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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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푸코 - 데리다 논쟁’ 이란 것이 있단다. 코기토 - 종교 - 광기가 핵심 쟁점인데, 둘 다 코기토와 광기의 연관성을 전제한다. 푸코는 코기토가 광기의 배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데리다는 코기토 자체가 광기를 통해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데리다 편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세상 전부가 환각이 아닐까 하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의심’ 보다 더 한 광기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코기토는 이런 보편적 의심으로부터 출현한다. 비록 이 모든 것이 환각일지라도 나는 내가 사유한다는 것 자체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이 논쟁의 진짜 핵심은 철학의 외부성이냐, 외-밀성이냐에 있다는데, 복잡하니 통과;;)

 

  광기는 칸트의 ‘난폭함’, 헤겔의 ‘세계의 밤’, 셸링의 ‘수축’, 라캉의 ‘죽음충동’과 상동적이다. 칸트는 훈육과 교육이 인간 안의 동물성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동물적인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칸트가 지적한대로 동물들은 제대로 교육될 수 없다. 본능에 의해 그들의 행동이 이미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누리도록 교육을 받으려면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즉 ‘예지체적이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의미에서 이미 자유로워야 함을 의미한다. 이 무시무시한 자유를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용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죽음충동’ 이다. 인간의 탄생에 대한 철학적 네러티브들이 항상 인간(이 될 것)이 더 이상 단순한 동물이 아니지만 또한 아직 상징적 법에 묶여 있는 ‘언어의 존재’도 아닌 인간의 (전)사의 한순간을 전제하도록 강요받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아직 문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도착적이고’, ‘탈자연화되었으며’, ‘궤도에서 이탈한’ 본성이라는 계기를 말이다. 칸트는 인류학적 글들에서 인간의 본성에 내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섬뜩한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동물들에게는 규율을 통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강히 자기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려는 거친, 거리낌 없는 성향이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신을 규율할 주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규율은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 이 ‘난폭함’을 겨냥한다. p608~9」

 

  동물은 자신에게 유해한 행동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물리적인 위해가 닥치는데도 미친 듯이 고집을 꺾지 않을 때가 있다. 죽음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는 이 ‘난폭함’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속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 외적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칸트적인 자율성은 이 ‘난폭함’을 외적 주인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가 떠맡는 것에 있다. 아이들이 짜증을 낼 때 그것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해 보이더라도 진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지에 대한 ‘한계’를 정해달라는 것이다. 이 한계가 분명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부모만큼이나 아이들을 혼란과 분노에 빠뜨리는 것은 없다. 한계 혹은 기준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체의 칸트적 자율성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이 때문이다. -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를 위해 그러한 일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자연적 권위’의 어떠한 외적 대리인도 없음을, 나 자신이 나의 자연적 ‘난폭함’에 대해 한계를 설정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진정 계몽된 ‘성숙한’ 인간 존재는 더 이상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체, 기꺼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무거운 짐을 전적으로 떠안는 주체이다. p611」

 

  그렇다면 습관은 자유의 대립물이지 않을까? 습관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채 어떤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겔은 습관이 없이는 자유도 없음을 강조한다. 습관이 자유의 배경과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예로 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온 국민이 목을 매는 영어 공부의 지름길은 사실 영어를 습관화하는 것이다.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려면, 영어의 문법 따위는 잊어야 한다. 문법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야만, 영어로 말하기는 물론, 사고하고 공부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로 다른 과목을 수업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영어에 신경 쓰다 보니 정작 그 과목 자체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어는 향상될지 모르나 영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배우려는 해당 학문 자체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단 칸 방에 기러기 아빠로 살아도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이유가 사실 영어를 습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는 것은 물론 우리는 이미 충분히 습관화된 훌륭한 사고의 도구, 우리의 언어,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미국으로 필리핀으로 떠나보내고 있다. 여하튼..

 

  「언어를 사용할 때 자유를 행사하려면 습관에 완전히 익숙해야 하며, 그것 속에서(그것에 대해)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써먹는 법을, 그것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습관으로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오직 기계화된 습관들 속에서 배운 것을 외부화할 때만이 주체는 “보다 진전된 활동과 일에 대해서 열릴 수 있다.” 인간 주체가 창조적 사유와 노동이라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언어뿐만 아니라 일군의 훨씬 더 복잡한 정신적·신체적 활동들이 습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p615」

 

  약간 엇길로 새자면, 늙는 다는 것은 습관을 잊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건망증은 습관적으로 했던 그 많은 일들을 하나씩 잊는 것이다. 라면을  끓이고 나면 습관적으로 가스를 끄고, 세수를 하고나면 습관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용변을 보고나면 습관적으로 물을 내리고, 현관문을 닫고 나면 습관적으로 열쇠를 돌리던, 그 일들을 하나씩 빠뜨리며 우리는 늙어간다. 늙으면 습관으로 산다고도 하지만, 늙으면 습관을 잊어버리고, 그 잊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

 

  “습관은 광기의 불균형을 안정화시키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인사는 습관이다. “안녕? 잘 있었니?” 할 때, 그 누구도 사실 그 날 그 사람이 안녕한지, 아무 일 없이 잘 살았는지가 궁금해서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인사를 기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협약이다. 습관적인 인사는 여전히 좋은 관계임을 확인해 주는 의례이다. 그런데 광인은 이 ‘진지한 거짓말’ 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체이다. 친구가 “잘 있었니?” 라고 인사할 때 광인은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정말 내가 안녕한지 알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런 체하는 거야?” 라고 분노를 폭발한다. 아니면 얼마나 안녕한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거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습관에는 사실 아무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헤겔의 급진적인 결론은 이렇다. 즉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기호, 즉 개인의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습관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이상한 기호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기호는 라캉이 ‘시니피앙’이라고 부른 것으로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주체 자체의 공백으로, 따라서 궁극적 참조항의 부재는 이 부재 자체가 궁극적 참조항이며, 이 부재가 주체 자체임을 의미한다. p634」

 

  습관은 우연적인 어떤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처럼, 어떤 습관의 우세는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제사 때 절을 두 번하는 습관이나 오른 손으로 밥을 먹는 습관 따위가 투쟁의 산물이라니 좀 우습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오른 손이 반드시 선택되었어야 할 필연적 근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른 손은 우연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되었을 뿐이다.

 

  「광기에 대한 가장 간결한 규정은 보편성과 그것의 우연성들 사이의 직접적 조화, 이 양자를 분리시키는 간극의 철회가 될 것이다. - 광인에게서 객관적 현실 내부에서 그의 불가능한 대리인인 대상은 잠재적 성격을 잃고, 그러한 현실의 완전히 필수적인 일부가 된다. 광기와 반대로 습관은 가상적 성격 덕분에 직접적 동일시라는 이러한 덫을 피한다. 주체가 어떤 습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긍정적 특징들과의 직접적 동일시가 아니라 성향, 가상성과의 동일시이다. 습관은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그것은 ‘본질’로, 보편적 특수성으로 격상된 우연(성)으로, 그러한 보편성의 텅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다. p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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