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과 군중 -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공중의 세계인가?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지도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11년 11월 22일, 카페 과제물로 쓴 글입니다. 이 때는 타르드(따드)의 책이 번역된 것이 없었는데, 그 이후 두 권이나 나왔네요.  리뷰 상품인 <여론과 군중>과는 상관없이 쓴 글입니다. 

그 때 과제는 타르드를 우리 나라에 소개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기획서까지 써보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쓴 세 글 중 마지막 글입니다. 기념 삼아 옮겨 두었습니다.

 

 

 

세상에 라이벌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참 많다.

 

 

 

 

일요일 오전에 방송하는 MBC <서프라이즈> 에도 ‘불멸의 라이벌’이라는 코너가 있다.

내가 본 것은 에디슨 대 테슬라, 미켈란젤로 대 다빈치 편이었다.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어디에 있건, 이런 대결 구도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 주는 그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치졸함에 있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이야기를 보면, ‘천재라는 것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라는 멋진 격언이 어쩌면 테슬라의 발명 스타일에 대한 에디슨의 질투와 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에디슨은 될 때까지 실험을 반복하는 노력형인 반면 테슬라는 직관과 영감으로 승부하는, 어찌 보면 진짜 천재였기 때문이다.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에디슨과 테슬라는 노벨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서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이 두 라이벌은 동급으로 취급받느니 차라리 수상을 거부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다.

 

 

수학사에는 이 보다 더 살벌한 대결도 있다.

칸토어라는 수학자는 당시에만 해도 신의 영역이었던 ‘무한’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결국 정신 병원에서 죽었다.

칸토어의 무한 개념을 인정할 수 없었던 크로네커는 칸토어의 논문 발표와 교수직 임용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다른 수학자들과 함께 칸토어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끈질긴 방해와 핍박 속에서도 칸토어는 실무한의 이론을 정립하여 후세에 집합론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이한 비극적 인물이었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는 칸토어의 묘비명은 그의 정신병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혹은 없다고 추정되는) 크로네커가 그의 스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찬드라세카르는 블랙홀의 단초를 제공한 천체물리학자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 출신의 이 젊은이는 영국 유학의 기나 긴 항해 길에서 ,이후에 ‘찬드라세카르 한계’라고 불리게 될 획기적인 이론을 착안해 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들의 노년은 백색왜성이라고 알려졌는데, 찬드라세카르는 별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4배가 넘으면 중력 때문에 그 별은 백색왜성이 되지 못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다.

이렇게 폭발한 별들은 질량에 따라 중성자별이 되거나 블랙홀이 된다는 것이 후대의 연구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문학회의 거장이었던 영국의 에딩턴 경은 찬드라세카르의 이론을 ‘별 장난’으로 치부하며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식민지 원주민이었던 찬드라세카르는 막강한 귀족 과학자인 에딩턴의 핍박으로 한때 연구 분야를 바꿀 결심까지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론을 천체물리학계에 남기게 되었다.

 

 

당대의 최고 학자이며 저명 인사였던 사람들도 때로는 지독히도 치졸했던 것 같다.

논문 발표를 막고 온갖 술수를 부리면서까지 학계와 사회에서 라이벌을 매장시키려 했던 그들의 행동은 사실 인지상정으로 봐주기에는 과한 면이 있다.

치졸함을 드러내면서까지 라이벌을 짓밟아야 했던 그들의 분노는 어떤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그들 자신이 그 누구 보다 먼저 그 신예 라이벌들의 가능성과 파괴력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초조함과 불안감에 그토록 잔인하고, 그토록 폭발적으로 분노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과잉 반응은 그 자체가 어떤 질병을 나타내는 증상일 수도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부모나 선생님은 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한 아이 보다는 과잉적 폭력을 휘두르는 체벌자의 내면을 주목하게 만든다.

길거리에서 아이를 쥐 잡듯이 잡아 족치는 엄마의 귀를 찢는 고함 소리는 차라리 삶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지르는 비명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권위와 명성의 힘으로 혹은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그들의 과잉 탄압 또한 신예 라이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나타내는 증상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청출어람’ 이란 말은 겉보기만큼 그렇게 훈훈하기만 하거나, 맑고 깨끗한 푸른빛이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뛰어 넘는 제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수많은 스승과, 스승을 넘고 나아가야만 했던 제자들이, 얼마나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어야 했는지, 역사의 곳곳에 남아 있는 이 기록들이야말로 그 증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승부가 의외로 간단히 끝날 수 있다.

당대에는 권위나 명성에 억눌려 묻혀 버리기도 하지만, 한 번 빛을 본 위대한 이론들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살아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막힌 학문의 물꼬를 트고 신세계로 향하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고 가야 할 비밀의 문 같은 것이어서, 후학이라면 그 봉인을 풀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라이벌들을 현재에 다시 불러오는 이유가 그리 복잡할 것 같지는 않다.

역사 속의 인물들이 지지고 볶은 그 '서프라이즈‘한 쟁투만으로도 어느 정도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데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류의 교훈도 살짝 얹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진리는 승리할지니 굳세어라, 젊은이여!?

 

 

 

 

하지만 여기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불러 낸 세종 이도와 밀본 정기준의 대결 말이다.

 

 

 

그전에 잠깐, 여러 편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매우 친근해진 이산 정조에 관해 살짝 살펴보자.

내가 아는 한 대중에게 정조에 관한 관심을 맨 먼저 끌어 낸 사람은 소설가 이인화이다.

그가 <인간의 길>이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를 미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전, 그의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켜 준 것은 소설 <영원한 제국>이다.

<영원한 제국>은 간단히 말해 어떤 정치 형태가 더 훌륭한 것인가를 놓고 정조와 노론이 벌이는 정치적 투쟁에 관한 소설이다.

정조는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성왕정치를 주장한 반면, 노론은 붕당을 통해 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신권 중심의 붕당정치를 고집했다.

붕당은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 이라고 한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 때문에 붕당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지만, 사실 붕당은 지금의 정당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삼권이 분립되어 있는 현대의 민주정치에서도 이상한 대통령 하나가 5년이 채 되기도 전에 온 나라를 뒤집어 놓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사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강력한 왕권은 세종이나 정조 같은 성군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연산군 같은 폭군이 더 막강하게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백성의 삶이 왕의 품성 하나에 달려 있는 체제란 사실 야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붕당을 만든 양반들이 공맹의 도에 따라 올바른 정치를 이끌기 보다는 사리사욕과 가렴주구에 탐닉하게 되면 백성의 삶이란 어짜피 피폐해질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현대의 정당정치가 가져오는 폐해와도 다르지 않다.

국회가 날치기 통과시킨 각종 법안들이 오히려 국민의 목을 옥죄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굳이 애써서 찾아낼 필요도 없는 것이,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는 한미 FTA가 날치기를 앞두고 있다.

 

 

정치체제란 당대의 사회적 상황이나 힘의 관계와 분리하여 판단할 수는 어렵기에, 단순히 성왕정치가 더 나은가 아니면 붕당정치가 더 좋은가 따위의 질문은 별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내가 <영원한 제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왜 이인화가 조선 시대의 정치적 대결 구도를 현대에 다시 불러 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을 통해 정조의 왕권중심 체제를 강력히 옹호하고 있다.

어떤 블로거의 서평에 의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천황중심의 절대왕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는 왕에 의한 유신이 없었고 이 때문에 권문세도가의 가렴주구가 왕국의 쇠멸을 재촉했다’ 고 한다.

이 블로거는 ‘이 소설에는 정조가 살아서 유신에 성공했더라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도 않았고, 박정희가 군사 정권으로 유신을 단행하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감추어져 있다’ 고 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인화가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비극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일까?

 

처음 <영원한 제국>을 읽었을 때 나는 참 많이 감동했다.

붕당이란 것이 패를 갈라서 자기들 뱃속만 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니구나, 비록 상복 하나에 목숨을 거는 희극을 벌였을지언정 그 바탕에는 왕의 전횡을 막고 백성을 위해서 공론의 정치를 펴려했던 훌륭한 이념이 있었구나....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뿌듯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인화는 정조의 왕권정치가 좌절된 것에 깊은 회한을 표했지만, 나는 꼬장꼬장한 노론의 영수 심환지가 그렇게 악마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랬던 것이 그 이후에 출간된 <인간의 길>을 읽고서야, 나는 이인화가 왜 하필 정조를 이 시대에 다시 불러들였는지를 뒤늦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인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절대군주이건 군사독재 정권이건,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절대 권력에 의한 근대화 작업이었다, 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속에 잠자던 정조가 기껏 박정희의 들러리를 위해 후손들 앞에 불려 나왔던 것이다.

나는 극심한 배반감을 느꼈지만, 원래 이인화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는 결코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영원한 제국>을 통해 그의 사상을 세심하게 다듬어 유포시켰던 것이다.

이인화의 세계에서 박정희는 정조가 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근대화 작업을 완수해낸 훌륭한 지도자였고, 다만 이 근대화 작업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독재 정치는 필요악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인화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독재자의 길을 걸어 가야 했던 인간 박정희를 형상화함으로써, 박정희에게 인간적인 아우라마저 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영원한 제국>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인화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건 나는 그 책을 통해 정치 체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얻었던 것이다.

사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 본 적도 없고, 왜 국가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뉘어져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것들은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인 것, 그냥 원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당연한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정치 체제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것들은 목적에 따라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고 또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기초적인 상식이지만, 그것이 박제된 상식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히 마음을 파고드는 상식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결코 완결된, 완벽히 이상적인 체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영원한 제국>의 짝퉁은 아닌가 조금 의심했다.

왕의 밀명을 받은 학사들이 죽어 나가고, 왕은 무언가 비밀스런 일을 꾸미고 있고, 그것을 파헤치는 과정에 왕과 신하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기타 등등.... 이건 거의 표절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표절에 관해서라면 뭐 이인화가 시비를 삼을 리는 절대 없을 터이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인화의 첫 장편소설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표절 시비에 휘말렸을 때 이인화는 자신의 작품이 공지영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만을 베낀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마구 베낀 혼성모방 (페스티쉬)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표절이 아니라 하나의 당당한 예술적 기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바람에 페스티쉬라는 생소한 단어가 일약 유행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뿌리 깊은 나무>는 나의 그 우려가 제대로 증거를 갖추기도 전에,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아, 표절이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대결 구도는 복합적이다.

 

  태종 대 세종

  이도 대 똘복

  세종 이도 대 밀본 정기준

  소이(담이) 대 정채윤(똘복)

  정채윤 대 정기준

 

 

<뿌리 깊은 나무>가 <영원한 제국> 보다 복합적인 대결 구도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왕과 사대부가 공히 국가의 근본으로 내세우는 바로 그 ‘백성’이 전면에 부각되어, 대립의 한 축을 능동적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똘복과 소이는 절대 왕권을 추구하던 태종과 재상 정치를 뿌리내리려는 사대부 사이의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백성들이다.

세종 이도는 아비와는 달리 문의 길을 자신의 통치 형태로 삼았지만, 세종 역시 왕권을 강화하여 직접 성왕정치를 실현하려는 점에서 태종의 길과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성왕정치의 근본은 백성이다.

군주의 역할은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어버이처럼 돌보는 어진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이 꿈꾸었던 재상정치 역시 백성이 근간이라는 민본사상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정도전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 라는 맹자의 사상을 정치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니, 밀본이 주장하는 재상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백성은 늘 명분으로만 존재할 뿐 살아있는 개개인의 인간으로 존중받지는 못한다.

그것은 비단 조선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여타의 정치·역사물들과 뚜렷한 차별화에 성공하는 것은 백성이 명분이나 배경으로서만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로서, 주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복합적 대결 구도는 실제로는 왕권, 신권, 백성이라는 삼자 구도의 형태로 간결화 될 수 있다.

 

 

 

 

                                       똘복, 소이

 

               세종 이도                                         밀본 정기준

 

 나머지 대립들은 세부적인 이야기 전개에 흥미와 긴장을 불어 넣는 곁가지 대립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밀본의 수장 정기준은 세종 이도의 치세가 태평성대임을 인정한다.

밀본이 세종에 반대하는 것은 세종이 무능한 군주이거나 폭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이익이 침해당할까 우려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정기준은 세종이 성군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한다.

정기준의 우려는 이대로 왕권정치가 뿌리를 내리면 세종 이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있다.

무능한 왕이나 포악한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될 때, 이것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그 때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정기준이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삼봉 정도전이 관료 체제를 확립하고 재상 정치를 주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 이도는 어린 시절 정기준이 과거장에서 써 낸 글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는다.

세종은 유림들이 몰래 모여 정도전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바위에 올라서 정도전의 혼백에게 술을 뿌린다.

정도전만은 아마 자신이 하려는 일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세종 역시 정도전의 민본사상이 자신의 덕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분노는 백성을 위한 자신의 정책이 현실 정치에서 사사건건 사대부에 의해 방해받는 다는 사실에 있다.

사대부들은 정도전이 가리킨 민본의 이념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재상정치의 체계와 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만 매달린 채,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있다고 세종은 분노한다.

 

 

“내가 대체 뭘 그리 잘못했느냐? 나는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내 신하들은 지금도 모두 모여서, 내 뜻을 거스를 모의를 한다더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중국의 책력이 아닌 우리의 책력을 만든다 할 때도, 천문기기를 만들기 위해서 중국에 사람을 밀파할 때도, 세법 가부조사를 할 때도, 노비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려 할 때도... 대행 대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사옵니다. 국고가 낭비 되옵니다. 신분 질서가 어지럽혀 지옵니다... 지랄들 하고는... 결국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면서, 온갖 공맹의 도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공자께서 언제 자국의 책력을 만들면 안 된다 하셨느냐? 맹자께서 제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안 된다 하셨어? 나는 단지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

 

 

세종은 신하들에게 소리치는 대신, 정도전에게 술을 바친다.

세종이 신하들의 면전에서 직접 호통 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비록 형식에만 매달려 있다 해도, 정도전이 만든 경국대전은 조선 통치 이념의 근간이며, 그들의 논리 역시 만만하게 깨어질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익을 취하는 신하들은 별도로 하더라도, 적어도 세종 이도와 밀본 정기준 사이의 대립에는 원칙적으로 사사로운 이익에 대한 다툼은 없다.

이들은 말 뿐인 대의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대의를 위해 사활을 거는 것이다.

두 가지 체제 모두 대의와 논리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현실에서 잘못 운용될 경우 치명적인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

왕은 폭군이 되어 백성을 헐벗게 만들 수 있고, 사대부는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을 수탈할 수 있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

 

여기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는 새로운 길은 바로 ‘각성한’ 백성의 힘이다.

 

똘복은 왕이고 나발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신분이나 계급에 억매이지 않는 그의 주체성은 본능적으로 획득된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권에 대한 인식과 다르지 않다.

복수를 꿈꾸며 무작스럽고 교활하게 굴러 온 똘복이지만, 그가 철칙으로 신봉하는 것은 세상에 천한 목숨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똘복은 세종 이도를 죽여 왕의 목숨과 아버지 노비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소이의 주체성은 각성의 산물이다.

소이는 한자를 몰랐지만, 아는 체 했고, 그것 때문에 모두가 죽었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죄의식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세종이 백성들의 문자를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즉각적으로 그것이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닫는다.

문자야말로 왕이나 사대부의 농단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해독 불능의 편지(문자)’가 촉발한 비극 속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소이 보다 더 처절하고 절실하게 새로운 문자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달리 누가 있겠는가.

소이의 비극은 소이를 산주검으로 몰아갔지만, 그 죽음을 통과한 소이는 주체적 인간으로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는 그렇게 소이의 새로운 삶이자 복수가 된다.

소이는 직접적인 복수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백성들이 문자를 갖게 됨으로써 왕과 사대부와 백성이 모두 평등한 인간임을 입증하는 것, 더 천하고 더 귀한 목숨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소이의 복수이자 속죄이다.

문자가 곧 권력이었다면 백성의 문자는 그 권력을 백성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세종 이도가 백성의 문자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종은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사대부가 되더라도, 백성들이 억울하게 핍박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도전이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재상 정치 체제를 구축했던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전이 제도로서 백성을 보호하려 했다면, 세종은 백성 스스로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정기준의 투쟁은 철저히 사대부의 결사체인 밀본을 중심으로 실행된다.

재상정치의 근본에는 민본사상이 있지만, 조선은 또한 사대부의 나라이고 백성은 수동적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기준이 비록 가리온이라는 백정으로 수십 년을 반촌에서 살았다고 해도, 그는 한 번도 천한 신분의 백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뜻을 펴기 위한 수족이었을 뿐이었지, 뜻을 함께 하는 동지는 아니었다.

정기준에게 '민본'의 民인 백성은 다만 추상적 존재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종의 한글 창제에는 반드시 소이와 똘복이 필요하다.

허구의 인물임이 분명하겠지만, 그래도 <뿌리 깊은 나무>에서 소이가 한글 창제의 핵심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성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는 ‘백성의 문자’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작가들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 <뿌리 깊은 나무>의 끝 부분에 밀본 세력에 의해 세종이 문자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막에 둘러앉은 백성들은 낄낄거리며 별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당하면 당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냥 백성이다.

백성들은 아직 문자가 무엇인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 하루하루 밥 먹고 살아가는 일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귀찮고 쓸데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똘복은 세종을 향해 악을 쓴다.

문자를 몰라서 억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천해서 당하고 사는 것이라고.

문자를 몰라서도 죽지만, 문자를 알아도 죽는다고.

 

세종 이도 앞에 놓인 과제는 그러므로 단순히 사대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문자를 반포하는 것만이 아니다.

세종은 한글에 대한 두 번째 판관으로 똘복 정채윤을 선택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문자가 왜 필요한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한글이 백성의 문자로서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 방송 분량의 절반이 방영된 시점에서 <뿌리 깊은 나무>의 후반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관심사는 똘복 정채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똘복이 어떻게 한글을 수용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백성들의 삶에 어떤 능동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드라마의 명운이 달려 있을 것이다.

 

 

나는 힘없는 백성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탄생하는 소이와 똘복이라는 인물이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이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세련되어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사실 ‘소인이 뭘 알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드라마 속의 백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쉬운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지를 백성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문자란 그저 지랄염병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1인1표의 투표권이 주어졌다 해도, 그것이 등록금이나 취업난, 전세난, 빈부격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스스로 깨닫고 참여하지 않는다면 민주적인 선거 제도 역시 쓰잘데기 없는 정치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의 시대에서 문자에 눈뜬 백성이란 지금 이 시대에 정치의 필요성에 눈뜬 시민과 같지는 않을까?

소이가 똘복을 변화시키듯 우리도 우리를 변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을 이 드라마는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가 성왕정치와 재상정치 사이에서 세종의 편에 서는 것은 그 제도 자체의 우수성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백성의 문자라는 ‘한글’ 자체가 백성을 다스림의 수동적 대상으로 보는 사고로는 절대로 착안될 수 없고,  문자란 스스로의 뜻을 펴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고, 제도 자체 보다 더 탄탄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히 발상해내고 창제해낸 세종의 정치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핵심에 ‘백성의 참여’를 배치한 까닭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 ‘참여’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현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역사적 인물을 현재로 다시 불러 올 때는 그 인물의 삶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어떤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런 인물도 있었다거나 이런 신기한 사건이 있었다는 차원에서 역사 속에 곱게 잠자는 인물을 깨워 온다면, 괜히 미이라의 저주니 어떠니 하는 괴 소문에나 시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을 소환할 때는 먼저 그 사유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그것을 기획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이 내가

“ Gabriel Tarde에 대한 소개서를 자신이 낸다고 할 때, 출간 기획서를 쓰시오

”란 과제를 받아들고 계속 생각해 왔던 문제이다.

 

우리의 독자는 일반 대중이거나 기껏해야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진 대중이다.

따드는 대중에게 어떤 현재적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내가 가질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백과사전적 정보에다가, 동시대의 사회학자 뒤르켐과 라이벌이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의 책은 번역된 것이 없고, 그의 사회학적 방법론은 라이벌 뒤르켐에 의해 매장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심리학적 사회학’이란 이름 외에는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고작해야 “모든 사회현상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적(心的) 관계라는 궁극의 형태로 환원되며, 이것이 ‘순수하게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사회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일단 따드에 대한 우리의 소개서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뒤르켐과의 라이벌 관계다.

그러나 단순하게 뒤르켐이 얼마나 철저하게 따드를 파묻었고, 따드는 얼마나 생고생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나 등등의 이야기만으로는 별로 신선할 것이 없다.

세기의 라이벌, 불멸의 라이벌, 불구대천의 라이벌 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 왔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려면 일단 따드의 이론이 복권되어 거꾸로 뒤르켐을 파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땅에 묻힌 고분을 발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따드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대에 따드가 공헌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 따드를 필요로 하고 있어야 한다.

학문은 과거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해나간다고 할 수 있지만, 거꾸로 현재의 연구가 과거에 매장된 이론을 되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가 아니다.

우리 책은 전문 서적도 아니며, 따드의 책을 번역할 계획도 없다.

우리의 목적은 따드의 발굴이 아니라, 따드의 대중화이다.

따드의 이론이 훌륭해 보이니 그것을 먼저 발굴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분석해낼 방법을 찾아가는 식의 순서를 밟을 수는 없다.

우리는 거꾸로 따드를 통해 우리 사회를 성공적으로 분석해낸 사례를 찾아서 따드를 소개하는 방식을 택해야만 한다.

사실 그런 성공적인 사례가 없다면 우리는 따드를 포기해야 한다.

훗날에 제대로 따드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출간 기획서의 목표는 따드를 소개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먼저 판단하는 것이다.

정식 출간 기획서는 그 판단이 이루어진 이후에 작성될 수 있을 것이다.

출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따드와 관련된 연구자들을 찾아서 그들의 연구 내용과 그들이 판단하는 따드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따드의 이론을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 적용한 사례를 찾는 것이다.

셋째 그 사례들이 대중적으로 공감될 수 있거나 대중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책도 반드시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책이라 하더라도 ‘유용성’이 없이는 대중 서적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유를 촉발하건, 교양을 함양하건, 재미를 주건 대중 서적은 대중에게 줄 수 있는 유용한 그 무엇, 그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따드에 관한 기획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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