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2월 3일에 쓴 글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정치체에 대한 권리>의 리뷰 글을 쓰려다, 중간에 그만 둔 글인 것 같습니다. 나름의 문제 제기 비슷한 것이라 옮겨 둡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가끔, 내 나이가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십 대 때는 ‘나이 서른에 우린 무얼 하고 있을까?’를 부르고, 삼십 대 때는 어서 ‘불혹’의 안정이 찾아오길 바랐지만, 오십에도 ‘지천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무렵 어떤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기쁨의 감정은 아직도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아, 이 나이에도 배울 것이 있고,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은 참으로 강렬했다. 그 나이에 아마 나는 죽고 싶었고, 세상에서 더 배울 것도, 기쁨을 느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싶다.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 있으며, 기쁨도 그리고 간혹 행복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다. 평균 수명 구십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때까지 살아야 할 일이 암담하지만, 도서관의 서가 구석구석을 뒤지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구십 수명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대학교 때, 지금의 ‘도를 아십니까?’처럼, 혼자 캠퍼스를 걷고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따라 붙는 선교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창하는 것이 ‘영생’ 이었다. 나는 종교 자체 보다 그 영생이라는 말에 질겁해서 종종걸음으로 내빼곤 했는데, 영생이라니.. 영원히 죽지 못하는 고통 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때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의학과 뇌 과학이 결합해서 언젠가는 인간이 죽지 않고, 장기들을 갈아 끼우며 영원히 살게 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인간들은 진짜 행복할까, 나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다 죽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다지 명료하진 않지만 읽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정신만은 놓지 않고 살다 가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며 산소 호흡기를 수년씩 끼워 두는 행동이 나는 전혀 존엄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들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종합병원을 보면, 차라리 돈의 존엄성이라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정작 멀쩡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는 병원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는 건지, 종교 계열의 병원들이 존엄사를 두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그 위선을 스스로 어떻게 합리화하는지가 궁금하다.

 

  지금 내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살아갈수록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은데, 잠깐 넋을 놓으면 또 세상만사 모두 그렇고 그렇지 하는 상태로 돌아가고 마니, 어떻게 해서든 넋을 붙들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공자를 전공하는 지인에게 不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했던 생각만 남아있다. 마흔은 의심이 없거나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 세상일이 이제 와서 의심스럽거나 세상일에 이제와 흔들릴까봐 덜컥 겁이 나서, 똥고집이라도 부리며 그 두려움을 감추어야 하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의심이 없다는 것은 질문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꼰대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불안을 감추며 굳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으니 슬프다. 그렇다고 어떻게 나이를 먹지 않고 또 기성세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누가 뭐래도 이십대는 이십대고 사십대는 사십대일 수밖에 없다.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 ‘국가’가 있다. 말이 곰곰이지 가끔 어떤 계기로 그것들을 떠올리면 짧은 생각을 굴리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빌려다 읽는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환율이다. 똑 같은 물건이 어떻게 국경만 넘으면 갑자기 비싸지기도 하고, 또 턱없이 싸지기도 하는지 참 신기했다. 세계 여행기들이 넘쳐나면서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하루 종일 먹고 잘 수 있는 가난한 나라 이야기를 읽노라면 왠지 불편했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달을 일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도 살기 어렵다는 말과 똑 같은 것이다. 일년 내내 선배들에게 빈대 붙어 아낀 점심값까지 탈탈 털어서 유럽에 가서 홀라당 날리고 오는 후배 동료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똑 같이 일 년을 일해서 모은 돈이 왜 어떤 나라에 가면 일 년 밥값이 되고도 남는데, 다른 나라에 가면 열흘 밥값도 안 되는지, 이런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재밌는 것 중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들이 있다. 바다에 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엄쳐 다니던 고등어가 우리나라 쪽에서 잡히든, 잠깐 놀다가 중국 쪽으로 가서 잡히든 그 고등어가 그 고등어 일텐데도, 마트에 떡하니 팻말을 달고 있으면 중국산이냐 국산이냐에 따라 가격이 화악 달라진다. 중국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을 침범해서 싹쓸이 해 간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은데 그러면 그 배들이 잡아간 갈치는 국산 갈치일까, 중국산 갈치일까? 아, 별 것이 다 신기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다. 가격이라는 것이 원래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들로 정해지는 거지, 그 물건 자체의 고유한 가치(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와는 암 상관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 하며 역증을 내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고 요상한 것을.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음식점에 가면 차라리 조선족 아줌마들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아줌마들이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아줌마들과 똑 같은 일을 하고도 더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 아줌마들은 심지어는 우리나라 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는데 말이다, 물론 약간의 북한식 억양이 섞여 있긴 하지만. 만약 경상도 억양이나 전라도 억양이 있다고 급여를 차별했다면 ‘나꼼수’가 나서야 할 일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것 때문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들에 우리나라 노동력 보다 더 싸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체류가 가능한 이들이다. 아마 예전에 독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그 차별은 외국인 노동자의 태생적 조건이므로 적법하고 정당한 것인가? 고용주는 우리나라 노동자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관계없이 똑 같은 노동의 산물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주민등록증의 유무에 따라 그의 노동의 가치를 차별받는 것을 마땅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래서 국가란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안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놓인다. 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도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처럼 정규 사원임을 입증하는 사원증을 가진 노동자만이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군말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부당하다면 왜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은 정당한 것인가? 역시 국가인가? 어째서 국가란 틀에 놓이면 이 모든 불합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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