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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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말 할 수 있을까..

알아도 알지 못했던 것들..

 

한강은 "제대로 써야합니다" 의 압박을 어떻게 이기고,

제대로 쓸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지켜며.

 

나도 리뷰를 제대로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다만, 습기많은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아침에,

나는 펑펑 울었다,

고 써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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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에 대한 평이 다들 좋군요....

말리 2014-07-15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아는 이야기를 흡인력있게 써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원래 제가 한강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인물들이 구체적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감성적 공감과 전체적 조망이 모두 가능한 소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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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다. 20대까지는 열심히 읽었는데, 30대를 넘어서자 소설이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나도록 잘해야 한 해에 한두 권정도 읽었는데, 지방 소도시로 내려와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한 달에 두세 권씩 읽게 된 것이 벌써 일 년 째다. 현대 소설 반, 고전이 반 정도 되는데,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읽을 때 마다 이것이 내가 읽었던 그 책인가 싶다. 그 사이 민음사나 펭귄 클래식 등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본들이 많이 나왔고, 번역자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원어로는 읽지 못하지만, 원작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고전이 전혀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책 자체에도 있지만, 그 동안 나의 책읽기 방식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놓으며 책과도 좀 뜸해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철학하면 사주팔자가 떠오르고, 서양철학하면 소크라테스 어쩌고 밖에 모르던 처지에,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주체가 ‘나’지, 이까짓 걸로 무슨 학문을 하나, 처음엔 웃기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 저 책 손을 대고 철학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봤자 어설픈 교양도 안 되지만 여하튼 그 재미를 살살 알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에는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을 계기로 역사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역사 자체 보다는 역사적 눈으로 고전을 읽는 방식을 배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소설을 읽으면서도 줄거리나 캐릭터 자체 보다는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역사적 배경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은 어떤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따위가 더 흥미로웠다. 그런 면에서 현대 소설보다는 고전이 훨씬 재미있다. 고전이란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 이지만, 또한 당대의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전은 사건과 지문을 중심으로 읽었다면, 요즘은 다소 장황한 사변과 배경 묘사에 집중해 읽는다. 그러니 다시 읽는 고전은 예전의 그 고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문학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이 좋은 것인가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다. 가끔 나도 그런 의문이 든다. 가슴으로,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고, 분석하고 곱씹으면서 읽는 것이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번거롭게 문학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제 10, 20대의 감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감수성으로 읽는 책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그런데 철학적, 역사적 눈으로 작품을 뜯어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작가가 가치관을 형상화하는 방식에 경탄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구조적 틀이 개인을 옥죄이고 파멸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하기도 한다. 문학이 구체화 해내는 철학과 역사는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역사 그 자체가 갖지 못한 감동과 힘이 있다. 내게는 그것이 문학의 힘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도식적 책읽기로 비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가장 즐거운 책읽기인 이유이다. 감수성을 잃었지만, 희미하나마 눈 하나 얻었으니, 아직은 문학작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막상 철학적, 역사적 배경이 확연히 드러난 작품은 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인물이나 사건 속에 녹아들지 않고, 저자가 생목으로 내질러 버리는 가치관은 지루하고, 힘이 없다.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이슬람 여성은 발뒤꿈치만 보여도 육감적이라는데, 해변의 비키니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 마련이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말하자면 비키니다.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유명한 ‘~부인’ 시리즈의 원조인데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노골적이라 매력의 반을 잃어버렸지 싶다. 아쉽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출판 금지와 삭제의 험난한 역사가 보여주듯, 노골적이고 화끈한 섹스 묘사에 눈을 반짝이는, 감각적 방식이 하나이다. 어릴 때 그 고리타분한 우리 근대문학에서도, 입을 맞추거나 몸을 더듬는 장면이 나오면, 그것만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아일보가 그 명성이 짱짱하던 80년대에, 아침 등굣길에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신문을 남몰래 주워, <어우동>이란 연재물을 열에 들떠 읽기도 했다. 십대는 그런 때고, 그 시대는 영상보다는 활자가 더 성에 접하기 쉬운 때였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최고의 고전으로 기억된다면, 아마도 단연 여덟 번이나 되는 그 숨 막히는 장면들 덕분일 것이다. 어쩌면 요즘 10대들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벗고 노는 포르노물 보다 지루한 문학 작품 속의 성적 묘사는 분명히 더 매혹적인 면이 있다. 차도르에서 살짝 비어져 나온 발뒤꿈치처럼, 관능적이다. 물론 로렌스나 로렌스 전공자들은 무척 억울해하고, 왜곡된 읽기라고 주장하지만, 일차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 자극성으로 치자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따라올 고전은 없을 것이다. 고전이 이렇기만 하다면, 청소년들은 그리고 우리 독서회원도 그러리라 짐작되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째로 사서 읽으려 덤빌지도 모른다.

 

로렌스가 이렇게 파격적인 섹스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 원초적 자연성을 산업사회,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는 두 번째 방식은, 그리고 로렌스가 가장 좋아할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는 것이다. 사실 로렌스의 의도는 논의의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백하다. 심지어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지도 않고, 섹스 묘사만큼 노골적이다. 민음사 판 작품해설을 인용해 보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주제 의식은 이렇다. “그것은 기계적 관념성과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거부이며 이에 대응할 구원적 가치로서 살아있는 인간적 관계의 회복 가능성이다. p328"

 

채털리 경인 클리퍼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채털리 부인인 코니와 그녀의 연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원적 인물로서의 한 쌍이다. 이 대립 구도는 기독교도들의 선과 악만큼 뚜렷하다.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성공의 암캐 여신’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집착하는 클리퍼드는 처음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에, 코니 부인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는 사업가로서의 명성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클리퍼드는 두 가지 명성을 모두 얻지만, 혼자서는 산책조차 하지 못하는 하반신 불수이며, 점점 아이처럼 퇴화한다. 육체는 마비되고, 정신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 그 정신이란 것은 모든 것을 비웃거나 모든 것을 공허하게 여길 뿐이며, 내면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누구나 그렇다. ‘資本자본’, 재물-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불구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p315)”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구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 즉 자본가는 더욱 불구다. 성공의 암캐 여신이 그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라는 면에서 클리퍼드는 탄광의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돈을 위해 클리퍼드의 육체는 불구가, 불능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한 명작,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제국의 왕좌는 모든 인간성을 제거한 돈의 노예에게만 허락된 자리이다.

 

채털리 부인의 애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로렌스 자신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주인공이다. 채털리 부인은 사실 보조적 인물이다. 멜러즈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 동반자이지만, 그 이상의 틀을 짜는 것은 멜러즈 이다. 채털리 부인, 코니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멜러즈에 의한 각성이다.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 게다가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인간의 육체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을 따름이라고요. 육체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아름다운 불꽃을 한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 뒤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밟아 꺼버렸고, 이어 예수가 나타나서는 완전히 끝장내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이제 육체는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다고요. 정말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그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으로 피어날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말이죠. 2권 p167”

 

로렌스의 대안은 기형적으로 발달한 정신적 삶에 대비되는 육체적, 자연적 삶이다. 데카르트는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 ‘생각하는 실체’만을 주체로 보았고, 그 이외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주체의 육체마저도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res extensa 연장’ 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근대정신의 출발점으로 그 영광과 오욕의 대명사이다. 근대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뿐만 아니라 자연을 타자화해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산업문명과 물질문명의 시원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1차, 2차 대전으로 위대했던 근대는 파국을 맞았고, 그 주범으로는 데카르트가 지목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1928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출판되었다. 로렌스의 비판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그 근간이 되는 근대정신 전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삶에 대한 육체적 삶의 찬양은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자, 철저한 거부이다. 로렌스가 육체적 삶, 관능적 환희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근대정신과 철저히 단절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육체적 삶이 혹은 자연적 삶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작품해설을 통해 옮긴이 이인규는 “로렌스의 그러한 비판과 모색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것인가? 나아가 그의 비판과 모색은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만큼 현재성과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2권 p336”를 묻는다. 이인규는 문명비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육체와 성의 중요성에 관한 로렌스의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이제 성이 인간성 해방의 상징이 되기에는, 너무 개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을 즐기라는 압력에 시달린다. 성은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로 취급된다. 남자들의 의무방어전에 대한 스트레스는 그들의 남근을 점점 위축시키고 있다. 그런데 육체적 삶에 대한 로렌스의 주장을 말 그대로 ‘육체적’, ‘성적’ 관점에서만 비판해야 하는 것일까? 로렌스의 대안이 로렌스의 시대, 즉 성적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에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 <아바타>는 로렌스 주장의 현대적 판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문명에 의한 판도라 행성의 파괴. 그 첨병 역을 맡은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또한 하반신이 마비된 불구다. 그런데 제이크는 여기서 일종의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채털리경인 클리퍼드의 역할을, 후반부에서는 사냥터지기인 멜러즈의 역을 맡는다. 이 변화에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네이티리가 있다. 네이티리는 채털리 부인인 코니 역을 맡지만, 제이크와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나비족인 네이티리가 기계문명에 찌든 제이크를 자연적 삶, 순수한 육체적 삶으로 이끌어 낸다. 그런데 자연적 삶으로 돌아간 제이크가 지구인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현대인은 여기서 물질문명을 끝장내고 일제히 자연적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멜러즈의 주장을 읽고 있자면, 16세기 에스파냐를 비롯한 서구 문명인들에게 짓밟힌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야말로 자연에 동화되어 건강한 육체적 삶을 살았다. 자본 - 돈이 중심이 된 것도, 인본 - 인간만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닌, 자연인으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망했다. 그들이 나빠서 망한 것은 아니지만, 발달된 기계문명의 총칼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 앞에 멸망했다. 그리고 돈의 노예가 아니라 글자그대로 노예가 되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뭔가 굉장히 쇠락한 느낌이 든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그렇다. 명성을 얻지만 공허하고, 지식인들이 모여 떠들지만 알맹이는 없고, 세상의 모든 일들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것을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노쇠함이 아닌가했는데, 영국문학을 하는 지인께서, ‘제국의 피로감’ 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데카당스 문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피로감’, 그것이 주는 우울함이나 허무 따위 말을 들으면, 제3 세계 피식민지인의 후손으로 참 기분이 더럽다. 피식민지인을 앞에 두고, 그들의 눈앞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제국민이 피로감을 운운하면, 피식민지인들, 노예들은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여하튼 그 피로한 제국의 멋진 후예들 몇몇은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공동체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가 보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그들만의 이상향이었다. 제국은 더욱 강고해지고, 자본은 더욱 악랄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예속되었다.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 밖에 세운 유토피아는 결국 도피적· 은둔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 자체, 권력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궁극적 변화는 없다. 로렌스는 사회주의를 은근히 비꼬고, 볼키를 비난한다. 볼키 역시 기계적 삶을 추구하며,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볼키가 어땠건, 현실 사회주의가 어땠건 그들은 적어도 권력을 장악하여 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키려 했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짓이겨진 삶 한가운데서 투쟁했던 것이다. 모두가 망하든지 모두가 구원받든지 함께 새로운 체계와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세계의 밖이 아니라 세계의 안에서, 그 내부에서,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우리의, 우리 모두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문제이면 정신을, 물질이 문제이면 물질을 바꾸어 내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삶은 육체와 그리고 자연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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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개정판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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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무난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제주 4.3 사건이 배경이라기에 극적인 전개와 격한 감정 따위를 예상했지만, 책은 예상밖에 잔잔했다. 유년의 풍경을 아스라이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중3까지의 이야기지만, 성장소설이 아닌 회고담, 기억의 수묵화라 할 수 있다.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듯, 아스라하고 안온한데도, 책이 술술 넘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눈치없이 하릴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할머니에게 붙들린듯, 마음이 다른곳으로 널을 뛰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책이 눈에 안들어와 마음이 산란한지 잘 모르겠다. 점점 서정적인 책들을 읽기가 어려워진다. 눈이 뻑뻑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뻑뻑해지는 것일까... 너무 많이 보아버려, 이제 아무 감흥이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여든이 넘은 엄마는 남루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전에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함께 보았는데, 엄마는 조금 언짢아 했다. 쪼글쪼글 늙은 것들이 연애질하는 것도 보기 흉하고, 치매 걸린 마누라와 자살하는 늙은 부부의 이야기도 심란하다고 했다. 오히려 나는  보지 않는 아이돌들의 춤을 더 좋아한다. 언뜻 생각하면 노인들 눈에 망칙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엄마는 그 터질듯한 생명력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에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 을 보았을 때, 나도 그랬다. 내가 살던 곳과 너무 닮아, 너무 끔찍하게 현실적이라, 너무 영화같지가 않아 지루했다. 운동화 두짝만 질질 끌고 나가면 보게 되는 풍경을 굳이 스크린에서 또 봐야 하다니, 짜증이 일었다. 영화는 영화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소설은 소설이니까 보는데....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보아버린 회고담이다. 작가들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유년의 기억들로 돌아가나 보다. 독서회에서 몇 달 전에 읽은 『관촌 수필』도 그렇고, 지금은 책 이름도 금새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젊은 시절 읽었던 여러 책들이 이런 유형의 회고담들이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 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유난히 담담하다. 유년에 겪은 4.3이 그저 스치듯 지나가버리니, 독자를 빨아들이는 극적인 사건이 따로 있을리가 없다. 평양냉면의 밋밋한 맛 같다고나 해야할까. 내게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있는데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처럼 읽게 한 것 같다. 나는 회고록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양 냉면의 맛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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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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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리뷰 상품을 세움판으로 잘못 선택해 올렸던 예전 글입니다. 예전 글을 비공개로하고(댓글들이 있어서)  민음사판 리뷰로 다시 올려 놓습니다.

 

다시 읽은 『이방인』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이상도 하지, 내 기억의 어디에도 『이방인』에 대한 옛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스무 서넛 무렵 까뮈에 푹 빠진 나는, 서점과 헌책방을 가리지 않고 까뮈의 책들을 찾아 다녔다. 온라인 서점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사실 나는 까뮈의 소설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재미도 없었고 이해도 못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당시 책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시론이 뭔지도 몰랐다.)인,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이었다.

 

『시지프의 신화』의 첫 문장은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이다. 까뮈를 대표하는 두 문장에 모두 죽음이 있다. 까뮈의 세계는 ‘죽음’과의 대면이다. 그의 시론들인,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와 자살, 『반항인』은 살인과 반항을 탐색하고 있다. (링크『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관한 리뷰) 이 두 작품은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데, 사실 까뮈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까뮈는 노벨 문학상 소감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상호 관련성 아래 철저히 기획된 것임을 밝혔다.

 

「 “나는 처음 시작 때부터 내 작품 세계의 정확한 계획을 세워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선 부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세 가지 형식으로. 그것이 소설로는 『이방인』, 극으로는 「칼리굴라」와「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의 신화』였다. 나는 또 세 가지 형식으로 긍정을 표현하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 그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 층도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다.”  이와 같이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 등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은 이미 그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기록해 온 『작가 수첩』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세 번째 층”은 작가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하여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방인』은 그러니까 카뮈가 구상한 첫째 번 층위인 “부정”, 즉 “부조리” 삼부작 중 하나로 그에게는 최초의 소설에 해당한다. 철학적 에세이는 설명하고 소설은 묘사하고 연극은 이 부조리의 감정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1939년 가을에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이 관통한다. p170~1」

 

 

 

 

 

이 책들의 일관된 주제는 죽음이다. 그러나 까뮈의 ‘죽음’은 개인적 죽음이 아니다. 자살과 살인 혹은 사형이라는 죽음의 방식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이에 끝까지 맞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는(그러나 헛된) 인간 반항의 정신과 그 행위를 철학적, 역사적,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다. 까뮈의 출발점은 서양 근대정신의 바탕인 “신은 죽었다”와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절망적 세계인식이다. 신의 죽음이 절망적인 이유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 가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결박임을 쓰디쓰게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신, 옳고 그름의 가치 기준인 대타자의 부재는 이제 인간 자신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세계를 통일시킬 것인가? 이 험난한 과정이 서구 근대 사상의 역사다. 근대의 주인은 ‘이성’이다. 그러나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성은 또 다른 신이 되어 인간을 억압했다. 이성이 지배한 서구 근대의 역사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신을 죽이고 건설한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도, 퇴폐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인 나치즘 체제도,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지향한 공산주의 체제도 모두 대재앙을 초래했다. 세계는 통일되지 못했고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세계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인간 실존의 조건은 부조리이다. 부조리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시지프의 신화』p68 ”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이 부조리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이 단절, 이 간극, 이 대립이 사실은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대립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세계의 무의미에 실망하여 자살하거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긍정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세계와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반항은 어떠한 통일이나 주인도 거부하고 순간순간 세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까뮈는 부조리가 소설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라마조프, 키릴로프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고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신의 작품 『이방인』과 『페스트』야말로 20세기 이후,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가장 치열한 탐색일 것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젊은 청년이 알제의 어느 바닷가에서 아랍인 한 사람을 살해했다. 수사 결과 그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울지도 않고 그 다음날 바로 여자와 만나 수영과 섹스를 했다. 재판정은 아랍인에 대한 살해 사실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심한 태도’를 문제 삼아 이 청년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사형 집행 전 교도소 부속사제가 회개를 설득하지만 그는 격렬히 거부하고,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린다.

 

『이방인』에는 세 가지 ‘죽음’이 나온다. 엄마의 자연사, 아랍인의 살해, 뫼르소의 사형이다. 죽음은 이 책의 주제이자 형식이기도 하다. 1부는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해변에서의 아랍인 살해로 끝난다. 2부는 아랍인 살해에 따른 재판으로 시작해서 사형이 언도된 뫼르소가 집행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 전체의 시작과 끝에 죽음이 배치되어 있고, 이 두 죽음은 또 다른 죽음으로 매개되어 있다. 아랍인 살해는 1부의 종결과 2부의 시작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사실 아랍인의 죽음은 매개 역할 이외에는 별 다른 중요성이 없다. “태양 때문이다.” 라는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진술 때문에, 아랍인 살해의 원인을 놓고 독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소설 자체에서 그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로 취급되지 않는다. 살해자인 뫼르소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부조리한 사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 프랑스 식민지였던 당시 알제리의 현실에 비추어서도 사형은 예상 밖의 가혹한 판결이라고 한다. 뫼르소는 까뮈와 같이 프랑스 이주민 혈통의 백인이다. 백인이 아랍인을, 식민 종주국 국민(?)이 식민지 원주민을 쏘아 죽인 것은 중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뫼르소의 진정한 범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재판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국선 변호사는 처음 만난 날, 재판에서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한다. 다만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서 보여준 태도일 뿐이라는 듯이.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 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며 나를 다그쳤다. p75"  재판정이 오직 관심을 갖는 것은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 날 보였던 '무심한 태도' 이다. 배심원 앞에서의 실제 재판에서도 어찌나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에 집중되었던지 변호사마저 이렇게 외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p107” 그러나 검사는 이 두 가지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p108"  이 엉뚱해 보이는 주장은 그러나 방청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변호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뫼르소는 검사가 주장하는 본질적인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무심한 태도'가 살인 자체 보다 더 극악한 죄악으로 비난받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무용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살해한 잔학한 범죄보다 뫼르소의 ‘무감각함’이 더 전율스런 공포가 된다. 부친 살해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부정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 혹은 사회의 가치 체계이다. 그러나 이 적극적 살해와 증오는 그것 자체에 대한 ‘무심함’ 보다는 덜 치명적이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은 그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뫼르소는 모든 가치에 대해 무심하다. 세계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들이 헛되이 부여한 가공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뫼르소는 인간들의 이 절망적 노력을 ‘무심함’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어떤 가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사회를 인간들은 견뎌낼 수 없다. 그러므로 뫼르소의 무심함은 용서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전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까뮈 스스로가 밝혔듯이  “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p141 ”

 

1년 가까이에 걸친 재판과정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구원을 주제로 한 격한 논쟁과 갈등이 놓여있다. 예심판사는 처음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뫼르소가 쓰러진 아랍인의 시체에 다시 총 네 발을 쏜 이유를 끝내 대답하지 않자,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며,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흥분한다. 예심판사에게 두 번째의 네 발은 뫼르소의 구원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마지막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주저앉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벌써 책상 너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나의 눈앞에다 내밀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께 네 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너는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고통 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p79~80 ”

 

변호사와 검사가 이 사건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적절한 애도이다. 그것은 사회의 질서, 법체계, 가치를 뫼르소가 인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사회가 원하는 애도를 거부하고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한편 예심판사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 판단의 기준이다. 한 사람이라도, 길 잃은 어린 양이 한 마리라도 있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세계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의 삶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라고 격분한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교회가 이교도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것은 길 잃은 어린 양보다 더 나쁜 적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48” 라고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세계는 하나의 의문과 의심으로부터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는 브루노도 갈릴레이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항성체계는 수도 없이 많고, 지구는 태양을 오늘도 돌고 있다. 그러자 신은 죽고 이성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간들은 세계의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예심판사는 이 격렬한 감정의 분출 후에 더 이상 뫼르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열한 달에 걸친 예심을 끝마친다. 그는 아마도 뫼르소를 세계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부속사제는 뫼르소에게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유한다. 뫼르소는 거절한다. 지루한 설득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뫼르소가 폭발한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p133”  뫼르소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특권이 있다고 외친다. 모든 사람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특권은 죽음이다. 우리 모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분노인 동시에 기쁨이었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엄마가 왜 생의 마지막에 ‘약혼자’를 만들었는지,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을지 이해되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35~6 ”

 

뫼르소는 신의 구원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증오를 선택한다. 무관심한 세계에 마음을 열고, 행복을 느낀다. 고뇌와 함께 희망이 사라지자 행복을 찾은 것이다. 『이방인』은 『시지프의 신화』와 함께 부정 계열의 삼부작에 속하지만, ‘행복’ 이란 말로 끝이 난다. 뫼르소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희망을 버리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희망이란 구원에의 희망 혹은 세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투항이다. 부조리한 세계와의 힘겨운 긴장에 지쳐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까뮈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신에 달려 있으며 우리들은 신의 의지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시지프의 신화』p141”  고 했다. 자신의 관심은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아는 것” 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방인』은 그 가능성을 그려내고 있다. 독자로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신의 죽음은 서양 근대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도 불분명하고 세계도 분명하지 않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반항하는 인간” 을 주장하기 위해 까뮈가 철학뿐만 아니라 소설과 희곡의 형식을 택해야 했던 이유도 이 불분명함 때문이다.  “만약 세계가 명료한 것이라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시지프의 신화』p130 ” ,  “표현은 사고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시지프의 신화』p130”  고 했다. 그러니 『이방인』을 논리적으로 읽기 힘들다고 해서 서둘러 실망할 일은 아니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죽였는지 답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이방인』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뫼르소의 ‘태양’처럼 우리에게도 ‘뫼르소의 행복’ 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정서 판 『이방인』을 두고 알라딘 서점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논쟁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싶다. 논쟁이 한창 일 때는 『이방인』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이정서 판 역시 보지 못했던지라, 어느 편이 더 논리적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정서 측에서 “정당방위” 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끊어 버렸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음사 판으로 다시 『이방인』을 읽고 나니, 문득 그 심각해 보였던 논쟁이 우스꽝스러운 난리굿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랍인의 살해 원인이 정당방위라는 해석은 『이방인』을 그리고 까뮈의 부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아랍인의 살해는 권태 속에 살아가던 뫼르소가 어느 날 “왜?” 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살해는 우연적이고, 사건은 부조리하다. 그것이 명료했다면, 『이방인』이 어떻게 사르트르의 말처럼 “부조리에 관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정당방위라면, 『이방인』은 살인 사건에 관한 하나의 흥미로운 판례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세한 번역의 문제에 관해서는 불어 원서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무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트윗 친구의 번역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글이 관련되어 싸움질 중인 상황 혹은 글 내의 생각을 싸움질의 에너지가 담기게 옮겨야 한다는 것.” “옮기는 작업이 아니더라도 독해란 그런 것이고 말의 힘을 안다는 것은 말과 맥락의 투쟁을 느끼는 것과도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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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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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관한 역설力說이다. 로자 아줌마는 전직 창녀 출신의 유대인으로, 창녀들이 낳은 불법적인 아이들을 길러 주는 일을 한다.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로자 아줌마는 히틀러의 사진을 침대 밑에 몰래 넣어두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꺼내보며, 현재의 삶을 위로받는다. 모하메드는 세 살 때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져 10여년을 함께 산 아랍인 아이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로자 아줌마는 치매에 걸려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로자 아줌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식물인간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의사 카츠 선생이 17년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살았던 미국인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에게 식물인간이란 심지어 나치의 포로수용소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다. 연명을 위한 병원 치료는 나치의 학대고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병원이란 데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법이 그러니까. 나는 필요 이상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아무리 유태인이라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들은 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온갖 학대를 다 할 거다. 의사는 처방전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끝까지 괴롭히면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을 거야. 그것이 그들의 특권이니까.” 모하메드는 로자 아줌마에게 식물인간이 되게 하지는 않겠다고 맹세한다. 로자 아줌마의 상태가 절망적이 되자, 모하메드는 의사 카츠에게 안락사를 부탁하지만, 카츠 선생은 펄쩍 뛰며 거절한다. “그건요. 그런 권리가 있다면 로자 아줌마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신성한 자결권이 있다는 거죠. 아줌마가 자결하고 싶다면 그건 아줌마의 권리라고요. 그리고 아줌마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어야 해요.” 로자 아줌마는 온갖 고통 속에서 겨우 숨만 붙어 있다.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 ...” 그러나 카츠 선생이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자, 모하메드는 몰래 로자 아줌마를 비밀 은신처로 옮겨, 사랑하는 아줌마가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지켜 준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주제는 인종문제다. 유태인, 아랍인,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사는 파리의 사창가가 배경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러 인종들이 파리 빈민가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아마도 프랑스 식민통치와 이민정책 그리고 나치즘에 기인할 것이다. 프랑스에 잡혀온 노예의 후손들과 불법이주민들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과 하층 프랑스인들이 서구 문명의 꽃, 파리의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다. 서구 문명의 찬란함이란 식물인간이 된 이 ‘불쌍한 사람들 - 레미제라블’의 희생 위에 피어난 것이다.

 

안락사의 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고 생각한다. 몇몇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의 권리라 주장하고 있지만, 나는 철저히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운명의 잔인한 장난에 놀아난 오이디푸스가 파국의 벼랑 끝에서 그 어떤 신의 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두 눈을 찌른 것처럼, 마지막 순간을 선택할 권리는 인간에게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에는 오이디푸스와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치매에 정신을 빼앗겨 가고 있던 로자 아줌마는 문득문득 정신이 늙은 육체에 되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순간 마다 식물인간을 거부하고 인간으로 죽을 권리를 주장했다. 십자가에 매달려 의사들의 속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으로 죽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자 아줌마는 파리 사창가의 식물인간들, 그 다양한 유색인종들의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 엉덩이를 내주며 사는 것은 곧 십자가에 매달린 채 연명하는 것, 빛나는 파리의 어두운 죄를 대속하는 식물인간과 같은 것이기에. 하지만 에밀 아자르가 식물인간을 파리의 사창가에 비유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그리고 있는 사창가는 구질구질하지만, 너무도 따뜻하기에. 여하튼 내게는 하나의 유비처럼 읽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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