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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읽은 것은 책이 아니다. 점토판이다. 4,800년 전에 있었던 역사를 바탕으로 최소 4,600년 전부터 토판에 새겨 온 이야기다. 거듭 거듭 다듬고 다듬으며 전해지는 수 천년 동안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고, 그 중 가장 완성된 형태의 판본이 19세기 말, 영국인에 의해, 2,600년 전 서아시아를 통일했던 앗시리아 제국의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12개의 토판 중 11개의 토판은 3,600년 전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킨 카시트족의 대서기관 신-리키-운니니가 개작한 판본이다. 현대의 <길가메쉬 서사시>는 대개 이 운니니 판본을 토대로 하고 있다.
4,600년 → 3,600년 → 2,600년 전까지 끊이지 않고 전승되었던 인류 최초의 영웅, 길가메쉬가 홀연히 나타나 오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곰을 만나기도 훨씬 전의 그 이야기가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류가 남긴 혹은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문학 -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가 문학의 원형 (原型)인 동시에 완성태라고 한다면 과장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엉터리없는 감탄사에 불과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가 고전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이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EBS 특별기획 <통찰>에서 길가메쉬 서사시 강연을 한 배철현 교수는 영웅 이야기는 세 단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 째 단계가 집을 떠나는 것, 둘 째는 온갖 고생을 하며 고통을 겪는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구조는 단순하다. 떠났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떠날 때 얻고자 했던 것, 그 욕망을 성취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돌아온 그는 떠날 때의 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를 영웅으로 부른다. 한낱 욕망으로 가득했던 철부지를 성숙한 영웅으로 만든 것은 passion, 희랍어로 pathos 즉 겪음, 고통, 고난 이다. 고통이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라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한 인간의 깨달음이다.
<문학 고전 강의>
'pathei mathos' 는 희랍에 널리 퍼진 격언으로 희랍 비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길가메쉬 서사시』 의 序詞에 해당하는 1장도 'pathei mathos' 로 시작한다.
<길가메쉬 서사시>
'모든 지혜의 정수'는 악카드어로 'nagbu/naqba' 이다. 심연 'the Deep' 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지혜'로 번역하기도 한다. 길가메쉬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nagbu를 본 자' 로, '지혜기 망토처럼 그에게 붙어 다녔다.' 이 지혜는 '모든 것을 경험' 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 는 명성을 얻고자 철없이 날뛰던 길가메쉬가 지혜로운 영웅 길가메쉬가 되어 돌아오기까지의 고난, 겪음에 관한 이야기다.
길가메쉬가 얻은 깨달음, 최고의 지혜는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하던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서야 아무리 뛰어난 인간일지라도 결국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길가메쉬는 영생을 찾아 떠난다. 손에 넣을 뻔했던 영생은 뱀에게 도둑맞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르크에 성벽을 쌓고, 자신이 겪은 고난을 돌기둥에 새긴다. 길가메쉬는 126년 동안 우르크를 다스렸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특수자로 인식한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 나는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반면 타인들,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 겪음을 통해, 인간 일반의 성질들 즉 보편성을 획득한다. 다양한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험은 말랑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인 동시에 열정이다. 지혜는 안락한 여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밤잠을 잘 수 없는 고뇌 속에서 문득 깨달아지는 '가시박힌 식물' 같은 것이다. 이 가시에 찔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반성적 사유를 할 수 있다. 나는 특수자인 동시에 보편자로서 인간 존재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다.
개별자의 겪음, passion이 compassion이 될 수 있어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compassion은 'com + passion' , 고난을 함께 겪는 것이다. 함께 겪으며 함께 고통을 나누다 보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발달한다. compassion을 동양에서는 慈悲, 同情이라 한다.
함께 고통을 나누면 공통 감각 sensus communis 즉 공감 능력이 발달하고, 공동체의 공감 능력이 발달할수록 공동체는 공공의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고난을 통해 얻는 지혜란 무엇인가? 무엇에 대한 지혜인가? the Deep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길가메쉬는 바닷속 심연으로 내려가서 nagbu/naqba를 보았으나 그것을 가지고 오지는 못했다. 길가메쉬가, 그러므로 우리 인류가 잃어버린 nagbu/naqba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시황이 입증했듯 불로초는 없다.) '모든 지혜의 정수'는 손에 잡히는 실체적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한다. 무엇을 인간의 지혜로, 우리 공동체의 지혜로 삼을 것인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의 조건 속에서 우리가 합의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희랍에서는 아레테라고 불렀다. 아레테는 덕 혹은 탁월함이라고 해석한다. 커피의 미덕은 맛이고, 바이올린의 탁월함은 소리에 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인간의 미덕은 지혜이다. 무엇에 대한 지혜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지혜를 인간의 아레테라고 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
시대의 아레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겪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고전의 기능이 있다. passion을 compassion化 하는 것이 고전의 오래된 역할이었다. 수 천 년에 걸쳐 『길가메쉬 서사시』 가 다양한 판본으로 개작되어 전승되어 온 것은 길가메쉬를 통해 시대가 추구해야 할 美德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희랍 전역에서 음송되었던 것도 아킬레우스의 영웅적 희생이 폴리스 시대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폴리스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텍스트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아테나이는 축제나 각종 행사를 통해 폴리스가 직접 시민의 덕성을 담당하면서 민주정을 발달 시켰다. 그 절정이 바로 희랍 비극이다. 안티고네를 관람하면서 아테나이 시민들은 폴리스가 인간의 법 위에 서야 하는지 신의 법 위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쟁했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 키토>
이것을 이데올로기 교육이라고 폄훼한다면 극단의 개인주의자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zoon politikon' 이다. 희랍의 맥락에서는 폴리스에 살지 않는 인간, 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다. 현대적으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로 의역된다.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에게는 반드시 사회적 의식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겪음과 공감에 의해 형성되는 시대 정신이 없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거나 인간의 '세계'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개인주의는 인간을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각자의 경험은 많아도 공통의 경험은 부재하고, 개별 감성은 풍부해도 공통의 감각, 공감의 능력은 부족하다. 루카치의 유명한 개탄처럼 '별이 빛나는 하늘'이 없는 시대는 불행하다.
고전은 우리에게 부재한 공통의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제공하는 소중한 텍스트이다. 시대의 특수성과 인류의 보편성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점이 고전의 미덕이다. 당대의 가치관을 제시하고 시대를 날카롭게 묘파할 뿐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근원과 본질을 질문하며 탐색하고 있다.
고전의 질문을 이어받아 인간 일반의 보편성에 우리 시공간의 특수성을 결합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레테, 미덕, '하늘의 별'을 합의해 낼 수 있다면, 영원한 진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고전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유산이 되어 줄 것이다.
<문학 고전 강의>
길가메쉬는 우르크로 돌아와 성벽을 쌓았다. 필멸의 인간이란 한계 속에서 불멸의 인간성을 공공의 영역에 새긴 것이다. 죽지 않는 인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간의 이름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우스도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죽음이 예고된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길가메쉬 이후 인간의 '불멸'은 그 이름 앞에 새겨 졌으니, 우리에게도 '불멸의 이순신' 이 있다. 공동체가 불멸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별이 빛나는 하늘' 이 있다는 것이다. 별빛을 따라 함께 걸을 수 있는 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동네 이웃들과 4주간에 걸쳐 『길가메쉬 서사시』 를 읽었다. 이제 시작이지만 다음에 읽을 고전을 준비하는 마음은 설레인다.
추기 :
플라톤 아카데미 <지혜의 향연> 중
주원준의 길가메쉬 서사시 강의에서 캡춰.
https://youtu.be/JJxj0ziaFgk
1. 길가메쉬는 역사적 인물인가? : 기록들
2. 토판본들
3. 점토문자 해독
4. 최초의 '서사시' 인가?
토판본의 아카드어는 '작품' 으로 표현
5, 지혜는 '가시'
1) "네게 비밀을 말해주겠다. 길가메쉬, 음 ..... 무언가 하면 ..... 식물이 하나 있는데 ....... 가시덤불 같은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다.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
2) "손은 찔렸지만 식물을 움켜잡았다."
3) "그때 뱀 한마리가 식물의 향기를 맡고 몰래 올라와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 (김산해 편역, p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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