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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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름은 들어 보았다. 아니 어쩌면 짧은 글 한편 정도는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상 문학상> 류의 책 표지에서 몇 번 눈에 뜨였으니까. 내가 <세계 테마 기행>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 저 사람이 그 은희경이구나 했던 것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단 뜻이다. 그리고 실망했다. 쉰은 되었을 듯한데, 공주 같은 몸짓에 애기 같은 목소리의 나레이션, 소화가 힘겨웠다.

 

두 번째 인상은 어쩌면 더 나빴다. 어떤 카페의 과제물로, ‘은희경의 <생각의 일요일>을 읽고 논하시오’ 가 나왔다. 論할 것이 없었다. 그 책은 은희경 최초의 산문집이라는 광고문을 달고,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만, 산문집이 흔히 그렇듯 신변잡기일 뿐이었다. 게다가 첫 장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날씨를 살피고, 커피콩을 갈고 ...” 따위의 문장으로 시작했다. 시애틀, 커피콩, 독일, 맥주, 사인회, 원주와 박경리, ‘반짝이는 문장들을 탁구공처럼 주고받는’ 문인 친구들과의 새벽 트윗질, 그리움, 쓸쓸함, 사랑의 기억... 고급스러운 잡지를 보는 듯 했다. 나는 論하지 못하고, 논하지 못하는 이유만 논했다. 아니 화보 같은 삶을 질시하며, 유명한 문인에 대해 마땅히 취하길 기대하는 경의를 거부했다.

 

세 번째 인상이 좋을 수가 있을까. 어제 다음 주 독서회를 위해 <새의 선물>을 읽었다. 내 눈이 찾아내려 했던 것은 내가 가졌던 인상들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 증거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고, 그것들이 열두 살에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만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열두 살 진희를 은희경으로 읽고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게도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75)” 오만은 공주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천성이다. “단물만 빼먹고 종구를 차버릴 거라는 짐작으로만 보면 장군이 엄마와 나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한쪽은 악의에서 나온 험담이고 다른 한쪽은 인생에 대한 냉소로부터 비롯된 통찰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236)” 당돌함과 어이없는 자신감에 혀를 차면서도 나는 소리 없이 탄성을 질렀다. 내 느낌이 딱 맞았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야말로 근대적 계몽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모든 인간을 통찰하는 그녀의 눈빛은 말 그대로 light, 그 눈이 비추는, enlighten, 대상은 그 속을 투명이 드러내는 타자들이었다.

 

18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린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으로 표현되는 이성의 시대기도 하다. 계몽의 시대를 준비한 것은 과학혁명의 시대인 17세기의 데카르트이다. 그 유명한 사유와 연장의 이분법은 또한 악명으로도 이름 높다. res cogitans 와 res extensa. 데카르트는 자연은 물론 동물, 심지어는 주체의 신체까지도 연장, res extensa, 으로 대상화했다.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나 기계 단추를 누르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기계나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에게 능동적 주체란 오로지 res cogitans, 사유하는 존재(혹은 사유하는 것, 사유) 뿐이었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나와 다른 대상을 타자화 하여 착취하고 절멸시킨, 탐욕스럽고 잔인했던 서구 근대 역사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12”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 중간 무시로 강조되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이분법은 데카르트의 연장과 사유를 연상시킨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나’ 이다. 그녀의 ‘바라봄’은 자신뿐만 아니라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뚫는다.

 

“최선생님은 내 어깨를 한번 꼭 싸안는다. 술 냄새가 확 끼친다. 술 냄새 속에는 어른으로서 비겁했던 자괴감의 찌꺼기도 있다. 그러나 내일 아침술이 깨고 변소에 한번 다녀오면 찌꺼기는 다 청소된다. p219 ”

 

12살 그녀는 그보다 몇 배나 오래 산 선생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도 확정한다. 알량한 예술적 자부심마저 버리고 금력에 굴복해야 했고, 어린 제자의 성깔 혹은 기지로 일말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복잡다단함을 술 냄새 하나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최 선생님은 그 외의 어떤 인간도 될 수 없다. 되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중후반의 철학은, 특히 프랑스 철학은 타자의 문제에 봉착했다. 타자는 계몽의 불빛에도 여전히 불투명함으로 남았다.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는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라는 또 다른 주체를 문제 삼고 있다. 샤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야” 라고 탄식했다.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 이며,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 이다. 타자는 지옥이지만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나의 시선이 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는 말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속이 훤하게 보이는 사람, 무엇을 할지가 뻔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 할 수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p250”

 

그녀가 사랑을 냉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번의 배신으로 그녀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냉소와 배신과 적당한 거리두기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일까? 사랑은 동시에 불안이다. 모든 것을 알고 함께하고 싶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오해가 없었다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지고 있다고 내가 착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콩깍지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사랑을 냉소하는 그녀는 삶을 냉소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계몽인인 (이 책은 1995년 작이다) 그녀는 냉소주의자이다. 계몽은 양차대전을 통해 파산했다. 책으로 혹은 식민지로 근대를 배운 우리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배회한다. 냉소는 후근대인의 이데올로기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405

 

지난 주에는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 대해 토론했다. 삶의 끝에선 노인의 지혜는 열두 살 그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제목도 아마 농담일 것이다. 농담 같은 삶을 살아내는 그녀의 방식과 노인이 만든 등장인물들의 방식은 물론 다르다. 그녀의 열두 살을 지켜보며 나는 내내 ‘잔망스럽다’ 는 단어에 시달렸다. 노인의 꼭두각시들은 유쾌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삶은 무의미한 농담이다.

 

 

삶은 정말로 무의미한 농담일까?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크레인 꼭대기의 고공농성 노동자를 바라보며, 농담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을 그저 농담으로 냉소하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은 거리의 투사로 내몰리고, 열정에 불타는 고등학생은 강연장에 불붙은 도시락을 던지고, 십상시와 7인회가 국가를 뒤흔들고, 마카다미아넛이 비행기를 되돌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자살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농담일 뿐이니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까, 혀를 차고 잊어버릴까, 나의 소소하고 안락한 일상의 기쁨을 찾아서! 세계에 대한 냉소는 부조리한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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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을 보다가 흥미로운 링크를 발견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에 관한 글인데, 제목은

"Lewis Carroll's Photographs of Alice Liddell, the Inspiration for Alice in Wonderland" 이다.

영문이라 대충대충 읽다가, 사전을 찾아가며 다시 찬찬히 읽었다. 마침 다음주 독서회 책이 『거울나라의 앨리스』이다.

 

 

 

루이스 캐럴은 "polymath",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수학자, 논리학자, 작가, 시인에 성공회 성직자로까지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진작가로서의 캐럴이다. 당시 사진은 매우 새로운 매체였는데, 그는  “became a master of the medium, boasting a portfolio of roughly 3,000 images and his very own studio.” 

 

이 삼천 장의 사진 중 반 이상이 아이들 사진이고, 그 중 30장은 누드이거나 세미 누드 사진이다. 캐럴을  pedophile, 소아성애자로 의심하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아마도 이 사진들일 것이다. 펭귄 클래식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서문에는 앨리스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앨리스 자매들과 캐럴의 관계를 끊어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일기가... 1863년 6월 말경 3일 동안 또 한 번 중단된다. 이 기간 동안 도지슨이 앨리스 자매들과 가깝게 지내던 관계는 급작스럽게 영원히 단절되고 만다. 이는 앨리스의 어머니, 즉 리오너 리델이 개입한 결과였다. 리델 부인은 도지슨이 앨리스에게 보낸 모든 편지도 불태웠다. 이는 도지슨의 삶에 있어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1865년 출간되어 앨리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곱 살 소녀가 되고, 도지슨이 가장 유명한 아동문학 작가가 되었던 그 시기 동안, 그들의 관계는 과거의 사실로 멀어졌으며 도지슨이 학장 관사에 방문하는 일도 금지되었다. 우리는 왜 입맞춤이 멈추었는지, 또는 무엇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틀을 형성했던 이야기들과 사진과 강 여행을 끝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p25

 

도지슨 (캐럴의 본명)이 앨리스에게 청혼을 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그래서 그런지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물론이고,『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서시조차 기쁨의 바닥에는 쓸쓸함이 깊이 배여있다.

 

그런데, 링크한 글에 의하면, 아이들의 누드 사진이나 세미 누드 사진이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명백히 호색적으로 보이는 사진들조차 당대에는 '순진무구함 그 자체'를 예술화한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아이들의 누드 사진이 우편엽서나 생일카드에 찍히기도 했다.

 

Some of his portraits—even those in which the model is clothed—might shock 2010 sensibilities, but by Victorian standards they were… well, rather conventional. Photographs of nude children sometimes appeared on postcards or birthday cards, and nude portraits—skillfully done—were praised as art studies […]. Victorians saw childhood as a state of grace; even nude photographs of children were considered pictures of innocence itself.

 

이런 글쓴이(글쓴이가 인용한 캐럴의 전기작가)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이상 계속된 캐럴의 소아성애적 취향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캐럴을 비판하는 측과 옹호하는 측의 대립은 여전히 팽팽하며 어떤 결론도 내려지지 않았다. 캐럴의 행동은 충분히 의심할만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또한 누드뿐만 아니라 요정이나 중국인처럼 아이들을 꾸며놓고 사진을 찍는 것은 당대의 유행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신화속 의 인물 등으로 아이들을 치장하기도 했다. 당시 캐럴 이외의 사진작가들도 캐럴과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이런 사진들이 “brilliant testimonies to the taste, the sentiment, and perhaps the sexuality of mid-Victorian England.”란다.

 

어떻게 보면 저것이 19세기의 영국이 아닌가 싶다.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하며, 만든 '빅토리아 시대'... 저 사진들을 순진무구함 그 자체의 상징으로 보든지, 퇴폐와 향락적 성애로 보든지, 앨리스 자매의 커다란 중국 우산 뒤에는 영국 함대에 억눌린 식민지인들의 지친 얼굴이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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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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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를 하고 나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책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무심히 넘겼던 어떤 장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을 더듬어 반납해버린 책의 앞뒤를 맞춰보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어떤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아, 그것이었을까.

 

어제는 『댈러웨이 부인』의 날이었다.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셉티머스, 봉헌으로서의 파티에 대한 이야기 끝에 미스 킬먼이 나왔다. 누구에게나 비호감인, 증오와 질투로 배배 꼬인 그녀는 단지 댈러웨이 부인을 밝히는 어두운 단역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왜 댈러웨이 부인은 전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미스 킬먼을 떠올리며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라고 했을까.

 

사실 지난 번 리뷰를 썼을 때, 나는 미스 킬먼에 마음이 갔다. 나의 성장 환경이 그래서인지, 유독 측은했고,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공감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가난 때문에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심성의 왜곡 때문에. 감추려 해도 어느새, 어두운 마음과 질투, 억눌린 분노, 때로는 격렬한 증오가 비집고 나온다. 세상의 빛 속에 드러난 그것들은 너무 혐오스러워 또 한 번 그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미스 킬먼의 이 어둠이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의 무시무시함으로 보일 뿐이다. 미스 킬먼과 댈러웨이 부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타자이다.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에 대한 댈러웨이 부인의 섬세한 심미안, 하녀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 따위가 미스 킬먼에게는 단지 허영과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당신이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그의 타자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모, 전두환의 의리를 안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적이란, 프로이트의 표현을 적용한다면 unheimlich 하다. unheimlich는 heimlich의 반대말이 아니라, (un)heimlich다. heim은 영어의 home이다. 익숙하면서도 두렵고 낯선 적, 그것은 또한 이웃이다. 한나 아렌트가 보았던 아이히만이 그랬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가 너무도 평범하고 성실한 얼굴을 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아렌트는 그것에 ‘악의 평범성’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평범한 악의 얼굴이야말로 unheimlich하다.

 

「오래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 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트리는 자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98》 」

 

 

댈러웨이 부인은 성공적인 파티의 마지막에 느닷없이 미스 킬먼을 떠올린다. 기억을 맞추어 보면, 아마도 셉티머스라는 청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도서관에 잠깐 들러 찾아보니 소식을 듣기 직전이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조금 생뚱맞았다. 잠깐 나왔다 사라진 미스 킬먼을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의 절정에서 떠올린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뒤 설명도 없고,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도 없이, 갑작스레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의 존재를 긍정한다. 어떻게 미스 킬먼은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 위로 튀어 올랐을까?

 

겉으로 드러난 풍요로움과 평화로움의 이면에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 중의 한 사람인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영혼이 질식된” 댈러웨이 부인은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의 반쪽에는 영혼의 질식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비정상적인’ 셉티머스가 있다. (물론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버지니아 울프 자신도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하나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 자체로 unheimlich 하다. 집처럼 편안하고 친숙한 댈러웨이 부인은 동시에 낯설고 두려운 셉티머스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심연에는 적이자 이웃인 셉티머스가 있다. 그런데 셉티머스가 자살한다. 이제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부터 벗어난 댈러웨이 부인은 완벽하게 heimlich 해졌을까? 비정상을 떨쳐내고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그런데 영혼의 질식을 거부하는 것이 비정상이고, 영혼이 질식된 채 사는 것이 정상인가? ‘영혼을 질식’ 시키지 않고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인가?

 

셉티머스가 창가에서 떨어질 즈음,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떠올린다. 무시무시한고 사악한 적, 미스 킬먼을, 그러나 그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미스 킬먼을.

 

「정말이지 수상이 와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저기 샐리, 저기 피터가 있고 리처드는 아주 흡족한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과 함께 방을 지나면서, 그녀는 순간의 도취를, 심장의 신경들이 부풀어 올라 파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그래,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느낌을 사랑했고 그 온몸이 저리는 짜릿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외양과 승리는(가령 피터는 그녀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수상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토시를 낀 어린 소녀를 그린 조슈아 경의 그림이 든 금빛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현듯 킬먼이 생각났다. 그녀의 적인 킬먼이.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는지 -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더럽히는 여자(리처드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p227」

 

unheimlich한 셉티머스가 죽는다는 것은 또한 댈러웨이 부인의 영혼이 일상의 공허에 투항하여 완전히 질식한다는 뜻은 아닐까? 셉티머스가 죽어갈 즈음, 그를 대신할 또 하나의 unheimlich인 미스 킬먼이 떠올랐던 것은, 그러므로 너무나 당연한 무의식의 작용이 아닐까? 왜냐하면 댈러웨이 부인은 영혼의 질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안락함을 위해 그녀 스스로 질식시켰던 영혼이지만, 그것 없이 삶은 외양과 공허일 뿐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리처드 댈러웨이도 피터 월시도 수상도 아닌 미스 킬먼이다.

 

미스 킬먼은 댈러웨이 부인을 불안하게 하고, 안온한 생활 방식을 깨트리는 적이다. 그러나 그 불안함과 두려움이야말로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충격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셉티머스의 죽음을 기뻐하며, 소소한 일상을 그토록 소중히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녀 곁에 미스 킬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혐오하면서도 사랑해야 했고, 그 무엇보다 필요로 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투명하고 길들여진 이웃이 아니라, 낯설고 섬뜩한 이웃 속에 우리 삶은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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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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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참 좋아했던 작가들 중 내가 따라 읽지 못한 두 사람이, 더 있었던가?, 보르헤스와 버지니아 울프였다. 다행히 지난여름 보르헤스의 미로는 여기 독서회 몇몇 회원들과 함께, 비록 헤매었으되 그럭저럭 통과했고, 이번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우리 또래들이 다 그런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물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다. 얼마 전 알라딘 로자님의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를 읽으며, 그래서 웃었다. 떨어진 낙엽처럼 여기저기 뒹굴던 이 시의 출처가 책받침이었는지, 공책의 표지였는지, 그 기억은 어슴푸레한데, 여린 감성을 툭 건드리던 그 첫 구절은 아직도 외울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그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의 한 자락이나마 얻어 들은 것은 아주 오랜 뒤였다.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강인가 바다인가로 걸어 들어가서 죽었다는 이야기, 그 이유가 다시 덮쳐올 정신병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정도가 고작이긴 해도.

 

목마가 아니라 물결을 안고 떠난 이 숙녀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빼든 책은, 어쩌면 당연히도,『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 이란 구절도 찾지 못하고 책을 던졌다. 그냥 안 읽혔다. 그 재미있었다는 드라마 <상속자>가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이런 비유가 너무 부적절한 걸까. 여자로서의 기본적 소양과 의무라는 채찍을 들이대도, 읽지 못했다. 나의 하소연을 들은 지인이 추천한 것이 그렇다면,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 P255”가 영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의식의 흐름이라니, 말만 들어도 엄청 지겨울 것 같지 않은가?

 

 

독서회는 이럴 때 또 고맙다. 예전처럼 그냥 던져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에 쓸 꽃을 사러 웨스트민스터의 거리를 걸으며, 그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가는 과정은 여전히 지난했다. 잡생각이 수시로 끼어들고, 댈러웨이 부인을 놓치기 일쑤였다. 봄에 읽었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비슷했다. 그래도 일단 분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되니,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댈러웨이 부인』도 치미는 갑갑증을 꾹꾹 누르며, 빅토리아 스트리트며 세인트 제임스 파크며 본드 스트리트며,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이방의 거리와 광장들을 따라 걷다보니, 이 여인의 <의식의 흐름>이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250여 쪽의 책을 덮을 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살았던, 그러나 만 서른 해를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젊은 시인이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며 쓰러진 술병을 두고 울먹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작 서러운 것은 버지니아 울프 아니 댈레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장편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댈러웨이 부인』에는 참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주요 인물들도 여럿이지만, 파티에 참석하는 군상들까지 합치면 누가 누군지 자꾸 책장을 거꾸로 넘겨봐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요 축으로 삼은 인물은 댈레웨이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리처드 댈레웨이, 첫사랑 피터 월시, 처녀시절 영혼의 친구 샐리, 딸 엘리자베스의 역사 선생인 미스 킬먼, 그리고 1차 대전 참전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이다. 이 중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는 하나의 영혼의 두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해설에 보면 <더블>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는 모양이다. 그러니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가 둘이면서 하나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고, 댈러웨이 부인을 둘러싸고 피터와 샐리 그리고 리처드가 있다. 그리고 약간 동떨어져 보이는 미스 킬먼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말하자면 우아한 강남 진보라 할 수 있다. 몸은 상류층의 안락함에 파묻혀 있지만, 영혼은 셉티머스처럼 예민하여, 삶의 허위와 무의미를 꿰뚫고 있다. 조금 비약하자면 드라마 <밀회>의 오혜원(김희애)과 같다. 댈러웨이 부인은 처음부터 상류층이었고 오혜원은 바닥을 박박 기어 상류사회의 고급 집사가 되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극과 극이라 해야겠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그들이 발 디딘 위치와 욕망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둘 모두 잃어버린 것을 갈망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영혼이 통하던 피터 월시와 헤어지고 휴식과 안정을 주는 리처드와 결혼한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지만, 젊은 날의 꿈과 열정은 화려한 파티 속에 흩어진 지 오래다. 오혜원도 그렇다.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대신 자신의 재능과 꿈을 버렸다. 그러나 이 두 중년의 여인들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영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 환상은, 드라마 <밀회>에서는 대중 드라마답게, 아름다운 모습과 영혼을 간직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 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뜻밖에도,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럼직하게, 옛 연인 피터가 아니라 셉티머스의 자살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현실적이다. 첫사랑 피터 월시가 회고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녀의 감정은 모두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은 아주 영리했다.” 클라리사(댈레워에 부인)는 날카로운 논쟁, 열정적 토론, 셰익스피어 대신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 중 한 명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왔다. 피터 월시는 물론 남편인 리처드까지 속으로 비웃는 파티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이유는 하나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파티는 봉헌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은 조합이고 창조이다. 그녀는 성공을 좋아하고 불편함을 싫어하는 속물이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실없는 수다를 떨며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의 이면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인생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두려움이다. <더 타임스>를 읽는 고지식한 리처드가 없었다면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섬세하고 복잡한 댈러웨이 부인에게 삶은 두려움이지만 또한 더 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셉티머스에 동질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내던진 그 청년의 삶을 기뻐하는 동시에, 속물적이고 무의미한 파티 한 가운데서 행복을 만끽한다.

 

댈러웨이 부인과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세계는 나에게 낯설다. 가난하게 자랐고, 예쁘지도 않고, 사교성도 없고, 상류층의 문화에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미스 킬먼이 더 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미스 킬먼과 댈러웨이 부인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끔찍이 싫어하고, 미스 킬먼의 마음에는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동정, 부러움이 뒤섞여 들끓는다. 미스 킬먼은 불쌍한 여자지만, 내 안의 무엇들과 닮아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어디에나 값비싼 물건을 늘어놓고, 그림과 양탄자에 수많은 하인들을 부리며,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미스 킬먼은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은 지독히도 못생기고 지독히도 가난하다. 자기가 경멸하는 댈러웨이 집안 같은 곳에서도 일을 해야 한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왜 다른 여자들, 댈러웨이 부인 같은 여자들은 당하지 않는 고통을, 그녀만 당해야 하는 걸까? 미스 킬먼은 종교를 통해 분노를 다스리며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의 무가치한 삶을 동정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똑똑한 미스 킬먼의 삶은 힘들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부유하고 예뻤다면 더, 더, 덜 힘들었겠지만.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뿌리 깊은 것이다. 수 천 년에 걸쳐 종교가 해 온 일은 어쩌면 이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 그것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분노가 뿌리 뽑힐 수는 없는 법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처럼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만약 미스 킬먼처럼 가난하고 못생겼다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미스 킬먼』이 우리에게 남겨졌을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더 오래 살았다 해도, 그녀는 『미스 킬먼』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썼다 해도 『댈러웨이 부인』처럼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결코 미스 킬먼을 댈러웨이 부인을 묘사한 것처럼, 그토록 섬세하고 미묘하고 복합적으로,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오와 동정과 부러움이 뒤엉킨 미스 킬먼의  <의식의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렇기에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인 것이다.

 

「정말이지 수상이 와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저기 샐리, 저기 피터가 있고 리처드는 아주 흡족한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과 함께 방을 지나면서, 그녀는 순간의 도취를, 심장의 신경들이 부풀어 올라 파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그래,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느낌을 사랑했고 그 온몸이 저리는 짜릿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외양과 승리는(가령 피터는 그녀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수상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토시를 낀 어린 소녀를 그린 조슈아 경의 그림이 든 금빛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현듯 킬먼이 생각났다. 그녀의 적인 킬먼이.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는지 -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더럽히는 여자(리처드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p227」

 

우리가 그 <의식의 흐름>을 세밀히 쫓아온 댈러웨이 부인이 마지막에 와서 킬먼에 대한 혐오와 사랑을 동시에 깨달은 것처럼, 아마도 미스 킬먼에게도 세밀한 <의식의 흐름>이 허용되었다면 그녀 또한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증오와 사람을 동시에 깨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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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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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에서 소설 읽기의 장점은 이런 것이다. 혹은 단점도 이런 것이다. 아~좋은 책이야!, 뭐가 이래ㅡ.ㅡ; , 오..비극적이다..,하고, 가만히 혹은 탁! 책을 덮고 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니까, 내 취향이 아니예요 하고 입을 다물수는 없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매우 쉬운 책도 있고, 너무 힘든 책도 있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거리가 없는 책도 있고, 목구멍이 뻐근하거나 혹은 콧구멍이 새큰거려 그 들끓는 감정을 딱딱한 언어로 뭉쳐낼 수 없는 책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쥐어짜내게 되는데, 새로운 생각의 촉매가 될 때도 있고, 아련한 느낌을 파사삭 깨버릴 때도 있다.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굳이 말하라면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해버리면 당연히 양자택일의 압박에 놓이게 된다. 그러려고 시작한 말이 아니라면, 저  !와 ㅡ.ㅡ;와 ...는 새빛 둥둥도 아니고 낙동강 동동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 앞뒤 딱딱, 가로세로 각맞는 그런 것도 아니다. 콧구멍은 간질거리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잡히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헐벗은 언어가 붙들기에는 너무 풍부한 어쩌고 그런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데, 재미있다고만 말하기에는 그렇고, 무언가를 더 파고 들기에는 평론가의 영역이 될 것 같고, 일상과 엮어보기에는 너무 이야기가 많다. 단편집이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데, 어느것 하나 그저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려고 덤벼들다간 독서회 회원들의 눈총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안그래도 말이 너무 많아 요주의 인물이 된 지 오래다.

 

7편의 단편 중 마지막인 <꽃의 피, 피의 꽃>이 경험상(?) 제일 친숙하다. 이 단편에는 세상의 모든 도박이 등장한다. 섯다, 도리짓고땡은 기본이고 고스톱, 포카를 거쳐 전자오락 도박, 경마, 라스베가스까지 좌악 펼쳐진다.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나의 친애하는 지인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가장 큰 도박"인 주식만 빠져 있다.

 

세상의 이 잡다한 그러나 거대한 도박 중 내가 직접 해본 것은 고스톱 같은 민속놀이를 빼면 경마다. 한 두번이 아니라 한 두 번의 한 이삼십 배는 될 듯 하다. 나야 기껏 하루 열두 경주 중 총 일이만원 정도 잃을 간덩이밖에 안되지만, 낮게 깔리는 음악과 함께 "제 9경주, 마권 발매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 초대형 전광판에 숫자들이 촤르륵 나타났다 또 촤르륵 바뀌는데 ,그것이 꼭 바람따라 이리 누웠다 저리 눕는 황금들판의 물결처럼 눈부시었다. 수백에서 시작해서 수천, 수억, 수십억으로 불어나는 그 숫자들의 물결을  보노라면, 어떻게 이삼십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돈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러나 배팅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부터는 화장실이며 실내 객장이며 너른 경마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끔 시사프로에 나오는 경마장 꽁지며 큰손이며 예상전문가들도 보게 되고, 일가족이 둘러앉아 예상지에 머리를 맞댄 모습, 피니시 라인에 코차로 들어오지 못한 기수를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수십만원인지 수백만원인지 알 수 없는 마권을 뿌려대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상실감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 인생을 건 모든 사람들도 결국 승자는 마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의 피, 피의 꽃>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듯, 총 배팅 금액 중 72%만 배당금으로 경마꾼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28%는 마사회로 들어 간다. 판돈의 100%가 돌아도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갈리기 마련인데, 그 판돈이라는 것이 한 판에 28%씩 줄어드는데, 하루 12경주를 모두 배팅하고 나면 결국 처음 100원으로 시작했다면 1원만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1원 중 딴 사람도 나오지만 당연히 잃은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매 경주 사람들은 기대에 차 배팅을 한다. 간혹 1000배 이상의 배당이 터지기도 하는데, 만원만 걸면 1000만원을 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방이니까.

 

<꽃의 피, 피의 꽃>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거다. 몇번을 읽어봐도 결정적인 오타가 있긴 한데, 게임이란 혹은 도박이란 이런것이다,라는 명시적 교훈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이들도 하는 게임이지만, 이 가위바위보는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위를 낼 수 없다. 상대편은 가위바위보 모두 낼 수 있다. 어떻게 될까? 거듭 말하지만 목숨이 걸려있다.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현실과 확률은 다르니까. 내가 자유롭게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무엇을 낼 것인가? 상대는 무엇을 낼 것인가? 결론은 이 게임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위, 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은 상대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보를 낸다. 비긴다. 1라운드는 끝났다. 2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또 보를 낸다. 비겼다. 2라운드 끝. 3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를 낸다. 역시 비긴다. 가위바위보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상기하라.

 두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은 라운드가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다. 게임을 더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목숨을 거는 것이 게임이다. 목숨을 걸지만 아무도 서로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이다.게임.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에는 게임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p288~9」

 

바위,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까? 이 비밀을 눈치채셨는가?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의 경우가 있다. 이기거나 비기는 것, 이기거나 지는 것, 그리고 비기거나 지는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지는 것'이 들어가는 경우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기거나 비기는 것이다. 그것이 보를 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보를 내면 가위를 낼 수 없는 상대는 보나 혹은 바위를 낼 것이다. 보를 내면  비기게 되고, 바위를 내면 내가 이긴다. 그런데 머저리가 아닌 이상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당연히 보를 낸다. 죽을 때까지 보를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도박꾼이라면, 오후 4시의 권태를 이길 수 없어 손가락을 걸고 내기 상대를 찾아 헤매던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 허슬러라면, 나는 아마 가위를 낼 것이다. 상대가 나의 약점을 알고 보를 낼 것이라 예상한다면 나의 가위는 그만큼 승산이 있다. 그러나 가위에는 그만큼의 부담도 있다. 바위가 나오면 내가 죽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그런데 이걸 부추기는 소위 멘토들도 많으시다.)  그러나 목숨은 손가락이 아니고, 왠만한 우리들은 죽어나 사나 보를 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게임이고,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런데 성석제는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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