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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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를 하고 나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도는 책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무심히 넘겼던 어떤 장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을 더듬어 반납해버린 책의 앞뒤를 맞춰보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어떤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아, 그것이었을까.

 

어제는 『댈러웨이 부인』의 날이었다.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셉티머스, 봉헌으로서의 파티에 대한 이야기 끝에 미스 킬먼이 나왔다. 누구에게나 비호감인, 증오와 질투로 배배 꼬인 그녀는 단지 댈러웨이 부인을 밝히는 어두운 단역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왜 댈러웨이 부인은 전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미스 킬먼을 떠올리며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라고 했을까.

 

사실 지난 번 리뷰를 썼을 때, 나는 미스 킬먼에 마음이 갔다. 나의 성장 환경이 그래서인지, 유독 측은했고, 댈러웨이 부인보다 더 공감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가난 때문에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심성의 왜곡 때문에. 감추려 해도 어느새, 어두운 마음과 질투, 억눌린 분노, 때로는 격렬한 증오가 비집고 나온다. 세상의 빛 속에 드러난 그것들은 너무 혐오스러워 또 한 번 그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미스 킬먼의 이 어둠이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의 무시무시함으로 보일 뿐이다. 미스 킬먼과 댈러웨이 부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타자이다.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에 대한 댈러웨이 부인의 섬세한 심미안, 하녀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 따위가 미스 킬먼에게는 단지 허영과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당신이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그의 타자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모, 전두환의 의리를 안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적이란, 프로이트의 표현을 적용한다면 unheimlich 하다. unheimlich는 heimlich의 반대말이 아니라, (un)heimlich다. heim은 영어의 home이다. 익숙하면서도 두렵고 낯선 적, 그것은 또한 이웃이다. 한나 아렌트가 보았던 아이히만이 그랬다.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가 너무도 평범하고 성실한 얼굴을 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아렌트는 그것에 ‘악의 평범성’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평범한 악의 얼굴이야말로 unheimlich하다.

 

「오래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 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트리는 자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p98》 」

 

 

댈러웨이 부인은 성공적인 파티의 마지막에 느닷없이 미스 킬먼을 떠올린다. 기억을 맞추어 보면, 아마도 셉티머스라는 청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도서관에 잠깐 들러 찾아보니 소식을 듣기 직전이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조금 생뚱맞았다. 잠깐 나왔다 사라진 미스 킬먼을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의 절정에서 떠올린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뒤 설명도 없고,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도 없이, 갑작스레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의 존재를 긍정한다. 어떻게 미스 킬먼은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 위로 튀어 올랐을까?

 

겉으로 드러난 풍요로움과 평화로움의 이면에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의 세속적인 면을 부추겨 한갓 안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완벽한 신사들>” 중의 한 사람인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영혼이 질식된” 댈러웨이 부인은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의 반쪽에는 영혼의 질식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비정상적인’ 셉티머스가 있다. (물론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버지니아 울프 자신도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하나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 자체로 unheimlich 하다. 집처럼 편안하고 친숙한 댈러웨이 부인은 동시에 낯설고 두려운 셉티머스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심연에는 적이자 이웃인 셉티머스가 있다. 그런데 셉티머스가 자살한다. 이제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부터 벗어난 댈러웨이 부인은 완벽하게 heimlich 해졌을까? 비정상을 떨쳐내고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그런데 영혼의 질식을 거부하는 것이 비정상이고, 영혼이 질식된 채 사는 것이 정상인가? ‘영혼을 질식’ 시키지 않고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것인가?

 

셉티머스가 창가에서 떨어질 즈음,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떠올린다. 무시무시한고 사악한 적, 미스 킬먼을, 그러나 그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미스 킬먼을.

 

「정말이지 수상이 와주다니 친절하기도 하지.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저기 샐리, 저기 피터가 있고 리처드는 아주 흡족한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조금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과 함께 방을 지나면서, 그녀는 순간의 도취를, 심장의 신경들이 부풀어 올라 파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그래,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느낌을 사랑했고 그 온몸이 저리는 짜릿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외양과 승리는(가령 피터는 그녀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공허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지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전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수상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토시를 낀 어린 소녀를 그린 조슈아 경의 그림이 든 금빛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불현듯 킬먼이 생각났다. 그녀의 적인 킬먼이.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 얼마나 그녀를 혐오하는지 - 과격하고, 위선적이고, 사악한 여자, 무서운 힘으로 엘리자베스를 유혹한 여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더럽히는 여자(리처드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녀를 혐오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p227」

 

unheimlich한 셉티머스가 죽는다는 것은 또한 댈러웨이 부인의 영혼이 일상의 공허에 투항하여 완전히 질식한다는 뜻은 아닐까? 셉티머스가 죽어갈 즈음, 그를 대신할 또 하나의 unheimlich인 미스 킬먼이 떠올랐던 것은, 그러므로 너무나 당연한 무의식의 작용이 아닐까? 왜냐하면 댈러웨이 부인은 영혼의 질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안락함을 위해 그녀 스스로 질식시켰던 영혼이지만, 그것 없이 삶은 외양과 공허일 뿐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리처드 댈러웨이도 피터 월시도 수상도 아닌 미스 킬먼이다.

 

미스 킬먼은 댈러웨이 부인을 불안하게 하고, 안온한 생활 방식을 깨트리는 적이다. 그러나 그 불안함과 두려움이야말로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충격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셉티머스의 죽음을 기뻐하며, 소소한 일상을 그토록 소중히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녀 곁에 미스 킬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댈러웨이 부인은 미스 킬먼을 혐오하면서도 사랑해야 했고, 그 무엇보다 필요로 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필요한 것은 적이지 친구가 아니었다.” 투명하고 길들여진 이웃이 아니라, 낯설고 섬뜩한 이웃 속에 우리 삶은 생명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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