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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3일에 쓴 글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정치체에 대한 권리>의 리뷰 글을 쓰려다, 중간에 그만 둔 글인 것 같습니다. 나름의 문제 제기 비슷한 것이라 옮겨 둡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가끔, 내 나이가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십 대 때는 ‘나이 서른에 우린 무얼 하고 있을까?’를 부르고, 삼십 대 때는 어서 ‘불혹’의 안정이 찾아오길 바랐지만, 오십에도 ‘지천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무렵 어떤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기쁨의 감정은 아직도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아, 이 나이에도 배울 것이 있고,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은 참으로 강렬했다. 그 나이에 아마 나는 죽고 싶었고, 세상에서 더 배울 것도, 기쁨을 느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싶다.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 있으며, 기쁨도 그리고 간혹 행복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다. 평균 수명 구십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때까지 살아야 할 일이 암담하지만, 도서관의 서가 구석구석을 뒤지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구십 수명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대학교 때, 지금의 ‘도를 아십니까?’처럼, 혼자 캠퍼스를 걷고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따라 붙는 선교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창하는 것이 ‘영생’ 이었다. 나는 종교 자체 보다 그 영생이라는 말에 질겁해서 종종걸음으로 내빼곤 했는데, 영생이라니.. 영원히 죽지 못하는 고통 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때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의학과 뇌 과학이 결합해서 언젠가는 인간이 죽지 않고, 장기들을 갈아 끼우며 영원히 살게 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인간들은 진짜 행복할까, 나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다 죽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다지 명료하진 않지만 읽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정신만은 놓지 않고 살다 가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며 산소 호흡기를 수년씩 끼워 두는 행동이 나는 전혀 존엄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들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종합병원을 보면, 차라리 돈의 존엄성이라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정작 멀쩡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는 병원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는 건지, 종교 계열의 병원들이 존엄사를 두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그 위선을 스스로 어떻게 합리화하는지가 궁금하다.

 

  지금 내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살아갈수록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은데, 잠깐 넋을 놓으면 또 세상만사 모두 그렇고 그렇지 하는 상태로 돌아가고 마니, 어떻게 해서든 넋을 붙들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공자를 전공하는 지인에게 不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했던 생각만 남아있다. 마흔은 의심이 없거나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 세상일이 이제 와서 의심스럽거나 세상일에 이제와 흔들릴까봐 덜컥 겁이 나서, 똥고집이라도 부리며 그 두려움을 감추어야 하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의심이 없다는 것은 질문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꼰대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불안을 감추며 굳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으니 슬프다. 그렇다고 어떻게 나이를 먹지 않고 또 기성세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누가 뭐래도 이십대는 이십대고 사십대는 사십대일 수밖에 없다.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 ‘국가’가 있다. 말이 곰곰이지 가끔 어떤 계기로 그것들을 떠올리면 짧은 생각을 굴리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빌려다 읽는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환율이다. 똑 같은 물건이 어떻게 국경만 넘으면 갑자기 비싸지기도 하고, 또 턱없이 싸지기도 하는지 참 신기했다. 세계 여행기들이 넘쳐나면서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하루 종일 먹고 잘 수 있는 가난한 나라 이야기를 읽노라면 왠지 불편했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달을 일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도 살기 어렵다는 말과 똑 같은 것이다. 일년 내내 선배들에게 빈대 붙어 아낀 점심값까지 탈탈 털어서 유럽에 가서 홀라당 날리고 오는 후배 동료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똑 같이 일 년을 일해서 모은 돈이 왜 어떤 나라에 가면 일 년 밥값이 되고도 남는데, 다른 나라에 가면 열흘 밥값도 안 되는지, 이런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재밌는 것 중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들이 있다. 바다에 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엄쳐 다니던 고등어가 우리나라 쪽에서 잡히든, 잠깐 놀다가 중국 쪽으로 가서 잡히든 그 고등어가 그 고등어 일텐데도, 마트에 떡하니 팻말을 달고 있으면 중국산이냐 국산이냐에 따라 가격이 화악 달라진다. 중국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을 침범해서 싹쓸이 해 간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은데 그러면 그 배들이 잡아간 갈치는 국산 갈치일까, 중국산 갈치일까? 아, 별 것이 다 신기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다. 가격이라는 것이 원래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들로 정해지는 거지, 그 물건 자체의 고유한 가치(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와는 암 상관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 하며 역증을 내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고 요상한 것을.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음식점에 가면 차라리 조선족 아줌마들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아줌마들이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아줌마들과 똑 같은 일을 하고도 더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 아줌마들은 심지어는 우리나라 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는데 말이다, 물론 약간의 북한식 억양이 섞여 있긴 하지만. 만약 경상도 억양이나 전라도 억양이 있다고 급여를 차별했다면 ‘나꼼수’가 나서야 할 일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것 때문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들에 우리나라 노동력 보다 더 싸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체류가 가능한 이들이다. 아마 예전에 독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그 차별은 외국인 노동자의 태생적 조건이므로 적법하고 정당한 것인가? 고용주는 우리나라 노동자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관계없이 똑 같은 노동의 산물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주민등록증의 유무에 따라 그의 노동의 가치를 차별받는 것을 마땅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래서 국가란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안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놓인다. 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도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처럼 정규 사원임을 입증하는 사원증을 가진 노동자만이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군말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부당하다면 왜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은 정당한 것인가? 역시 국가인가? 어째서 국가란 틀에 놓이면 이 모든 불합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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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군중 -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공중의 세계인가?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지도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11년 11월 22일, 카페 과제물로 쓴 글입니다. 이 때는 타르드(따드)의 책이 번역된 것이 없었는데, 그 이후 두 권이나 나왔네요.  리뷰 상품인 <여론과 군중>과는 상관없이 쓴 글입니다. 

그 때 과제는 타르드를 우리 나라에 소개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기획서까지 써보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쓴 세 글 중 마지막 글입니다. 기념 삼아 옮겨 두었습니다.

 

 

 

세상에 라이벌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참 많다.

 

 

 

 

일요일 오전에 방송하는 MBC <서프라이즈> 에도 ‘불멸의 라이벌’이라는 코너가 있다.

내가 본 것은 에디슨 대 테슬라, 미켈란젤로 대 다빈치 편이었다.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어디에 있건, 이런 대결 구도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 주는 그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치졸함에 있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이야기를 보면, ‘천재라는 것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라는 멋진 격언이 어쩌면 테슬라의 발명 스타일에 대한 에디슨의 질투와 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에디슨은 될 때까지 실험을 반복하는 노력형인 반면 테슬라는 직관과 영감으로 승부하는, 어찌 보면 진짜 천재였기 때문이다.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에디슨과 테슬라는 노벨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서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이 두 라이벌은 동급으로 취급받느니 차라리 수상을 거부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다.

 

 

수학사에는 이 보다 더 살벌한 대결도 있다.

칸토어라는 수학자는 당시에만 해도 신의 영역이었던 ‘무한’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결국 정신 병원에서 죽었다.

칸토어의 무한 개념을 인정할 수 없었던 크로네커는 칸토어의 논문 발표와 교수직 임용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다른 수학자들과 함께 칸토어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끈질긴 방해와 핍박 속에서도 칸토어는 실무한의 이론을 정립하여 후세에 집합론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이한 비극적 인물이었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는 칸토어의 묘비명은 그의 정신병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혹은 없다고 추정되는) 크로네커가 그의 스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찬드라세카르는 블랙홀의 단초를 제공한 천체물리학자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 출신의 이 젊은이는 영국 유학의 기나 긴 항해 길에서 ,이후에 ‘찬드라세카르 한계’라고 불리게 될 획기적인 이론을 착안해 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들의 노년은 백색왜성이라고 알려졌는데, 찬드라세카르는 별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4배가 넘으면 중력 때문에 그 별은 백색왜성이 되지 못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다.

이렇게 폭발한 별들은 질량에 따라 중성자별이 되거나 블랙홀이 된다는 것이 후대의 연구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문학회의 거장이었던 영국의 에딩턴 경은 찬드라세카르의 이론을 ‘별 장난’으로 치부하며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식민지 원주민이었던 찬드라세카르는 막강한 귀족 과학자인 에딩턴의 핍박으로 한때 연구 분야를 바꿀 결심까지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론을 천체물리학계에 남기게 되었다.

 

 

당대의 최고 학자이며 저명 인사였던 사람들도 때로는 지독히도 치졸했던 것 같다.

논문 발표를 막고 온갖 술수를 부리면서까지 학계와 사회에서 라이벌을 매장시키려 했던 그들의 행동은 사실 인지상정으로 봐주기에는 과한 면이 있다.

치졸함을 드러내면서까지 라이벌을 짓밟아야 했던 그들의 분노는 어떤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그들 자신이 그 누구 보다 먼저 그 신예 라이벌들의 가능성과 파괴력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초조함과 불안감에 그토록 잔인하고, 그토록 폭발적으로 분노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과잉 반응은 그 자체가 어떤 질병을 나타내는 증상일 수도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부모나 선생님은 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한 아이 보다는 과잉적 폭력을 휘두르는 체벌자의 내면을 주목하게 만든다.

길거리에서 아이를 쥐 잡듯이 잡아 족치는 엄마의 귀를 찢는 고함 소리는 차라리 삶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지르는 비명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권위와 명성의 힘으로 혹은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그들의 과잉 탄압 또한 신예 라이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나타내는 증상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청출어람’ 이란 말은 겉보기만큼 그렇게 훈훈하기만 하거나, 맑고 깨끗한 푸른빛이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뛰어 넘는 제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수많은 스승과, 스승을 넘고 나아가야만 했던 제자들이, 얼마나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어야 했는지, 역사의 곳곳에 남아 있는 이 기록들이야말로 그 증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승부가 의외로 간단히 끝날 수 있다.

당대에는 권위나 명성에 억눌려 묻혀 버리기도 하지만, 한 번 빛을 본 위대한 이론들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살아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막힌 학문의 물꼬를 트고 신세계로 향하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고 가야 할 비밀의 문 같은 것이어서, 후학이라면 그 봉인을 풀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라이벌들을 현재에 다시 불러오는 이유가 그리 복잡할 것 같지는 않다.

역사 속의 인물들이 지지고 볶은 그 '서프라이즈‘한 쟁투만으로도 어느 정도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데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류의 교훈도 살짝 얹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진리는 승리할지니 굳세어라, 젊은이여!?

 

 

 

 

하지만 여기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불러 낸 세종 이도와 밀본 정기준의 대결 말이다.

 

 

 

그전에 잠깐, 여러 편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매우 친근해진 이산 정조에 관해 살짝 살펴보자.

내가 아는 한 대중에게 정조에 관한 관심을 맨 먼저 끌어 낸 사람은 소설가 이인화이다.

그가 <인간의 길>이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를 미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전, 그의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켜 준 것은 소설 <영원한 제국>이다.

<영원한 제국>은 간단히 말해 어떤 정치 형태가 더 훌륭한 것인가를 놓고 정조와 노론이 벌이는 정치적 투쟁에 관한 소설이다.

정조는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성왕정치를 주장한 반면, 노론은 붕당을 통해 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신권 중심의 붕당정치를 고집했다.

붕당은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 이라고 한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 때문에 붕당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지만, 사실 붕당은 지금의 정당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삼권이 분립되어 있는 현대의 민주정치에서도 이상한 대통령 하나가 5년이 채 되기도 전에 온 나라를 뒤집어 놓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사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강력한 왕권은 세종이나 정조 같은 성군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연산군 같은 폭군이 더 막강하게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백성의 삶이 왕의 품성 하나에 달려 있는 체제란 사실 야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붕당을 만든 양반들이 공맹의 도에 따라 올바른 정치를 이끌기 보다는 사리사욕과 가렴주구에 탐닉하게 되면 백성의 삶이란 어짜피 피폐해질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현대의 정당정치가 가져오는 폐해와도 다르지 않다.

국회가 날치기 통과시킨 각종 법안들이 오히려 국민의 목을 옥죄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굳이 애써서 찾아낼 필요도 없는 것이,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는 한미 FTA가 날치기를 앞두고 있다.

 

 

정치체제란 당대의 사회적 상황이나 힘의 관계와 분리하여 판단할 수는 어렵기에, 단순히 성왕정치가 더 나은가 아니면 붕당정치가 더 좋은가 따위의 질문은 별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내가 <영원한 제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왜 이인화가 조선 시대의 정치적 대결 구도를 현대에 다시 불러 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을 통해 정조의 왕권중심 체제를 강력히 옹호하고 있다.

어떤 블로거의 서평에 의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천황중심의 절대왕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는 왕에 의한 유신이 없었고 이 때문에 권문세도가의 가렴주구가 왕국의 쇠멸을 재촉했다’ 고 한다.

이 블로거는 ‘이 소설에는 정조가 살아서 유신에 성공했더라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았고, 박정희가 군사 정권으로 유신을 단행하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감추어져 있다’ 고 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인화가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비극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일까?

 

처음 <영원한 제국>을 읽었을 때 나는 참 많이 감동했다.

붕당이란 것이 패를 갈라서 자기들 뱃속만 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니구나, 비록 상복 하나에 목숨을 거는 희극을 벌였을지언정 그 바탕에는 왕의 전횡을 막고 백성을 위해서 공론의 정치를 펴려했던 훌륭한 이념이 있었구나....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뿌듯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인화는 정조의 왕권정치가 좌절된 것에 깊은 회한을 표했지만, 나는 꼬장꼬장한 노론의 영수 심환지가 그렇게 악마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랬던 것이 그 이후에 출간된 <인간의 길>을 읽고서야, 나는 이인화가 왜 하필 정조를 이 시대에 다시 불러들였는지를 뒤늦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인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절대군주이건 군사독재 정권이건,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절대 권력에 의한 근대화 작업이었다, 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 잠자던 정조가 기껏 박정희의 들러리를 위해 후손들 앞에 불려 나왔던 것이다.

나는 극심한 배반감을 느꼈지만, 원래 이인화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는 결코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영원한 제국>을 통해 그의 사상을 세심하게 다듬어 유포시켰던 것이다.

이인화의 세계에서 박정희는 정조가 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근대화 작업을 완수해낸 훌륭한 지도자였고, 다만 이 근대화 작업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독재 정치는 필요악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인화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독재자의 길을 걸어 가야 했던 인간 박정희를 형상화함으로써, 박정희에게 인간적인 아우라마저 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영원한 제국>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인화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건 나는 그 책을 통해 정치 체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얻었던 것이다.

사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 본 적도 없고, 왜 국가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뉘어져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것들은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인 것, 그냥 원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당연한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정치 체제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것들은 목적에 따라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고 또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기초적인 상식이지만, 그것이 박제된 상식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히 마음을 파고드는 상식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결코 완결된, 완벽히 이상적인 체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영원한 제국>의 짝퉁은 아닌가 조금 의심했다.

왕의 밀명을 받은 학사들이 죽어 나가고, 왕은 무언가 비밀스런 일을 꾸미고 있고, 그것을 파헤치는 과정에 왕과 신하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기타 등등.... 이건 거의 표절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표절에 관해서라면 뭐 이인화가 시비를 삼을 리는 절대 없을 터이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인화의 첫 장편소설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을 때 이인화는 자신의 작품이 공지영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만을 베낀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마구 베낀 혼성모방 (페스티쉬)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표절이 아니라 하나의 당당한 예술적 기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바람에 페스티쉬라는 생소한 단어가 일약 유행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뿌리 깊은 나무>는 나의 그 우려가 제대로 증거를 갖추기도 전에,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아, 표절이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대결 구도는 복합적이다.

 

  태종 대 세종

  이도 대 똘복

  세종 이도 대 밀본 정기준

  소이(담이) 대 정채윤(똘복)

  정채윤 대 정기준

 

 

<뿌리 깊은 나무>가 <영원한 제국> 보다 복합적인 대결 구도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왕과 사대부가 공히 국가의 근본으로 내세우는 바로 그 ‘백성’이 전면에 부각되어, 대립의 한 축을 능동적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똘복과 소이는 절대 왕권을 추구하던 태종과 재상 정치를 뿌리내리려는 사대부 사이의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백성들이다.

세종 이도는 아비와는 달리 문의 길을 자신의 통치 형태로 삼았지만, 세종 역시 왕권을 강화하여 직접 성왕정치를 실현하려는 점에서 태종의 길과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성왕정치의 근본은 백성이다.

군주의 역할은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어버이처럼 돌보는 어진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이 꿈꾸었던 재상정치 역시 백성이 근간이라는 민본사상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정도전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 라는 맹자의 사상을 정치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니, 밀본이 주장하는 재상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백성은 늘 명분으로만 존재할 뿐 살아있는 개개인의 인간으로 존중받지는 못한다.

그것은 비단 조선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여타의 정치·역사물들과 뚜렷한 차별화에 성공하는 것은 백성이 명분이나 배경으로서만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로서, 주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복합적 대결 구도는 실제로는 왕권, 신권, 백성이라는 삼자 구도의 형태로 간결화 될 수 있다.

 

 

 

 

                                       똘복, 소이

 

               세종 이도                                         밀본 정기준

 

 나머지 대립들은 세부적인 이야기 전개에 흥미와 긴장을 불어 넣는 곁가지 대립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밀본의 수장 정기준은 세종 이도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인정한다.

밀본이 세종에 반대하는 것은 세종이 무능한 군주이거나 폭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이익이 침해당할까 우려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정기준은 세종이 성군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한다.

정기준의 우려는 이대로 왕권정치가 뿌리를 내리면 세종 이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있다.

무능한 왕이나 포악한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될 때, 이것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그 때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정기준이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삼봉 정도전이 관료 체제를 확립하고 재상 정치를 주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 이도는 어린 시절 정기준이 과거장에서 써 낸 글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는다.

세종은 유림들이 몰래 모여 정도전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바위에 올라서 정도전의 혼백에게 술을 뿌린다.

정도전만은 아마 자신이 하려는 일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세종 역시 정도전의 민본사상이 자신의 덕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분노는 백성을 위한 자신의 정책이 현실 정치에서 사사건건 사대부에 의해 방해받는 다는 사실에 있다.

사대부들은 정도전이 가리킨 민본의 이념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재상정치의 체계와 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만 매달린 채,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있다고 세종은 분노한다.

 

 

“내가 대체 뭘 그리 잘못했느냐? 나는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내 신하들은 지금도 모두 모여서, 내 뜻을 거스를 모의를 한다더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중국의 책력이 아닌 우리의 책력을 만든다 할 때도, 천문기기를 만들기 위해서 중국에 사람을 밀파할 때도, 세법 가부조사를 할 때도, 노비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려 할 때도... 대행 대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사옵니다. 국고가 낭비 되옵니다. 신분 질서가 어지럽혀 지옵니다... 지랄들 하고는... 결국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면서, 온갖 공맹의 도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공자께서 언제 자국의 책력을 만들면 안 된다 하셨느냐? 맹자께서 제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안 된다 하셨어? 나는 단지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

 

 

세종은 신하들에게 소리치는 대신, 정도전에게 술을 바친다.

세종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직접 호통 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비록 형식에만 매달려 있다 해도, 정도전이 만든 경국대전은 조선 통치 이념의 근간이며, 그들의 논리 역시 만만하게 깨어질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익을 취하는 신하들은 별도로 하더라도, 적어도 세종 이도와 밀본 정기준 사이의 대립에는 원칙적으로 사사로운 이익에 대한 다툼은 없다.

이들은 말 뿐인 대의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대의를 위해 사활을 거는 것이다.

두 가지 체제 모두 대의와 논리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현실에서 잘못 운용될 경우 치명적인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

왕은 폭군이 되어 백성을 헐벗게 만들 수 있고, 사대부는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을 수탈할 수 있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

 

여기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는 새로운 길은 바로 ‘각성한’ 백성의 힘이다.

 

똘복은 왕이고 나발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신분이나 계급에 억매이지 않는 그의 주체성은 본능적으로 획득된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권에 대한 인식과 다르지 않다.

복수를 꿈꾸며 무작스럽고 교활하게 굴러 온 똘복이지만, 그가 철칙으로 신봉하는 것은 세상에 천한 목숨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똘복은 세종 이도를 죽여 왕의 목숨과 아버지 노비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소이의 주체성은 각성의 산물이다.

소이는 한자를 몰랐지만, 아는 체 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죽었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의식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세종이 백성들의 문자를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적으로 그것이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닫는다.

문자야말로 왕이나 사대부의 농단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해독 불능의 편지(문자)’가 촉발한 비극 속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소이 보다 더 처절하고 절실하게 새로운 문자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달리 누가 있겠는가.

소이의 비극은 소이를 산주검으로 몰아갔지만, 그 죽음을 통과한 소이는 주체적 인간으로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는 그렇게 소이의 새로운 삶이자 복수가 된다.

소이는 직접적인 복수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백성들이 문자를 갖게 됨으로써 왕과 사대부와 백성이 모두 평등한 인간임을 입증하는 것, 더 천하고 더 귀한 목숨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소이의 복수이자 속죄이다.

문자가 곧 권력이었다면 백성의 문자는 그 권력을 백성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세종 이도가 백성의 문자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종은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사대부가 되더라도, 백성들이 억울하게 핍박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도전이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재상 정치 체제를 구축했던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전이 제도로서 백성을 보호하려 했다면, 세종은 백성 스스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정기준의 투쟁은 철저히 사대부의 결사체인 밀본을 중심으로 실행된다.

재상정치의 근본에는 민본사상이 있지만, 조선은 또한 사대부의 나라이고 백성은 수동적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기준이 비록 가리온이라는 백정으로 수십 년을 반촌에서 살았다고 해도, 그는 한 번도 천한 신분의 백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뜻을 펴기 위한 수족이었을 뿐이었지, 뜻을 함께 하는 동지는 아니었다.

정기준에게 '민본'의 民인 백성은 다만 추상적 존재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종의 한글 창제에는 반드시 소이와 똘복이 필요하다.

허구의 인물임이 분명하겠지만, 그래도 <뿌리 깊은 나무>에서 소이가 한글 창제의 핵심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성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는 ‘백성의 문자’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작가들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 <뿌리 깊은 나무>의 끝 부분에 밀본 세력에 의해 세종이 문자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막에 둘러앉은 백성들은 낄낄거리며 별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당하면 당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냥 백성이다.

백성들은 아직 문자가 무엇인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 하루하루 밥 먹고 살아가는 일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귀찮고 쓸데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똘복은 세종을 향해 악을 쓴다.

문자를 몰라서 억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천해서 당하고 사는 것이라고.

문자를 몰라서도 죽지만, 문자를 알아도 죽는다고.

 

세종 이도 앞에 놓인 과제는 그러므로 단순히 사대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문자를 반포하는 것만이 아니다.

세종은 한글에 대한 두 번째 판관으로 똘복 정채윤을 선택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문자가 왜 필요한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한글이 백성의 문자로서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 방송 분량의 절반이 방영된 시점에서 <뿌리 깊은 나무>의 후반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관심사는 똘복 정채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똘복이 어떻게 한글을 수용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백성들의 삶에 어떤 능동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드라마의 명운이 달려 있을 것이다.

 

 

나는 힘없는 백성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탄생하는 소이와 똘복이라는 인물이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이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세련되어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사실 ‘소인이 뭘 알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드라마 속의 백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쉬운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지를 백성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문자란 그저 지랄염병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1인1표의 투표권이 주어졌다 해도, 그것이 등록금이나 취업난, 전세난, 빈부격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스스로 깨닫고 참여하지 않는다면 민주적인 선거 제도 역시 쓰잘데기 없는 정치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의 시대에서 문자에 눈뜬 백성이란 지금 이 시대에 정치의 필요성에 눈뜬 시민과 같지는 않을까?

소이가 똘복을 변화시키듯 우리도 우리를 변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을 이 드라마는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가 성왕정치와 재상정치 사이에서 세종의 편에 서는 것은 그 제도 자체의 우수성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백성의 문자라는 ‘한글’ 자체가 백성을 다스림의 수동적 대상으로 보는 사고로는 절대로 착안될 수 없고,  문자란 스스로의 뜻을 펴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고, 제도 자체 보다 더 탄탄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히 발상해내고 창제해낸 세종의 정치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핵심에 ‘백성의 참여’를 배치한 까닭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 ‘참여’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현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역사적 인물을 현재로 다시 불러 올 때는 그 인물의 삶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어떤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런 인물도 있었다거나 이런 신기한 사건이 있었다는 차원에서 역사 속에 곱게 잠자는 인물을 깨워 온다면, 괜히 미이라의 저주니 어떠니 하는 괴 소문에나 시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을 소환할 때는 먼저 그 사유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그것을 기획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이 내가

“ Gabriel Tarde에 대한 소개서를 자신이 낸다고 할 때, 출간 기획서를 쓰시오

”란 과제를 받아들고 계속 생각해 왔던 문제이다.

 

우리의 독자는 일반 대중이거나 기껏해야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진 대중이다.

따드는 대중에게 어떤 현재적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내가 가질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백과사전적 정보에다가, 동시대의 사회학자 뒤르켐과 라이벌이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의 책은 번역된 것이 없고, 그의 사회학적 방법론은 라이벌 뒤르켐에 의해 매장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심리학적 사회학’이란 이름 외에는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고작해야 “모든 사회현상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적(心的) 관계라는 궁극의 형태로 환원되며, 이것이 ‘순수하게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사회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일단 따드에 대한 우리의 소개서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뒤르켐과의 라이벌 관계다.

그러나 단순하게 뒤르켐이 얼마나 철저하게 따드를 파묻었고, 따드는 얼마나 생고생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나 등등의 이야기만으로는 별로 신선할 것이 없다.

세기의 라이벌, 불멸의 라이벌, 불구대천의 라이벌 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 왔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려면 일단 따드의 이론이 복권되어 거꾸로 뒤르켐을 파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땅에 묻힌 고분을 발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따드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대에 따드가 공헌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 따드를 필요로 하고 있어야 한다.

학문은 과거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해나간다고 할 수 있지만, 거꾸로 현재의 연구가 과거에 매장된 이론을 되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가 아니다.

우리 책은 전문 서적도 아니며, 따드의 책을 번역할 계획도 없다.

우리의 목적은 따드의 발굴이 아니라, 따드의 대중화이다.

따드의 이론이 훌륭해 보이니 그것을 먼저 발굴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분석해낼 방법을 찾아가는 식의 순서를 밟을 수는 없다.

우리는 거꾸로 따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성공적으로 분석해낸 사례를 찾아서 따드를 소개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

사실 그런 성공적인 사례가 없다면 우리는 따드를 포기해야 한다.

훗날에 제대로 따드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출간 기획서의 목표는 따드를 소개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는 것이다.

정식 출간 기획서는 그 판단이 이루어진 이후에 작성될 수 있을 것이다.

출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따드와 관련된 연구자들을 찾아서 그들의 연구 내용과 그들이 판단하는 따드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따드의 이론을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 적용한 사례를 찾는 것이다.

셋째 그 사례들이 대중적으로 공감될 수 있거나 대중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책도 반드시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책이라 하더라도 ‘유용성’이 없이는 대중 서적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유를 촉발하건, 교양을 함양하건, 재미를 주건 대중 서적은 대중에게 줄 수 있는 유용한 그 무엇, 그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따드에 관한 기획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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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0년 9월 14일,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줄곧 비가 온 탓일까, 아직 덥지만 어딘가 가을이 시작된 느낌이 든다. 한 여름에 손에 쥐었던 <자살론>을 이제야 끝냈다.  그나마 찬 바람이 불기 전에 끝을 내어 다행이지만, 솔직히 학교 졸업한 이후 이렇게 지루한 책을 끝까지 읽어 낸 것은 처음이다. 습작당과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열두 번은 더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해야 선생님을 따라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무미(無味)한 수치들에 눈길을 되풀이 붙이곤 했다. 그래봤자 30분도 못돼서 꼬박꼬박 졸기가 일쑤였지만 말이다.


뒤르켐의 수치들은 대부분 1800년대의  것이다. 그리고 특히 1장의 분류방법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너무 엉성한 면이 있다. 정신병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법 같은 것들은 좀 웃기기도 했다. 적어도 ‘자살’의 비사회적 요인을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로 1장은 너무 너무 지루했다. 그러나 뒤르켐이 진짜로 주장하고 싶은, 자살과 사회적 요인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기적과 이타적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 용어와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아마 뒤르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자살은 사회의 통합 정도와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주의자는 세상에서 자신 말고는 의미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며, 지나친 이타주의자의 슬픔은 반대로 자신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긴다. 전자는 자신이 집착할 아무런 목적을 찾을 수 없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삶을 벗어 던지며, 후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가 삶의 외부에 존재하므로 삶이 장애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삶을 버린다.」

자기의 외부에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가 너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 살아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기주의적 자살이고, 사회의 가치가 너무나 위대하여 자신의 목숨은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이타주의적 자살이다.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이란, 이런 성향이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사회의 규범norm이 무너지고 새로운 규범norm이 아직 굳건히 세워지지 못한 아노미anomy 상태에서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은 급격히 분출할 수 있다.

그래서 뒤르켐이 내놓은 해법은 적절한 사회 통합의 방법으로서의 ‘조합’, ‘직업 집단의 조합‘ 이다. 조합은 국가가 하지 못하는 규범을 세우고 개인을 묶어서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집단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직업 집단이 노동자 집단을 말하고 그래서 결국 이것이 노동조합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답게(? 사회학자라는 것이 꼭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전체주의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개인은 개인으로서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적 통합 없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 갈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사회 밖에서도 살아 갈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거나, 사회를 버리고 자살하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나쁘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사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형태든지 사회 속의 구성원이 되지 않고는 의미 있게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하다못해 속세를 버리고 떠난 스님들도 신도를 모아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내가 이 습작당에 머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사회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통합된 사회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

한때는 군부 독재가 없으면 누구나 행복한 사회가 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만 전에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장밋빛 꿈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났고, 사람들은 그 어긋남에 대하여 목청껏 떠들지만 아직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은 우리 사회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민노당으로 그리고 또 진보신당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이에 다리의 힘은 빠지고 기력은 쇠해간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아노미성 허무주의가 유혹한다. 사회는 어짜피 모두 다 나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가장 나쁜 사회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맑스에게로? 레닌에게로? ...누구는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다시 스탈린이라면....

얼만 전 진중권의 유토피아 논쟁이 불붙었던 적이 있다. 유토피아란 환영 혹은 신기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유토피아적 비전이라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통합된 사회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지지난 남자의 자격편에서 박칼린은 넬라 판타지아의 솔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솔로는 피아노에 얹혀 가는 것이 아니라 저 희망의 세상으로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수백명을 이끌고 기어이 가고 말겠다는 의지와 신념을 표출하는 강인함이라고. 그런데 앞장 선 솔로가 가리키는 저 희망의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가 그 뒤를 따르겠는가? 만약에 유토피아란 그저 이 세상에는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누구나 생각해 버린다면 말이다.


사실 자살론을 읽으며 나는 내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생각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사회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면, 까뮈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자면,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라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 다시말해 어떤 유토피아도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면 말이다. 물론 <시지프의 신화>는 조금 다른 것들을 다루고 있고, 나는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어 어쩌면 엉뚱한 연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다 읽고 나면 최소한 자살할 마음은 없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내는데 실패한(개인적으로ㅋ) <자살론> 보다는 아마 그 효과에 있어 훨씬 더 유용할 <시지프의 신화>를 나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살에 관한 사회적, 개인적 생각은 <시지프의 신화>를 읽고 난 후에 조금 더 이어가기로 하고, 뒤르켐의 <자살론>에 관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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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 / 비르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12년 6월 8일,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나는 프랑스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베르사이유가 있어서. 물론 나의 베르사이유는 오스칼과 앙드레와 마리 앙뜨와네뜨가 비극적 사랑을 하던『베르사이유의 장미』속의 그 베르사이유다. 그래서 내게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의 오스칼이 근위대장 견장을 뜯어내고, 혁명군을 조준하고 있던 대포를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림으로써 혁명이 깔끔이 승리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만, 프랑스 역사는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는 로베스피에르가 생 쥐스트와 함께 단두대로 끌려가고, 민중 공화정이 무너진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그리고 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열월이며, 태양력 7월 무렵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만화로만 배운 나는 그 이후로 프랑스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그가 결국 황제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제2 공화정의 수립과정과 몰락에 관한 일종의 연작 칼럼이다. 주간지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 칼럼들은 결국 1852년 봄부터 월간지에 발표되었다가, 총 7편이 책으로 묶여 발행되었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몇몇 다른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인용문의 출처로 표기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란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참으로 요령부득이었다. 만화의 배경 지식정도로는, 브뤼메르가 혁명력 무월(안개의 달)이며, 브뤼메르 18일이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 11월 9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브뤼메르 18일은 일테면 우리의 5.18과 같은 고유명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니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이 연작 칼럼의 첫머리를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뜻밖에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한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p10

  ‘비극’은 단적으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고통과 파멸, 죽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어떤 ‘숭고한 대상’을 상실한 대가이다. 비극은 그 속에 채 피어나지 못한 고갱이, 소중한 그 무엇을 품고 있다. 비극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비극이 소극으로 반복될 때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숭고한 대상’ 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숭고한 대상’이 없다면 그 고통과 파멸은 생뚱맞기 그지없는 소동, 어이없는 광태에 불과하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반복되는 역사란, 그러므로 두 번의 죽음이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러나 그 물리적 죽음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죽은 영웅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숭고한 대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소극으로’. 이 두 번째 죽음이야말로 영웅의 진짜 죽음, 영원한 말살이다. 한 바탕의 소극은 비극이 획득한 숭고함의 광채를 박탈하고 영웅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단지 우스꽝스러운 광대였음을 드러낸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광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라면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두목’ 이다. 공화정을 뒤엎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황제가 되었다는 면에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형식적으로 반복했지만, 비극의 주인공 나폴레옹과는 달리 조카 루이는 그 어떤 숭고함도 표상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시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 했지만, 그는 자기 시대의 임무, “곧 근대 부르조아 사회를 봉건제로부터 해방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했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명언에 굳이 비극과 소극을 덧붙인 것은 그러므로, 모든 반복의 역사가 소극으로 끝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폴레옹은 로마를 반복했지만 영웅이었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을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광대가 되었다.

  「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혁명에서 죽은 자를 깨어나게 하는 일은 과거의 투쟁을 단순히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에 영광을 부여하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 과거의 유령으로 하여금 주변을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했다. 」p13

  그런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오직 과거의 구 유령만이 배회”하도록 했다. 루이가 반복한 것은 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혁명의 떡고물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통해 나폴레옹을 보고자 했던 프랑스 인민들은 거꾸로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퇴보에 대한 어떤 의혹도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옛 시절이 다시 도래”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160여 년 전의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이 책이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 때문이다. 배회하는 유령들로 날로 음산해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김일성의 유령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만이 있다. 지금 다시 박정희를 반복하는 것이 유신독재로 퇴보하는 것인 만큼이나, 노무현의 반복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원칙과 상식의 환상은 깨어졌고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하물며 김일성의 유령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싶지만, 현실은 어이없는 난장판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주체 유령의 난장질로 산산조각 나고 있는 진보를 목격하고 있다. 이제 주사파는 더 이상 진보의 한 분파가 아니다. 경기동부든, 구당권파든,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주사파 무리들을 퇴출시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진보에 대한 희망은 없다. ‘레닌 재장전’을 외쳤던 슬라보예 지젝도 북한 체제에 대해서만은 도무지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지젝은 북한 언론을 인용하며 기막힌 사례 하나를 제시했다. “...북한 최초의 골프장에서 열린 개막 경기에서 친애하는 수령 김정일이 18홀의 경기를 19타로 끝내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선전담당 관료가 어떻게 머리를 굴렸을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 김정일 동지가 매번 홀인원을 달성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럴 듯한 상황을 만들자면 단 한번은 홀인에 2타가 필요했다고 하자....” 우연찮게도 이것은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p91)에 실려 있다. 18번의 홀인원은 몰라도 17번의 홀인원은 충분히 통용되는 곳이 북한이다. 비록 북한 인민 개개인은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전체로서의 인민, ‘대문자 People’ 로서의 인민은 그 누구도 공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탈북자 모시기의 말마따나 총살감이기 때문인지, 도대체 북한의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지젝의 유언비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악의적 음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주사파, 경기동부, 구당권파의 실체 또한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정작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운운함으로써, 국회의원의 대표성 자체를 부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무수한 논자들이 그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국민의 대표자로서 공적 가치관을 밝혀야 할 의무 사이의, 명백히 다른 층위를 설파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주사파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짜피 통하지 않을 대화나 어정쩡한 봉합이 아니라, 한 시라도 빨리 끝장을 보고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태를 질질 끌어가면 갈수록 진보는 수렁으로 빠지고, 정국은 퇴보할 것이며, 박근혜는 아니 박정희의 유령은 손쉽게 권좌를 차지할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 직후, 프랑스에는 곧바로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노동 프롤레타리아, 민주공화파 쁘띠부르주아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심지어는 왕당파 야당까지, 다양한 정파로 구성된 이 임시 정부는 당연한 수순으로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맨 처음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제거되었고, 그 다음엔 쁘띠 부르주아지, 그 다음으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였던 왕당파 야당 연합인 ‘질서당’이 마지막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축출 당했다. 혁명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역사의 퇴보에는 민중의 기만적 믿음이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왜 민중들이 이런 자기기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혁명으로 열린 공간은 나날이 혼탁해 가고, 그 혼돈 속에서 어떤 진보세력도 희망과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신성시했을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능을 질타하고 조롱한다.

  「 무기를 자신들의 수중에 확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는 공화국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시켰고, 그 정부를 사회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근대혁명의 일반적 내용이 제시되었지만, 그 내용은 주어진 조건과 관계 하에서 이용 가능한 수단이나 대중의 교육 수준으로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모든 것들과는 기묘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 p20

  순수성을 고집하며 불가능한 것들만 요구하는 현대의 좌파와도 닮아 있다. 조금만 타협해도 배신자로 낙인찍고,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순혈주의는 최근 주사파 사태가 공론화되기 전까지는 가장 비판받던 좌파적 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항상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들의 순수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현실에서의 실천을 유예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태도를 헤겔을 들어 풍자했다.

  「 이곳이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 」p17

  이 경구는 헤겔이 이솝우화를 변용한 것이다. 로도스 섬에 살 때 엄청나게 높이 뛰었다며 자랑을 하고 다니는 허풍쟁이에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고 한 이솝우화는 말만 하지 말고 “바로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로도스가 장미꽃을 뜻하기 때문에, 헤겔은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는 대구對句를 덧붙였다. 이 경구는 나도 여기저기서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도 “여기가 로도스다!” 는 뻥쟁이를 재갈물리는 가장 확실한 입마개가 될 터지만, 단 그 뻥쟁이가 두루 책깨나 읽은 먹물이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로도스에서는!’ 을 외치던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시들시들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 프롤레타리아 일부는 교환은행과 노동자 협동단체와 같은 공론적 실험에 몰두하며, 구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통해 구세계를 변혁하는 일을 포기하고 차라리 사회의 배후에서 사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제한된 존재조건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려 하지만,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동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p23

 

 

  그렇다고 우리가 고소해할 처지는 더욱 아니다.

  「부르주아지를 위해 공화정을 수립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지들을 당분간 침묵하게 만든 후에 정작 부르주아공화파는 당연하게도 국가를 자신의 재산으로 접수한 부르주아 대중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 대중은 바로 왕당파였다.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들은 부르봉이나 오를레앙의 이름이 아닌 자본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이 공동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국가형태를 발견했다.」p38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 이외의 모든 세력에 의해 혁명의 무대 바깥으로 밀려났다. 가장 거칠고 성가신 프롤레타리아가 사라지고 나자, 그 다음 희생 제물은 쁘띠부르주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획책했던 부르주아 왕당파들 자신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등장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손쉽게 혁명의 무대를 접수했다. 이제 2월 혁명이 수립했던 공화정은 완전히 파괴되고, 프랑스 제2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혁명정신과 공화적인 헌법의 파괴였다.

  「가장 단순한 부르주아적 재정개혁에 대한 요구와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형식적 공화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사회에 대한 도발”로 단죄당하고 “사회주의”로 낙인찍힌다. 」p25

  2월 임시 정부에 함께 참여했던 각 정파들은 자신들만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가장 취약한 기반을 가진 정파들부터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그들 자신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제거한 그 세력이야말로 더 큰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힘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방어막을 해체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많이도 닮아있다. 진보정당은 역사상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성공에 의해 순식간에 몰락했다. 노무현의 실패를 통해 한 단계 더 전진하려했던 대중은 한 순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것이 진보의 맨 얼굴이라면, 차라리 적당히 타락했지만 적당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보수정당인 민주통합당이 낫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한 일반 대중이다. 내가 던진 정당투표가 국회의원 이석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20여년 개인 투표사의 치욕이다. 이 사태는 한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욱 철저히 파괴되는 것은 ‘진보’라는 개념이다. 통합진보당이 주사파를 끊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진보‘는 곧 ’종북‘으로 인식될 것이다. 주사파가 지금까지 보여 온 행태 중 어느 하나도 진보의 개념과 부합하지 않지만, 대중의 인식은 더 이상 그들을 분리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중은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나는 정말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 사태는 무엇보다 최악의 조건 속에 발생했다. 이미 ‘3공, 5공의 정예’들로 구성된 박근혜의 7인회가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념전쟁’에 나선 박근혜의 지지율은 50%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곧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도 종북주의라 낙인찍힐지 모른다. 이 시대의 종북은 과거의 빨갱이만큼이나 대중적 금기가 될지 모른다. 북한처럼 되느니, 차라리 약간의 자유와 평등을 저당 잡히려 할지도 모른다. 대중은 어쩔 수 없이 진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중 자신의 목 졸림으로 돌아오겠지만, 진보의 실체에 경악한데다 경제적 파산의 위기에까지 내몰린 대중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보여주는 몰락의 길을 제 발로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서 완전한 패배만을 보여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고난 속을 방황하고 있다. 혁명은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1851년 12월 2일까지 혁명은 자신의 예정된 과업 가운데 절반을 완수했을 뿐이다. 지금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p137

  이 낙관적 믿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건, 분명한 것은 우리 역시 진행 중의 역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 하에서” 란 단서가 있지만, 어쨌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임을 마르크스가 믿었듯이 나 역시 믿고 싶다.  역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의 창조물인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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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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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 1조 1항이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다. 작곡가 윤민석의 CD는 지금도 차 안에서 가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노래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공화국이 뭘까, 민주공화국은 또 뭘까 잠깐 궁금해 하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민주는 대략 민이 주인이라는 글자 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공화국은 사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북한의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데,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나 인민이나, 학자들이야 엄밀성을 따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그거, 국가의 구성원일 따름이고, 영어로 하면 둘 다 People 아닌가? 남북이 극과극의 체제라고 하지만, 요렇게 놓고 보면 둘 다 추구하는 이념이 같아 보인다. 그럼 이념 대립이란 뭐? 슬슬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질문은 순전히 내 생각은 아니다. 뭔들 온전히 내 사고라는 것이 있겠냐만,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만난다. 영국의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라는 불온한 발언을 했고, 플라톤은 아예 민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 살던 우리에게 사실 우리의 실질적 소원은 통일 보다는 민주였다. 그런 민주주의, 절대 가치인 민주주의가 이런 모독을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갸우뚱했고, 점점 의심이 갔지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무엇 때문에 추문을 벗어나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이런 선거의 계절이 되면 더욱 궁금하다, 그 정체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여덟 명의 서구 사상가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이자 발제로서, 한 편당 2~30쪽 정도의 짧은 논문 여덟 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각각의 논문들은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에서부터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화, 민주주의적 제도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상이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책 자체의 통일된 시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된 개념도 없다.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하기 위해 대중에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론 논쟁이 전공인 사상가들치고는 매우 쉽게 쓴 논문이고, 현실 민주주의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특별히 발제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찾아 요약해 보았다.

 

 

 

 

1.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 조르조 아감벤 (철학·미학 교수)

 

① 민주주의 개념의 두 가지 성격

1) 구성 권력 : 공법 : 일반의지, 입법부

2) 구성된 권력 : 행정체계 : 통치, 행정부

② 서구 정치체계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묶임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정당화해주며, 서로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그 두 요소는 정치적-법적 합리성과 경제적-통치적 합리성, ‘구성형태’와 ‘통치형태’이다. p24

 

 

* 쉽게(거칠게) 말하면, 민주주의의 첫 째 의미는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자체이고, 둘 째 의미는 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통치 형태 즉 행정 체계이다.

 

 

 

 

2. 민주주의라는 상징, 알랭 바디우 (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상징이란 무릇 상징체계에서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p29

②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 두 가지 테제p33

1) 사실상 민주주의적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2) 민주주의적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향락의 견지에서만 구성된다.

③ 플라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동기의 뒤얽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의 부재, 순환에 굴복한 주체성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징,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처럼 즐기라는 정언 명령. p37

④ 끝나지 않은 황혼의 순간에, 자본-의회주의가 그것에 부여한 뜻에서 고려된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p41

⑤ 민주주의란 단어의 본래 의미...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 p41

 

 

* 바디우는 말을 어렵게 하는 편인 듯;; 여튼 바디우는 자본주의 사회를 ‘무조음의 세계’ 즉 대의도 없고 진리도 없이 그저 욕망에 붙잡힌 사회라고 보는데.... 현실 민주주의가 자본-의회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적 인간은 욕망, 욕망의 대상, 그 대상으로부터 끌어내는 찰나의 향락에 묶여서 끝없이 순환하는 주체이며, 이 순환의 상징인 돈에 매달리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다른 모든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이 민주주의는 건드릴 수 없는 상징으로 신성시하고 있으므로, 결국 욕망과 욕망의 숭고한 대상인 돈이 신성시되는 사회이다.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인민이 스스로 권력을 갖는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3. 영원한 스캔들 , 다니엘 벤 사이드 (철학교수)

 

 

* 사이드가 보기에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형태로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통치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하는 행위, 혹은 정치의 조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이드는 약간 랑시에르 쪽에 기운 듯한데 여하튼 이 둘의 대립을 기초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모순을 설명하고자 한다.

 

 

① 민주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급진적 비판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및 상품등가성과 순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데 기초한다. 상품등가성에 따르면 모든 것은 값어치가 같고 등가적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대의라면, 그것은 먼저 그것의 형식을 담지 하는 일반 체계의 대의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거민주주의는 그것이 먼저 자본주의, 오늘날 ‘시장경제’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의 합의적 대의인 한에서 대의적 일뿐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의 부패이다. 맑스가 그런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행기적 독재밖에 없다고 봤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는 그것을 포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의와 부패 사이의 변증법적 궤변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맑스에게 독재는 민주주의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레닌에게도 ‘민주주의적 독재’는 모순 어법이 아니었다. p53~4

② '정의로운 질서‘와 정반대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 형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선 정치의 역설적 조건이다. 그 지점에서 모든 정당성이 궁극적인 정당성의 부재와 마주치고, 불평등주의적 우연성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평등주의적 우연성과 마주친다.” ... 그것은 “통치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유를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분리해내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전혀 아니라,,,,정치의 설립 자체이다.” p57~8

 

 

*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구성하는 권력이란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민의 권력이 구성되어야만 한다. 구성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제도나 체제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루소는 이것을 위해 최초로 ‘사회계약’의 원칙을 도입했다.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합의된 권력은 정당하므로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정당한’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어떤 권위에도 기댈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다. 제도화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당성은 보증될 수 없다는 것.

 

 

③ 민주주의의 실질적 모순은 사회계약의 아포리아에 기입되어 있다.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힘이 법〔권리〕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되자마자 정당성의 토대 문제, 그리고 적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긴장의 문제가 제기된다. p61

④ 생-쥐스트는.....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영향력을 법이 지닌 힘과 불변하는 정의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면 혁명은 확고해 진다. ” 생-쥐스트도, 체 게바라도, 파트리스 루뭄바도,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 신비로운 민주주의적 등식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수수께끼를 남겼다. p66

⑤ ...위임과 대의는 피할 수 없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파업에서도 그렇고, 정당에서도 그렇다. 그 문제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꼭 껴안고서, 위임자가 수임자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의 전문화를 제한하는 대의방식을 찾는 것이 낫다. p71

⑥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성, 비확실성, 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은총, 기적, 계시, 회개, 용서라는 신학의 모든 소지품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정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겠다는 허망한 도주는 사실상 무능력을 영속화할 뿐이다. 원리의 무조건성과 실천의 조건성 사이의 모순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자처하는 대신, 정치는 그 모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모순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지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p79

⑦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p81

 

 

*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는 위임과 대의의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임과 대의를 부정한다면 결국 신에 의존하거나 정치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은 민주주의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이게 하는 스캔들이다.

 

 

4.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 웬디 브라운(정치학 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계종교로 부상했다. 정치권력과 정치문화의 특정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서구와 그 숭배자들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제단으로서,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의 십자군들을 빚어내고 정당화했던 신의 의도로서. p85

② 근대 이전의 공화제적 민주주의가 공통의 지배라는 가치 위에 세워졌고 평등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약속은 언제나 한결같이 자유였다. 대표나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극히 형식적인 의미 말고, 근대 민주주의가 평등을 내세운 적은 결코 없다. p95

③ 임마누엘 칸트, 루소, 존 스튜어트 밀이 그랬듯이, 근대성에서 자기-입법으로 이해된 자유는 인간 존재의 정수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 간주된다. 사실 근대 서구의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은 근대성이 낳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주체이다. 바로 이런 주체의 형상이 민주주의에 문자 그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당성을 만들어줬고, 계속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주체가 지닌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얼굴은 근대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예속시키기 위한 폭력을 허용하고 영속화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하는데, 이는 설사 모든 인민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제국주의적 꿈이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양새를 띠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p96

④ 민주주의를 선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 조재들이 자기-입법을 원하며, 데모스에 의한 지배가 무책임하고 집중된 정치권력의 위험을 견제한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이다...그러나 오늘날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인간 존재가 “빵보다는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할 수있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 또는 철학적 가르침 같은 것이 있을까? ...만일 인류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면....플라톤은 제 자신의 정치적 실존에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히지 않는 사람들이... 루소는 타락한 인민이 공적인 삶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p100~102

 

 

* 웬디 브라운은 근현대의 민주주의를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결합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만들고 합의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가지지만, 이 자유로운 주체가 사실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라는 특정 주체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프랑스 혁명이나 아이티 혁명 같은 것은 뭐란 말인가? 여하튼 이런 의문들을 잔뜩 제기한 후 웬디 브라운은 민주주의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통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가 평등을 배제한 채 유사-자유에만 결합되어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5.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 장-뤽 낭시(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의 양가성은 정치를 구성하는 이원성이나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끊임없이 이중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공통의 실존에 관한 유일한 규칙,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존의 의미 또는 진리의 전제. p109

② 철학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철학처럼 정치는 신의 현전이 끝나면서 나온 발명품이다, 로고스가 뮈토스(신화)의 실추 위에 세워졌듯이, 정치도 신-왕의 소멸 위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신정의 타자다. 이는 민주주의가 ‘주어진 권리’의 타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권리를 발명해야만 한다. p110

③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음을 자각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약점이다. 우리는 이 교착어법의 핵심에 있다. p111

④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난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근본적인 정당성의 자격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112

⑤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는 단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다시 긍정하고 작동시킬 시기이다. 인간에게는 본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온갖 자연적인 것은 지나치게 갖고 있는 주체의 특성 말고는 다른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초험적 원리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의 부재에 토대를 두거나 토대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 p116

⑥ 민주주의가 진짜 욕망하는 진짜 이름, 민주주의가 사실상 지난 150년간 자신의 지평으로서 발생시키고 젊어졌던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다. 이 이름은 모든 점에서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공동체의 상징적 진리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p118

 

 

*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놀랍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는 더욱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낭시의 논문이 내게는 좀 감성적으로 읽혔지만, 여하튼 민주주의는 코뮤니즘,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진리에 관한 물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발명해나가야 하는 것이며,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6.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 랑시에르(철학 명예교수)

 

 

①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단어들에 대한 투쟁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맥락에 따라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p131

②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의 논변이기도 하지요. 가장 강한 자의 권력은 권리라고 서술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권리는 그냥 부과되면 그뿐이니까요. 달리 정당화할 필요가 없죠. 제 생각에 민주주의란 평등 전제이며, 우리의 것과 같은 과두적 체제조차도 바로 그 전제 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정당화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비판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체에 이중으로 박아 넣은 평등의 쐐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치는 단순히 치안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있죠. p132~3

 

 

*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평등 전제’라는 정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평등은 목표가 아니라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 역시 전제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따지고 자시고가 아니라, 평등한 인민주권은 모든 정치체의 전제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랑시에르가 한국을 방문한 모양이고 촛불집회를 보거나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서구에서는 화석화된 민주주의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펙터클하게 상연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촛불집회란?

 

 

7. 민주주의를 팝니다. , 크리스틴 로스(비교문학 교수)

 

 

① 근대에 수용되어 온 민주주의란 투표, 다수의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 ‘최대 다수’의 법에 의한 지배로 이해된다. p149

② 유럽 헌법과 관련한 리스본 조약을 부결시킨 아일랜드의 투표 결과에 대해.. 프랑스와 EU 관리들은 재투표를 요구 ...샤르트르가 ‘바보들을 위한 덫’이라고 불렀던 대의민주주의의 선거조차도 박탈하려는 시도... 그러나 아일랜드의 투표가 보여주는 것은 이 선거라는 형식적 의례도 반-민주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③ 1869년경 프랑스의 정치계에는 각종 민주주의자들이 번성했는데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사회적 민주주의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자’ 등이 있었다.... 이 단어 자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못했다. p152

④ 자네가 내게 말했지. 자네는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민주주의자라고. 이 말을 정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음모가들이 좋아하는 수법이지.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도 아니고 민주주의자이다!”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경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들이라네....그 어떤 견해가 이런 깃발 아래에 똬리를 틀지 못하겠는가? 모든 이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자임을 자임하고 있지. 특히 귀족계층의 사람까지 말이야 p152

⑤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감행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비록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나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주의자라는 이 단어는 여전히 1789년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p153

⑥ 19세기가 시작될 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집단이 그 세기가 끝날 때쯤 그 용어를 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랭보의 시 속에서처럼, 민주주의는 문명화됐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는 서구에 필수적인 정신의 보충물이자 이상적인 무화과 나뭇잎이 됐을 뿐 아니라 문명화됐음을 알리는 깃발, 구호,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계급 살육의 역사가 개시됐음을 선언했다. 유럽에서 파리꼬뮌이 겪은 바로 그런 형태로, 그리고 식민지에서는 그 이상의 폭력적인 형태로. 2008년 국민투표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쏟아진 위협과 비난의 언어에서 우리는 이 폭력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서구는 이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헤게모니는 전 세계에 걸쳐 진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p159~160

⑦ 만약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단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단어를 전유해 온 적들에게 내줘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민주주의란 정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는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랭보의 숱한 구호 중 하나인 사랑처럼, 민주주의는 공적 삶의 끊임없는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서 재창조되어야만 한다. p164

 

 

*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못한 채(혹은 의도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채), 여러 정치 세력에 의해 이용당해 오다가,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문명화된 서구의 정신적 깃발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통치형태가 아니라 인민의 권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섣불리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는 투쟁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8.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 슬라보예 지젝 (이론정신분석학협회 대표)

 

 

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와 동일시할 수 있는 모든 특징(가령 노동조합, 보통선거, 무상 의무교육, 언론의 자유 등)은 19세기 내내 하층계급이 길고도 힘든 투쟁을 해 쟁취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다. p172

②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충격요법을 써서 민주주의에 투신하고 서둘러 자본주의를 향해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제적 파산선고였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 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라는 괴상은 결합은 말도 안 되는 변칙이 아니라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p174~5

 

 

*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일 때 오히려 더 빨리 발달했다는 것.

 

 

③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p187~8

④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p191

⑤ 이 사실은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가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관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점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한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결국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의 대표자들이 텅 빈 권력의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p194

⑥ 차베스 정부는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차베스는 그들의 대통령이고, 그의 통치 아래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그들이다. 비록 민주적 선거의 규칙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차베스가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대상이자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내는 원천은 그런 규칙이 아니라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 민주적인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p194

⑦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란 선거로 집권한 급진 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따라야 한다. p195

 

 

* 어쩌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지젝이 다시 부활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은. 어쨌거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신적 폭력은 인민주권이란 원칙에서 정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독재라는 개념에 관한 것인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 이라고 했다. 처음에 차베스가 선택한 것은 대의민주제의 형식인 선거가 아니라 쿠데타였다. 실패 이후 전략을 바꾸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은 ‘제헌의회 소집’ 이었다.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베네수엘라의 지배 체계가 이미 미국과 자본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 빈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그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다 결국 패배하고 대통령궁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차베스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기존 헌법체계를 무효화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국회, 법원, 행정부는 모두 해산되고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구성되었다. 물론 차베스의 혁명 세력이 모든 국가 조직을 장악했고, 차베스는 빈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혁명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베스를 몰아내려는 쿠데타와 음모가 끊임없이 시도되었지만, 차베스를 지지하는 절대 다수의 빈민들은 이를 막아내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차베스의 권력은 곧 빈민들의 권력이고, 이것을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태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보면, 빈민의 권력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 원리에서 나온 정당한 권력이다. 문제는 이 인민의 권력이 대의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차베스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선거 형식과는 상관없는 포퓰리즘적 성격이 짙다. 차베스가 곧 인민의 일반의지를 직접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과잉’이 출현하기 쉽다. 그러나 이 전체주의적 과잉이 베네수엘라의 빈민, 즉 기존 사회 체계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들의 편에 있는 것이라면, 민주적 형식이라는 것은 그다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베스 권력의 정당성은 빈민들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에 있는 것이지 민주적 절차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젝의 급진적인 혹은 너무나 구식인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관해서 수용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의 원리라는 점에서 음미해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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