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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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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읽은 책이다. 언제 읽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 명성에 비해 그리 감명을 받지는 못했나 보다. 약간 쓸쓸한 기분으로 책을 잡았다. 늙어서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니, 슬퍼라!  

  그런데, 뜻밖에도  재미있다. 요즘 드라마의 원형이 여기 있었네.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야 말로 광적인 사랑, 삼각관계 드라마의 원형이다. 베르테르의 열정적인 사랑, 알베르트의 안정된 사랑, 두 사랑 사이에 흔들리는 롯테. 어떤 캔디 드라마도 『오만과 편견』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미친 사랑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문학사적으로 괴테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위치하는 자리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극명한 대립은 마치 이성에 대한 괴테의 신랄한 비판처럼 보인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의 방에서 우연히 권총을 발견하고, 자살에 관해 논쟁을 하게 된다. 알베르트는 자살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리석고 나약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베르테르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물에 빠져 죽은 소녀의 예를 들어 알베르트에 열광적으로 반박한다.

  "이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어리석은 여자야! 좀 기다렸다면, 시간이 흘러서 때가 오면 절망도 가라앉을 것이고 반드시 다른 남자가 나타나서 위로해 주었을 텐데>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한심한 사람이지요.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열병을 앓고 죽다니 참 어리석은 놈이야. 체력이 회복되고 원기가 좀 생겨서 혈액의 혼란이 가라 앉을때까지만 기다려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말이오.p83" 

 

  알베르트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지만 감성 보다는 이성에 따르는 인물이다. 사랑에 목숨을 버리는 베르테르의 연적으로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를 맞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뚜렷한 대비는 없을 테니까.  이성은 알베르트의 성격 구축을 위해 괴테가 부여한 특성이겠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열정과 이성이 베르테르와 알베르트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어 이 소설 자체가 열정과 이성의 격렬한 논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떠나 생활하던 중 만난 공작에 관해서도 이성에 대한 비판은 잘 드러나 있다.

  " 그 분은 그뿐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p129" 

  "그는이지적인 인간, 그것도 아주 평범한 이지의 사람이다. 그 사람과의 교제는 잘 씌어진 책을 읽는 이상의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p130"

  베르테르에게 지성과 이성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고유한 것은 오직 마음이다. 

  그런데 알베르트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로테에게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없다고 베르테르는 생각한다.

  "그녀는 알베르트보다 나와 결혼했으면 더 행복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알베르트는 그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은근한 소원을 남김없이 풀어줄 만한 그런 인물은 아니다. 감수성에 일종의 결함이 있지. 결함이라, 그 해석은 자네의 자유지만, 똑 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뛰는 그런 마음의 공감이라는 것이 알베르트에게는 없단 말이다. p131"

  베르테르는 롯테 보다 알베르트에 관해 더 깊은 탐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롯테는 그냥 한 눈에 빠져 버린 사랑의 대상, 숭배하는 대상, 어떻게 보면 한낱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외친다. 

  "때때로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이다지도 외곬으로 그녀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모르고,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p133~4" 

 

 

  나는 감성 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메마른 편이고, 마음의 공감이라는 것도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프다.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지만, 그래도 베르테르의 비극에 나도 따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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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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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쪽 가까운 책을 만 하루만에 읽었다. 그건 나의 집중력도 끈기도 아니고,순전히 이야기가 가진 힘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탐색해 보거나  배경을 짚어 볼 틈도 없이, 이야기는 주인공(?) 팀버 울프 '링고'처럼 나를 덮쳐 왔다. 나도 링고를 놓지 못했고, 링고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 모든 감각을 빨아 당겼던 이야기는 책장을 덮자마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재빠르게 흩어졌다. 마지막 두어방울의 눈물조차 흐르면서 말라버렸다. 독서회에서야 무슨 말이든 하게 되겠지만, 무슨 해야 할 말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80년 광주를 연상했고, 누군가는 국가에 이런 전염병이 나돌면 다른 선택이 없지 않을까하고 말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각각이지만, 그것이 내 귀에 하나로 흘러 들어오자, '빨간 눈' 전염병 보다 더 끔찍한 무엇이 되었다.  광주에서는 인간을 위협하는 어떤 전염병도 없었지만, 광주 밖의 사람들은 그것을 '빨간 눈' 보다 더 무서운 '빨간 것' 으로 두려워 했다. 두 가지 '빨간' 색의 일치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의도가 엉뚱한 방향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읽힌다면, 이 소설은 재앙일 수도 있다. 더우기 입에 담기도 힘든 왜곡과 모욕이, 광주를 다시 한번 난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의 후반부는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광주와 지나치게 닮았다. 구덩이에 파묻힌 사체, 체육관에 늘어 선 주검들, 시청에 모여든 사람들, 시민들의 토론과 자치,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  그리과 최후의 진압까지. 그런데 국가나 계엄군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무능하지만 기계처럼 냉혹하게 전염병의 확산에 대처하는 행정이 있을 뿐이다. 누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어떤 격론이 있었는지, 어떤 항명이 있었는지, 하다 못해 계엄군들의 최소한의 인간적 고뇌마저 작가는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  한쪽에는 인간이 있지만, 반대쪽에는 무능한 행정이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불가항력에 놓인 행정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있다.

  그런데 소설의 이 '어쩔 수 없음' 이 예기치 않게 역사적 '광주'와 연결되면, 일베가 한 그 어떤 짓들 보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역사의 왜곡이 발생한다. 광주도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암흑연기처럼 독자들의 마음에 스며든다면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친 우려거나 혼자만의 망상일 수 있지만,  이 책을 독서 목록에 올리자마자 동시에 튀어나온 회원들의 몇 마디가 내내 가슴에 걸려 있다. 작가는 한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겠지만, 해석은 늘 엉뚱하게 튀게 마련이다.

  이 책은 광주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전혀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어느 경우든 독자가 광주를 연상하고, 저자가 그것을 예견했다면, 저자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광주를 말하려 했다면,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하고, 현상만 나열한 나태함에 대해, 그 결과 의도치 않게 왜곡한 역사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광주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배경으로 차용하려 했을 뿐이라면, 그렇게 무심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 자체가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광주의 비극을 한낱 이야기거리로 전락시킨 그 안이함과 잔인함에 대해.

  그래서 이 책은 광주와는 한 올의 연관도 없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숨겨진 구원의 상징과 생존을 향한 뜨거운 갈망'으로 오롯이 읽힐 수 있다. 한 편의 재난 영화처럼.  인간을 덮쳐 오는 알 수 없는 재앙에 사로잡혀서도 끝까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성의 승리라고 읽어 낼 수 있다. 너무 많이 보아와서 하나도 새롭지 않고, 조금도 충격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힘있게 달려 가는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지치지 않는 어린시절 동화책처럼 너무 너무 재미있으니까. 책을 덮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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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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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의 원제는 『To kill a mockingbird』이다. 그러나 mockingbird는 앵무새가 아니라 흉내쟁이지빠귀다. 오역인 셈인데, 지은이는 앵무새로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 굳이 수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앵무새는 사람 말을 따라하는 새로 유명하다. 흉내쟁이지빠귀는 다른 새들의 소리를 잘 흉내 낸다. 하지만 제목의 의미는 ‘따라하는’ 것에 있지 않다. 앵무새든 흉내쟁이지빠귀든, 하여튼 이 mockingbird를 죽이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이 새는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60년에 쓰였지만, 1930년대 경제 공항을 겪던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주제라, 지금 우리 눈에는 그다지 새롭거나 충격적이지는 않다. 앞 뒤 몽땅 자르고 말하면, 이 소설은 인종차별에 맞닥뜨린 백인 지성인 사회의 양심선언이다.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 ‘강간 사건’이 일어난다.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 처녀 메이옐라양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지만,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전도된 사건의 실체를 밝혀낸다. 메이옐라양이 톰을 유혹하려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가족이 작당하여, 거꾸로 톰에게 강간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백인 배심원들은 톰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톰은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된다. 이 재판으로 메이옐라양의 아버지는 앙심을 품고, 핀치 변호사의 남매를 해치려다 거꾸로 칼에 찔려 죽는다.

 

 

 

  이 사건에서 핵심은 백인 사회의 이중적 태도이다. 마을의 핵심적 백인 사회는 메이옐라양과 그의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내세울 것이 피부색뿐인 더럽고 쓰레기 같은 하층민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인한, 톰은 유죄이다. 톰의 죄는 강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백인이 어떤 백인이건, 백인 처녀의 강간범으로 톰이 지목된 순간, 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백인사회의 명예를 위해 톰은 반드시 희생되어야 한다.

 

  흑인은 ‘호모 사케르’ 이다.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자신의 몫은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다. 백인 사회는 사실상 흑인에 의해 굴러간다. 백인의 주방에는 흑인 가정부가 있다. 신사숙녀의 우아한 삶은 흑인의 고된 노동 위에 피어난 꽃이다. 그러나 흑인은 백인 사회의 그 어디에도 자리할 수 없다.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조그만 몫이라도 주장하는 순간, 그들은 가차 없이 희생당한다.  

  ‘호모 사케르’의 죽음에는 누구도 책임이 없다. 누구나 처벌받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제물이 바로 ‘호모 사케르’ 이다. 그럼에도 ‘호모 사케르’는 제의에 조차 오를 수 없는 더러운 제물이다. 마치 제상에는 올릴 수 없는 부정 탄 음식처럼.

 

 

 

  핀치 변호사는 백인 사회의 관습에 맞선다. 사회 자체가 불평등의 관습 속에 움직인다 해도, 오로지 법만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물론 소설의 배경은 80여년 전이다. 그렇다고 이미 끝난,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다소 지루한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지만) 이 책이 여전히 미국 전역에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하긴 뉴스만 보더라도 인종차별은 미국 구석구석에서 지금도 발생한다. 흑인 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과잉 발포, 법원의 경찰 손들어주기 등등...

 

 

 

  하지만 우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호모 사케르’ 만들기는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일베’는 한 때의 소란에 그칠 수도 있지만, 일베의 태생은 뿌리가 깊다. 이삿짐 싸서 달랑 옮겨버리면 그만인 나라에서, 무슨 지역감정에 이렇게 뿌리를 박고 사는지 모르겠다. 평균 학력이 가장 높다는 나라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반-지성적 태도는, 냉소와 혐오만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삶의 틀을 구성하는 정치는 그 자체가 통째로 지역감정에 좌우되고 있다. 누구도 그 해법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각자는 ‘호모 사케르’ 가 되어 가고 있다. 똑같은 선행을 해도 누구는 전라도 연예인이라서 빨갱이 짓이 되고, 누구는 경상도 연예인이라서 인도주의가 된다. 녹조가 온 강을 뒤덮어도 경상도 정권이 한 일이라, 4대강과는 관련이 없다고 우긴다. 판단의 기준은 사실이 아니라 태생이다.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가 했느냐가 진실을 가르는 기준이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것은 앵무새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노래만 부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만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 의하면, 설득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하는 것이다. 권리는 순진무구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백인들의 소설이다. 백인의 눈으로 바라본 인종차별에 대한 양심선언이다.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 는 금언은  백인들의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그 주체는 백인이고, 앵무새는 한낱 대상일 뿐이다. '백인의 양심'을 위해,  앵무새를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들의 금언은 달라져야 한다. 흑인들에게는, ‘호모 사케르’에게는 ‘앵무새가 되는 것이 곧 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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