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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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 1조 1항이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다. 작곡가 윤민석의 CD는 지금도 차 안에서 가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노래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공화국이 뭘까, 민주공화국은 또 뭘까 잠깐 궁금해 하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민주는 대략 민이 주인이라는 글자 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공화국은 사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북한의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데,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나 인민이나, 학자들이야 엄밀성을 따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그거, 국가의 구성원일 따름이고, 영어로 하면 둘 다 People 아닌가? 남북이 극과극의 체제라고 하지만, 요렇게 놓고 보면 둘 다 추구하는 이념이 같아 보인다. 그럼 이념 대립이란 뭐? 슬슬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질문은 순전히 내 생각은 아니다. 뭔들 온전히 내 사고라는 것이 있겠냐만,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만난다. 영국의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라는 불온한 발언을 했고, 플라톤은 아예 민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 살던 우리에게 사실 우리의 실질적 소원은 통일 보다는 민주였다. 그런 민주주의, 절대 가치인 민주주의가 이런 모독을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갸우뚱했고, 점점 의심이 갔지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무엇 때문에 추문을 벗어나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이런 선거의 계절이 되면 더욱 궁금하다, 그 정체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여덟 명의 서구 사상가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이자 발제로서, 한 편당 2~30쪽 정도의 짧은 논문 여덟 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각각의 논문들은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에서부터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화, 민주주의적 제도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상이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책 자체의 통일된 시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된 개념도 없다.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하기 위해 대중에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론 논쟁이 전공인 사상가들치고는 매우 쉽게 쓴 논문이고, 현실 민주주의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특별히 발제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찾아 요약해 보았다.

 

 

 

 

1.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 조르조 아감벤 (철학·미학 교수)

 

① 민주주의 개념의 두 가지 성격

1) 구성 권력 : 공법 : 일반의지, 입법부

2) 구성된 권력 : 행정체계 : 통치, 행정부

② 서구 정치체계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묶임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정당화해주며, 서로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그 두 요소는 정치적-법적 합리성과 경제적-통치적 합리성, ‘구성형태’와 ‘통치형태’이다. p24

 

 

* 쉽게(거칠게) 말하면, 민주주의의 첫 째 의미는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자체이고, 둘 째 의미는 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통치 형태 즉 행정 체계이다.

 

 

 

 

2. 민주주의라는 상징, 알랭 바디우 (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상징이란 무릇 상징체계에서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p29

②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 두 가지 테제p33

1) 사실상 민주주의적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2) 민주주의적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향락의 견지에서만 구성된다.

③ 플라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동기의 뒤얽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의 부재, 순환에 굴복한 주체성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징,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처럼 즐기라는 정언 명령. p37

④ 끝나지 않은 황혼의 순간에, 자본-의회주의가 그것에 부여한 뜻에서 고려된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p41

⑤ 민주주의란 단어의 본래 의미...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 p41

 

 

* 바디우는 말을 어렵게 하는 편인 듯;; 여튼 바디우는 자본주의 사회를 ‘무조음의 세계’ 즉 대의도 없고 진리도 없이 그저 욕망에 붙잡힌 사회라고 보는데.... 현실 민주주의가 자본-의회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적 인간은 욕망, 욕망의 대상, 그 대상으로부터 끌어내는 찰나의 향락에 묶여서 끝없이 순환하는 주체이며, 이 순환의 상징인 돈에 매달리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다른 모든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이 민주주의는 건드릴 수 없는 상징으로 신성시하고 있으므로, 결국 욕망과 욕망의 숭고한 대상인 돈이 신성시되는 사회이다.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인민이 스스로 권력을 갖는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3. 영원한 스캔들 , 다니엘 벤 사이드 (철학교수)

 

 

* 사이드가 보기에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형태로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통치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하는 행위, 혹은 정치의 조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이드는 약간 랑시에르 쪽에 기운 듯한데 여하튼 이 둘의 대립을 기초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모순을 설명하고자 한다.

 

 

① 민주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급진적 비판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및 상품등가성과 순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데 기초한다. 상품등가성에 따르면 모든 것은 값어치가 같고 등가적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대의라면, 그것은 먼저 그것의 형식을 담지 하는 일반 체계의 대의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거민주주의는 그것이 먼저 자본주의, 오늘날 ‘시장경제’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의 합의적 대의인 한에서 대의적 일뿐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의 부패이다. 맑스가 그런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행기적 독재밖에 없다고 봤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는 그것을 포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의와 부패 사이의 변증법적 궤변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맑스에게 독재는 민주주의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레닌에게도 ‘민주주의적 독재’는 모순 어법이 아니었다. p53~4

② '정의로운 질서‘와 정반대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 형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선 정치의 역설적 조건이다. 그 지점에서 모든 정당성이 궁극적인 정당성의 부재와 마주치고, 불평등주의적 우연성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평등주의적 우연성과 마주친다.” ... 그것은 “통치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유를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분리해내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전혀 아니라,,,,정치의 설립 자체이다.” p57~8

 

 

*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구성하는 권력이란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민의 권력이 구성되어야만 한다. 구성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제도나 체제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루소는 이것을 위해 최초로 ‘사회계약’의 원칙을 도입했다.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합의된 권력은 정당하므로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정당한’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어떤 권위에도 기댈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다. 제도화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당성은 보증될 수 없다는 것.

 

 

③ 민주주의의 실질적 모순은 사회계약의 아포리아에 기입되어 있다.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힘이 법〔권리〕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되자마자 정당성의 토대 문제, 그리고 적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긴장의 문제가 제기된다. p61

④ 생-쥐스트는.....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영향력을 법이 지닌 힘과 불변하는 정의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면 혁명은 확고해 진다. ” 생-쥐스트도, 체 게바라도, 파트리스 루뭄바도,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 신비로운 민주주의적 등식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수수께끼를 남겼다. p66

⑤ ...위임과 대의는 피할 수 없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파업에서도 그렇고, 정당에서도 그렇다. 그 문제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꼭 껴안고서, 위임자가 수임자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의 전문화를 제한하는 대의방식을 찾는 것이 낫다. p71

⑥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성, 비확실성, 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은총, 기적, 계시, 회개, 용서라는 신학의 모든 소지품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정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겠다는 허망한 도주는 사실상 무능력을 영속화할 뿐이다. 원리의 무조건성과 실천의 조건성 사이의 모순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자처하는 대신, 정치는 그 모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모순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지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p79

⑦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p81

 

 

*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는 위임과 대의의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임과 대의를 부정한다면 결국 신에 의존하거나 정치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은 민주주의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이게 하는 스캔들이다.

 

 

4.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 웬디 브라운(정치학 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계종교로 부상했다. 정치권력과 정치문화의 특정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서구와 그 숭배자들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제단으로서,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의 십자군들을 빚어내고 정당화했던 신의 의도로서. p85

② 근대 이전의 공화제적 민주주의가 공통의 지배라는 가치 위에 세워졌고 평등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약속은 언제나 한결같이 자유였다. 대표나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극히 형식적인 의미 말고, 근대 민주주의가 평등을 내세운 적은 결코 없다. p95

③ 임마누엘 칸트, 루소, 존 스튜어트 밀이 그랬듯이, 근대성에서 자기-입법으로 이해된 자유는 인간 존재의 정수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 간주된다. 사실 근대 서구의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은 근대성이 낳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주체이다. 바로 이런 주체의 형상이 민주주의에 문자 그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당성을 만들어줬고, 계속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주체가 지닌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얼굴은 근대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예속시키기 위한 폭력을 허용하고 영속화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하는데, 이는 설사 모든 인민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제국주의적 꿈이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양새를 띠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p96

④ 민주주의를 선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 조재들이 자기-입법을 원하며, 데모스에 의한 지배가 무책임하고 집중된 정치권력의 위험을 견제한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이다...그러나 오늘날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인간 존재가 “빵보다는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할 수있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 또는 철학적 가르침 같은 것이 있을까? ...만일 인류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면....플라톤은 제 자신의 정치적 실존에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히지 않는 사람들이... 루소는 타락한 인민이 공적인 삶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p100~102

 

 

* 웬디 브라운은 근현대의 민주주의를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결합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만들고 합의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가지지만, 이 자유로운 주체가 사실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라는 특정 주체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프랑스 혁명이나 아이티 혁명 같은 것은 뭐란 말인가? 여하튼 이런 의문들을 잔뜩 제기한 후 웬디 브라운은 민주주의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통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가 평등을 배제한 채 유사-자유에만 결합되어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5.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 장-뤽 낭시(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의 양가성은 정치를 구성하는 이원성이나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끊임없이 이중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공통의 실존에 관한 유일한 규칙,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존의 의미 또는 진리의 전제. p109

② 철학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철학처럼 정치는 신의 현전이 끝나면서 나온 발명품이다, 로고스가 뮈토스(신화)의 실추 위에 세워졌듯이, 정치도 신-왕의 소멸 위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신정의 타자다. 이는 민주주의가 ‘주어진 권리’의 타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권리를 발명해야만 한다. p110

③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음을 자각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약점이다. 우리는 이 교착어법의 핵심에 있다. p111

④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난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근본적인 정당성의 자격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112

⑤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는 단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다시 긍정하고 작동시킬 시기이다. 인간에게는 본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온갖 자연적인 것은 지나치게 갖고 있는 주체의 특성 말고는 다른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초험적 원리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의 부재에 토대를 두거나 토대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 p116

⑥ 민주주의가 진짜 욕망하는 진짜 이름, 민주주의가 사실상 지난 150년간 자신의 지평으로서 발생시키고 젊어졌던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다. 이 이름은 모든 점에서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공동체의 상징적 진리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p118

 

 

*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놀랍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는 더욱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낭시의 논문이 내게는 좀 감성적으로 읽혔지만, 여하튼 민주주의는 코뮤니즘,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진리에 관한 물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발명해나가야 하는 것이며,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6.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 랑시에르(철학 명예교수)

 

 

①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단어들에 대한 투쟁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맥락에 따라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p131

②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의 논변이기도 하지요. 가장 강한 자의 권력은 권리라고 서술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권리는 그냥 부과되면 그뿐이니까요. 달리 정당화할 필요가 없죠. 제 생각에 민주주의란 평등 전제이며, 우리의 것과 같은 과두적 체제조차도 바로 그 전제 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정당화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비판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체에 이중으로 박아 넣은 평등의 쐐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치는 단순히 치안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있죠. p132~3

 

 

*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평등 전제’라는 정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평등은 목표가 아니라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 역시 전제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따지고 자시고가 아니라, 평등한 인민주권은 모든 정치체의 전제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랑시에르가 한국을 방문한 모양이고 촛불집회를 보거나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서구에서는 화석화된 민주주의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펙터클하게 상연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촛불집회란?

 

 

7. 민주주의를 팝니다. , 크리스틴 로스(비교문학 교수)

 

 

① 근대에 수용되어 온 민주주의란 투표, 다수의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 ‘최대 다수’의 법에 의한 지배로 이해된다. p149

② 유럽 헌법과 관련한 리스본 조약을 부결시킨 아일랜드의 투표 결과에 대해.. 프랑스와 EU 관리들은 재투표를 요구 ...샤르트르가 ‘바보들을 위한 덫’이라고 불렀던 대의민주주의의 선거조차도 박탈하려는 시도... 그러나 아일랜드의 투표가 보여주는 것은 이 선거라는 형식적 의례도 반-민주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③ 1869년경 프랑스의 정치계에는 각종 민주주의자들이 번성했는데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사회적 민주주의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자’ 등이 있었다.... 이 단어 자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못했다. p152

④ 자네가 내게 말했지. 자네는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민주주의자라고. 이 말을 정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음모가들이 좋아하는 수법이지.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도 아니고 민주주의자이다!”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경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들이라네....그 어떤 견해가 이런 깃발 아래에 똬리를 틀지 못하겠는가? 모든 이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자임을 자임하고 있지. 특히 귀족계층의 사람까지 말이야 p152

⑤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감행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비록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나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주의자라는 이 단어는 여전히 1789년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p153

⑥ 19세기가 시작될 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집단이 그 세기가 끝날 때쯤 그 용어를 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랭보의 시 속에서처럼, 민주주의는 문명화됐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는 서구에 필수적인 정신의 보충물이자 이상적인 무화과 나뭇잎이 됐을 뿐 아니라 문명화됐음을 알리는 깃발, 구호,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계급 살육의 역사가 개시됐음을 선언했다. 유럽에서 파리꼬뮌이 겪은 바로 그런 형태로, 그리고 식민지에서는 그 이상의 폭력적인 형태로. 2008년 국민투표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쏟아진 위협과 비난의 언어에서 우리는 이 폭력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서구는 이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헤게모니는 전 세계에 걸쳐 진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p159~160

⑦ 만약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단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단어를 전유해 온 적들에게 내줘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민주주의란 정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는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랭보의 숱한 구호 중 하나인 사랑처럼, 민주주의는 공적 삶의 끊임없는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서 재창조되어야만 한다. p164

 

 

*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못한 채(혹은 의도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채), 여러 정치 세력에 의해 이용당해 오다가,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문명화된 서구의 정신적 깃발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통치형태가 아니라 인민의 권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섣불리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는 투쟁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8.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 슬라보예 지젝 (이론정신분석학협회 대표)

 

 

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와 동일시할 수 있는 모든 특징(가령 노동조합, 보통선거, 무상 의무교육, 언론의 자유 등)은 19세기 내내 하층계급이 길고도 힘든 투쟁을 해 쟁취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다. p172

②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충격요법을 써서 민주주의에 투신하고 서둘러 자본주의를 향해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제적 파산선고였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 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라는 괴상은 결합은 말도 안 되는 변칙이 아니라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p174~5

 

 

*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일 때 오히려 더 빨리 발달했다는 것.

 

 

③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p187~8

④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p191

⑤ 이 사실은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가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관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점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한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결국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의 대표자들이 텅 빈 권력의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p194

⑥ 차베스 정부는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차베스는 그들의 대통령이고, 그의 통치 아래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그들이다. 비록 민주적 선거의 규칙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차베스가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대상이자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내는 원천은 그런 규칙이 아니라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 민주적인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p194

⑦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란 선거로 집권한 급진 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따라야 한다. p195

 

 

* 어쩌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지젝이 다시 부활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은. 어쨌거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신적 폭력은 인민주권이란 원칙에서 정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독재라는 개념에 관한 것인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 이라고 했다. 처음에 차베스가 선택한 것은 대의민주제의 형식인 선거가 아니라 쿠데타였다. 실패 이후 전략을 바꾸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은 ‘제헌의회 소집’ 이었다.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베네수엘라의 지배 체계가 이미 미국과 자본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 빈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그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다 결국 패배하고 대통령궁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차베스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기존 헌법체계를 무효화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국회, 법원, 행정부는 모두 해산되고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구성되었다. 물론 차베스의 혁명 세력이 모든 국가 조직을 장악했고, 차베스는 빈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혁명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베스를 몰아내려는 쿠데타와 음모가 끊임없이 시도되었지만, 차베스를 지지하는 절대 다수의 빈민들은 이를 막아내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차베스의 권력은 곧 빈민들의 권력이고, 이것을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태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보면, 빈민의 권력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 원리에서 나온 정당한 권력이다. 문제는 이 인민의 권력이 대의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차베스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선거 형식과는 상관없는 포퓰리즘적 성격이 짙다. 차베스가 곧 인민의 일반의지를 직접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과잉’이 출현하기 쉽다. 그러나 이 전체주의적 과잉이 베네수엘라의 빈민, 즉 기존 사회 체계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들의 편에 있는 것이라면, 민주적 형식이라는 것은 그다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베스 권력의 정당성은 빈민들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에 있는 것이지 민주적 절차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젝의 급진적인 혹은 너무나 구식인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관해서 수용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의 원리라는 점에서 음미해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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