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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지인이 참 좋아했던 작가들 중 내가 따라 읽지 못한 두 사람이, 더 있었던가?, 보르헤스와 버지니아 울프였다. 다행히 지난여름 보르헤스의 미로는 여기 독서회 몇몇 회원들과 함께, 비록 헤매었으되 그럭저럭 통과했고, 이번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우리 또래들이 다 그런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물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다. 얼마 전 알라딘 로자님의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를 읽으며, 그래서 웃었다. 떨어진 낙엽처럼 여기저기 뒹굴던 이 시의 출처가 책받침이었는지, 공책의 표지였는지, 그 기억은 어슴푸레한데, 여린 감성을 툭 건드리던 그 첫 구절은 아직도 외울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그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의 한 자락이나마 얻어 들은 것은 아주 오랜 뒤였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강인가 바다인가로 걸어 들어가서 죽었다는 이야기, 그 이유가 다시 덮쳐올 정신병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정도가 고작이긴 해도.
목마가 아니라 물결을 안고 떠난 이 숙녀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빼든 책은, 어쩌면 당연히도,『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 이란 구절도 찾지 못하고 책을 던졌다. 그냥 안 읽혔다. 그 재미있었다는 드라마 <상속자>가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이런 비유가 너무 부적절한 걸까. 여자로서의 기본적 소양과 의무라는 채찍을 들이대도, 읽지 못했다. 나의 하소연을 들은 지인이 추천한 것이 그렇다면,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 P255”가 영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의식의 흐름이라니, 말만 들어도 엄청 지겨울 것 같지 않은가?
독서회는 이럴 때 또 고맙다. 예전처럼 그냥 던져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에 쓸 꽃을 사러 웨스트민스터의 거리를 걸으며, 그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가는 과정은 여전히 지난했다. 잡생각이 수시로 끼어들고, 댈러웨이 부인을 놓치기 일쑤였다. 봄에 읽었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비슷했다. 그래도 일단 분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되니,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댈러웨이 부인』도 치미는 갑갑증을 꾹꾹 누르며, 빅토리아 스트리트며 세인트 제임스 파크며 본드 스트리트며,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이방의 거리와 광장들을 따라 걷다보니, 이 여인의 <의식의 흐름>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250여 쪽의 책을 덮을 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살았던, 그러나 만 서른 해를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젊은 시인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며 쓰러진 술병을 두고 울먹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버지니아 울프 아니 댈레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장편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댈러웨이 부인』에는 참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주요 인물들도 여럿이지만, 파티에 참석하는 군상들까지 합치면 누가 누군지 자꾸 책장을 거꾸로 넘겨봐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요 축으로 삼은 인물은 댈레웨이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리처드 댈레웨이, 첫사랑 피터 월시, 처녀시절 영혼의 친구 샐리, 딸 엘리자베스의 역사 선생인 미스 킬먼, 그리고 1차 대전 참전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이다. 이 중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는 하나의 영혼의 두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해설에 보면 <더블>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그러니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가 둘이면서 하나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고, 댈러웨이 부인을 둘러싸고 피터와 샐리 그리고 리처드가 있다. 그리고 약간 동떨어져 보이는 미스 킬먼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말하자면 우아한 강남 진보라 할 수 있다. 몸은 상류층의 안락함에 파묻혀 있지만, 영혼은 셉티머스처럼 예민하여, 삶의 허위와 무의미를 꿰뚫고 있다. 조금 비약하자면 드라마 <밀회>의 오혜원(김희애)과 같다. 댈러웨이 부인은 처음부터 상류층이었고 오혜원은 바닥을 박박 기어 상류사회의 고급 집사가 되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극과 극이라 해야겠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그들이 발 디딘 위치와 욕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둘 모두 잃어버린 것을 갈망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영혼이 통하던 피터 월시와 헤어지고 휴식과 안정을 주는 리처드와 결혼한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지만, 젊은 날의 꿈과 열정은 화려한 파티 속에 흩어진 지 오래다. 오혜원도 그렇다.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대신 자신의 재능과 꿈을 버렸다. 그러나 이 두 중년의 여인들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영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 환상은, 드라마 <밀회>에서는 대중 드라마답게, 아름다운 모습과 영혼을 간직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뜻밖에도,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럼직하게, 옛 연인 피터가 아니라 셉티머스의 자살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현실적이다. 첫사랑 피터 월시가 회고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녀의 감정은 모두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은 아주 영리했다.” 클라리사(댈레워에 부인)는 날카로운 논쟁, 열정적 토론, 셰익스피어 대신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 중 한 명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왔다. 피터 월시는 물론 남편인 리처드까지 속으로 비웃는 파티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이유는 하나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파티는 봉헌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은 조합이고 창조이다. 그녀는 성공을 좋아하고 불편함을 싫어하는 속물이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실없는 수다를 떨며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인생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두려움이다. <더 타임스>를 읽는 고지식한 리처드가 없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섬세하고 복잡한 댈러웨이 부인에게 삶은 두려움이지만 또한 더 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셉티머스에 동질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내던진 그 청년의 삶을 기뻐하는 동시에, 속물적이고 무의미한 파티 한 가운데서 행복을 만끽한다.
댈러웨이 부인과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세계는 나에게 낯설다. 가난하게 자랐고, 예쁘지도 않고, 사교성도 없고, 상류층의 문화에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미스 킬먼이 더 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미스 킬먼과 댈러웨이 부인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끔찍이 싫어하고, 미스 킬먼의 마음에는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동정, 부러움이 뒤섞여 들끓는다. 미스 킬먼은 불쌍한 여자지만, 내 안의 무엇들과 닮아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어디에나 값비싼 물건을 늘어놓고, 그림과 양탄자에 수많은 하인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미스 킬먼은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은 지독히도 못생기고 지독히도 가난하다. 자기가 경멸하는 댈러웨이 집안 같은 곳에서도 일을 해야 한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왜 다른 여자들, 댈러웨이 부인 같은 여자들은 당하지 않는 고통을, 그녀만 당해야 하는 걸까? 미스 킬먼은 종교를 통해 분노를 다스리며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의 무가치한 삶을 동정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똑똑한 미스 킬먼의 삶은 힘들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부유하고 예뻤다면 더, 더, 덜 힘들었겠지만.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뿌리 깊은 것이다. 수 천 년에 걸쳐 종교가 해 온 일은 어쩌면 이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 그것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분노가 뿌리 뽑힐 수는 없는 법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처럼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만약 미스 킬먼처럼 가난하고 못생겼다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 우리에게 남겨졌을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더 오래 살았다 해도, 그녀는 『미스 킬먼』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썼다 해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결코 미스 킬먼을 댈러웨이 부인을 묘사한 것처럼, 그토록 섬세하고 미묘하고 복합적으로,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오와 동정과 부러움이 뒤엉킨 미스 킬먼의 <의식의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렇기에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인 것이다.
「정말이지 수상이 와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저기 샐리, 저기 피터가 있고 리처드는 아주 흡족한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과 함께 방을 지나면서, 그녀는 순간의 도취를, 심장의 신경들이 부풀어 올라 파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그래,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느낌을 사랑했고 그 온몸이 저리는 짜릿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외양과 승리는(가령 피터는 그녀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수상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토시를 낀 어린 소녀를 그린 조슈아 경의 그림이 든 금빛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현듯 킬먼이 생각났다. 그녀의 적인 킬먼이.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는지 -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더럽히는 여자(리처드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p227」
우리가 그 <의식의 흐름>을 세밀히 쫓아온 댈러웨이 부인이 마지막에 와서 킬먼에 대한 혐오와 사랑을 동시에 깨달은 것처럼, 아마도 미스 킬먼에게도 세밀한 <의식의 흐름>이 허용되었다면 그녀 또한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사람을 동시에 깨닫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