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 / 비르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12년 6월 8일,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나는 프랑스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베르사이유가 있어서. 물론 나의 베르사이유는 오스칼과 앙드레와 마리 앙뜨와네뜨가 비극적 사랑을 하던『베르사이유의 장미』속의 그 베르사이유다. 그래서 내게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의 오스칼이 근위대장 견장을 뜯어내고, 혁명군을 조준하고 있던 대포를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림으로써 혁명이 깔끔이 승리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만, 프랑스 역사는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는 로베스피에르가 생 쥐스트와 함께 단두대로 끌려가고, 민중 공화정이 무너진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그리고 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열월이며, 태양력 7월 무렵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만화로만 배운 나는 그 이후로 프랑스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그가 결국 황제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제2 공화정의 수립과정과 몰락에 관한 일종의 연작 칼럼이다. 주간지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 칼럼들은 결국 1852년 봄부터 월간지에 발표되었다가, 총 7편이 책으로 묶여 발행되었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몇몇 다른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인용문의 출처로 표기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란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참으로 요령부득이었다. 만화의 배경 지식정도로는, 브뤼메르가 혁명력 무월(안개의 달)이며, 브뤼메르 18일이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 11월 9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브뤼메르 18일은 일테면 우리의 5.18과 같은 고유명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니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이 연작 칼럼의 첫머리를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뜻밖에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한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p10

  ‘비극’은 단적으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고통과 파멸, 죽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어떤 ‘숭고한 대상’을 상실한 대가이다. 비극은 그 속에 채 피어나지 못한 고갱이, 소중한 그 무엇을 품고 있다. 비극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비극이 소극으로 반복될 때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숭고한 대상’ 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숭고한 대상’이 없다면 그 고통과 파멸은 생뚱맞기 그지없는 소동, 어이없는 광태에 불과하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반복되는 역사란, 그러므로 두 번의 죽음이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러나 그 물리적 죽음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죽은 영웅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숭고한 대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소극으로’. 이 두 번째 죽음이야말로 영웅의 진짜 죽음, 영원한 말살이다. 한 바탕의 소극은 비극이 획득한 숭고함의 광채를 박탈하고 영웅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단지 우스꽝스러운 광대였음을 드러낸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광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라면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두목’ 이다. 공화정을 뒤엎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황제가 되었다는 면에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형식적으로 반복했지만, 비극의 주인공 나폴레옹과는 달리 조카 루이는 그 어떤 숭고함도 표상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시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 했지만, 그는 자기 시대의 임무, “곧 근대 부르조아 사회를 봉건제로부터 해방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했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명언에 굳이 비극과 소극을 덧붙인 것은 그러므로, 모든 반복의 역사가 소극으로 끝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폴레옹은 로마를 반복했지만 영웅이었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을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광대가 되었다.

  「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혁명에서 죽은 자를 깨어나게 하는 일은 과거의 투쟁을 단순히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에 영광을 부여하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 과거의 유령으로 하여금 주변을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했다. 」p13

  그런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오직 과거의 구 유령만이 배회”하도록 했다. 루이가 반복한 것은 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혁명의 떡고물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통해 나폴레옹을 보고자 했던 프랑스 인민들은 거꾸로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퇴보에 대한 어떤 의혹도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옛 시절이 다시 도래”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160여 년 전의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이 책이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 때문이다. 배회하는 유령들로 날로 음산해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김일성의 유령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만이 있다. 지금 다시 박정희를 반복하는 것이 유신독재로 퇴보하는 것인 만큼이나, 노무현의 반복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원칙과 상식의 환상은 깨어졌고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하물며 김일성의 유령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싶지만, 현실은 어이없는 난장판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주체 유령의 난장질로 산산조각 나고 있는 진보를 목격하고 있다. 이제 주사파는 더 이상 진보의 한 분파가 아니다. 경기동부든, 구당권파든,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주사파 무리들을 퇴출시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진보에 대한 희망은 없다. ‘레닌 재장전’을 외쳤던 슬라보예 지젝도 북한 체제에 대해서만은 도무지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지젝은 북한 언론을 인용하며 기막힌 사례 하나를 제시했다. “...북한 최초의 골프장에서 열린 개막 경기에서 친애하는 수령 김정일이 18홀의 경기를 19타로 끝내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선전담당 관료가 어떻게 머리를 굴렸을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 김정일 동지가 매번 홀인원을 달성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럴 듯한 상황을 만들자면 단 한번은 홀인에 2타가 필요했다고 하자....” 우연찮게도 이것은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p91)에 실려 있다. 18번의 홀인원은 몰라도 17번의 홀인원은 충분히 통용되는 곳이 북한이다. 비록 북한 인민 개개인은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전체로서의 인민, ‘대문자 People’ 로서의 인민은 그 누구도 공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탈북자 모시기의 말마따나 총살감이기 때문인지, 도대체 북한의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지젝의 유언비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악의적 음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주사파, 경기동부, 구당권파의 실체 또한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정작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운운함으로써, 국회의원의 대표성 자체를 부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무수한 논자들이 그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국민의 대표자로서 공적 가치관을 밝혀야 할 의무 사이의, 명백히 다른 층위를 설파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주사파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짜피 통하지 않을 대화나 어정쩡한 봉합이 아니라, 한 시라도 빨리 끝장을 보고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태를 질질 끌어가면 갈수록 진보는 수렁으로 빠지고, 정국은 퇴보할 것이며, 박근혜는 아니 박정희의 유령은 손쉽게 권좌를 차지할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 직후, 프랑스에는 곧바로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노동 프롤레타리아, 민주공화파 쁘띠부르주아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심지어는 왕당파 야당까지, 다양한 정파로 구성된 이 임시 정부는 당연한 수순으로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맨 처음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제거되었고, 그 다음엔 쁘띠 부르주아지, 그 다음으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였던 왕당파 야당 연합인 ‘질서당’이 마지막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축출 당했다. 혁명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역사의 퇴보에는 민중의 기만적 믿음이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왜 민중들이 이런 자기기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혁명으로 열린 공간은 나날이 혼탁해 가고, 그 혼돈 속에서 어떤 진보세력도 희망과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신성시했을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능을 질타하고 조롱한다.

  「 무기를 자신들의 수중에 확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는 공화국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시켰고, 그 정부를 사회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근대혁명의 일반적 내용이 제시되었지만, 그 내용은 주어진 조건과 관계 하에서 이용 가능한 수단이나 대중의 교육 수준으로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모든 것들과는 기묘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 p20

  순수성을 고집하며 불가능한 것들만 요구하는 현대의 좌파와도 닮아 있다. 조금만 타협해도 배신자로 낙인찍고,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순혈주의는 최근 주사파 사태가 공론화되기 전까지는 가장 비판받던 좌파적 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항상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들의 순수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현실에서의 실천을 유예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태도를 헤겔을 들어 풍자했다.

  「 이곳이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 」p17

  이 경구는 헤겔이 이솝우화를 변용한 것이다. 로도스 섬에 살 때 엄청나게 높이 뛰었다며 자랑을 하고 다니는 허풍쟁이에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고 한 이솝우화는 말만 하지 말고 “바로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로도스가 장미꽃을 뜻하기 때문에, 헤겔은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는 대구對句를 덧붙였다. 이 경구는 나도 여기저기서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도 “여기가 로도스다!” 는 뻥쟁이를 재갈물리는 가장 확실한 입마개가 될 터지만, 단 그 뻥쟁이가 두루 책깨나 읽은 먹물이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로도스에서는!’ 을 외치던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시들시들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 프롤레타리아 일부는 교환은행과 노동자 협동단체와 같은 공론적 실험에 몰두하며, 구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통해 구세계를 변혁하는 일을 포기하고 차라리 사회의 배후에서 사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제한된 존재조건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려 하지만,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동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p23

 

 

  그렇다고 우리가 고소해할 처지는 더욱 아니다.

  「부르주아지를 위해 공화정을 수립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지들을 당분간 침묵하게 만든 후에 정작 부르주아공화파는 당연하게도 국가를 자신의 재산으로 접수한 부르주아 대중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 대중은 바로 왕당파였다.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들은 부르봉이나 오를레앙의 이름이 아닌 자본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이 공동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국가형태를 발견했다.」p38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 이외의 모든 세력에 의해 혁명의 무대 바깥으로 밀려났다. 가장 거칠고 성가신 프롤레타리아가 사라지고 나자, 그 다음 희생 제물은 쁘띠부르주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획책했던 부르주아 왕당파들 자신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등장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손쉽게 혁명의 무대를 접수했다. 이제 2월 혁명이 수립했던 공화정은 완전히 파괴되고, 프랑스 제2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혁명정신과 공화적인 헌법의 파괴였다.

  「가장 단순한 부르주아적 재정개혁에 대한 요구와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형식적 공화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사회에 대한 도발”로 단죄당하고 “사회주의”로 낙인찍힌다. 」p25

  2월 임시 정부에 함께 참여했던 각 정파들은 자신들만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가장 취약한 기반을 가진 정파들부터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그들 자신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제거한 그 세력이야말로 더 큰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힘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방어막을 해체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많이도 닮아있다. 진보정당은 역사상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성공에 의해 순식간에 몰락했다. 노무현의 실패를 통해 한 단계 더 전진하려했던 대중은 한 순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것이 진보의 맨 얼굴이라면, 차라리 적당히 타락했지만 적당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보수정당인 민주통합당이 낫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한 일반 대중이다. 내가 던진 정당투표가 국회의원 이석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20여년 개인 투표사의 치욕이다. 이 사태는 한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욱 철저히 파괴되는 것은 ‘진보’라는 개념이다. 통합진보당이 주사파를 끊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진보‘는 곧 ’종북‘으로 인식될 것이다. 주사파가 지금까지 보여 온 행태 중 어느 하나도 진보의 개념과 부합하지 않지만, 대중의 인식은 더 이상 그들을 분리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중은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나는 정말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 사태는 무엇보다 최악의 조건 속에 발생했다. 이미 ‘3공, 5공의 정예’들로 구성된 박근혜의 7인회가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념전쟁’에 나선 박근혜의 지지율은 50%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곧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도 종북주의라 낙인찍힐지 모른다. 이 시대의 종북은 과거의 빨갱이만큼이나 대중적 금기가 될지 모른다. 북한처럼 되느니, 차라리 약간의 자유와 평등을 저당 잡히려 할지도 모른다. 대중은 어쩔 수 없이 진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중 자신의 목 졸림으로 돌아오겠지만, 진보의 실체에 경악한데다 경제적 파산의 위기에까지 내몰린 대중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보여주는 몰락의 길을 제 발로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서 완전한 패배만을 보여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고난 속을 방황하고 있다. 혁명은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1851년 12월 2일까지 혁명은 자신의 예정된 과업 가운데 절반을 완수했을 뿐이다. 지금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p137

  이 낙관적 믿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건, 분명한 것은 우리 역시 진행 중의 역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 하에서” 란 단서가 있지만, 어쨌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임을 마르크스가 믿었듯이 나 역시 믿고 싶다.  역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의 창조물인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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