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밴드에 올리는 후기를 오늘 살짝 공개합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에 대한 3~40대 일반 주부들의 생각, 이렇게 팽팽합니다^^

 

 

 

 

여름 내내 읽었던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드디어 토론탁상에 올랐습니다. 추석 준비를 이유로 OO님이 두 주간이나 발제를 미루기도 했던 책이지요. 그런데 추석은 표면상의 이유인듯하고 그 동안 발제준비에 몰두하셨던 듯합니다. 아주 훌륭한 발제로 저절로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등장인물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했구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비롯 몇 가지 논제를 던지셨습니다.

 

오늘 토론은 한마디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선악의 팽팽한 대립' 이라 할 수있는데요. <정글만리>에 긍정적 평가를 하신 분들은 착한 사람, 부정적 평가를 내린 인간들은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졸지에 나쁜뇬에 등극하신 분들, 독서회의 필요악이라, 자위를 하자구요 흙. 결과는 긍정평가 4명, 부정평가 4명, 굳이 중도를 표방하신 2명, 무승부 되겠습니다.  70만부(맞나요?) 가 팔린 베스트셀러에, 지금도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시대를 논할 수 없다는 둥의 광고가 나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저희 독서회의 평가는 이례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나쁜뇬들의 암약으로 ㅠ.ㅠ.

 

긍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로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이란 나라의 현실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아주셨습니다. 역사책이나 경제학책은 아무래도 읽기힘든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기초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게다가 중국에 대한 흥미가 생기니 관련 책을 더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구요. 말하자면 동기 유발자적 입문서라는 것이지요. 독자들 중에는 실제로 중국, 한번 해볼만한 시장이야, 라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부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도 다름 아닌 이 '쉬운 접근법' 에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정반대의 관점이 극명하게 충돌한 , 저희 독서회에서는 보기드문 상황인데요. 조정래가 보여준 중국의 실상이 극히 편협하고 표면적이어서 오히려 중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의 표현대로 100가지 얼굴 중에 한가지의 얼굴만 보여주므로써 한가지 얼굴을 중국 전체의 얼굴로 오인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문학 작품이라면 작가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작가의 답, 작가의 시선이 항상 옳은 것도, 항상 옳을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특히 조정래라는 '이름값' 자체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그 이름에 대한 독자들의 무한신뢰가 비판적 독해를 방해할 위험이 높기 때문입니다. ... 아무래도 부정판단에 대해 더 말이 길어지는군요...짐작하다시피 저도 나쁜뇬에 지명된 처지라 ㅠ.ㅠ.... 기록자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 댓글로 균형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여하튼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양편이 모두 공감한 것은 문학작품으로서의 <정글만리>는 조금(혹은 엄청) 격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물도 사건도 갈등도 없고 저자의 아바타들만 난립하는 인상입니다. 그래서 여러 회원님들도 소설 보다는 르포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셨구요. 반면 약간 모자란 문학성이 오히려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님의 부군은 평소 책을 머~얼리 하시는 분인데도, 이 책만은 휘리릭 단숨에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조정래 할아버지가 여성을 보는 조야하고 비하적인 시선에 대해서도 대부분 의견 일치를 보였습니다. 한중 젊은이 한쌍의 연애 묘사도 너무 6~70년대 적이고요. 신성일, 엄앵란에 간드러진 성우 목소리를 입혀 만든 연애영화를 보는 듯한 오글거림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12시 반이 넘을 때까지 선악의 극한 대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요. 역시 의견일치 보다는 굽힐줄 모르는 소신 주장이 활력있고 짜릿하고, 기타 등등 ... 좋았습니다. 양볼이 살짝 붉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부작용은 있지만, 아직 그 정도의 심박 상승은 버텨낼 수 있는 연배들이신지라 이런 종류의 토론은 적극 권장해도 될 것 같습니다. 참석 회원님들도 즐거워 하셨습니다.(아닌가요?)

 

그런데 왜 긍정평가자들이 좋은 사람이냐구요? ☆☆☆님이 말씀하시길, '우리 착한 사람들'은 어떤 책에서라도 좋은 내용을 찾아낼 수 있고, 배울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고 하시는 바람에, 졸지에 부정평가자들은 '너희 나쁜 인간들' 이 되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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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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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수없이 봤지만 한번도 뽑아든 적이 없는 책이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사실 저자가 셀린저라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호손이나 뭐 그런 정도의 유명작가인 줄 알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 셀린저라는 이름은 엄청 낯설었다;; 심지어는 몇 주전에 <빨간책방>을 들었는데도, 처음 보는 이름 같았다. 대개 설겆이나 청소를 하면서 듣기 때문에 흘려버리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분명히 들었을텐데도 책 표지의 셀린저라는 이름은 아주 이상해 보였다.

 

내용도 그랬다. 오랫동안 제목이 준 인상은 <붉은 수수밭>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목화농장 같은 것이었다. 광활한 호밀밭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 뉴욕 중산층 사춘기 소년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탈이라니, 사실 요즘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이걸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도 1950년대의 미국에서는 굉장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제임스 딘의 반항적 이미지에 맞먹는 홀든 콜필드의 강렬함. <빨간책방>의 두 남자가 뭐라고 신나게 떠든 얘기 속에는 존 레논 암살범이 이 책을 갖고 있었다는 둥의 비화들이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선구자라나.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현대의 산업사회를 부정하고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며 문학의 아카데미즘을 반대한, 방랑자적인 문학가 및 예술가 세대를 이르는 말

 

문학 뿐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도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물질 환경 속에서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반발해 저항적인 문화와 기행을 추구했던 일단의 젊은 세대 " 를 가르킨다.

 

그러니 책 내용은 '다음 어학사전'의 정의 속에 그대로 있는 셈이다. 풍요로운 물질환경, 홀든 콜필드의 아버지는 뉴욕에 사는 변호사다. 보수적인 기성 질서에 대한 반발. 가령 이런 것이다.  콜필드와 늙은 스펜서 선생이 나누는 대화다.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주 전에 교장 선생님과 부모님이 상담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아주 훌륭하신 분들 같더구나」 

「예. 좋으신 분들입니다.」

 훌륭하다니. 난 정말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예의바른 자세와 공손한 대답 뒤에서 콜필드는 분노와 구역을 쏟아낸다. 그런데 나는 콜필드 보다 스펜서 선생이 마음 아프다. 내가 쏟아낸 수많은 말들도 누군가에게 조롱 속에 짓밟히지 않았을까 슬며시 겁도 난다. 이제 풋내기 콜필드에게 감정이입하기에는 나도 늙었다.

 

콜필드의 기행은 줄담배, 친구에게 흠씻 두들겨 맞기, 클럽에서 성인 여성들과 춤추기, 호텔에서 매춘부와의 소동, 떡이 되게 술마시기 따위 들이다. 그런데 콜필드는 그렇게 막 나가는, 앞뒤가리지 않는 반항아처럼 보이지 않는다. 콜필드에게는 항상 브레이크가 있다. 매춘부를 그냥 돌려보내고, 좋아하는 선생님을 찾아가고, 결국 가출도 하지 못한다. 콜필드의 3일은 일종의 럼스프린가이다.

 

럼스프린가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닌다' 는 뜻의 독일어에서 온 말이다. 미국의 아만파 공동체는 17세가 되면 아이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 '뛰어 돌아다니게' 한다. 공동체 안은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는데,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어떤 일을 해도 아니 어떤 일을하도록 부추겨진다. 차와 팝음악, 텔레비젼은 기본이고 음주와 마약 난교를 경험한다. 그리고 몇년 후 아이들은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다. 아만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미국 시민이 될 것인가? 결과는 90%의 아이들이 공동체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왜?  여기에는 속임수가 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진정한 선택의 기회가 아니다. 아이들은 17세가 될때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런데  자연스런 삶속에서의 한계나 규제 없이 갑작스레 주어진 음주와 마약과 섹스는 그들의 환상을 박살내며 참을 수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아이들은 평화와 안정을 찾아 아만파 공동체의 규율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17세가 될때까지 일반적인 미국 가정에서 살다가 강제로 아만파 공동체에서 몇 년을 살게 된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몇년 후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럼스프린가는 일종의 '불맛'을 체험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아무것이나 덥석덥석 집으려는 아이에게 뜨거운 남비뚜껑을 만지게 해서 아이가 스스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훈육같은 것 말이다. 

 

 콜필드의 3일은 막막하고 외롭고 불안하다. 콜필드는 한번도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주위를 뛰어 돌아다니다,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온다. 이 책이 미국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린 책 (빨간책방에서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도 엄청 많이 팔렸고 지금도 많이 팔린단다) 인 이유는 아마도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효과 때문이지 않을까?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을 거부하지만,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에 성공한다. 영국 엄마들이 딸들에게 이 책을 첫번째로 권유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다. 사랑은 악세러리고 결혼이 실체이다. 사랑이라는 장식물로 결혼이라는 영악한 실체를 가린 이 성공담이야말로 보기 좋아 맛도 더 좋은 떡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도 파멸하지 않고 안전한 세계로 돌아온다. 저자 셀린저는 막대한 인세로 은둔형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적어도 홀든 콜필드는 3일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 같다.  한때는 좀 놀아봤다는 그 추억이 그를 삶에 한층 더 단단히 고정시켜 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콜필드는 파수꾼, catcher가 되고 싶다고 한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파수꾼. 그런데 벼랑 위는 여전히  '기존의 질서와 도덕' 의 세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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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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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케이블 TV를 달았을 때, 플레이보이 같은 채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심코 돌리다 야한 장면에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리모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면에 붙들리곤 했다. 그런데 매번 딱 2~3분 이었다. 스토리는 없고 행위만 반복되는 장면은 감각적이지도 않고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메스꺼움, 인간의 살덩어리에 대한 오심惡心.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고문이 될 것 같은 그런 벌건 화면들. 그런데 고맙게도 그런 채널들은 곧 별도의 요금을 받는 유료채널이 되었고, 무심코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조금 아쉬웠나? ^^;;

 

예롄커라는 중국작가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가 딱 그랬다. '중국 당대 최고의 소설가' 라는데, 설마 뭔가 있겠지라는 기대는 그냥 기대였다. 포르노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이런 책을 왜 번역했을까 싶어 역자후기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중국 소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란한 수사와 시적인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몹시 긴장하면서 퇴고를 거듭해야 했다." 현란은 고사하고 수사자체가 없고, 시적인 이미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구호 외에는 시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혹시 중국어의 번역 때문이었을까? 현대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한문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문 번역은 너무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이나 영어, 일어처럼 문법구조가 꽉 짜여져 있지도 않고, 더우기 조사가 없어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번역의 과정에서 '수사'와 '시'가  몽땅 날아간 걸까? 기억나는 표현이라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밖에 없는데 말이다. 설마 실오라기가 현란한 수사는 아니겠지?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되었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했다는 이유' 다. 어쩌면 중국 인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0년대 박정희를 대놓고 깐 소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면 우리국민들에게도 그런 책은 화제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을 모욕하는 방식이다. 밤낮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주인공은 모두 마오주석의 책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투철한 친체제주의자들이다. 그럼에도 서로의 애정이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주석의 얼굴이나 어록이 들어간 갖가지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파손한다. 그리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혁명 강령을 성적 자극의 페티시로 이용한다. 강령이 적힌 팻말은 침실로 올라오라는 신호가 된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모욕되는 방식은 딱 이것뿐이다.  마오쩌뚱의 사상과 위상이 그 내용에 있어서 왜 모욕되어야 하는지, 인민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에 관해서는 진짜 실오라기 하나의 언급도 없다. 물론 중국인민들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사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오쩌뚱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중국인민을 해방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의 마오쩌뚱에 대한 애증은 소설 속에 전혀 형상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 두 주인공이 마오쩌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마오쩌뚱의 중국혁명이 이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환시켰는지 같은 배경도 전혀 없다. 그냥 모든 것이 마오쩌뚱마저도 포르노같은 애정 행각의 소도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상징적으로 보아, 내용없는 형식상의 비판이 최고의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성스러운 강령을 성적 환타지의 패티시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시적 은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보아주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이 작품같지 않은 작품,『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역설적이게도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정의는 평론가 김현의 것이다. 문학이란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젝의 책 중 『The Ticklish Subject』, 『까다로운 주체』가 있다. 사실 ticklish에는 간지럼을 타는, 불안정한이란 뜻도 있다. 동사는 tickle로 간지러움을 태우다란 뜻의 타동사이다. 간지러움을 태우는 주어는 주체가 아니라 object, 대상이다.  강아지풀 같은 대상이 주체의 콧구멍을 살살 간질러서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대상이 주체를 슬슬 긁어 자극을 주면, 주체는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김현의 문학은 작품이라는 대상이 독자라는 주체를 건질거리게 긁고 자극하여 주체를 불편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말한다. 독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책을 덮는 순간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주위를 살펴보고, 이 세계를 비딱하게 보게 될 때, 그 책은 좋은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전에 희극보다 비극이 압도적인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불편한 책이다. 그런데 불편함의 종류가 다르다. 이 대상은 내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내 허벅지를 살짝 건드리는 것 같다가 곧바로 나의 구토중추를 자극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는 아주 멋진 말이다. 모든 인민이 혹은 모든 당원들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강령대로 산다면 중국은 이 땅의 유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중국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일당독재의 국가이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에서 눈부신 꽃을 피운 이 아니러니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여하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마오주석의 성스러운 강령이 혁명을 통해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  실체는 변질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혁명강령이 중국 인민의 삶을 어떻게 왜곡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형상화된 인물들 속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기대는 기대로 끝났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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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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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 카버 작, 김연수 번역, 문학동네 출판은 맞는데 '리뷰상품'의 『대성당』은 2014년 출간본만 선택이 된다. 빌려온 『대성당』은 2007년 초판본이다. 미국에서는 1983년에 출간되었고, 그때 레이먼 카버 나이 45세, 5년 뒤 암으로 죽었다. 얼마전 알라딘 메인화면에서 신작으로 본 기억이 어슴푸레한데(아닌가? 제목이 인상에 남았는데..), 여하튼 30여 년 전의 작품이다. 30여년 전 미국 사회의 단면,단면들이 무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주로 하층민들의 이혼, 실업, 알콜 중독 등을 소재로 하는데, 엄청난 절망도 낙천적 희망도 없고 ,그저 삶의 물결을 따라 어둠 속으로 혹은 희미한 빛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밝지 않은 이 단편집이 그리 어둡지도 않은 것은 때로, 남루하지만 가만가만 귀기울여주는 이웃들의 뭉근한 온기 때문이다.

 

레이먼 카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을 읽으며, 4월에 이 단편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세월호 사건 직후,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4월 마지막 주에 이 단편을 낭독하는 것으로 본방을 대체했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와 빵집 주인의 이야기다. 이들 부부는 『대성당』의 인물들 중 가장 부유한, 중산층이다. 가장 우연적이고 가장 슬픈 사건이지만, 또한 가장 따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고르고 고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동진이 이 단편을 낭독했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괴한 현실이 세월호를 둘러싸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왜 위로도 공감도 하지 못하고 잊으라고만 할까. 그들의 애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이 비현실적인 현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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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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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다. 책을 읽고 이런 우울함을 느낀 건 또 처음이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평판때문이다.

 

영화 <명량>을 둘러싼 설전을 힐끗힐끗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뭐라고 껴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대중적 취향이라 천만 넘는 영화는 나름대로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거리가 되었든, 웃기기 때문이든 혹은 싸구려 신파라 할지라도,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영화에는 분명히 우리를 움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을 찾는 작업이 평론가의 일일텐데, 간혹 어떤 비평들은 대중의 싸구려 취향을 비웃거나 훈계함으로써 SNS의 시비를 불러일으킨다. 명량에 대한 집단 열광은 병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관객의 발걸음은 치료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 비록 관객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지독한 증상이다. 증상을 두고 그걸로 치료가 되겠냐고 묻는 것은 분석가의 태도가 아니다. 증상에서 적절한 병명을 찾아내는 것, 그가 먼저 해야할 일은 그것일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 나는 평자도 분석가도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두 개의 대하소설이 있다. 토지와 태백산맥이다. 그때 토지는 완간되지도 않았고, 태백산맥도 막 출판이 되기 시작할 때였다. 서울에 갓 올라와 사투리는 부끄럽고, 서울말은 낯간지럽던 시절이었는데, 토지와 태백산맥은 사투리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내가 쓰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정감 넘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영 낯설던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찰방지고 멋드러진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 토지는 지금도 '나의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로 책꽂이에 남아있지만, 태백산맥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내가 좋아한 태백산맥은 딱 6권까지이다. 한권 한권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7권부터의 태백산맥은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똑 같은 작가의 손에서 나온 책일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7권부터는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구호와 선전만 남은 느낌이었다. 내 사춘기 시절을 달구었던 김영숙의 순정만화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뒤늦게 알았지만 김영숙의 만화들은 일본 만화를 베낀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정성들여 베껴내어 우리를 꼼짝없이 사로잡았지만,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림이 엉망이 되어갔다. 첫 권과 마지막 권을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태백산맥의,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에 대한 묘사가 딱 그랬다. 살아있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형들만이 남았다. 그래도 아리랑이 나왔을 때,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어권을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이후로는 조정래의 책은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정래의 명성은 하늘 높이높이 올라, 한국 문학계의 큰별이 되었다. 내 하늘에는 뜨지 않았지만.

 

독서회를 하며『정글만리』에 관한 말을 간간이 들었다. TV 광고에서도 들었다. 오빠집에도 있었다. 군에 있는 중국어 전공의 조카에게 1권을 보내고 2,3권이 남아 있었다. 오빠의 일을 이어받아 무역업을 하기를 바라는 새언니가 발빠르게 사보냈다. 담배보다 끊긴 힘든 저 어찌할 수 없는 사교육열이라니, 나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렇게 소문만 듣던 『정글만리』를 이번 주에 읽었다. 9월 독서회 책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읽었다니까 우리도 서둘러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자본주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진 결과이다. 사실 내가 읽자고 추천했다. 중국식 자본주의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망했다. 이런 책을 3권씩이나 읽어야 하는 우리 회원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솔직히 문학작품으로 치기에는 민망하다. 캐릭터도 문장도 조악하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너무 천박해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중국은 돈과 꽌시와 얼라이 외에는 없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 이라는 지젝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그대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하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들과 그것을 중국 인민들이 어떻게 내면화하면서 어떤 충돌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인물들 속에 훌륭히 형상화되면 말할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실의 차원에서 깊이있게 탐구되고, 사유되었기를 바랬다. 현실적으로도, 돈밖에 모르는 중국놈들이라는 관념이 중국시장 개척에 나서는 한국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퇴직하는 전부장을 통해 작가가 마지막에 쏟아내는 사변들이 뒤늦게 무언가를 채우려는 듯해 보이지만, 소설은 이미 끝이 났고, 이 소설에 대해 남은 인상은 그저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버린 중국과 그럼에도 2~30년은 뜯어 먹을 것이  어마어마한 시장이라는 것뿐이다.  

 

한 소설이, 명성 높은 작가의 한 소설이 내 기대를 배반했다고, 우울할 이유는 없다.  실망은 우울과 같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 반응이다. 리뷰를 쓰려고 '리뷰상품' 검색을 했더니, '알라딘 2013년 올해의 책' 파란 딱지가 눈에 뜨인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낸 것일까? 혼자서만 답을 찾지 못한 것인가? 이것은 나의 증상인가?,  대중의 증상인가?   나는 늘 대중적 감성의 편에 있었는데, 왜 이 책에 유독 별 한개를 주면서, 이렇게 우울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평자거나 분석가라면..., 그러나 나는 그냥 독자이고, 다만 우울해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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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글만리는 선물은 했지만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백산맥을 4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10권을 한결같이 쓴다는건 굉장히 힘든가 봅니다.
이곳엔 비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말리 2014-08-21 14:07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곳도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더위도 없이 여름이 다 가고 있네요. 10권을 힘빠지지 않고 쓰기도 어렵겠지만 읽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글만리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각선으로 읽었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ㅎ

icaru 2014-08-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대출해서 1권까지 읽었구요. 김에 2권 읽겠다고 예약해 놓은 상태인데, 문학적인 것은 고사하더라도 정보나 얻을 수 있겠지 해서 봤는데, 읽긴 읽되 정체모를 거부감을 정말 거부할 수 없더라고요, 참 아쉽더라고요...

말리 2014-08-21 16:34   좋아요 0 | URL
일본 상사원 두명을 <나홀로 집에> 어벙벙한 도둑들처럼 그려놓고 쾌감을 느끼는듯한 부분도 굉장했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사람을 중시하는 사업을 하는지를 익히 들어온 터라 더 놀랐지요.

책읽는여름 2014-08-2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대하소설은 토지와 태백산맥만 읽었습니다. 이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둘 다 다 가지고 있지만...그 뒤로 나온 다른 대하소설은 읽지 않았지요... 저는 토지도 중간부터 좀 그랬거든요 ㅜㅜ

말리 2014-08-22 10:32   좋아요 0 | URL
네^^ 토지도 3부부터는 굉장히 사변적이죠. 박경리의 역사관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지루하긴 했어요 저도.

책읽는여름 2014-08-22 15:14   좋아요 0 | URL
ㅎㅎ 3부라고 찍어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그뒤로 주구장창 이어지는 토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봐 참았거든요. 말리님이 콕 집어 말씀하시다니 통했네요! ㅋㅋㅋㅋ찌찌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