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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앵무새 죽이기』의 원제는 『To kill a mockingbird』이다. 그러나 mockingbird는 앵무새가 아니라 흉내쟁이지빠귀다. 오역인 셈인데, 지은이는 앵무새로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 굳이 수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앵무새는 사람 말을 따라하는 새로 유명하다. 흉내쟁이지빠귀는 다른 새들의 소리를 잘 흉내 낸다. 하지만 제목의 의미는 ‘따라하는’ 것에 있지 않다. 앵무새든 흉내쟁이지빠귀든, 하여튼 이 mockingbird를 죽이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이 새는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60년에 쓰였지만, 1930년대 경제 공항을 겪던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주제라, 지금 우리 눈에는 그다지 새롭거나 충격적이지는 않다. 앞 뒤 몽땅 자르고 말하면, 이 소설은 인종차별에 맞닥뜨린 백인 지성인 사회의 양심선언이다.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 ‘강간 사건’이 일어난다.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 처녀 메이옐라양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지만,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전도된 사건의 실체를 밝혀낸다. 메이옐라양이 톰을 유혹하려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가족이 작당하여, 거꾸로 톰에게 강간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백인 배심원들은 톰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톰은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된다. 이 재판으로 메이옐라양의 아버지는 앙심을 품고, 핀치 변호사의 남매를 해치려다 거꾸로 칼에 찔려 죽는다.
이 사건에서 핵심은 백인 사회의 이중적 태도이다. 마을의 핵심적 백인 사회는 메이옐라양과 그의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내세울 것이 피부색뿐인 더럽고 쓰레기 같은 하층민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인한, 톰은 유죄이다. 톰의 죄는 강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백인이 어떤 백인이건, 백인 처녀의 강간범으로 톰이 지목된 순간, 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백인사회의 명예를 위해 톰은 반드시 희생되어야 한다.
흑인은 ‘호모 사케르’ 이다.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자신의 몫은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다. 백인 사회는 사실상 흑인에 의해 굴러간다. 백인의 주방에는 흑인 가정부가 있다. 신사숙녀의 우아한 삶은 흑인의 고된 노동 위에 피어난 꽃이다. 그러나 흑인은 백인 사회의 그 어디에도 자리할 수 없다.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조그만 몫이라도 주장하는 순간, 그들은 가차 없이 희생당한다.
‘호모 사케르’의 죽음에는 누구도 책임이 없다. 누구나 처벌받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제물이 바로 ‘호모 사케르’ 이다. 그럼에도 ‘호모 사케르’는 제의에 조차 오를 수 없는 더러운 제물이다. 마치 제상에는 올릴 수 없는 부정 탄 음식처럼.
핀치 변호사는 백인 사회의 관습에 맞선다. 사회 자체가 불평등의 관습 속에 움직인다 해도, 오로지 법만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물론 소설의 배경은 80여년 전이다. 그렇다고 이미 끝난,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다소 지루한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지만) 이 책이 여전히 미국 전역에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하긴 뉴스만 보더라도 인종차별은 미국 구석구석에서 지금도 발생한다. 흑인 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과잉 발포, 법원의 경찰 손들어주기 등등...
하지만 우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호모 사케르’ 만들기는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일베’는 한 때의 소란에 그칠 수도 있지만, 일베의 태생은 뿌리가 깊다. 이삿짐 싸서 달랑 옮겨버리면 그만인 나라에서, 무슨 지역감정에 이렇게 뿌리를 박고 사는지 모르겠다. 평균 학력이 가장 높다는 나라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반-지성적 태도는, 냉소와 혐오만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삶의 틀을 구성하는 정치는 그 자체가 통째로 지역감정에 좌우되고 있다. 누구도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각자는 ‘호모 사케르’ 가 되어 가고 있다. 똑같은 선행을 해도 누구는 전라도 연예인이라서 빨갱이 짓이 되고, 누구는 경상도 연예인이라서 인도주의가 된다. 녹조가 온 강을 뒤덮어도 경상도 정권이 한 일이라, 4대강과는 관련이 없다고 우긴다. 판단의 기준은 사실이 아니라 태생이다.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했느냐가 진실을 가르는 기준이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것은 앵무새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노래만 부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만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 의하면, 설득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하는 것이다. 권리는 순진무구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백인들의 소설이다. 백인의 눈으로 바라본 인종차별에 대한 양심선언이다.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 는 금언은 백인들의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그 주체는 백인이고, 앵무새는 한낱 대상일 뿐이다. '백인의 양심'을 위해, 앵무새를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들의 금언은 달라져야 한다. 흑인들에게는, ‘호모 사케르’에게는 ‘앵무새가 되는 것이 곧 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