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름은 들어 보았다. 아니 어쩌면 짧은 글 한편 정도는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상 문학상> 류의 책 표지에서 몇 번 눈에 뜨였으니까. 내가 <세계 테마 기행>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 저 사람이 그 은희경이구나 했던 것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단 뜻이다. 그리고 실망했다. 쉰은 되었을 듯한데, 공주 같은 몸짓에 애기 같은 목소리의 나레이션, 소화가 힘겨웠다.

 

두 번째 인상은 어쩌면 더 나빴다. 어떤 카페의 과제물로, ‘은희경의 <생각의 일요일>을 읽고 논하시오’ 가 나왔다. 論할 것이 없었다. 그 책은 은희경 최초의 산문집이라는 광고문을 달고,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만, 산문집이 흔히 그렇듯 신변잡기일 뿐이었다. 게다가 첫 장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날씨를 살피고, 커피콩을 갈고 ...” 따위의 문장으로 시작했다. 시애틀, 커피콩, 독일, 맥주, 사인회, 원주와 박경리, ‘반짝이는 문장들을 탁구공처럼 주고받는’ 문인 친구들과의 새벽 트윗질, 그리움, 쓸쓸함, 사랑의 기억... 고급스러운 잡지를 보는 듯 했다. 나는 論하지 못하고, 논하지 못하는 이유만 논했다. 아니 화보 같은 삶을 질시하며, 유명한 문인에 대해 마땅히 취하길 기대하는 경의를 거부했다.

 

세 번째 인상이 좋을 수가 있을까. 어제 다음 주 독서회를 위해 <새의 선물>을 읽었다. 내 눈이 찾아내려 했던 것은 내가 가졌던 인상들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 증거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고, 그것들이 열두 살에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만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열두 살 진희를 은희경으로 읽고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게도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75)” 오만은 공주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천성이다. “단물만 빼먹고 종구를 차버릴 거라는 짐작으로만 보면 장군이 엄마와 나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한쪽은 악의에서 나온 험담이고 다른 한쪽은 인생에 대한 냉소로부터 비롯된 통찰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236)” 당돌함과 어이없는 자신감에 혀를 차면서도 나는 소리 없이 탄성을 질렀다. 내 느낌이 딱 맞았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야말로 근대적 계몽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모든 인간을 통찰하는 그녀의 눈빛은 말 그대로 light, 그 눈이 비추는, enlighten, 대상은 그 속을 투명이 드러내는 타자들이었다.

 

18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린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으로 표현되는 이성의 시대기도 하다. 계몽의 시대를 준비한 것은 과학혁명의 시대인 17세기의 데카르트이다. 그 유명한 사유와 연장의 이분법은 또한 악명으로도 이름 높다. res cogitans 와 res extensa. 데카르트는 자연은 물론 동물, 심지어는 주체의 신체까지도 연장, res extensa, 으로 대상화했다.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나 기계 단추를 누르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기계나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에게 능동적 주체란 오로지 res cogitans, 사유하는 존재(혹은 사유하는 것, 사유) 뿐이었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나와 다른 대상을 타자화 하여 착취하고 절멸시킨, 탐욕스럽고 잔인했던 서구 근대 역사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12”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 중간 무시로 강조되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이분법은 데카르트의 연장과 사유를 연상시킨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나’ 이다. 그녀의 ‘바라봄’은 자신뿐만 아니라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뚫는다.

 

“최선생님은 내 어깨를 한번 꼭 싸안는다. 술 냄새가 확 끼친다. 술 냄새 속에는 어른으로서 비겁했던 자괴감의 찌꺼기도 있다. 그러나 내일 아침술이 깨고 변소에 한번 다녀오면 찌꺼기는 다 청소된다. p219 ”

 

12살 그녀는 그보다 몇 배나 오래 산 선생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도 확정한다. 알량한 예술적 자부심마저 버리고 금력에 굴복해야 했고, 어린 제자의 성깔 혹은 기지로 일말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복잡다단함을 술 냄새 하나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최 선생님은 그 외의 어떤 인간도 될 수 없다. 되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중후반의 철학은, 특히 프랑스 철학은 타자의 문제에 봉착했다. 타자는 계몽의 불빛에도 여전히 불투명함으로 남았다.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는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라는 또 다른 주체를 문제 삼고 있다. 샤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야” 라고 탄식했다.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 이며,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 이다. 타자는 지옥이지만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나의 시선이 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는 말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속이 훤하게 보이는 사람, 무엇을 할지가 뻔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 할 수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p250”

 

그녀가 사랑을 냉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번의 배신으로 그녀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냉소와 배신과 적당한 거리두기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일까? 사랑은 동시에 불안이다. 모든 것을 알고 함께하고 싶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오해가 없었다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지고 있다고 내가 착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콩깍지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사랑을 냉소하는 그녀는 삶을 냉소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계몽인인 (이 책은 1995년 작이다) 그녀는 냉소주의자이다. 계몽은 양차대전을 통해 파산했다. 책으로 혹은 식민지로 근대를 배운 우리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배회한다. 냉소는 후근대인의 이데올로기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405

 

지난 주에는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 대해 토론했다. 삶의 끝에선 노인의 지혜는 열두 살 그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제목도 아마 농담일 것이다. 농담 같은 삶을 살아내는 그녀의 방식과 노인이 만든 등장인물들의 방식은 물론 다르다. 그녀의 열두 살을 지켜보며 나는 내내 ‘잔망스럽다’ 는 단어에 시달렸다. 노인의 꼭두각시들은 유쾌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삶은 무의미한 농담이다.

 

 

삶은 정말로 무의미한 농담일까?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크레인 꼭대기의 고공농성 노동자를 바라보며, 농담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을 그저 농담으로 냉소하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은 거리의 투사로 내몰리고, 열정에 불타는 고등학생은 강연장에 불붙은 도시락을 던지고, 십상시와 7인회가 국가를 뒤흔들고, 마카다미아넛이 비행기를 되돌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자살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농담일 뿐이니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까, 혀를 차고 잊어버릴까, 나의 소소하고 안락한 일상의 기쁨을 찾아서! 세계에 대한 냉소는 부조리한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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