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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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헤겔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젝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그런데 지젝은 왜 이 중요한 장을 굳이 ‘간주곡’이란 형식으로 끼워 넣었을까? <간주곡1>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런 의문은 남아있다. 왜?

 

  <간주곡1>은 쉬어가는 장이 아니다. 처음부터 헤겔의 인륜성과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마르크스의 좌우명이 무슨 말인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헤겔적 ‘화해’가 주체/실체 개념과 어떻게 관련지어 해석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열심히 줄을 치며 정리할 것이 너무 많아 걱정하던 참에, 결정적인 번역 오류를 하나 발견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라 생각했다. 몇몇 오탈자가 보이긴 했지만, 문맥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너무 어려워 이해를 못하는 내용은 번역이 어떻게 되었건 알 수 없으니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도 좋은 편이고, 전체적인 맥락을 거스르는 오역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딱 걸린 것이다. 마침 그 내용이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나왔던 부분이라 대번에 눈에 뜨이기도 했지만, 번역된 내용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아 논리적 오류를 스스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때 마침 이 장이 <간주곡> 인 걸 핑계 삼아, 전반적 정리 보다는 이 번역 오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직 영문판을 보지 못해 대조하지는 못했지만, 『시차적 관점』의 번역판과 영문판을 비교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449쪽의 마지막 문단, “화폐로부터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묘사 -그것은 분명히 헤겔과 기독교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부터 456쪽 마지막 문단에서 시작해 457쪽에서 끝나는 “그렇다면 자본이 진정한 주체 또는 실체인가? ~” 까지는 『시차적 관점』의 121쪽 “무가 자랑하는 이 유일한 대상” 이라는 절의 전반부(p121~p126)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말하자면 지젝이 자기복제를 한 대목이다. 자기복제는 지젝의 주특기 중 하나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데, 여기서 지젝은 조금 발전된(?) 형태의 복제를 했다. 헤겔과의 관련성을 조금 더 상세하게 보태놓고 있다. (그런 것 같다.;; 내용이 복잡해서 ㅠ)

 

  여하튼 문제가 되는 대목은 여기다.

 

  「 앞의 인용문의 맨 처음 세 단어, 즉 ‘그러나 사실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물론 그것들은 이 사실이 어떤 거짓 가상 또는 경험을 배경으로 평가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인간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자본은 단지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충족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일상적 추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은 자신을 낳지 않으며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뜯어낸다. 따라서 (자본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착취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필연적인 세 번째 수준이 추가되어야 한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다시한번 - 라캉을 인용하자면- 진리는 픽션의 구조를 갖고 있다. 자본의 진리를 정식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은 자신을 ‘무염 상태로’ 낳는 자기운동이라는 이러한 픽션을 참조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뿐이다. p456~7」

 

  ‘앞의 인용문’ 이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인용한 대목이다.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설명으로, 흔히 대중 강사들이 C-M-C니 M-C-M이니 적어 놓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하튼 여기서 지젝은 ‘in truth, however' 라는 세 단어에 주목한다. 이 책은 truth를 사실로, 『시차적 관점』은 진실로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이 단어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정확한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in truth, however' 는 무언가를 부정한다. 사실은 말야, 진실은 말야로 시작할 때 우리 역시 뭔가 그게 아닌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truth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 즉 C-M-C 시대의 원칙이다.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 위해 화폐는 단지 편리한 수단일 뿐이던 시절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생각은 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상계적이다. 어쨌든 욕구충족이라는 상상은 ‘truth’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truth' 가 아닌 것이 있다. 그 보다 오히려 역으로 말해야 할텐데, 자본주의의 현실 즉 'reality'는 ‘truth' 가 아니다. 상상도 ‘truth' 가 아니고, 현실도 ‘truth' 가 아니다. 그럼 이 'reality'는 무엇인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자본이 자본을,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들어 낸 잉여가치가 돈을 불리는 것이다. 최근 학생으로부터 국정원에 고발당한 강사 임승수는 몇 해 전 시립도서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이 'reality'에 대해 아주 생생한 사례를 들어 준 적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가진 돈을 몽땅 꺼내놓고 한 달간 우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면, 과연 돈이 저절로 증가해 있을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reality'도 ‘truth' 는 아니라고 한다. 다시 그렇다면 ‘truth' 는 무엇일까? 지젝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 사이에 세 번째 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주관적 경험이란 자본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라는 상상이다. 객관적 현실은 당연히 착취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제 3항은 객관적 기만, ‘objective deception’ 이다. 기만이 객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런데 여기서 번역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대목에, 게다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에서 저자는 전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을 해버렸다. 사실 지젝의 뜻과는 완전히 상반된 번역이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여기에는 물론 전제가 있다.  인용한 대목 전체는 이 책과 『시차적 관점』에 동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전치사 하나 바꾸지 않고 지젝이 그냥 복사한 것 같다. 그런데 만에 하나 지젝이 마음을 바꿔먹고 저 부분만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면,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지젝의 문제가 되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문맥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두 책에 나오는 내용이 완전 동일하다고 전제하기로 한다. 이제 『시차적 관점』의 번역을 보기로 하자.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현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인, “객관적 기만”과 (자본의 신비한 자기 생성적 순환 운동에 내재하는)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의식적 환상’과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 생성적 순환운동’ 의 관계이다. 『헤겔 레스토랑』 에서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주어로서 자본의 순환 운동을 부인한다. 반면에 『시차적 관점』에서는 무의식적 환상의 내용이 바로 자본의 순환 운동이다.  부인되는 것은  바로 이 무의식적 환상이다.

 

  『시차적 관점』 번역의 정확성을 검토하기 위해 영어 원문을 살펴 보자.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unconscious" fantasy 다음에 나오는 괄호 속의 ‘of’ 는 여기서 동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자본의 신비한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이라는)’ 으로.  물론 수동태 ‘disavowed’ 는 부인된 것이지,  부인하는 능동적 입장이 아니다. 무의식적 환상은 부인된 것이지, 무의식적 환상이 부인한 것이 아니다.

  ‘of' 가 동격으로 쓰여야 하는 이유는 의미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렇다. 그 앞의 문장 역시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도 동격으로 쓰이고 있다.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이 책, 『헤겔 레스토랑』의 번역에서도 이 부분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unconscious" fantasy 부분에서만 엉뚱한 번역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부분의 번역이 진짜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truth' 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판타지는 reality 가 아니라 fiction이지만, 이 판타지가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작동시킨다.

 

   지젝은 이 부분을 되풀이 설명한다. 문제의 이 대목에 10여 페이지 앞서,  지젝은 현실 reality와 실재 the Real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unconscious fantasy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the Real 이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자기를 끌어 올리는 자본의 광적인 순환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오늘날의 메타재귀적 투기들에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낳으며 인간이나 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는 이러한 괴물의 유령은 이데올로기적 추상화이며, 그러한 추상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사람들과 자연적 대상들  -자본주의적 순환은 이들의 생산적 능력과 자원에 기반하고 있으며, 거대한 기생충처럼 이것에 기식하고 있다-  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상화’가 사회 현실에 대한 우리 (금융 투자자)의 오인에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정확히 물질적인 사회적 과정 자체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 이라는 것이다. 긴 행렬을 이룬 무수한 사람들 전체, 그리고 종종 나라 전체의 운명이 자본의 ‘독아론적’인 투기적 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데, 이 자본은 사회 현실에 자신의 운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축복받은 무관심을 갖고 최대 이윤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 바로 거기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이 있는데, 전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사회경제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것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사악한’ 의도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며’, 체계적이고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 사이의 라캉적 차이와 만나게 된다. ‘현실’은 상호작용과 생산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현실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규정하는 자본의 냉혹한, ‘추상적인’ 유령 같은 논리다. 이러한 간극은 어떤 나라의 경제 상황이 심지어는 국민 다수의 형편이 전보다 악화되었는데도 국제 금융 전문가들에 의해 양호하고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이다. p444」

 (짚고 넘어가자면,  중간 부분의 ‘현실적’ 은 reality의 그 real이 아니라 the Real 의 real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real은 때때로 그 의미를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말로는 차라리 실재적이라고 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  

  증권시장이 그 직접적 예이다. 주식시장은 기업의 현실과 무관하게 움직인다. 유령같은  실재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즉 “어떤 사회구성체의 내속적인 개념적 구조를 묘사하려면 먼저 그것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진짜 모습은 바로 ‘탈산업화된’ 형태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드러난다.

 

  「오직 이처럼 철두철미한 ‘탈물질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즉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대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명제가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것보다 훨씬 더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게 될 때,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인 사회적 현실이 자본의 유령적 또는 투기적 운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자체가 점점 ‘유령화될’ 때야 비로소, 간단히 말해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과 유동적인 이념들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가 전도될 때야 비로소 - 오직 그러한 시점에서야 비로소 데리다가 자본주의의 유령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완전히 실현된다. p448」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오역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길게 다룬 것은 이 대목이   ‘간주곡1’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번역 오류는 사실 옮긴이가 the Real과 reality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에 실패한 증거가 될 위험도 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웃기기는 하다.  그런데 안그래도 오독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까다로운 지젝이 아닌가.  그 지젝을 꿋꿋이 읽어가는 독자를 생각한다면, 번역에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이다.

 

  마지막으로 오역이라 의심되는 부분의 『시차적 관점』 영어판을 옮겨 놓는다.

 

 

「 how are we to read its first three words, "In truth, however"? First, of course, they imply that this truth has to be asserted against some false appearance or experience: the everyday experience that the

ultimate goal of capital’s circulation is still the satisfaction of human needs, that capital is just a means to bring this satisfaction about in a more efficient way. This "truth,” however, is not the reality of capitalism: in reality, capital does not engender itself, but exploits the worker's surplus-value. There is thus a necessary third level to be added to the simple opposition of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the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of the capitalist process. Again—-to quote Lacan—-truth has the structure of a fiction: the only way to formulate the truth of capital is to present this fiction of its "immaculate" self-generating movement.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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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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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물 자체 The thing itself : 헤겔

 

 

 

04_

오늘날에도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능할까?

 

 

 

 

  4장 전체는 헤겔에 대한 변명처럼 보인다. 통상 헤겔은 한때 이름을 드날렸으나 지금은 도서관 서가에나 꽂혀 있는 낡은 철학자로 인식된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가 그랬듯,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후대의 난장이들에 의해 극복된 것이다. 이것을 지젝은 단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에 대한 단절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핵심적 사상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오인 속에 너절하게 비판되었기 때문이다. 지젝이 헤겔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절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절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망자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듯이, 제대로 된 단절만이 헤겔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대지를 소유했다고, 신의 마음을 읽는다고, 자신의 정신의 자기운동으로부터 현실 전체를 연역할 수 있다고, 자임하는 절대 관념론자’ 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물론  ‘이성의 간지’ 이다.

 

  지젝은 이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 오른다’ 로 응답한다. 어떤 이성도 운명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은 불투명한 미래 속에 주체가 내린 결단과 행위에 의해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를 통해 필연성이 구성될 뿐이다. 행위가 일어난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의미는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젝이 강조하는 개념은 ‘소급성’ 이다. 헤겔의 '전제의 정립'이 바로 소급성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전체, ‘총체성’이 아니라 '비전체'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 닫힌 빗금쳐진 세계에 소급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면, 그 때 비로소 총체성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완전하지 않다. 그 중심에는 항상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대타자는 (W)hole 로서의 전체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대강 이렇다. 지젝이 되풀이 강조했던 것들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지젝의 헤겔 해석은 정통이 아니라 일종의 이단이라는 풍문이 있지만, 해석에 정통이 없다는 것이 바로 탈구조주의 시대의 이론이 아닌가? 지젝의 해석이 자신의 논리 내에서 정합성을 획득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해석을 택할 것인가는 독자들의 선택일 뿐이니 말이다.

 

 

 

 

 

 

0.

 

 

  역사적 사유의 주요 특징은 ‘단절’ 이후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에 다시 중세 철학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헤겔에 대해서도 똑 같은 단절을 말한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이후로는 다시 헤겔의 전통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그런데도 지젝은 부단히 헤겔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지젝에게 헤겔과의 단절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절은 비록 헤겔에게서 정점에 달한 모습으로 구현된 관념론과의 단절을 표방하지만 헤겔 사유의 결정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

  단절은 무시가 아니라,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철학적 경의’ 가 되어야 한다. 계승과 확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다. 그러나 헤겔과의 단절은 마치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없었던 것처럼 사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표방되었다. 지젝이 헤겔의 ‘사변적 사유’를 재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헤겔과의 진짜 단절을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1. 헤겔 대 니체

 

 

  헤겔에게 패배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전혀 ‘실제적인 것’ 이 아니다. 오직 형식적인 전환만 있을 뿐이다.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려는 관점의 변화’ 만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짜 승리라 할 수 있을까? 니체에 의하면 이 승리는 가짜다. 싸구려 속임수다. 상식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관점의 변화만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주사파의 정신승리와 무엇이 다를까?

  지젝이 들고 나오는 것은 헤겔의 ‘부정성’, 부정의 힘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예로 삼고 있다. 내용은 통과! (다음 절에 이어지므로..)

 

 

 

 

2. 투쟁과 화해

 

 

  헤겔의 사상을 ‘모든 것은 변한다.’로 파악하는 통상적 인식은 철저히 반 헤겔적이다. 이 오해를 대중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반동과 진보,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갈등으로 규정하며, 헤겔을 ‘영원한 투쟁’의 철학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투쟁의 외적 장애물은 환상에 불과하다.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주체가 적으로, 극복해야 할 외적 장애물로 지각하는 것은 주체의 내재적 비정합성이 물질화된 것이다. 투쟁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은 정합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형상을 필요로 하며, 그의 정체성 자체가 적에 맞서 있는 것에 달려있다. p368」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유대인이다.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침입자라는 유대인 형상은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비정합성, 즉 계급적대를 은폐하기 위한 대리물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체제인 것이다.

 

 

  「주체는 투쟁에 뛰어들며, (일반적으로 승리 자체 속에서) 패배하며, 그리고 이 패배가 그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헤겔을 니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를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즉 니체가 소생시키려는 활기 넘치는 영웅주의의 순진성, 모험의 열정, 투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려는 열정 또는 승리 또는 패배의 열정. - 이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이다.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그리고 패배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p369」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 화해를 기만적이라 비판한다. 현실의 적대성은 그대로 두고 이념 속에서만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변혁하는 대신 단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만 제안할 뿐이라고 헤겔을 비꼬았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런 비판은 헛 다리 짚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헤겔에게는 “소외로부터 화해로 이행하려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지각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헤겔의 화해는 관념적일 뿐이고 현실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철저한 사회변혁을 통해 현실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여전히 옳은 것이 아닐까?

 

 

  "이처럼 아직 아닌 것으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소급적 전도(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에서 갑자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 p373"가 헤겔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으로부터 구해준다는 것이 지젝의 반론이다.

 

 

  「최종적 화해에서 변하는 것이라고는 주체의 관점뿐이다. -주체는 패배를 인정하며, 그것을 승리로 재기입한다. 따라서 화해는 적대성의 극복이라는 통상적인 이념 이상인 동시에 이하이다. 이하인 것은 아무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상인 것은 이 과정의 주체가 (특수한) 실체 자체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p374」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지젝이 예로 든 ‘성령’은 수긍이 간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진짜 환생을 고대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회중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귀환인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기만이다. 회중을 성령으로 보는 것 그것이 화해라는 것. 지젝이 늘 하는 말로, 패배를 승리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항상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진정한 사변적 의미는 오직 반복적인 읽기를 통해서만, 첫 번째의, 잘못된 읽기의 사후효과 (또는 부산물)로만 나타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는 과잉적인 혁명의 사생아가 아니라, 합리적인 근대적 국가에 도달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실패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불필요한 과잉으로 드러난다.

 

 

 

 

3. 해야 할 이야기

 

 

  「진정 역사적인 사유는 어떻게 그처럼 보편화된 ‘모든 것은 변한다’와 단절할까? ..열쇠는 소급성이라는 개념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 관계의 핵심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르크스에게서 헤겔로 돌아가야 하며, 마르크스 자체를 ‘유물론적으로 전복’시켜야 하는 주된 이유이다. p380」

 

 

  소급성은 예를 들면 과거를 재창조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작가는 자신의 선도자들을 창조한다. 그의 작품은 미래를 수정하듯이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수정한다.” 고 했다. 대표적 작가는 역시 카프카 이다.

 

 

  우리도 지금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두고 투쟁을 하고 있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사실이지만,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이냐 민족사관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좌표를 차지한다.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현재의 투쟁이 과거를 소급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헤겔적 소급성의 핵심적인 철학적 함의는 그것이 충분근거율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과거의 원인들의 총합이 미래의 사건을 규정하는 일직선적 인과성이라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 소급성은 (과거의, 주어진) 원인들의 집합은 결코 완벽하고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이유들은 일직선적인 질서 내부에서 그것들의 효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p390」

 

 

 

 

 

4. 운명을 바꾸기

 

 

  소급성에 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어 보자. ‘진정한 행위’ 에 있어 소급성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일상적 활동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단지 우리 정체성의 좌표들을 따를 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위는 행위자들의 존재의 잠재적인 ‘초월론적’ 좌표들 자체를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또는 프로이트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우리 세계의 현실성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 움직임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건이” 재귀적으로 일종의 “그것이 조건으로 주어진 어떤 주어진 것 위로 되접어 꺾이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순수 과거가 우리 행위를 위한 초월론적 조건인 반면 우리 행위는 새로운 현실적 현실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급적으로 이러한 조건 자체를 변화시킨다. p392」

 

 

  소급성이 그토록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좌표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이란 유행어는 소급성을 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을 어떻게 소급시키는가에 따라 우리의 좌표는 달라진다. 발전하는 좌표인가, 퇴보하는 좌표인가.

 

 

  헤겔의 ‘이성의 간지’는 조롱거리로 전락할 때가 많다. 역사적 과정의 끈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성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목적론적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전혀 헤겔과 상관이 없다. 헤겔에게는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도구가 되기를 자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스탈린주의적 혁명가 상을 위한 자리는 없다. 뿐만 아니라 헤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 역사적 필연성은 역사 실현의 우연적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과정은 그 자체로 열려있고, 결정되어 있지 않다.

 

 

 

 

5. 미네르바의 부엉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사유가 사후에야 존재를 따른다는 헤겔의 통찰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유의 우위를 다시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깨를 올라타고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역사의 텍스트에 부합하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 자체는 반복해서 소급적으로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소급성이 미래를 선험적으로 예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아오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행위의 결과들을 완전히 예견할 수 있다면 주체의 자유는 없다. 다만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들을 실현하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을 배경으로만 주체는 자유롭다.

 

 

 

 

6. 잠재태 대 잠재성

 

 

  ‘헤겔은 영원 속에서 시간을 지양한다.’ 고 비판받는다.- 그렇다. 하지만 이 지양 자체는 우연적인 시간적 사건으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은 우연성을 보편적 합리적 질서 속에서 지양한다.’고 비판된다. - 그렇다. 하지만 이 질서 자체는 우연적인 초과에 달려 있다. ‘헤겔의 투쟁은 대립물들의 화해의 평화 속에서 지양된다.’ 고 비난받는다.- 그렇다. 그러나 이 화해 자체는 그것의 대립물로,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에 반대하는 주장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들이 헤겔의 사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헤겔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주장을 전개하기는 쉽다. 즉 그의 체계는 범주들로 완전히 ‘포화된’ 집합으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의 논리학에서 각각의 범주는 벗어날 길 없는 내재적·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선행 범주들로부터 이어지며, 이러한 범주들의 계열 전체가 자폐적인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주장이 무엇을 놓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이처럼 ‘포화된’, 자족적인, 필연적인 전체가 아니라 그러한 전체가 형성되는 열려 있고 우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비난은 존재와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 즉 그것은 헤겔에게서는 소급적으로 존재의 필연성을 낳는 생성 과정인 것을 존재의 고정된 질서(범주들의 네트워크)로 간주한다. p414~5」

 

 

  「비전체의 그러한 존재론은 철저한 우연성을 주장한다. 필연성을 손에 넣는 어떠한 법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법칙이 그 자체로 우연적이다. - 그것은 어느 순간에든 뒤집어질 수 있다. 그것은 충족근거율을 중단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식론적 정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존재론적 정지이기도 하다. 즉 인과적 규정들의 네트워크 전체를 결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쇄 자체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성의 내재적 우연성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어떠한 선-재하는 질서에도 종속되지 않은 그러한 생성의 카오스가 철저한 유물론을 규정하고 있다. p418」

 

 

  우연성은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잠재태와 분명히 구분된다. 잠재태의 사례는 주사위 던지기다. 주사위에는 6개의 숫자가 잠재되어 있고, 던져서 나온 숫자는 그것의 잠재태가 실현된 것이다. 잠재성은 7번째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인가의 출현이다.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는 헤겔을 잠재성이 아니라 잠재태의 철학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잠재성은 가능한 것들의 집합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출현하며, 선-재하는 가능한 것들의 집합에서는 어떠한 자리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가 현행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 새로운 것은 단지 선-재하는 가능성을 현행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행화가 자신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소급적으로 열어 주는) X가 출현할 때 등장한다. p419」

 

 

   따라서 무로부터 어떤 현상의 출현은 더 이상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반대로 신의 비존재의 표시이다. 자연은 비전체로, 어떤 초월적 질서나 힘이 그것을  조종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여기서 유물론적 개념이 된다. ‘기적’은 신의 비존재의 드러남이다.

 

 

  「생성 과정은 그 자체로서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필연성 자체의 생성(점진적이고 우연적인 출현)이 된다. ‘실체를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또한 (다른 무엇보다) 바로 이것이다. 즉 공백으로서의 주체, 자기 관계 맺기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없음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모든 새로운 형상이 출현하는 무 자체이다. 다시 말해, 모든 변증법적 이행 또는 전도는 새로운 형상이 무로부터 출현하고, 소급적으로 자신의 필연성을 정립 또는 창조하는 이행이다. p423」

 

 

 

 

7. 원환들의 헤겔적 원환

 

 

  헤겔은 “정신이 정신인 것은 오직 자체의 결과로서 일 뿐” 이라고 했다. 이 말은 헤겔의 정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상적 인식이 심각한 오인임을 보여준다. : 정신은 자신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며, 그런 다음 자신을 그러한 타자성 속에서 인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내용을 재전유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은 비슷하게 답한다. 일단 내가 먼저 있고, 이 내가 밖으로 나가 대상이 됐다가, 그 대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시 나로 돌아오는 뭐 그런 거지 ;;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먼저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 나, 자아라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하는 과정에서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먼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헤겔에게 “정신이 되돌아가는 자아는 그러한 복귀 운동 자체 속에서 생산되며 복귀 과정이 되돌아가는 것은 그처럼 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 된다. 본질의 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질이 자신을 외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그러한 본질 자체를 낳는 과정이다. 즉 ‘외화’는 정확히 자신을 외화하는 본질의 형성과 동일한 것이다. 본질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외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본질은 오직 넓은 만큼만 깊다는, 너무 많이 인용되는 헤겔의 발언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신을 외화하고 그런 다음 소외된 실체적 타자성을 재전유하는 주체라는 유사-헤겔적 주제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타자성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선-재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타자 속에서의 이러한 소외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 p42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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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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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3_

피히테의 선택

 

 

 

 

  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럴 것 같았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서문과 1,2장은 읽을 만 했다. 그동안 독해가 좀 늘었나 싶었는데, 웬걸 3장에서 탁 걸렸다.

  지젝은 피히테를 가끔 언급하긴 했지만, 한 장에 걸쳐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은 ‘Anstoss' 의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하자면 피히테의 ‘Anstoss'는 라캉의 ’대상a‘와 같다. 이 책 3장에서도 ‘Anstoss'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된다. ‘Anstoss'처럼 라캉에 빗댄 개념은 오히려 이해할만 하다. 그 외의 것들은 머리가 아프다.

 

  “절대자는 오직 동시에 그것의 대립물, 즉 출현이 출현에게도 출현할 때만 출현할 수 있다.” 같은 문장투성이다. 째려보고 노려보아도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쳐다볼 기력도 없다. 진이 빠지는 것 같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어떻게 읽기는 했는데,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연결은 안 되지만 그냥 멋지게 보이는 것들 토막토막 옮겨 놓는 것이 내 수법이다.

 

 

 

 

 

0.

 

 

  독일관념론은 ‘공식적으로’는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진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 장점은 이어받고 단점은 극복하며 매끄럽게 진보한 것은 아니다. 선임은 후임의 비판을 거부하고, 후임은 선임의 핵심 개념을 놓치는 등 굴곡이 많은 역사다. 그러나 이런 충돌을 지젝은 오히려 철학 발전의 촉매로 본다. 칸트라면 헤겔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 헤겔이라면 마르크스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 그것이 철학의 근본 모습에 다가가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1. 피히테적 내기

 

 

  「피히테는 주체성의 핵심 자체에 있는 기묘한 우연성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철학자였다. 피히테적 주체는 모든 현실의 절대적 기원으로 과장된 에고=에고가 아니라 영원히 지배를 벗어나는 우발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유한한 주체다. 동인 Anstoß, 즉 처음에는 텅 빈 주체의 점진적인 자기한정과 자기규정을 가동시키는 원초적인 충동은 단지 기계적인 외적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유의 심연 속에서 나의 자유를 한정하도록/규제하도록, 즉 추상적인 이기주의적 자유로부터 합리적인 윤리적 세계 속에서의 구체적인 자유로의 이행을 완수할 것을 강요하는 요청으로 기능하는 또 다른 주체를 암시하고 있다. p281」

 

 

  Anstoß. 두 가지 상반된 뜻을 가진 독일어다. 억제, 방해 저지 등 저항의 의미와  동인, 자극 등 행위를 촉진하는 의미가 있다. 지젝은 이 Anstoß (영어 번역어는 Anstoss) 를 대상a, 주체를 분열시키는 욕망의 대상-원인과 동일시한다. 피히테는 Anstoß를 “주체가 텅 빈 절대적 주체와 비(非)나에 의해 제한되는 유한한 한정된 주체로 분할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로 규정하고 있다.  피히테의 유명한 공식이라는 ‘나=나’ 를 불가능하게 하는, 목 안의 가시 같은 이물이다. “Anstoß는 절대적 나의 관념성의 한가운데로의 ‘난입’, 실재와의 위험한 부딪힘, 마주침의 순간을 가리킨다.”

 

 

  「우리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칸트적인 예지체적 물과는 분명히 반대로 동인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외-밀하다. 주체의 핵심 자체에 있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 자체인 것이다. 피히테 본인이 강조하듯이 동인의 역설은 그것이 나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데 있다. 만약 이 동인이 ‘순전히 주관적인 것’ 이 아니라면, 만약 이미 이 비나, 객관성의 일부라면 우리는 다시 ‘독단주의’에 떨어질 것이다. 즉 동인은 실제로는 단지 칸트적 물 자체의 어슴푸레한 잔여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단지 피히테의 비정합성 (그에 대한 가장 흔한 비난)을 확인해줄 뿐일 것이다. 만약 동인이 단지 주관적일 뿐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자신과 얼빠진 놀이를 하는 것일 것이며, 우리는 결코 객관적 현실이라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피히테는 실제로 독아론자 (그의 철학에 가해지는 또 다른 상투적인 비난)가 될 것이다. 핵심적 요점은 동인이 ‘현실’의 구성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를 가진 순수한 나가 중심에 있다. 주체가 형식이 없는 동인의 실재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하며, 그것에 객관성의 구조를 부여한다. p282~3」

 

 

  지젝은 피히테가 통상적인 비판과는 달리 독아론자도 아니고 비정합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그 이유가 책의 내용이지만, 보다시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그냥 결론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피히테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결정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물론 또 책 안에 다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통과한다.

  뭐.. 그 오류라는 것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자면 , “나 자신을 볼 때 어떻게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라는 피히테 자신의 질문에 대해 피히테는 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지젝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는 어떻게든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지젝은 그 전제의 ‘불가능성’이 답이라고 한다. “ 나는 알지 못한다. 인식은 오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원래 공백이며, 존재의 질서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의 실패이다. 나와 나의 실체 또는 대상으로서의 나인 것 사이에는 구성적 간극이 있다.”

 

 

 

 

2. 동인 Anstoß 과 행위-행동

 

 

「동인은 형식적으로 라캉의 대상a와 상동적이다. 이것은 자장처럼 나의 정립 행위의 초점, 그것을 중심으로 히 행위가 순환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적으로 비실체적이다. 그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 자체에 의해 창조되고- 정립되고,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p284」

 

 

  Anstoß에 관해서는 뒤에도 이어진다. 하나 더 가져오면,

 

 

  「동인은 정확히 출현appear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가상appearance, 즉 무엇인가로 나타나는 무가 아닐까? 바로 이것이 피히테의 동인을 기묘하게 라캉의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  - 이것은 또한 어떤 결여의 실정화, 공백의 대리물이다-  에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 p313」

 

 

  「모든 동일성의 원조 격의 모델은 나=나, 즉 주체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라는 피히테의 주장이 옳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동일성이라는 형식 논리적 개념은 두 번째로 오며, 이것은 나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초월론적 논리적 개념에 정초되어야 한다. 피히테가 절대적 나는 사태가 아니라 행위(행위-행동)임을, 즉 그것의 동일성은 순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과정적인 것임을 강조할 때 그가 말하려는 것은 정확히 주체는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 자기 자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주체로 완전히 실현하려 하지만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가 주체이다. (그것이 나이다) 오직 주체의 경우에만 우리는 실패와 성공,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결여에 정초되어 있는 동일성의 이러한 완전한 일치를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과정성에 앞서는 또는 그것의 기저에 놓여 있는 실체적 동일성의 가상이 있게 된다. 그리고 실재론의 ‘독단론’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은 모든 실체적 존재자에 대한 나의 이러한 순수한 과정성의 초월론적·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하는 데 요점이 있다. p288」

 

 

  ‘동일성’은 identity 의 번역이다. 그래서 동일성으로 잘 이해가 안 갈 때는 정체성으로 바꾸어 읽으면 쉬울 때도 있다. 여기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생각난 김에 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 그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고려해야 될 때도 있다. 영어에는 그런 단어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지젝이 잘 쓰는 단어로는 ‘cause' . 대의 혹은 원인. 『in the defence of lost Cause』. 지젝의 책 제목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책이다.

  여하튼 이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라캉과 헤겔이 지젝 사유의 지평이다. 인용문에서도 피히테를 엄청 헤겔-라캉식으로 읽는 것 같다. 피히테는 자기 동일성이 ‘과정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지젝은 여기서 자기 동일화의 ‘실패가 주체다’ 고 한다.

 

 

  「주체의 한정은 외적인 동시에 내적이며, 주체의 외적 한계는 항상 주체의 내적 한정이라는 주장은 물론 피히테에 의해 ‘절대적인 초월론적 관념론’의 주요 명제로 발전된다. 모든 외적 한계는 내적인 자기한정의 결과이다. 칸트가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칸트에게 물 자체는 직접적으로 주체에 의해 구성된 현상체적인 장의 외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예지체적인 것을 현상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한계는 초월론적 주체의 자기한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의 외적 한계일 뿐이다. p289」

 

 

  어떻게 보면 지젝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잔소리장이 같다. ‘칸트의 한계’에 대해서는 수십 번을 들어 본 것 같다. 지젝에 의하면 칸트는 다 해놓고 저 골칫덩이 ‘물자체’ 때문에 망한 것 같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를, 인식의 저 너머에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한 일은 간단하다. 인식의 불가능성을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모든 외적 한계는 자기한정의 결과라는 것’

 

 

 

 

3. 분할과 한정

 

 

  「피히테에게서 나와 비나 사이의 관계는 상호 한정의 관계이다. 비록 이 상호 한정은 항상 절대적 나 내부에서 정립되지만 핵심적인 요점은 이 나를 실재론적 방식으로 ‘자체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나와 비나가 상호 제한하는 추상적이며, 순전히 초월론적 관념적 매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최고의) 현실인 것은 절대적 나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나 자체는 오직 나를 좌절시키고 제한하는 비나의 반대하는 힘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것 속에서만 현실성을 획득한다. p293」

 

 

  피히테에게 나의 (자기)정립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 비나는 무엇인가? 비나는 나의 ‘비정립되어 있음’ 이다. 비나는 절대적으로 무이며 순수한 없음이다. 피히테는 이것을 일종의 ‘비존재’ 로 표현했다. ‘죽지 않은 not dead’이 아니라 '안죽은 undead' 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비존재, 나가 아닌 것이 아니라 비나이다. 나와 비나의 대립 외부에는 나의 어떠한 현실도 없다. 나로부터 비나를 박탈하는 것은 현실을 박탈하는 것이다.

 

 

  피히테의 무한성은 ‘행위하는 무한성’, 주체의 실천적 참여의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다. 사람에 있어 ‘한정’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한정은 내부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에 끼어들어 그것을 좌절시키며, 그것을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한정이다.

 

 

  헤겔의 진무한과 자기한정은 자기 관계 맺기라는 개념 속에서 전개된다. 생물학의 ‘자기생산 autopoiesis'와 같다. 수프같은 유기체의 웅덩이에서 어떻게 세포막을 가진 독립체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 말이다. 생화학적 반응으로 어떤 분자가 만들어지고, 이 분자는 세포막을 생성한다. 생성된 세포막은 역으로 그 생화학적 반응을 제한한다. 원환이 만들어지고, 이것으로 자기구분이 발생한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전제정립‘과 동일한 구조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요약·비판하고 있는 이 장에서(친절한 요약은 물론 아니거니와 더우기 지젝의 논지에 필요한 것들만 선별한 것일터이다.)  무언가를 발췌한다는 것은 우스운 짓인 것 같다. 축약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뚝뚝 떼어온 인용문은 선문답처럼 생경맞다. 그래도 기왕 한 것, 조금만 더 인용하기로 한다. 나중에 피히테를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읽어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하며.

 

 

 

 

4. 유한한 절대자

 

 

  ‘비나’는 칸트의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 ‘비인간’은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비인간’에게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인간이라는 것 속에 있는 어떤 무시무시한 초과라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칸트와 함께 일어난 변화이다.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 동물적 욕망과 신적 광기의 초과와 싸우는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오직 칸트 그리고 독일관념론과 함께 이제 맞서 싸워야 할 초과는 절대로 내재적인 것, 주체성 자체의 핵심 자체에 위치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어떤 영웅이 미칠 때 그것은 동물적 열정이나 신적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 자체의 폭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피히테적 비자아는 술어의 부정이 아니라 비-술어의 긍정이다. 그것은 ‘이것은 자아가 아니다’가 아니라 ‘이것은 비자아이다’ 이다. p311」

 

 

  「피히테는 단정적인 판단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나=나, 생명의 순수한 내재성, 순수한 생성, 순수한 자기정립, 행위-행동, 정립된 것과 정립하는 것의 완벽한 일치가 그것이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나는 이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지적 직관으로, 이러한 신비적 흐름은 의식에는 접근 불가능하다. 모든 의식은 자신과 대립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흐름으로부터 안나의 등장은 나로부터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존재로부터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나로부터 비나로서의 대상으로 이행할까?  동인을 통해. 이 외-밀한 장애물을 통해. 동인은 (나를 포함한) 비나도 또 (외적으로 나와 대립해 있는) 대상도 아니다. 동인은 절대적으로 무인 것도 또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로 셈해지는 무이다. 여기서는 피히테가 그렇게나 크게 강조하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핵심적이다. 내용과 관련해 동인은 무이다. 형식과 관련해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  따라서 그것은 ‘어떤 것의 형식 속에서 무’이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이미 첫 번째 명제로부터 두 번째 명제로의 이행에서 작용하고 있다. 즉 A=A는 순수한 형식, 자기동일성의 형식적 제스처, 형식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안자아는 그것과 대칭을 이루는 대립물로, 형식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재귀성이 또한 A=A로부터 안자아의 정립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최소한의 간극이 없다면 절대적 자아와 절대적 안자아는 간단히 직접적으로 겹치고 말 것이다. p311~2」

 

 

 

 

 

5. 목에 걸린 피히테적 가시

 

 

  내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감각들뿐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자는 나의 ‘정신적 구성물’ 이라는 것이 피히테 철학에 대한 통상적 인식이다. 그러나 피히테가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그는 정말로 버클리적인 실재론자일 뿐이다. 따라서 피히테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현실적인 대립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외부 세계가 나에 실제로 대립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피히테에 따르면 그것은 오직 정신이 세계에 대해 실천적 태도를 취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이론적·관찰자적 입장에서 현실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꿈으로 파악하기는 쉽다.  -하지만 현실은 일단 우리가 개입해 그것을 바꾸려고 하기 시작하면 ‘상처를 주고’ 저항한다. 물론 바로 여기서 피히테의 악명 높은 가무한이 들어온다. 즉 실천적 자아는 결코 비나의 저항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아 본래의 실천적 성향은 분투”이다.-  궁극적으로, 도덕적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무한한 윤리적 분투가 그것이다. p331」

 

 

  피히테는 이론이성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철학자라고 한다.

 

 

 

 

6. 최초의 근대신학

 

 

  관념론을 대할 때, 특히 모든 것이 주체의 정신의 작용이라거나, 나의 정신적 구성물이라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이것이다. 모든 ‘나’가 제 각각 자신의 구성물을 만들어내면, 어떻게 이 ‘나’들은 소통을 할까?  이런 질문과 동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피히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바로 “나의 다수성 문제” 라고 한다.

 

 

  「나의 전주체적 근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피히테는 다수의 자아가 어떻게 이처럼 공유된 근거 속에서 공존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p341」

 

 

  「피히테는 근거의 지위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비정신적이며, 즉 비주체적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물’은 아니며 순전히 관념적인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용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의 큰 타자가 정확히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비정신적인 것이며, 그것은 주체의 경험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 이전의 물질적 실재도, 주체성과 독립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이나 과정도 아니다. - 큰 타자의 지위는 순전히 잠재적이며, 관념적인 참조의 구조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오직 주체의 전제로서만 존재한다. 라캉적인 ‘큰 타자’는 또한 주체의 복수성 문제도 해결한다. 그것은 제3항, 즉 주체들 간의 만남의 매개 자체인 제3항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p344」

 

 

  이 라캉의 대타자는 헤겔의 ‘객관적 정신’ 에 얼추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타자로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대타자가 언어 체계 혹은 이데올로기 체제 또는 국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 대타자 속에서 동일한 체계를 습득하는 셈이니 주체 간 상호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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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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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_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제목만 보면 2장은 무슨 소린지 감이 안 온다. 어디서 튀어나온 문장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의미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런데 의외로 2장의 내용은 매우 재미있고, 비교적 쉽다. 2장에는 지젝의 특기인 온갖 비유적 사례들이 출동한다. 영화, 농담, 소설, 시, 정치적 사건 등이 2장의 삼분의 일 가량은 족히 차지하는 것 같다. 골치 아픈 이론은 제쳐두고 이 흥미로운 사례들에 푹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2장은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한 이야기다. 지젝이 보는 기독교는 한마디로 ‘무신론적 종교’ 다.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가 무신론적 종교라니, 언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은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 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쳤다. 이 외침은 원망이 아니라 탄식이다. 아버지 신이 자신의 아들마저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다. 지젝은 이것을, 반항의 몸짓, 아버지 신을 향한 ‘염병할!’ 이라고 매우 과격하게 표현한다. 어쨌거나 이 때 신은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신 자신도 죽었다. 전능함의 베일 아래 감춰진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신은 죽었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대타자다. 라캉의 유명한 정식 중 하나는 ‘대타자는 없다’ 이다. 대타자는 구멍 뚫려있고, 빗금쳐져 있다는 뜻이다. 대타자는 비전체not all이며, (W)hole이다. 주체만 빗금쳐진 것이 아니다. 대타자 역시 빗금쳐져 있다. 주체만 무능한 것이 아니라, 대타자 역시 무능하다.

 

  대타자의 구멍(W)hole에 직면할 때, 비로소 주체는 소외에서 분리로 이행한다. 주체는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대타자를 잃었지만, 그 대신 자유를 획득한다. 주체의 자율성이란 어떤 외적 참조점도 없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행위하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네 의무를 다하라’ 는 무조건적 명령은 어떤 내용도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식이다. 무엇이 의무인지에 대해 칸트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윤리적 주체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그 행위의 결과 또한 완전히 주체 자신의 책임이다. 어떤 대타자나 어떤 신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러므로 전혀 칸트적이지 않다. 아이히만은 칸트를 통해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은 행위의 책임을 대타자에게 지우는 바로 그 합리화의 길을 완전히 봉쇄한다.

 

  2장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이제까지 지젝이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해 주장해 온 내용들이다. 단, 기독교가 왜 무신론적인 종교인지에 관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왜 무신론자만이 ‘본래적인 믿음’을 가지고 행위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아먹기가 쉽다. 사실 그 동안은 왜 지젝이 기독교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목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는 베유 (아마 시몬느 베이유인 것 같다;;) 의 표현인데, 204쪽에 그냥 달랑 나온다. 베유의 말이 어떤 맥락인지는 모르겠다. 별 설명 없어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인가? 여하튼 이 ‘아무것도 없음’의 대리인이 바로 라캉의 대상a이다.

 

 

1. 큰 타자

  (보통은 대타자로 번역되기 때문에, 이 책의 인용문이 아닌 경우에는 입에 익은 대타자를 썼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으려 몇 번 시도했다.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근간이 확실한 건지, 철학책이라도 좀 읽을라치면 꼭 거기서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못 읽었다. 늘 구약 초반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나거나, 신약의 유명한 부분만 조금 보다 덮는다.

  우리 언니 중 한명은 약간 보태면 종교에 반 목숨은 걸었다. 전화를 하다보면 늘 하느님 이야기다. 그런 언니에게 내가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다. “성령이 뭐야?" 언니는 의외로 당황했다. 성령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성령은 무엇일까? 대타자일까? 지젝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는 식의 조금 모호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보기엔 성령이란 대타자인 동시에 대상a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젝은 딱 부러지게 말하지는 않는다. S1과 대상a를 등치시키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에 어긋나는 걸까? .. 잡설은 그만두고 이제 책 내용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성령은 시니피앙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제목 아래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일 겁니다.” 고 했다. 성령은 삶의 영역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적 질서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에게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생물학적 삶을 넘어 종교적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성령은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타자는 잠재적 현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나 꽃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성령에 대해 대답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겠나.

 

  「큰 타자는 오직 그에 대한 주체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잠재적 질서이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큰 타자에 대한 믿음을 중단한다면 주체 그 자체, 주체의 ‘현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상징적 픽션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픽션을 제거하면 현실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고리가 바로 헤겔이 ‘전제의 정립’이라고 부른 것이다. p181」

 

  주체의 믿음은 대타자를, 대타자는 주체의 현실을, 구성한다. 달걀과 닭의 관계다. 이 꼬리를 무는 원환의 구조를 헤겔은 ‘전제의 정립’ 이라는 말로 해결했다.

 

 

 

2. 신의 죽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잠재적 실체(큰 타자)가 죽기 위해서는 육체와 피라는 실재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픽션이지만 이 (현실을 구조화하고 있는) 픽션이 죽으려면 실재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야 한다. 잠재적 질서, 상징적 픽션으로서의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작용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작용한다 - 따라서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하는 것, 픽션을 현실로 환원시키는 것, 이 픽션이 어떻게 현실로부터 출현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으로는 (도킨스 같은 ‘속류’ 무신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이 픽션은 내부로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즉 이 픽션의 내속적 허위성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기술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무신론의 공식은 신 스스로 자기 자신의 비존재를 선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자신을 믿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역설이 있다.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해 현실을 환원시키면 현실 속에서는 계속 기능하며, 상징적 효력을 행사한다. p202~3」

 

  신 스스로 비존재를 증명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부로부터 대타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자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의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이 시대에 이데올기의 허구성,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성 따위는 숨겨진 비밀도 아니다. 영화나 소설 심지어는 드라마까지 나서서 이 거대한 대타자를 비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끄떡없이 굴러간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냉소를 먹고 커가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의 핵심적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다름 아니라 기독교는 가장 심원한 핵심에서 이미 무신론적인, 역설적이지만 무신론적 종교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후 현혹당해 있는 추종자들에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은 그곳에, 그들 사이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사랑이 사랑의 관계에서 제3항, 즉 사랑의 보증자와 토대라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읽혀야 한다. 즉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주는 큰 타자는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자신에 근거한 우리 사랑의 심연이 전부이다. p216」

 

  바디우는 사랑을 ‘이자의 장면’ 이라고 한다. 사랑은 일자도 아니고 삼자도 아니다. 사랑에는 삼자, 즉 우리 사랑의 조화를 보장해주고 적절한 토대를 제공해주는 삼자는 없다. 또한 사랑은 일자도 아니다. 연인과의 하나로 융합된 일자는 망상일 뿐이다. 사랑은 원초적 실재이며, 결혼의 의식에 의해 비로소 제3자인 대타자에 등록된다. 사랑은 그 개념 자체로부터 무신론적이다.

  신자들에게는 자명한 사실인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사랑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성령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성령은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인간의 필멸성의 죽음/끝, ‘죽음의 죽음’, 부정의 부정이다. 신의 죽음은 안 죽은 충동 (안 죽은 부분 대상)의 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대상a를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헤겔은 또한 몸으로 나타나는 불멸성 (‘안 죽어 있음’)을 무시한다. p197 」

 

  성령이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고, 신의 죽음은 안-죽은 부분 대상, 대상a의 출현이라면, 성령을 곧 대상a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밤 꿈속에서 조 힐을 만났지.

너와 나처럼 살아 있었네.

내가 말했지, “아니 조, 10년 전에 죽었잖아.”

“나는 결코 죽지 않았네.” 조의 말씀.

 

“구리 회사 사장놈들이 너를 죽였어, 조

너를 쏴죽였잖아, 조.” 내가 말했지.

“사람을 죽이려면 총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조의 말씀. “나는 죽지 않았어.”

 

거기 생명처럼 크게 서 있었지

두 눈으로 미소 지으며

조가 말했지. “저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계속해서 조직하지.“

 

“조 힐은 죽지 않았어.” 그가 내게 말했지.

“조 힐은 절대 죽지 않는다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곳이면 어디든

조힐이 그들 편에 서 있을 거라네.”

 

  <조 힐>이라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노래다. 1925년에 만들어져 진정한 민중가요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1952년 피스 아치 콘서트에서 “저 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저들이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불렸다. 불멸의 차원, 자본가가 총으로 죽이지 못한 그 영(靈)이 계속해서 조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로서의 대상a이다.

 

 

 

3. 무신론적 내기

 

  성령은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서 여성적 입장이다. 여성적 입장은 주인 기표라는 예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화 될 수 없는 장, 즉 비전체 not-all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여성성이란, 지도자에 기반하지 않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주인 형상이 아니며 대상a로서 분석가의 자리에 있다.

 

  지젝은 자신의 ‘기독교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에 이러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나는 내 입장을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진정 철저한 무신론으로, 즉 큰 타자의 비존재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무신론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즉 앞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는 신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 본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 또한 비실체적인 상징적 질서로, 즉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대표해 계속 믿는 잠재적 큰 타자로 살아남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오직 큰 타자의 그러한 사라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만이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의 신앙이며, 파스칼의 내기보다 훨씬 미친 듯한 내기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인식론적인 것, 즉 단지 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머문다. 즉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하며, 내기는 신 자체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철저한 무신론에서 내기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 무신론적 주체는 프로젝트에 가담하며, 그것을 ‘믿는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따라서 나의 명제는 이중적이다. 즉 기독교는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이다. p223」

 

  지젝은 신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에도 ‘믿는 것’ 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라고 역설한다. 천국과 성공에 대한 아무런 보증 없이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를 보증하는 대타자는 없지만, 그 프로젝트에 대한 충실한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주체의 진정한 정치적 행위이다.

 

  「진정한 윤리에서 우리는 큰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행위하며, 어떠한 보장 또는 토대도 박탈당한 행위의 심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p227」

    

 

4.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는 쾌락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제는 ‘쾌락원리를 넘어’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칸트의 윤리적 의무와 동일하다.

 

  「첫 번째로 명확히 해 둘 것은 라캉적 윤리는 쾌락주의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프로이트가 ‘쾌락원리 - 쾌락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심정 장치의 기능 - 라고 부른 것의 무절제한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라캉에게 쾌락주의는 실제로 ’현실주의적 양보‘를 위해 욕망을 연기하는 모델 자체이다. p235」

 

 

 

  정리를 하기 전과 후에 생각이 달라질 때가 많다. 2장은 비교적 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를 하다 보니 그리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훨씬 적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에 관해 분명히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성령’의 일반적 개념조차 없는 내 바탕 위에  정립하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렴풋이, 성령이란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대타자이자, 신의 죽음 이후에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상a라고 생각한다. <조 힐>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함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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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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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식전에 한 잔

 

01_

‘상블랑들을 뒤흔들기’

 

 

 

 

일단 뜻이라도 알고 시작하자. 출처는 네이버다.;;

상블랑, semblant : sembler (~처럼 보이다. ~같다.)의 명사형

                          ① 가장, 겉치레(=simulacre) ② 외관, 외견

 

 

 

  1부 제목이 ‘식전에 한잔’ 이니, 뭔가 가볍지 않을까? 란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다.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1부는 첫 장을 ‘상블랑’ 으로 시작한다. 지젝이 불어 ‘상블랑’ 을 주제어로 삼은 것은 처음 본다. 생경하다. 『시차적 관점』에는 가상, 현상 따위로 머리를 아프게 하더니. 하긴 옮긴이께서 ‘appearance' 를 가상으로도 현상으로도 번역해주셔서 더 뒤죽박죽이 되기도 했다.

 

  여하튼 ’상블랑’ 은 뭐고, 또 이걸 뒤흔드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앞뒤 맞춰가며 읽어내면 성공이지만, 그렇게는 못했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나오는 ‘8개의 가정’ 을 가지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멀미만 심하게 했다. 지젝이 어떻게 비트켄슈타인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을 거쳐 라캉과 헤겔, 그리고 바디우에 도달하는지 일관성 있게 그려내고 싶었으나, 언제나처럼 또 실패다. 할 수 없이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과 나름 이해가 가는 조각들을 모아 놓는 걸로 대신한다.

 

 

 

 

1.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명제는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니까. 그럼 비트켄슈타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명제에는 보태야 하는 것이 있다. 논리적 형식이라는 것은 말해질 수는 없고, 보여 질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다. 대표적인 예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다. 공포는 내용으로 재현될 수 없지만, 미학적 형식 속에 기입될 수 있다. 다큐멘터리적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예술적 형식을 통해 보여 질 수 있다.

 

 

「가상〔출현〕 속에는 그것 아래 감추어져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다. 바로 거기에 플라톤의 심오한 통찰이 있다. 즉 이데아는 가상 아래 감추어진 현실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 감추어진 현실이 영원히 변화하는, 변질시키고 변질되는 물질의 현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데아는 다름 아닌 가상의 형상이며, 이러한 형상 자체이다.) - 또는 라캉이 플라톤의 요점을 간결하게 해서 표현하고 있는 바로는, 초감각적인 것은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다. p74」

 

 

  철학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예전에 막 갖다 붙여 암기하던 식으로 하면, 말해지는 ‘내용’ 보다 보여 지는 ‘형식’ 속에, 즉 ‘실재’ 보다 ‘가상’ 속에 진리가 있다? 라기 보다, 실재는 곧 가상이다?  

 

 

 

 

2. 이데아의 출현

 

 

  플라톤은 20C에 가장 욕먹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데카르트와 헤겔도 있다.)  ‘이데아’ ‘진리’ 가 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는 플라톤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왜? 바디우는 유물론자지만, 아니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비물질적’ 질서의 자율성을 옹호한다. 환원주의적 유물론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인간이란 동물이 동물성을 버리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어떻게 쾌락을 쫒는 인간이 대의에 헌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유로운 행위가 가능한가?

  여기서 바디우가 찾은 방법은 플라톤을 유물론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는 관념론과 유물론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유물론’ 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대립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유물론은 ‘오직 몸체들과 언어들만 있다’ 로 압축된다. 변증법법적 유물론은 여기에 간단히 하나를 덧붙인다. “ ...진리들은 예외로 하고” . 이 무조음의 세계에서 바디우가 붙잡고자 하는 것은 ‘진리’와 ‘사건’ 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무엇인가? 이데아의 존재론적 지위는 ‘순수한 출현’ 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가상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헤겔적 문제와 동일하다.

 

 

  「플라톤의 무언의 교훈은 모든 것이 가상이며, 가상과 현실 사이에 명확한 분리선을 긋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며, 본질은 가상 내부에서 가상과는 반대로 나타나며, 가상과 본질 사이의 구분은 가상 자체 속에 기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과 가상 사이의 간극이 가상에 내속적인 한, 다시 말해 본질이 단지 자체 내에 반영된 가상에 불과한 한 가상은 무를 배경으로 한 가상이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무로부터 나타난다. p85」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의 마지막은 오직 무만이 존재하며 모든 과정은 ‘무로부터 무를 통해 무까지’ 발생한다는 명제를 암시한다. 비록 플라톤 자신은 이데아를 존재론화하여, 현실의 너머에 있는 ‘진실된’ 현실로 보았지만, 그의 무언의 교훈은 이데아란 ‘비물질적’이며, ‘잠재적인 실체’ 즉 ‘순수 출현’ 이라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교훈에 관한 대화편이다.

 

 

 

 

3. 픽션들로부터 상블랑들로

 

 

  가상, 픽션, 상블랑.. 막 혼란스럽다. 가상은 무엇의 번역인지도 궁금하다. 딱 잘라서 개념을 정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빗금친 주체)가 뭐예요?(내가 예전에 댓글로 누군가에게 한 질문이다;;)” 라고 묻거나 “존재가 뭐예요?” 라 묻는 것만큼 생뚱맞을 것이다. 그리스 이래 철학의 오랜 물음들을 단 몇 줄로 설명하라는 요구니까. 여하튼 여기서 지젝은 픽션과 상블랑을 이렇게 구분한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모호성이 작동하고 있는데, 라캉이 계속해서 픽션들에서 상블랑으로 이동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의 상징적 픽션과 시뮬라크르라는 의미에서의 상블랑이 구분되는 것이다. 비록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그것이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 둘을 나누는 섬세한 선이 있다. p97~8 」

 

 

  라캉은 상블랑 개념의 열쇠로 먼저 벤담의 픽션을 언급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픽션이란 ‘그래도 그것은 돈다.’ 의 논리를 가진다. 픽션의 수수께끼는 그 비밀이 밝혀져도 작동한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상품물신’이 그렇다. 마르크스 이래로 그것의 작동방식이 다 까발려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품은 물신으로 작용한다. 신은 존재한 적도 없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케잌을 먹는다. 귀신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제사는 지내고, 이사는 손 없는 날에 간다. 주식은 숫자 놀음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경제를 움직인다. 인간은 환상을 찰떡같이 믿기 때문이 아니라, 믿는 척 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픽션은 가능할까?

 

 

  「본래적인 의미의 인간의 언어는 오직 픽션이 현실보다 중요할 때, 가면 아래의 어리석은 현실보다 가면 속에 더 많은 진실이 있을 때, 상징적 호칭(아버지, 판사...)의 경험적 담지자의 현실보다 그러한 상징적 호칭 속에 더 많은 진실이 들어 있을 때만 기능한다. 플라톤적인 초감각적 이데아는 모방의 모방이며, 가상으로서의 가상이라는 라캉의 지적이 옳은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실체를 가진 현실의 표면에 나타나는 어떤 것 말이다. p100」

 

 

  픽션과 상블랑을 나누는 ‘섬세한 선’ 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상블랑은 ‘무의 가면(베일)’ 이라고 한다.

 

 

  「상블랑에 대한 핵심적인 공식은 밀레에 의해 제안되었다. 즉 상블랑은 무의 가면(베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물신과의 연관성은 저절로 나타난다. 물신 또한 공백을 감추는 대상인 것이다. 상블랑은 베일과도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무〕를 감추는 베일이다. - 베일 아래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의 기능이다. p100」

 

 

  포도를 진짜로 실감나게 그린 제욱시스보다 커튼을 진짜처럼 그린 파라시오스가 이겼다는 그리스의 일화에 비유할 수 있다. 제욱시스의 그림에는 새가 달려들어 포도를 쪼아 먹으려 했다. 그런데 파라시오스의 그림을 보고 제욱시스는 그림을 봐야하니 커튼을 걷어달라고 부탁했다. 파라시오스의 그림은 마치 커튼 뒤에 무엇이, 즉 진짜 그림이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상블랑이다.

 

 

  그러면 ‘상블랑을 뒤흔들기’는 또 무엇인가? ‘모든 담론은 상블랑이다.’ 는 공식이 있다.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따르면, 모든 담론이 상블랑이기 위해서는, 상블랑이 아닌 담론 하나가 예외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예외를 통해 상블랑이 아닌 담론에 가닿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즉 여성적 공식에 의한 방법이 있다.

 

 

  「즉 예외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담론들을 ‘비전체’로 다루는 것을 통해, 그러한 담론들의 비정합성을, 불가능성의 점들을 식별해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라캉이 후기 강의에서 ‘상블랑들을 뒤흔들기’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가상들 너머, 가상들의 예외가 아니라 비정합적인 비전체에 가닿는 것 말이다. p102」

 

 

  예외를 통한 방식은 가상들 너머에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믿었던 이데아의 현존 같은 것.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부딪힌 것은 실재란 가상의 가상일뿐이라는 것이다. 상블랑이라는 ‘베일’은 그 너머에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 ‘무’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상은 아니다. 가상은 그 자체로 비정합적이고, 비전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를 실재에 가닿게 해준다.

 

 

  「단지 가상들의 상호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도 있다. - 하지만 이 실재는 접근 불가능한 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막는 간극, 부분 투시도법을 통해 지각된 대상에 대한 우리의 l관점을 왜곡시키는 적대성의 ‘바위’ 이다. 따라서 ‘진리’는 어떤 관점주의적 왜곡도 없이 대상을 ‘직접’ 봄으로써 접근할 수 있는 사물의 ‘실재’ 상태가 아니라 관점주의적 왜곡 자체를 초래하는 적대성의 실재 자체이다. p103」

 

 

  상블랑을 흔든다는 것은 이 ‘비정합성’ 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블랑은 완전한 베일이 아니다. 상블랑들은 비전체이다. 완전하지 않은 그 틈이 실재이다. 혹은 상블랑은 라캉의 대상 a와 같은 것이 아닐까? 대상a 역시 환상을 유지시켜주는 스크린, 베일이다. 베일 아래의 무를 감추기도 하지만 동시에 베일 아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구멍을 가리키는 대상a야 말로 흔들려진 상블랑은 아닐까?

 

 

  헤겔의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 또한 상블랑들을 뒤흔드는 작업이다.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 역시 ‘뒤흔들려진 상블랑’ 이다. 거기서 우리가 부딪히는 실재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런데 결론적으로 픽션과 상블랑의 미세한 차이는 뭘까? 픽션이 S1이라면, 상블랑은 대상a 라고 구분해도 될까?

 

 

 

 

4. 변증술의 연습이요? 아뇨, 됐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을 변증술의 연습으로 본다면, 이 연습의 정확한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 아무런 분명한 결과가 없다. 유일한 결과는 정합적인 총체성은 없다, ‘큰타자’는 없다는 것이다.

 

 

  「8개의 세계들은 자신을 낳는 어떤 불가능성이나 교착 상태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 존재와 일자를, 실재와 시니피앙을 화해시킬 수 없는 불가능성, 그것들을 대칭적으로 겹치게 할 수 없는 불가능성 말이다. p111」

 

 

  큰타자 없고, 총체성 없고, 불가능성까지 나왔으면 사실 다 나온 것이다. 연습이 아니라 이것이 핵심 고갱이라는 것. 나도 여기서 더 이상은 골치아프니까, 됐습니다!! 로 끝.

 

 

 

 

5. 일자에서 덴den으로

 

 

  골치 아프기로 하면 여기가 압권이다. den은 신조어인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책 내용을 통째로 옮겨야 할 판이다. 하지만 여기서 ‘less than nothing' 이 도출되기 때문에 넘어가기도 곤란하다. 이 골칫거리의 원흉은 데모크리토스인데, 일단 읽어 보자.

 

 

  「몽매주의적 관념론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 이라는 모티브를 변주하기를 좋아한다. 즉 최소한이지만 그럼에도 신성을 증언하는 존재를 말이다. 이에 대한 유물론적 대답은 'less than nothing' 이다. 그러한 대답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유물론의 아버지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 'less than nothing' 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den이라는 놀라운 신조어에 의존했는데, 그리하여 그의 존재론의 기본공리는 “less than nothing 은 othing만큼은 존재한다 이다.” p122」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말하자면 nothing에서 'n' 을 뺀 만큼은 존재한다는 소리다. ‘thing'에서 ’nothing' 사이, 거기에 ‘othing' 이 있는 셈이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nothing보다 더 없는, less than nothing. 이게 도대체 무얼까?

 

 

  「따라서 den은 ‘no'가 없는 nothing, 어떤 것 a thing이 아니라 othing 이다. 즉 그것은 어떤 것something 이지만 아직 무nothing의 영역 내부에 있는 것, 존재론적인 살아 있는 죽은 자와 같은 것, 유령과도 같이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무' 이다. p 123」

 

 

  라캉은 den을 대상a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den은 일종의 ‘나눌 수 없는 잔여’ 이다. 또한 den은 존재와 비존재가 구분되지 않는 공간이다. den은 존재하지만 무인,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공백이다.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궁극적 분수령은 존재의 물질성이 아니라 없음/공백과 관련되어 있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p125」

 

 

  den 그리고 ‘less than nothing' 은 결과적으로 ’실재‘ 라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너머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백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공백은 생성적 공백으로, '본원적으로 수축된 존재 이전의 존재자' 들이 출현하는 곳이다. 지젝이 항상 주장하는, 헤겔의 <세계의 밤>과 같은 것이 아닐까?

 

 

 

 

 

6.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 나온다. 항상 모호한 지젝의 표현치고는 이례적으로,

 

 

  「이제 결론을 내리자. 『파르메니데스』의 2부에서 1부로, 즉 이데아의 지위로 돌아가 본다면 결과는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체에 고유한 존재론적 현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참조점들로 지속된다. 즉 유일하게 적절한 결론은 영원한 이데아는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 일자와 타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들의 지위는 순수하게 잠재적이다. 이 잠재적 지위는 위대한 반플라톤주의자 중 하나인 들뢰즈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진 바 있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들뢰즈의 개념은 현재 사방에 만연한 가상현실이라는 주제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현실(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이 실재이다) 이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은 잠재적인 것 그 자체의 현실을, 그것의 실제적인 효과와 결과들을 나타낸다. p140~1」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하게 잠재적인 참조점이라는 결론은 지젝이 단독으로 내린 결론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에 따라 도출된 것이다. 플라톤이 자기 역설에 부딪힌 셈이다. 어쨌든 여기서 플라톤과 반플라톤주의자 들뢰즈가 일치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데아란 잠재적인 것의 현실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 자체의 실제적인 효과와 결과들을 가진다. 이것이 라캉의 실재이기도 하다.

 

 

 

 

7. 플라톤이 아니라 고르기아스가 원조-스탈린주의자이다!

 

 

  ‘아버지냐 더 나쁜 것이냐’ 의 선택에서 윤리적 선택은 ‘더 나쁜 것’ 이라는 라캉의 주장을 지젝은 줄기차게 반복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할까? 여기에서 비로소 그 명료한 답이 제시된다.

 

 

  「 물론 이 ‘더 나쁜 것의 선택’은 실패하지만 그러한 실패 속에서 그러한 양자택일적인 장 전체를 잠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두 항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p142」

 

 

  실패를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진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 고 누누이 강조했는데, 여기서 조금 더 명확한 표현은 그 실패를 통해서만 그런 강요된 선택의 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더 나쁜 것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라기보다는, 그럼으로써 그런 대립항을 벗어나 새로운 좌표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1장의 결론부분이다.  

 

 

  「소피스트들은 말과 사물 사이의 신화적 통일성을 깨뜨리고 말을 사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말놀이 방식으로 고수했다. 그리고 본래적 의미의 철학은 오직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소피스트들이 열어놓은 간극을 닫고 말을 위한 진리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신화로 -하지만 새로운 합리성의 조건 하에- 되돌아가려는 시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플라톤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는 먼저 이데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토대의 취약성을 받아들여야 하게 되자 소피스트들과 진리 사이의 명확한 분리선을 재확정하기 위해 오랜 투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소피스트적 유혹에 맞서 투쟁한 철학자들의 계보가 헤겔,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자신의 진리를 입증하는 어떤 외적 토대도 없는 상징적인 것의 자기참조적 놀이를 포용하는 궁극적인 소피스트이기도 한 이 ‘최후의 철학자’와 함께 끝나는 것은 철학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헤겔에게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징적 과정에 내재적이다. - 진리는 외적 기준이 아니라 ‘실용적 모순’, 담론적 과정의 내적 (비)정합성, 언표된 내용과 언표의 입장(위치) 사이의 간극에 의해 가늠된다. p156」

 

 

 

 

 

정리하고 나서 ...

 

 

  1장에서 지젝은 ‘상블랑’ 이란 새로운 개념과 『파르메니데스』의 8개의 가정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꼼꼼이 읽으며 정리해 나가자니, 사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들어 해 왔던 내용을 플라톤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것에 지나지 않은가 싶다. 지젝이 갑자기 플라톤에 몰두하는 것은 아마도 바디우와 합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블랑이라는 ‘무의 베일’은 스크린으로서의 대상a와 유사한 느낌이 들고, 이것을 뒤흔든다는 것은 대상a가 베일일 뿐만 아니라 그 아래의 공백을 지시하는 이중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것과 상통한다.

  den이라는 괴상한 신조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 역시, 헤겔의 <세계의 밤>을 설명할 때와 유사해 보인다. 머리와 사지가 따로따로 피 흘리며 출몰하는 유령들의 밤은 주체가 탄생하는 공백이다. 실재란 그 무의 공간 혹은 더 정확히는 ‘less than nothing' 의 공백이다.

 

  플라톤이 규정하려 했던 이데아란 이 실재에 다름 아님을 밝히고 싶은 것이 1장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플라톤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파르메니데스』에서 부딪힌 이 곤경에 의해서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less than nothing' 이 그냥 nothing이 아닌 것처럼, 이 이데아- 실재는 실존하지 않지만, 현실의 참조점으로서 자체의 효과와 결과를 가진다. 이것 역시 지젝이 늘 주장해오던 ‘수행력 performative' 과 비슷하다. 픽션을 설명하면서 사례로 들었던 상품물신이 가지는 수행력 말이다. 주식시장의 원리도 이런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상징계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지만, 수행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실재계와 같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지젝은 픽션과 상블랑 사이 미세한 선을 긋기 위해서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그 미세함과는 별개로 상징계와 실재계, 픽션과 상블랑은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다.

 

  1장에 관한 개략적인 이해인데, 제대로 읽었는지 자신은 없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부분이 많겠지만, 엄밀하자면 책을 통째로 베끼는 수밖에 없으니, 오류가 많더라도 나름대로 정리해 보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요약했다.

  내용의 대다수는 책에 나오는 구절들이나, 군데군데 사견이 섞여 있기도 하다. 표시가 팍나게 급이 다른 표현들은 물론 내 것인데, 혹시 몰라 '바탕체'로 표기했다. 그래도 섞인 표현들은  분리하기도 만만치않고, 모두 다 ' ~라고 했다',' 지젝이 말하기를~' 등으로 쓰기도 그렇고 해서 뒤섞인 채 버려두었다. 의심이 가는 부분은 꼭 책을 찾아 비교해 보시면 좋겠다. 혹시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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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

말리 2014-03-1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머리 아퍼 2014-04-19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 읽었어요. 이건 철학 심리학이 아니라, 대승기신론 유식론 반야심경 진공묘유네요. ㅎㅎ
11차원의 끈이론, 중첩 확률 비국소적 EPR실험... 아 ~~고만 생각 해야지.

말리 2014-04-20 07:59   좋아요 0 | URL
정확하지도 않은 글을 읽으시느라 머리가 아프셨다니 죄송합니다.;; 이 책은 지젝이 자신의 헤겔 철학을 야심차게 완결한 내용이라, 지젝 책 중에서도 어렵습니다. 이 책은 철학이지만 심리학은 아니고요, 헤겔과 라캉의 결합이니 그렇게 말할 수있다면 정신분석적 관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여하튼 읽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