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0년 9월 14일,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줄곧 비가 온 탓일까, 아직 덥지만 어딘가 가을이 시작된 느낌이 든다. 한 여름에 손에 쥐었던 <자살론>을 이제야 끝냈다.  그나마 찬 바람이 불기 전에 끝을 내어 다행이지만, 솔직히 학교 졸업한 이후 이렇게 지루한 책을 끝까지 읽어 낸 것은 처음이다. 습작당과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열두 번은 더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해야 선생님을 따라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무미(無味)한 수치들에 눈길을 되풀이 붙이곤 했다. 그래봤자 30분도 못돼서 꼬박꼬박 졸기가 일쑤였지만 말이다.


뒤르켐의 수치들은 대부분 1800년대의  것이다. 그리고 특히 1장의 분류방법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너무 엉성한 면이 있다. 정신병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법 같은 것들은 좀 웃기기도 했다. 적어도 ‘자살’의 비사회적 요인을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로 1장은 너무 너무 지루했다. 그러나 뒤르켐이 진짜로 주장하고 싶은, 자살과 사회적 요인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기적과 이타적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 용어와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아마 뒤르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자살은 사회의 통합 정도와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주의자는 세상에서 자신 말고는 의미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며, 지나친 이타주의자의 슬픔은 반대로 자신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긴다. 전자는 자신이 집착할 아무런 목적을 찾을 수 없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삶을 벗어 던지며, 후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가 삶의 외부에 존재하므로 삶이 장애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삶을 버린다.」

자기의 외부에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가 너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 살아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기주의적 자살이고, 사회의 가치가 너무나 위대하여 자신의 목숨은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이타주의적 자살이다.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이란, 이런 성향이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사회의 규범norm이 무너지고 새로운 규범norm이 아직 굳건히 세워지지 못한 아노미anomy 상태에서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은 급격히 분출할 수 있다.

그래서 뒤르켐이 내놓은 해법은 적절한 사회 통합의 방법으로서의 ‘조합’, ‘직업 집단의 조합‘ 이다. 조합은 국가가 하지 못하는 규범을 세우고 개인을 묶어서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집단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직업 집단이 노동자 집단을 말하고 그래서 결국 이것이 노동조합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답게(? 사회학자라는 것이 꼭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전체주의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개인은 개인으로서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적 통합 없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 갈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사회 밖에서도 살아 갈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거나, 사회를 버리고 자살하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나쁘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사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형태든지 사회 속의 구성원이 되지 않고는 의미 있게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하다못해 속세를 버리고 떠난 스님들도 신도를 모아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내가 이 습작당에 머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사회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통합된 사회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

한때는 군부 독재가 없으면 누구나 행복한 사회가 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만 전에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장밋빛 꿈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났고, 사람들은 그 어긋남에 대하여 목청껏 떠들지만 아직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은 우리 사회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민노당으로 그리고 또 진보신당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이에 다리의 힘은 빠지고 기력은 쇠해간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아노미성 허무주의가 유혹한다. 사회는 어짜피 모두 다 나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가장 나쁜 사회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맑스에게로? 레닌에게로? ...누구는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다시 스탈린이라면....

얼만 전 진중권의 유토피아 논쟁이 불붙었던 적이 있다. 유토피아란 환영 혹은 신기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유토피아적 비전이라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통합된 사회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지지난 남자의 자격편에서 박칼린은 넬라 판타지아의 솔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솔로는 피아노에 얹혀 가는 것이 아니라 저 희망의 세상으로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수백명을 이끌고 기어이 가고 말겠다는 의지와 신념을 표출하는 강인함이라고. 그런데 앞장 선 솔로가 가리키는 저 희망의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가 그 뒤를 따르겠는가? 만약에 유토피아란 그저 이 세상에는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누구나 생각해 버린다면 말이다.


사실 자살론을 읽으며 나는 내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생각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사회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면, 까뮈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자면,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라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 다시말해 어떤 유토피아도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면 말이다. 물론 <시지프의 신화>는 조금 다른 것들을 다루고 있고, 나는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어 어쩌면 엉뚱한 연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다 읽고 나면 최소한 자살할 마음은 없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내는데 실패한(개인적으로ㅋ) <자살론> 보다는 아마 그 효과에 있어 훨씬 더 유용할 <시지프의 신화>를 나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살에 관한 사회적, 개인적 생각은 <시지프의 신화>를 읽고 난 후에 조금 더 이어가기로 하고, 뒤르켐의 <자살론>에 관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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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