입니다. 고로 리뷰상품과는 관계없습니다. 타르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A4 10매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제 글 속에 파운데이션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혹시 ‘히치칵’을 아세요?

몇 년 전, 어떤 책을 읽는데 내용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자꾸 히치칵이란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책이 조금만 쉬웠다면 저도 단박에 아하, 히치콕 했을 텐데, 안 그래도 기가 죽은 터라, 이 히치칵이 그 히치콕인지 정말 알쏭달쏭했어요.

제가 히치콕 영화를 잘 알았던 것도 아니거든요.

나중에야 히치콕을 ‘히치코크’라고도 하고 ‘히치칵’이라고도 한다는 걸 알았죠.

예전 고등학교 시절 윤리 교과서에 ‘키에르케고르’라고 있었거든요.

그 분은 요즘 ‘키르케고르’라고도 불리더군요.

여기까진 일종의 진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발음에 충실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경우도 있고요.

또 예전엔 영어 번역본을 다시 번역하는 이중 번역이 많았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저자의 모국어로 쓰인 원본을 직접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아요.

시대를 따라 가야하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너무 투덜댈 수는 없겠죠.

그런데 한 번은 진짜 황당한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느 슬로베니아 학자가 영어로 책을 쓰면서 외국의 어떤 사람을 언급했는데요, 그 학자는 독어로 표기된 이 사람의 이름을 보고서 영어로 옮긴 거거든요.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에 이 책이 번역되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김영일”

누군지 아시겠어요?

네, 북한의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이 돌고 돌아 우리나라 번역가에 의해 김영일로 개명된 거죠.

이럴 땐 그저 웃을 수밖에요.

 

 

이쯤 되면 눈치 채셨나요?

네, 글쎄 ‘따드’가 없더라구요.

할 수 없이 Tarde를 쳤죠.

그제야 영어 사전 항목 안에 검색되는 것이 있더군요.

 

Gabriel, 타르드(1843-1904): 프랑스의 사회학자·범죄학자.

 

아무래도 따드는 영어권을 거쳐 중개 무역 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걸까요?

 

어쨌든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은

“쪽글 10.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 에 대해 열심히 답하는 거겠죠.

그런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따드님이 베일에 싸인 분이라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은 그 베일을 벗길 생각은 말라고 하셨죠.

어짜피 벗겨봐야 나오는 것도 없을 테니 쓰잘데기 없이 끙끙거리지 말고 차라리 베일에 장식을 달아 보라고 하시네요.

리본을 달건, 꽃을 달건, 방울을 달건 재주껏 달아 보라는 건데, 그렇다고 따드를 김영일 꼴로 만들 순 없잖아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김정일을 김영일로 만드는 건 할아버지가 될 판이네요.

하마터면 타르트가 돼 버릴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케잌인지 과자인지 애매모호한데 맛있는 것 있잖아요.

‘타르드’를 검색하면 지식백과 아래로 블로그와 웹문서들이 뜨는데 몇 개 안되는 따드 관련 글에 이어 바로 에그 타르트 만드는 법, 딸기 타르트 먹고 싶어요 등등의 글들이 주루룩 달려 있죠.

어쨌거나 거기까진 가지 않아야 할 텐데, 일단 출발해 보기로 해요.

 

 

 

 

따드의 행적을 쫒을 ...라기 보다는 상상할 몇 가지 단서들이 있어요.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사회학적 심리학’ 이네요.

다음으로 따드의 가장 유명한 책이라는 ‘모방의 법칙’ 이 있구요.

이런 건 지식백과에 바로 보이는 거라 다들 아시겠죠.

참, 친절하신 우리 카이로스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있어요.

따드는 ‘뒤르켐의 논적’이고, 뒤르켐이 자살론 1부 4장에서 따드의 모방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죠.

아, 그리고 ‘들뢰즈’가 있네요.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시네요.

‘드봉’도 있군요. 드봉의 군중 개념을 따드는 공중 개념과 분리해서 사고했다는 듯하네요.

또 단서를 주신 분이 있는데요.

네이버 블로거 한 분이 타르드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많이도 쓰셨네요.

다들 찾으셨을 것 같아요.

읽어 보시면 ‘경제 심리학’ 이라는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편의 글을 쪼개 썼다는 걸 알 수 있으실 건데요.

다른 분의 글은 거의 없는 셈이니, 자칫하면 우리는 이 분을 통해 따드를 수용할 위험(?)에 처해 있군요.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지는 않고, 공부 중인 분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쨌거나 감사를 드리고요,

그렇다 해도 어짜피 저희가 갈 길은 학습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이니 각자 필요한 만큼만 참고하심 될 것 같아요.

 

 

 

저는 먼저 심리학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심리학책이 얼마나 많은지 혹시 헤아려 보셨어요?

물론 저도 안했지요.

그런데 도서관에 가 보니 진짜 많긴 많더라구요.

철학책이 겨우 서가 하나를 차지할 정도라면, 심리학책은 서가 세 개를 채우고도 남더군요.

종류도 참 다양해요.

남성 심리, 여성 심리, 아동 심리 뭐 이런 건 기본이고요.

거짓말 심리, 몸짓 심리, 혈액형 심리, 욕망 심리, 불안 심리, 항공 심리 등등에다 심지어는 사주 심리까지 있더군요.

그렇게 별별 심리를 다 파헤쳐 주는데 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지 모를 지경으로 책들이 많더군요.

뒤바꼈다구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심리니 그렇게 책들이 많다고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러면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도서관에 “나는 너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라는 책이 있었어요.

음...그렇다는건, 따드를 알면 “우리는 사회를 책처럼 읽을 수 있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사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사회가 그러니까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으로서의 ‘공중’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자꾸 의문문으로 끝이 나니까, 부담스러우시다구요? 저도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이게 최선인 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는 것도 없고, 읽은 것도 없이, 달랑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혀를 풀려니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그건그렇고, 일단 잘만하면 사회구성체로서의 사람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게되면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할 수 있겠죠.

주역을 풀거나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면 이쯤에서 다들 생각나시는 책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저번에, 그렇게 말했는데 읽어 보는 놈도 없고 말이야 하셨던, 그 책 말이예요.

저는 그 책을 20년 전쯤에 읽었어요.

어떤 잘생긴 남자가 진짜 재밌다고 해서 몽땅 사서 밤을 새서 읽었죠.

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바로 그 책 말입니다.

뭐 한마디로 하라면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마음이죠.

그 후로 아시모프의 책들을 마구 찾아서 읽었답니다.

‘사회학적 심리학’

요 단어를 딱 보았을 때, 진짜 거짓말 안하고 파운데이션이 떠올랐답니다.

 

샐던이라는 수학자가 모델을 만들었거든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행해왔던 행동 패턴들을 대입해서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 말이예요.

요것이 제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인데, 거의 20년 전 기억이잖아요.

당연히 믿을 수가 없죠.

책을 찾아볼까 했는데 도서관에 없더군요.

아, 도서관은 왜 그런가 모르겠어요.

퇴마록 같은 책들은 잔뜩 있는데 말이예요.

그래서 또 검색을 할 수 밖에요.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오는 군요.

 

 

“심리역사학자, 해리 샐던(Hari Seldon)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심리역사학이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기반이 된다. 해리 샐던은 기체 분자의 운동역학을 인간 집단에 적용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낸다. 분자 개개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공기 전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개개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예측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해리 샐던은 연구를 계속하다, 은하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은하 제국이 몰락하며, 몰락 후에는 3만년에 달하는 거대한 암흑기가 찾아올 것을 예견한다. 인류는 3만년의 암흑기 후에 제 2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역사의 대세는 제국 몰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해리 샐던은 제국 몰락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암흑기를 천년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파운데이션(Foundation)으로,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성과를 두 행성으로 피난시켜 암흑기를 줄이는 것이었다. 제1 파운데이션은 터미너스(Terminus)행성에 자리 잡는다. 제 2파운데이션은 제 1파운데이션의 은하계 반대편에 위치하게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나고, 인류는 해리 샐던이 예견한대로 암흑기를 헤쳐 나가게 되는데‥‥‥.”

 

 

아, 수학자가 아니고 “심리 역사학자” 였군요.

어쨌거나 집단으로서의 인간 즉 생물체로서의 사회는 예측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도 제국의 몰락은 막을 수 없지만, 암흑기를 줄이고 그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건데요.

요기서 또 생각나는 것이 영화 ‘2012’ 이고, 당연 연상되는 건 노아의 방주죠.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살아남는 것에 있는 걸까요?

도대체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유전자일까요? 문화일까요?

'깨끗하게 멸망하면 되지 뭐' 같은 생각은 반-인간적 배신일까요? 흐흐..

하여튼 2012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거예요.

함선에 올라 탈 사람을 선정하는 방식이요.

거기엔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거나 합의라거나 그런 건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죠.

그냥 일방적이예요.

사실상 그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도 없고요.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제비뽑기? 레이디 먼저? 토론? 합의?

통치자들이 무조건적으로 결단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대중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없죠.

그저 결정되면 그걸로 끝이예요.

마치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처럼요.

사람들이 법의 기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 그것은 더 이상 법으로서 기능할 수가 없지요.

왕에게 네가 왜 왕이야? 하고 묻기 시작하면 왕정은 볼 일 다 본 셈이지요.

그런데 2012가 재밌는 부분이 그 어두운 기원을 감추는 교묘한 속임수죠.

마지막에 막 몰려든 사람들을 태우잖아요, 좌초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예요.

거기엔 소문 듣고 몰려 든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배를 만든 노동자들도 있죠.

쥔공 과학자가 휴머니즘에 막 호소를 하면서 결국 문을 열게 되잖아요.

그걸로 마치 새로운 세계가 인도주의적 바탕 위에 세워진 것처럼요.

한마디로 웃기고 자빠졌죠.

자기들 빼고 전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왜 죽는지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게 해 놓고는 막판에 가서 겨우 수 천인가 수 만명인가 더 살렸다고, 인간성 만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죠.

애초에 그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조 자체가 아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요.

물론 다른 방법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 기원의 심연을 그렇게 감추려 하지 말라는 거죠.

 

 

아차차...이런 또 함정에 빠진 기분인 걸요.

‘상상하라’에 사로잡혀 너무 멀리 날아다닌 것 같아요.

'따드'가 '타르트'는커녕 '호떡'이 될 판이군요.

다시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갈께요.

파운데이션의 ‘역사학적 심리학’ 을 거쳐서요.

다른 건 아는 것이 없는 걸요 뭐.

혹시 지금 읽고 계신 분은 이걸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샐던이 죽고 난 뒤에도 중간 중간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나잖아요.

자기 예측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돌발 변수는 없는지 확인하고, 조언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기억은 워낙 희미하지만.

이런 건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구요.

파운데이션을 가지고 제대로 쓴 감상문이나 비평문도 없고요.

 

 

샐던 모델에 가장 중요한 하나의 조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미래를 몰라야 한다는 거죠.

몇 년 뒤에 제국이 망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보세요, 당장 난리가 날거예요.

돌발변수죠.

시기에 따라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변수로 넣어 놓은 모델일 텐데 여기에 돌발 변수가 들어가면 결과는 끝장 난 거죠.

그렇게 몇 번의 위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뭐 아님 말고요.

어쨌든 인간 집단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연구 대상은 그 연구 자체의 존재나 목적이나 진행 상황을 전혀 몰라야 한다는 건, 그럴 듯 하잖아요?

영화 ‘2012’가 전 인류를 무지 속에 멸망시킨 이유도 사람들이 멸망을 알게 되면 그나마 인류 존속 프로젝트마저 진행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씨를 말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구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요.

샐던 모델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눈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인간집단의 심리를 대입해 놓고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바라보려면 인간 집단의 바깥에 존재하는 뭔가가 있어야 말이 되죠.

그런데 요즘 학자들 말로는 그 ‘밖’이라는 건 없다고들 하잖아요.

신이 사라졌으니까요.

사실 요즘 신은 거의 산타크로스와 비슷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은 하잖아요.

그러면서 크리스마스가 오면 야단법석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문화’라는 거야, 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우리가 진짜 믿지는 않는 것이 바로 문화라구요.

여튼 신이 없는데 누가 인간 바깥의 그 초월적 자리에서 인간 고놈들 참, 그러고 혀를 차겠어요?

샐던요?

모델을 만들었다는 샐던은 가능하다고요?

글쎄 그럴까요?

샐던이 뇌에 무슨 주사를 맞고 자기가 한 일을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는 한, 오히려 샐던 그 자체가 커다란 변수가 될 것 같은 걸요.

제가 얼마 전 글에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했던 것 중 하나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인데요.

왜 하나의 체계는 스스로 증명될 수 없는 공리를 적어도 하나는 가지고 있고, 그 체계의 완전성과 무모순성은 체계 논리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거요.

제가 늘 하는 대로 용감무식 거두절미하면 완전한 체계 같은 건 없다는 건데요.

그런데 체계의 구멍은 사실 체계가 만들어진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아요.

‘2012’에서 봤잖아요.

새로운 세계를 열면서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걍 자기들끼리 살아남을 궁리를 다 짜놓고는 막판에 가서 이 세계는 휴머니즘 위에 서있다 요따구로 포장하잖아요.

나중에 그 세계의 후손들은 그 휴머니즘적 전설만 기억하게 되겠죠.

그들의 세계가 자신들의 조상 이외에는 모든 인류를 몰살 속에 방치하고 세워졌다는 그 무시무시한 기원은 싸악 묻혀 진 채로요.

다른 영화도 보통 보면 나쁜 놈이 머리 좋은 놈을 잡아와서 다 만들게 해놓고는 제일 먼저 하는 짓이 그걸 만든 놈을 일단 죽여 버리는 거잖아요.

만든 놈이 있으면 그것의 약점이, 그러니까 구멍이 드러나게 될 위험이 크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그 흔적이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죠.

죽은 놈이 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니까요.

 

 

갑자기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네요.

뜬금없으시겠지만 한번 들어보셔요.

사마르칸트의 어느 마을에 총각 하나가 살았는데, 글쎄 자기가 내일 저녁이면 죽는다는 예언을 들어 버렸지 뭐예요.

잠이 올 턱이 없겠죠.

그래서 이 총각이 살아 보려고, 밤새도록 말을 달려서 아무도 없는 어느 사막으로 숨어들었는데, 글쎄 거기서 딱하고 저승사자를 만나 버린거예요.

그런데 이 총각 보다 더 당황한 저승사자 왈,

당신을 데리고 가기 싫어서, 당신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막으로 도망을 왔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 많이 아시죠?

물론 제일로 유명한 사람이 오디푸스죠.

운명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그 운명이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인간이란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운명을 알고 네, 알겠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그러니까 인간의 장대한 역사가 또 이렇게 쓰이는 거겠죠.

그런데 도대체 이 얘기와 사회학적 심리학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음....글쎄요;;

연관이 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저도 모르겠어요 흐흐;;;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조금만 더 얘기해 보면요.

결국 운명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운명을 완성시킨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요?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운명을 받아들여 버린 것과 같다는 걸요.

거꾸로 그래 그게 내 운명이야? 알았어! 운명이라니 할 수 없지 뭐. 라고 하는 겉보기에는 체념적인 태도가 오히려 운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허물어뜨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죠.

중요한 건 그 프레임에 갇히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인 것 같아요.

운명을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운명의 프레임에 갇혀 버리죠.

그리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운명의 늪에 빠져 들게 되고, 그래서 운명은 운명이 되 버리는 거예요.

어제 ‘뿌리 깊은 나무’ 보셨어요?

세종의 마지막 대사가 대충 이거죠.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돌아서서 혼자 말을 하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운명?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갈란다 그렇게 나가면 똘복이가 제 아무리 절치부심해도 세종이 암살당할 염려가 없는 것처럼, 운명이 우리를 막아서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오디푸스 얘기를 하다 보니 또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그런데 이 연상이란 게 참, 좀 그런 것 같아요.

별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하다보면 막 떠오른단 말이죠.

제 무의식은 그걸 연관 지워 놓고 있는 걸까요?

언제가 되면 저는 그걸 의식 위로 길어 올려 말이 되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어쨌든 이번 과제의 표면적 방법론은 ‘상상학’ 이잖아요.

저는 일단 가 볼 테니, 그냥 허허 웃어 주세요.

혹시, 여러분이 그것들을 어떻게 연관 지워 주실 수도 있잖아요.

 

뭐냐하면요, 죄수의 딜레마라는 거요.

 

“공범A,B 두 명의 죄수 중 자수를 한다면 감형을 받을 수 있고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해서 죄를 인정 안하면 역시 감형을 받을 수 있으나

둘 중 어느 한명이 자수를 했을 때 자수하지 않은 다른 한명은 더 무거운 형벌을 당하는 조건일 때 죄수들은 딜레마에 빠진다는 건데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엔 서로 자백을 하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검색하시면 대충 이렇게 나와요.

인간처럼 믿을 게 없다는 말, 많이 듣고 살잖아요.

 

예전 동구권에 이런 일도 실제 있었다는 군요.

어느 날 그 나라에, 휴지가 동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대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알고는 있었죠.

다만 소문일 뿐이라는 걸요.

실제로는 가게마다 휴지가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실제로 휴지가 동이 나 버려요.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거죠.

혹시 그 소문을 믿고 바보 같은 놈들이 휴지를 다 사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자기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휴지를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병신 같은 놈들 때문에 개고생이네 어쩌네 하면서 휴지를 사러 가겠죠.

그렇게 해서 그 나라의 소문은 현실이 되는 거죠.

 

이 얘기는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적도 있죠.

덕만이 소문을 내 버리잖아요.

왕실에서 쌀을 푼다고요.

군량미도 확 풀어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죠.

그러자 귀족들이 쌀값을 올리려고 비싼 값에 매점매석해 놓은 쌀이 갑자기 똥값이 되기 시작하잖아요.

실제로 왕실에서 군량미를 풀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귀족들은 당할 수밖에요.

사람들이 쌀을 안 사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치킨 게임을 할려면 밑천이 두둑해야 하는데, 군소귀족들은 못버텨요.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들면 한 사람 두 사람 내다 팔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바로 공황이죠.

너도 나도 투매죠.

결국 덕만은 군량미엔 손도 안 대고 쌀값을 잡아내죠.

 

 

사람 심리는 진짜 복잡하죠.

오죽했으면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했겠어요.

저는 이걸 이인화의 책 제목이라고 알았는데, 사실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구절이라네요.

인간은 좀 불투명한 존재인 것 같긴 해요.

제가 제 속을 들여다봐도 그렇고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다잖아요.

내 속에 나 보다 더 한 그것이 있다는데 아무리 제 몸뚱이라도 지가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몸뚱이 아니라 정신이라고요?

‘정신은 뼈다’는 말도 있다니까요. 정말 이예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하여튼 정신은 두개골은 아니지만 또 정신이 뼈라고 안 할 수도 없다고 했다고요.

 

그런데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어떨까요?

우리가 속 들여다보인다 보여, 할 때 그 속 말고요.

 

영화 ‘아바타’ 보셨죠?

나비족들이 이크란하고 교감 할 때, 말 꼬리처럼 생긴 긴 머리 꽁댕이를 서로 접촉하잖아요.

그러면 말도 필요 없고 몸짓도 필요 없어요.

그냥 저절로 서로를 알게 되요.

차라리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참 멋진 세상이 될까요?

일단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어지겠지요.

서로 싸울 필요도 없고요.

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으니 머리 굴릴 필요도 없고 그래서 머리 굴려서 생겨나는 갖가지 못된 짓들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소용없는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요.

 

가령 이럴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과제를 내면 그 순간 저희는 바로 선생님의 의도는 물론 함정도 다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답도 뻔히 알 테니, 지금 제가 하는 것 같은 삽질 따위는 있지도 않겠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구요.

다 똑 같을 테니까요.

개성도 없고 상상도 없고 문화도 없겠죠.

아주 멋진 신세계가 되겠군요.

사람의 속을 모른 다는 것, 혹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사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오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해 지겠죠.

소통의 노력 속에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구요.

결국 인간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자연 속에서 꽃이나 나비처럼 평화롭게 살긴 하겠지만, 인간은 아닐 것 같거든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성을 버린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군요.

이야기가 삐딱하다구요?

그래서 저는 아바타 같은 영화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이 그리 탐탁하지 않아요.

 

 

 

 

자, 이제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으로 돌아 갈 시간이군요.

저는 물론 따드의 이 심리학이 무슨 심리학인지 몰라요.

여러분은 어려운 원서도 읽고 논문도 좀 찾아 보셨나요?

저는 심리학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조금 의문이 들어요.

그 대상이 인간 개인이 아니라 인간 집단인 사회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고요.

오해라고요?

전 모르죠.

‘따드’도 그렇고 사회학적 심리학도 그렇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니까요.

그런데 사회를 분석한다거나 해석한다는 말은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 분석이나 해석과 심리는 좀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신분석 있잖아요.

그런데 정신분석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 굉장히 싫어하고, 아마 심리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프로이트를 두고 서로 당기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프로이트의 제자 융이 집단 심리학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프로이트가 융을 싫어했다는 말도 들은 것 같고요.

심리학을 한 융은 프로이트의 진짜 제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라깡학파는 융이나 심리학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무슨 학파는 되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정신분석에 조금 관심이 있어요.

정신분석은 자기 스스로는 못한다고 하는데요, 어쨌든 나는 왜 요 모양의 인간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제가 봐도 왜 제가 이런지 도통 알 수도 없고, 쫌 그래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심리 보다는 분석 쪽을 신뢰하는 편이예요.

사회를 대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심리 파악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의 경험이 또 하나 생각나네요.

얼마 전 MBTI인가 애니어그램인가 뭐 그런 성격 분석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그 전에 한의학에서는 또 사상체질이라는 게 유행했죠.

둘 다 사람을 어떤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거죠.

주로 심리를 분석하죠.

어떤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걸 선택하느냐 뭐 그런 질문들로 분석을 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제게 사상체질을 가지고 제품 개발을 하라는 업무가 떨어졌어요.

저는 열심히 책도 읽고 의사들도 찾아다니고 그랬죠.

그런데 결론은 이거였어요.

정확한 체질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죠.

아니면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체질이 있다는 거구요.

편의상 몇 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그게 다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실제로 병이 나고 그래서 치료를 해봐야 사후에나 정확히 그것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인간의 내면을 분석하고 그걸로 어떤 틀을 씌운다는 것 사실 딱 봐도 좀 엉성해 보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건 어쩌면 역설 같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만큼 심리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한 것 같아요.

쉽게 알 수 없고, 어렵게도 알 수 없고, 잘 알 수 없으니까 자꾸 알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요?

 

 

‘따드’의 ‘사회학적 심리학’ 하나로 참 쓸데없는 말을 길게도 했네요.

아직 뒤르켐이나 드봉, 들뢰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말이죠.

더 할 말이 남았냐구요?

말이 돼야 한다는 압박만 없으면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ㅎㅎ.

제가 처음 보면 말도 없고 숫기도 없고 그런데, 가만가만 말을 시켜 놓으면 또 끝도 없이 주절대는 버릇이 있어요.

말리고 싶어도 못 말리실 거구요.

그 땐 그냥 자리를 떠버리세요.

 

 

이번 과제는 꼭 10매를 채워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이란 게 또 한 번 나아가면 뒤로 물러나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기왕에 오기가 생기는 거죠.

사실 이번 과제가 너무하긴 해요.

책도 읽을 필요 없다, 자료도 별로 없다, 그러면서 이름 하나 달랑 던져 주시고는 과제를 3편이나 제출하라니요.

여기서 없는 얘기 다 지어내고 나면, 나머지 두 편을 뭘로 채우나 걱정이 많이 되긴 돼요.

역시 뒤르켐이나 들뢰즈는 남겨 둬야 할까요?

그래도 이왕 말도 나왔고,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시오’가 과젠데, 사회학적 심리학 말만하고 끝내기에는 좀 성의가 없어 뵐 것 같아요.

나름대로 들뢰즈가 어떤 말을 했는가도 찾아 봤고,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따드를 비판하는 부분도 다시 읽었거든요.

그렇게 그저 먹은 것은 아니라고 ㅎㅎ 주장하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들뢰즈를 알게 되었냐하면요.

몇 년 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노마디즘이란 책을 보게 되었어요.

물론 완전 우연은 아니고요.

이진경이라는 분이 유명하잖아요.

1980년대의 그 전설적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읽어 보진 못했지만 소문은 듣고 있었죠.

그 후에 이진경은 프랑스로 가서 들뢰즈를 연구했나 봐요.

저는 ‘철학과 굴뚝 청소부’, ‘철학의 모험’ 같은 책을 보게 됐고 이진경에 관심을 가졌죠.

‘노마디즘’은 이진경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기 쉽게 풀이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어요.

일종의 해설집이죠.

지금도 수유N이라는 공간에서 노마디즘 강의를 하는 걸로 알아요.

어쨌든 들뢰즈가 따드를 부활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는 ‘노마디즘’을 뒤졌죠.

‘천의 고원’은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으니, 노마디즘을 찾는게 당연한 순서겠죠.(물론 노마디즘을 다 읽은 것도 아니예요 ㅎ)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의 ‘3) 믿음·욕망의 흐름과 권력’ 편에 따드가 3쪽 정도에 걸쳐 언급되고 있어요.

복잡한 얘기여서 옮길 재주는 없고요.

그리고 지금 여기는 상상의 장이니, 딱딱한 이야기 별로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사회적인 집합표상 내지 표상체계와 같이 거대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던 뒤르켐과 달리 타르드는 미시적인 믿음이나 태도 등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어요.”

라는 표현만 소개해 드릴께요.

들뢰즈의 용어로 하면, 뒤르켐은 몰적인 대상에, 따드는 분자적 대상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분자적 대상을 주 테마로 하는 들뢰즈는 당연 따드를 좋아했겠죠.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또 까다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하니 직접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은 둘이 함께 쓴 책이예요) 는 따드가 하려고 했던 것이 개인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이나 욕망의 흐름 내지 파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는가 하는 데 관한 것 ”이었다고 이진경이 설명하고 있군요.

 

 

음...이렇게 되면 또 어떻게 되나요?

제가 앞에 풀었던 상상의 나래는 이 산이 아니고 저 산으로 날았던 셈인가요?

어쨌든 따드를 쫒아가니 뒤르켐은 물론 들뢰즈가 나오고, 들뢰즈가 나왔으니 스피노자까지 나와야 하는 걸까요?

어려운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슬슬 지치는 군요.

아직 한 사람이 안 나왔는데 말이죠.

드봉이라고.

‘군중 심리’ 라는 책이 대표작이라는데, 이건 또 서점에 떡하니 꽂혀 있더라고요.

앞부분만 살짝 넘겨봤는데 군중이란 얼마나 우매한 우중인가로 시작하는 듯 했어요.

요것도 읽어 보실 수 있겠죠?

 

 

자, 이제 진짜로 끝낼께요.

저도 온 몸이 뒤틀리는 군요.

이런 저런 자료들의 단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Garbriel tarde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하” 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겠죠.

아니, 각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고요?

뭐 어쨌거나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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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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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25일 카페 과제물입니다.  체스트턴의 책 리뷰는 아니고, 책에 나오는 ' 철학경찰'에 착안한 글입니다. 과제는 내가 어떤 학파의 태두가 된다면?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과제는 순전히 소설이다. 태두는커녕 학파에 한 다리 걸쳐볼 꿈도 꾸기 힘든 판이니 학파의 정의고 태두의 정의고 뭐고 그냥 소설로 나가야겠다. 이 때 소설은 그 소설이 아니고 소설 쓴다, 소설 써! 의 그 소설이다 ;; 



나는 철학 경찰 학파의 태두이다. 물론 처음 철학 경찰을 제안한 그 분은 일종의 사상 검열 같은 역할을 철학 경찰의 임무로 주창하셨지만, 우리 학파의 임무는 전혀 다르다. 일단 그 분은 하이데거가 파시즘에 논리를 제공하고, 맑스가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에 열 받으시어, 전체주의 같은 극악무도한 체제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철학을 발본색원 하시기를 염원하셨다. 그러나 히틀러가 하이데거의 책임이고 스탈린이 맑스의 책임이냐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분분하고, 우리 학파는 사실 그런 거창한 문제에는 각별한 관심을 가질 깜냥도 주제도 못되는 바, 단지 철학 경찰이라는 이름만을 그 분에게서 빌려왔음을 밝혀둔다. 또한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는바 우리 학파는 그 분의 철학 경찰 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물론 경찰이라는 것의 본분이 민중의 몽둥이 인 것이 사실이다. 국가는 민주적 법으로 지탱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법이라는 것의 실체가 몽둥이이다. 이해하시기 어려운 분들은 2008년부터 2010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신문들만 주욱 훑어보시면 된다. 이왕 보시는 김에 조중동 말고 한겨레, 경향 같은 것들로 보시면 좀 더 상황 판단을 빨리 하실 수 있다. 물론 다음 아고라를 이용하셔도 된다. 그러나 몽둥이도 사용하기에 따라 지팡이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우리 학파가 오해의 여지를 무릎 쓰고 철학 경찰 학파로 이름을 삼은 이유이다.


우리 철학 경찰 학파의 임무는 아래와 같다.

1.  각종 철학 관련 서적의 번역판을 저자별로 분류하여, 번역상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낸다. 단, 이 때 철학서라 함은 일반인들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입문서나 기초서로 너무 전문적인 영역은 우리 학파의 능력을 넘어서는 관계로 다루지 아니한다.

2.  오류가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번역가를 소환하여 진술서를 작성한다. 이때 허용 범위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 주어 술어 목적어의 관계가 불분명하여 문장의 뜻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우리 철학 경찰 학파가 탄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영문 서적의 번역본을 예로 들면 영문에서는 문장이 길어지는 경우 주로 S+V+O+which ~ 구문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문장의 목적어는 명확하다. which 구문은 단지 목적어를 설명하거나 수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될 경우, 동사가 문장의 맨 나중에 나오는 문장 구조 상 동사의 진짜 목적어와 which 구문 안의 여러 명사가 뒤엉켜 어느 것이 목적어이고 어느 것이 which 구문 안의 목적어인지 구별 불가능할 때가 많다. 심각한 경우에는 이것 때문에 문장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바뀌기도 한다.

② 주요 개념어의 번역상의 불일치로 독해를 쓸데없이 힘들게 한다.

    이를테면 noumenal의 경우 본체적, 예지적, 가상적 이란 말이 병용된다. 도대체 본체와 예지와 가상이 어떻게 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철학에는 철학 용어의 정의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일반인도 읽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일반인도 철학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최소한의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본 본체와 저 책에서 본 가상이 동일한 noumenal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한,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축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자에 따라 혹은 번역가에 따라 그 단어를 꼭 고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럴 때는 각주를 통해 자기가 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는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③ 읽어도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고,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어서, 책 자체를 누더기로 만든다.

   슬프지만 이런 번역 책 더러 있다. 앞 문장에서는 그렇다고 했다가 뒷문장 가면 뜻이 완전히 바뀌어 어느 것이 저자의 견해인지 알아먹을 재간이 없을 때가 있다. 또한 한글 문장으로만 두고 봤을 때 육하원칙은커녕 중이 염불을 하는 건지 강아지가 풀을 뜯어 먹는 건지 문장 구조가 성립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많지만 사소한 것들은 허용 범위로 인정하고 넘어 간다.

3. 이상의 기준으로 범죄 요건이 성립되면, 1차 수정을 권고한다. 시행되지 않으면 2차 수정을 강제한다. 계속 버티면 3차 책을 모두 모아 폐기한다.

4. 이미 발간되어 배포된 책에 대해서는 수정분을 부록으로 발간하여 별도로 발송하거나 웹상에 공지한다. 아직 배포되지 않은 책은 수정분을 별첨하여 판매한다.


우리는 철학 경찰의 실질적인 임무와 철학 경찰 학파라는 학술적 임무를 동시에 부여 받는다. 우리 철학 경찰은 임무의 특성상 상부 기관인 검찰이나 별도의 판결 기구인 사법부를 따로 두지 아니한다. 우리의 권력은 순전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민중은 전문 학자들처럼 철학 서적을 읽을 권리와 일종의 의무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국가를 일부 철학 엘리트의 손에서 농단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중 스스로 지배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도 스스로 사고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어학 실력 따위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한글만 깨치면 모든 학문에서 소외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리 철학 경찰의 임무는 매년 열리는 일반 민중 철학 총회에서 새롭게 인준 받거나 수정 받는다.



네, 이상의 소설은 제가 몇 몇 책을 읽으면서 느낀 답답함에 대한 한풀이입니다. 그런데 진짜 번역 좀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ㅠ.ㅠ.... 진짜 내용 파악하기도 힘든데, 말도 안되는 문장 만나면 참으로 막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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