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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7_

헤겔의 한계들

 

 

1. 하나의 목록

 

  헤겔을 ‘총체성’ 의 철학자로 본다면, 헤겔은 ‘비전체’라는 라캉의 개념을 사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적 총체성의 진정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헤겔적 총체성은 “전체적인 것 더하기 그것의 모든 ‘증상’을, 그것의 틀에 맞지 않는 초과를, 그것의 정합성을 무너뜨리는 적대성 등등을 가리킨다.”

  어쨌거나 헤겔이 사유할 수 없다고 알려진 일련의 목록이 있다. “반복, 무의식, 중층결정, 대상a, 수학소/문자(과학과 수학), 언어, 적대성(시차), 계급투쟁, 성적 차이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죠, 헤겔은 할 수 없었죠.”라고 딱 부러지게 긍정할 수 없게 만드는 미묘하고 지각 불가능한 뭔가가 있다.

  이 절의 내용은 “그렇죠.” 다음에 지젝이 덧붙이는 “하지만....” 들이다. 헤겔이 무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헤겔에 대한 비판들에 이미 헤겔의 대답이 맹아의 형태로 들어 있다는, 뭐 대충 그런 말인 듯하다.

 

 

2. 자기지양된 우연성으로서의 필연성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최종성의 관점’ 을 비판했다. 현재를 마치 과거인 것처럼 바라본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지젝은, 헤겔의 관점이 “정확히 미래가 과거로 열려있음을 재도입하는 것을, 존재했던 것을 생성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지금 존재하는 필연성을 낳았던 우연적인 과정을 보는 것” 이라면 어쩔래? 라고 응수한다.

  여하튼 이쯤에서 지젝의 주 레파토리 중 하나인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 나온다. : ‘과거의 반복을 통한 구원’

 

  「마르크스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자코뱅파의 터무니없는 혁명적 희망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열광적인 해방의 수사학은 단지 천박한 상업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수립하기 위해 역사적인 ‘이성의 간지’가 이용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배신당한 철저한 해방적 잠재력들이 어떻게 혁명의 기억을 계속 사로잡는 역사적 ‘유령들’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러한 잠재력의 실현을 요구하는지 -그리하여 후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또한 이러한 과거의 유령들까지 구원해 했다-를 설명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하려 했던 것이다. 유령 같은 형태로 지속되는 과거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버전들이 역사적 과정의 존재론적 ‘열림’을 구성하는데... p827」

 

  프랑스 혁명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을 부르주아 집권을 되풀이 하자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수립에 의해 배신당한 자유·평등·박애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닌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은 우리가 경험했던 소비에트 체제가 아니다. ‘commons’ 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지젝이 Ooccupy Wall Street' 현장에서 역설했던 그런 ‘공통적인 것’ 말이다. 과거가 고정된 채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미래다. 그것이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필연의 관계는 다시 사고되어야 한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의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과 같은 의미로 양자의 접합 방식을 파악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우리는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자유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객관적 상황에 의해 부과된 좌표들 내부에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자유가 소급적으로 객관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정립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한 조건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위의 전제로서 출현한다. p829~830」

 

  과거는 반복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고, 그렇게 구성된 과거가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즉 필연이다.

 

  「그렇다면 필연과 우연에 대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적 통찰은 무엇인가? 헤겔은 우연성의 필연성 - 즉 이념이 필연적으로 진정 우연적인 현상들 속에서 어떻게 외화되는지- 을 연역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측면은 종종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소홀히 되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의, 이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명제를, 즉 필연성의 우연성이라는 명제를 발전시킨다. 즉 ‘외적인’ 우연적 현상으로부터 ‘내적인’ 필연적 본질로의 진전, 자기반성을 통한 현상의 자기내화를 묘사할 때 헤겔은 그것을 통해 어떤 선-재하는 내적 본질,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던 것의 발견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 구조화되는 ‘수행적’ 과정을 묘사한다. 헤겔 본인이 『논리과학』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반성 과정에서 잃어버린 또는 숨겨진 근거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이 복귀하고 있는 것을 생산한다. p831~2」

 

  필연성의 우연성, 또한 반복과 마찬가지로 소급성과 관련된다. ‘근거’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복귀라는 행위 자체가 ‘근거’를 소급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필연성은 우연성,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에 도달한 우연성의 ‘진리’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헤겔이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대로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이야기를 완전한 존재론적 폐쇄에 대한 주장으로 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단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것, 또는 존재하던 것의 완전한 실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 동일한 진술은 또한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즉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이 된다. 즉 어떤 사물의 ‘영원한 본질’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현하며, 열린 우연적인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 영원히 지나간 본질은 변증법적 과정의 소급적 결과이다. 칸트가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소급성이었으며, 헤겔 본인도 오랫동안 힘들게 고생한 끝에 그것을 개념화할 수 있었다. p834」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근거 즉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연성의 소급적 결과라는 것이 이 절에서 주~욱 역설되고 있는 지젝의 주장인 것 같다. 프로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데.

 

  「내적 필연성은 증상의 우연성을 통해서만 자신을 분절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러한 필연성은 오직 그러한 분절화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필연성은 말 그대로 우연성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앞뒤라는 말로 라캉이 암시하고자 했던 바로 (억압된 내용의) 필연성은 (증상들 속에서 그것의 분절화의)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비판자들은 첫 번째 측면만, 즉 우연적 표현들을 지배하는 내적 원리로서의 필연성만 강조하고, 두 번째 측면, 즉 이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필연성의 형태로 끌어올려 진 우연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무시된다. p839」

 

 

3.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의 이형태들

 

  말도 참 어렵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 이란 끙끙 읽고 나니, ‘부정의 부정’ 이다. 그 다양한 형태들의 예로 ‘라비노비치-모체’, ‘아도르노-모체’, ‘이르마-모체’를 꼽고 있는데, 요약하긴 그렇고 직접 읽어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4. 형식적 측면

 

  「들뢰즈의 가장 급진적인 반헤겔적 주장은 이 순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즉 헤겔은 동일성 또는 모순의 지평 바깥에 놓인 순수 차이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p857」

 

  순수 차이, 극소 차이, 최소 차이. 뭐가 됐건 헤겔에게 차이는 모순이고, 이 모순은 변증법을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 통념이기 때문에 순수 차이는 가장 반헤겔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젝은 여기에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적 반박은 아마 이러할 것이다. 즉 ‘순수한’, 잠재적 차이는 현실적인 자기동일성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 자체가 아닐까? 그것은 현실적인 동일성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보다 정확하게,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 차이는 현실적 동일성의 잠재적 토대 또는 조건이다. 즉 존재자는 그것의 잠재적 토대가 순수 차이로 환원될 때 (오직 그럴 때만)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순수 차이는 잠재적 대상(라캉적 대상a)의 보충과 관련되어 있다. p858」

 

  순수 차이는 아마 들뢰즈의 개념인 듯한데, 그의 대표작 『차이와 반복』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최소 차이는 순수 반복 속에서 출현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상a의 보충과 관련 있다는 말은 이렇게 적용된다.

 

  「라캉을 헤겔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이는 최소 차이, 작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특징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헤겔 대 다른 인물이 아니라 헤겔과 그의 유령 같은 분신이다. - 헤겔로부터 라캉으로의 이행에서 우리는 하나의 헤겔에서 또 다른 하나의 라캉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헤겔+그의 대상a이다. p856」

 

  이것들이 ‘순수차이가 자기동일성의 토대이자 조건’이라는 까다로운 언명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여기서는 그냥 헤겔과 들뢰즈가 예상 외로 훨씬 가깝다는 것을 수긍한 척하고 넘어가자. 여하튼 차이는 반복 속에 출현하므로, 새로운 것 역시 오직 반복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것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만 관련된 변화들은 정말 새로운 어떤 것의 출현이 아니라 오직 기존의 틀 내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 새로운 것은 오직 현행적인 것의 잠재적 토대가 변할 때만 출현하며, 이 변화는 정확이 어떤 것이 현행성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반복 형태로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사물들은 A가 B로 변형될 때가 아니라 A가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변할’때 정말로 변한다. 이 변화가 최소 차이며, 이론의 과제는 주어진 다수성의 장에서 이러한 최소 차이를 빼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빼내기는 또한 헤겔적 지양 또는 부정의 부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p859」

 

  이제 헤겔과 들뢰즈의 관계가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이 아니다. 첫 번째 부정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 관련된 변화다. 기존의 틀 내에서 내용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첫 번째 부정의 내용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적 측면은 그대로 둔 채 형식적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부정으로 보았던 것 혹은 불가능으로 보았던 것을 단순히 관점을 바꾸어 긍정성으로 혹은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서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틀을 보지 않고 현실적 속성들만 보는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틀 자체를 뒤집어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것이 헤겔적인 지양, 부정의 부정이며 들뢰즈의 극소 차이다. 그러나 물론 들뢰즈와 그 의 후계자들은 들뢰즈의 반복과 차이가 헤겔의 지양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헤겔 이후는 오히려 “지양의 지배로부터의 반복의 해방” 이다.

 

  한편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비슷하다고 했다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통에 결론이 뭔지 헛갈리지만, 결국 헤겔은 ‘죽음 충동’을 사유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부정의 부정 보다 더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것이 아마 죽음 충동인 듯하다.

 

  「헤겔과 프로이트의 유사성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이다. 만약 헤겔이 이성의 한가운데서 비이성(모순, 모든 합리적 질서를 동요시키는 대립물들의 미친 춤)을 발견한다면 프로이트는 비이성(말실수, 꿈, 광기)의 한 가운데서 이성을 발견한다. 헤겔에게서 일자는 그것의 상실의 소급적 효과로, 잃어버린 일자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을 구성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는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가 일치하며, 억압된 것은 그것의 복귀의 소급적 효과이다. p862」

 

  이성과 비이성의 일치, 그리고 소급적 효과가 헤겔과 프로이트에게 공통적이다. 뿐만 아니라 더 흥미로운 것은 ‘무의식’ 의 공통성이다. 헤겔에게도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의 개념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프로이트적 무의식과는 분명히 반대로 헤겔적 무의식은 형식적이다. 그것은 언표된 내용 속에서는 보일 수 없는 언표의 형식이다... 즉 말실수 속에서 드러나는 우연적인 ‘병리적’ 욕망이 아니라 주체가 부지불식중에 의지하는 보편적인 상징적 형식 속에 있다. 헤겔의 무의식은 자기의식 자체의 무의식, 자기 자신의 필연적 비투명성, 자신이 직면하는 내용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형식을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특수한 내용의 보편적 형식이다. 진리는 내가 의미하려는 바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 속에 들어 있다는 헤겔의 말의 의미는 진리는 특수한 의도와는 반대로 말의 의미의 보편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p862」

 

  그러나 프로이트적 무의식 또한 형식적 측면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진정한 비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해몽을 통해 꿈의 내용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 즉 꿈 사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꿈의 진짜 비밀은 꿈-작업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와 헤겔의 무의식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지젝은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질문은 ‘헤겔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지만 그 역인 ‘프로이트는 헤겔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역시 필요하다고 한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갈등, 투쟁, ‘자기모순’, 내재적 적대성의 사상가이다. 하지만 헤겔과는 분명히 반대로 프로이트에게서 갈등은 자기모순이 극단화되어 자기 은폐되는 식으로,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이 출현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갈등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은 정점에 이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연되며, 타협의 형성물이라는 형태로 일시적으로 멈춘다. 이러한 타협은 ‘부정의 부정’ 이라는 헤겔적 의미에서의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실패한 부정, 방해된, 탈선된, 왜곡된, 뒤틀린, 옆길로 새버린 부정, 일종의 부정의 클리나멘이다. 다시 말해 헤겔을 빠져나가는 것은 중층결정이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에서 부정성은 항상 철저하거나 철저화되며 정합적이다. p866~7」

 

  뭔가 프로이트보다 헤겔이 낫다는 것도 같고, 반대로 프로이트가 헤겔보다 낫다는 것도 같다. 부정의 클리나멘 즉 실패한 부정이 부정의 부정 보다 못하다는 것 같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중층결정을 사고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헤겔과 프로이트가 어쨌건 이 구불구불 복잡한 길을 계속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살짝 짜증이 나지만 기왕에 온 것 계속 가보자.

 

  「따라서 프로이트는 추가적 비틀기, 나사로 다시 한 번 꽉 조이는 것으로써, 즉 부정을 철저화 한다는 ,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 관계 맺기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헤겔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좌절시키고 부정적인 것의 완전한 전개에 장애물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 ‘부정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헤겔의 부정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할까? 부정성과 관련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차이는 헤겔이 부정성을 자기 파괴적인 극단으로까지 철저화 하는 반면 프로이트는 부정성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타협-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로 환원될 수는 결코 없다. p870~1」

 

  프로이트가 ‘타협’ 한다고 볼 수는 없단다.

 

  「여기서의 주요한 요점은 프로이트에게서 부정성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들의 수렁은 추상적인 개념적 규정들에 저항하는 풍부한 경험적 현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개념적 힘에 대한 현실의 외적 초과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부정성’ 그 자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수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적 변증법의 부否를 보충하는 프로이트적인 Ver-시리즈(억압, 폐제, 부정, 부인)는 단지 그러한 부의 복잡화인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부, 헤겔을 빠져나가고 순수 반복에 대한 헤겔 이후의 여러 상이한 버전들에 흔적을 남긴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p871~2」

 

  속되게 말해 프로이트가 이긴 건가? 여하튼 조금만 건너뛰거나 정신을 놓아도, 뭐라는 건지 알기 힘들게 둘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여하튼 헤겔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말씀인 듯.

 

 

5. 지양과 반복

 

  헤겔이 죽음충동을 사유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겔이 직접 주제화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충동이란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이다.

 

  「즉 헤겔 본인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은 헤겔 이후의 단절에서나 가시적으로 된 반복적인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변증법의 토대에 변증법과 변증화될 수 없는 그것의 핵심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충동 또는 반복강박은 헤겔이 채 주제화하지 못한 전제인 부정성의 핵심이다. p876」

 

  헤겔 이후의 단절에는 두 측면이 있다. “개념적 매개와는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실정성에 대한 주장과, 지양이라는 관념론적 운동 속에는 담길 수 없는 순수 반복에 대한 주장이다.” 첫 번째가 훨씬 주목받았지만, 진정한 철학적 혁명은 두 번째에 있다.

 

  「반복은 직접적인 적극적 긍정의 봉쇄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877」

 

 

6. 반복에서 충동으로

 

  라캉 정신분석의 틀에서 설명할 때 지젝은 늘 ‘욕망에서 충동으로’ 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절의 제목은 ‘반복에서 충동으로’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순수 차이와 상관적이고, 차이는 반복을 통해 출현한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헤겔에서 라캉으로의 이행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7장은 ‘2부 헤겔’의 마지막 장이며, 8장부터는 ‘3부 라캉’이 시작된다. 한국판으로 하자면 ‘헤겔 레스토랑’ 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라캉 카페’에서의 차 한 잔이 준비되어 있다. 잔뜩 집어넣은 배속이야 물론 소화도 못 시킨 채 부글거리지만, 여하튼 이제 마무리 할 때이다.

 

  「실제로 욕망과 반대로 충동은 규정상 만족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동 속에서 만족은 대상에 도달하려는 반복된 실패 속에서, 대상 주위를 반복해서 빙빙 도는 가운데 획득되기 때문이다. 밀레를 따라 여기서 결여와 구멍 사이의 구분을 도입해야 한다. 결여는 공간적이며 공간 내부의 공백을 가리키는 반면 구멍은 보다 철저한 것으로 그러한 공간적 질서 자체가 (물리학의 ‘블랙홀’에서처럼) 무너지는 지점을 가리킨다. 바로 거기에 욕망과 충동의 차이가 있다. 즉 욕망은 자신의 구성적 결여에 근거하는 반면 충동은 구멍 주위를, 존재의 질서 속의 간극 주위를 빙빙 돈다. p882」

 

  칸트에서 헤겔로의 전환과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전환은 비슷한 면이 있다. 욕망은 만족될 수 없다. 물 자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물 자체는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간극 자체이다. 충동의 목적은 표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표적 주위를 반복해서 도는 것 자체에 있기 때문에 만족될 수 있다. 자본의 순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으로서의 돈의 순환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충동의 양식에 들어간다. 가치의 확대는 오직 부단히 갱신되는 이러한 운동 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충동은 어떤 특수한 개인에 속하지 않는다. - 오히려 자본의 직접적 ‘대리인들’ (자본가들 자체, 최고 경영자들)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p883」

 

  욕망과 충동의 관계는 라캉의 대상a를 통해 더욱 분명히 살펴 볼 수 있다.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우리는 원래 잃어버렸으며, 자신의 상실과 일치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출현하는 대상을 갖게 되는 반면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대상’은 직접적으로 상실 그 자체이다. -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의 전환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대상으로부터 대상으로서의 상실 그 자체로 이동한다. p884」

 

  인간적인 차원은 바로 이 충동에 있다.

 

  「인간들은 그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초과해서 즐기려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히며, 눈에 띄며 사물의 일상적 흐름을 탈선시키는 잉여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 역설은 특별히 인간적인 차원 -본능과는 대립적인 충동- 은 원래는 단지 부산물에 불과했던 것이 자율적 목표로 격상될 때 출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 더 ‘성찰적인 것’ 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동물에게는 아무런 고유한 가치도 없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지각한다.... 우리는 동일한 제스처를 반복하며, 거기서 만족을 찾는 폐쇄된, 자기추진적인 고리에 사로잡히게 될 때 ‘인간’ 이 된다. p886~7」

 

  지젝은 헤겔의 한계를 단순히 무시해 버려도 되는 어떤 것으로 버려두지 않는다. 헤겔 이후의 사상인 키르케고르-프로이트적인 순수 반복에 대해서 말하자면, 오직 헤겔적 문제 틀 안에서만 제대로 위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단순히 무시될 수 없다. 헤겔을 무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몹시 고되게 헤겔을 돌파한 연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젝은 말한다. “헤겔을 반복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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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 3

왕, 천민, 전쟁 ..... 그리고 섹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가 헤겔의 ‘왕’ 이다. 프랑스는 왕의 목을 잘라버렸는데, 헤겔은 군주제를 지지했다. 그것도 멍청한 왕, 그냥 서명만하는 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질서가 확고하게 잡혀있어 법률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국가에서 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왕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왕의 혈통 때문이다. (하긴,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그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순전히 형식적인 이 결단의 주체는 라캉의 주인기표와 같다고 지젝은 설명한다. 주인기표 없이 하나의 장場은 누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왕이란 말인가? 그것이 헤겔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젝은 왜 그것을 누누이 강조할까? 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물론 지젝이 현대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는 의미로 되풀이 ‘왕’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왕’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EBS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들으니,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제일 덕목이 ‘지식’ 이라고 했다는데, 헤겔은 그런 것 하나도 필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에게 도대체 지식은 필요한 걸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제제는 18~9C 헤겔이 생각한 군주정에도 미치지 못하고, 차라리 16C 피렌체 공화국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헤겔과 플라톤은 왕에 대해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최고로 생각했다. 현명한 지식을 가진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최고의 정치체이다. 헤겔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흔히 군주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군주가 교양을 제대로 갖추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국가의 정점을 차지할 만한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국가가 어떤 운세에 처하느냐는 군주로 인한 우연에 좌우된다느니 하면서 그와 같은 상태를 이성적인 상태로 현실에 존재하게끔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주장이 내세워지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격의 특수성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전제는 지금 여기에 전혀 합당치 않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에서는 오직 형식적 결단을 행하는 정점만이 중요할 뿐이며, 오직 군주의 최측근에 있는 단 한 사람만이 ‘그렇습니다’ 라는 한마디로 끝마무리하는 점을 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결코 성격의 특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질서가 잡혀 있는 군주제에서는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만 귀속되어 있고 군주는 다만 이 법률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의지한다’라는 것을 덧붙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762~3」

 

  헤겔의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 무언지 모르지만, 조금 짐작은 된다. ‘확고한 질서’ 가 잡혀 있고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 귀속’ 되어 있으니, 사실 왕은 있으나마나다. 그런데도 헤겔은 왜 굳이 ‘덧붙이기만’ 하는 왕의 존재를 역설할까?

 

  라캉적 용어로 말하자면 S2와 S1의 차이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전적으로 S2 즉 지식담화라면 헤겔의 군주정은 S2에 S1 즉 주인담화을 덧붙인 것이다. 본래 S1이란, 권위란, 어떤 이유도 필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이다. 아버지에 복종하는 것은 아버지가 유능하고 정직하고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며, 진정한 부권에 대한 부인이다. 종교적 의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학담화는 ‘이유’들을 필요로 한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학담화의 문제점은 그것이 정치가 아니라 ‘기술 관료적’ 인 권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세계사가 겪은 관료제의 가장 큰 재앙은 전체주의 정권이다. 헤겔은 이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주인담화와 대학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라캉적 용어를 빌리자면, ‘자연적’ 권위로부터 이유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권위로의 이러한 이행은 물론 주인의 담화로부터 대학의 담화로의 이행이다. 정당화된 권력 행사라는 이러한 세계는 또한 대단히 반정치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기술 관료적’ 이다. 즉 나의 권력 행사는 모든 합리적인 인간 존재에게 접근 가능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승인된 이유들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는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전적으로 대체 가능하며, 나는 모든 사람이 내 입장이라면 행동했을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 경쟁적인 투쟁의 영역으로서의 정치, 환원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성)의 명료화로서의 정치는 직접적으로 보편적 이익을 구현하는 합리적 관리〔행정〕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p768」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르브륀’ 이라는 ‘헤겔의 최상의 독자’마저 헤겔의 ‘국가 관료제’라는 개념을 위와 같이 해석했다. 이런 관점은 헤겔을 플라톤의 ‘철인-왕’ 전통에 줄 세운다. 그러나 지젝은 헤겔이 ‘정당화된 권위’ 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헤겔은 진정한 권위는 항상 동어반복적인 자기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권위의 행사는 찬반의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무한한 연쇄를 깨뜨리는 우발적 결정의 ‘비합리적’ 행위이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군주제를 옹호하는 근본적 이유 아닌가? 합리적 총체성으로서의 국가는 정상에 ‘비합리적’ 권위라는, 자질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권위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 다른 모든 공복〔공무원〕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만 왕은 바로 왕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해 정당화된다.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를 표현하자면, 국가 행위들의 수행적 측면은 왕을 위해 남겨진다. 국가 관료제는 국가의 행위의 내용을 준비하지만 그것을 실현해 사회에 강요하는 것은 왕의 비준이다. 헤겔은 ‘전체주의적’ 유혹에 맞서 사회체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 관료제 속에 구현되어 있는 ‘지식’과 왕 속에 구현되어 있는 주인의 권위 사이의 이러한 거리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전체주의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인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권위를 강요하고 합리적 지식의 제안들을 무시하는 정권이 아니라 지식이 즉각 ‘수행적 권력’을 떠맡는 정권을 말한다. -스탈린은 주인이 아니었으며(그렇게 자임하지 않았으며), 지식과 능력에 의해 정당화되는 인민의 최고의 공복이었다. p769」

 

  여기서 전체주의 정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식의 왕조정권이 아니다. 그리고 헤겔의 군주제 역시 그런 전근대적 왕조정치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겪었을 뿐 아니라 제3세계 빈곤국이 겪고 있는  일인 독재의 유형과도 다르다. 스탈린은 인민의 의지를 직접 대변하는 최고의 관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국가 관료제는 왜 전체주의가 되는 걸까? 여기서 지젝이 명료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는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의지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전도가 일어난다. 영도자가 인민의 의지를 완전히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으로 영도자의 의지가 곧 인민의 완전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대학담화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는 헤겔 역시 마찬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나 ‘확고한 질서’ 가 가능할까? 객관적인 면들이 완전히 ‘법률에 귀속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헤겔의 왕은 실로 불가능한 국가의 불필요한 왕이 아닌가? 여하튼 조금 더 인용해 보자.

 

  「헤겔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전통적 권위의) 주인의 담화와 (이유들에 의해 또는 주체들의 민주적 동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근대적 권력의) 대학의 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헤겔은 주인의 권위의 카리스마는 가짜이며, 주인은 사칭자라는 것을 간파했다. - 그를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그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다(그의 신민들이 그를 주인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헤겔은 또한 만약 그러한 초과를 제거하고 전문가적 지식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된 자기투명한 권위를 부여하려 한다면 결과는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비합리성’은 국가의 상징적 수반에 국한되는 대신 사회적 권력의 몸체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카프카의 관료제란 바로 그처럼 주인의 형상을 박탈당한 전문적 지식 정권이다. -벤야민이 일기에서 보고하고 있듯이 카프카가 ‘유일하게 진정 볼세비키적 작가’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옳다. p769~770」

 

  헤겔의 왕은 말하자면 ‘단독성’ 이다. 우연성이 필연성의 핵심 자체에 기입되는 지점인 주인 기표다. 민주주의적 선거가 보편적인 현대에도 이런 우연성은 작동한다.

 

  「그리고 뒤피가 지적하듯 선거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즉 선거 과정에서도 또한 우연성, 운, ‘인기몰이’의 계기가 핵심적이다. 완전히 ‘합리적인’ 선거는 도대체 선거가 아니라 투명한 객체화된 과정일 것이다. 전통(근대적) 사회는 이 문제를 결과를 ‘입증해 주며’,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선험적 원천(신,왕)을 환기시킴으로써 해결했다. 바로 거기에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 즉 근대 사회들은 자신을 자율적이며, 자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더 이상 외적인 (선험적) 권위의 원천에 의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거 과정에서는 ‘운’ 이라는 계기가 여전히 작동해야 하는데, 정치 해설가들이 툭하면 ‘비합리성’을 역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영원한 여론조사로 환원된다면 민주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기계화되고 양화되며 ‘수행적’ 성격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p766」

 

  우리가 선거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핵심이 된다. 그 우연성이 없다면 선거는 그냥 여론 조사에 불과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끝이 나지 않는다. S2들의, 지식의 끝없는 연쇄이다. 상황은 너무 복잡하고, 항상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남고, 찬반을 따지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S1, 주인기표는 여기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내가 그랬으니 그런 것이다.” 는 끝없는 찬반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다. 그 내용의 결과는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우연성이 없이는 ‘행위’ 역시 없다.

 

  「르포르가 지적하듯이 투표는 (희생적) 의례로, 의례를 통한 사회의 자기파괴와 재탄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운 자체가 투명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으로 외부화되고/물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인민〕의 의지’는 고대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의지 또는 운명의 손으로 간주했던 것의 현대적 등가물이다. 사람들이 직접적인 자의적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즉 순수한 운의 결과를 사람들은 만약 그것이 최소한의 ‘실재’를 가리키면 받아들일 수 있다. - 헤겔은 오래전에 이것을 알고 있었으며, 군주제를 옹호하는 그의 논점은 이것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p767」

 

  헤겔의 왕이나 선거의 결과는 모두 이 최소한의 ‘실재’ 이다. 순수한 ‘운’을 운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해 줄 수 있는 실재, 그것이 ‘왕’ 에게 필요한 것이 오직 혈통뿐인 이유이다.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혈통이기 때문에 토를 달 수 없는 ‘실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왜 헤겔이 다만 ‘덧붙일’ 뿐인 왕을 필요로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역사가 말하듯 그것이 오로지 왕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역할을 할 무언가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험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합리적인 이성 국가’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역으로 지젝이 헤겔의 ‘왕’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완전히 투명한 합리적인 이성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헤겔이 구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 조차 그 정점에 불합리한 요소인 ‘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불합리한 요소는 바로 체계의 ‘초과’ 이다.

 

  그런데 지젝은 여기서 헤겔의 한계를 지적한다. 체계의 불완전성을 구현하는 그 ‘초과’는 최상위의 ‘왕’의 존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하위의 ‘천민’에도 있다는 것을 헤겔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천민’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보편성이 되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섹슈얼리티’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천민은 잉여, part of no part 이다.

 

  「여기서 쉽게 천민과 섹슈얼리티 사이의 유사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국가 관료제 보다는) 천민 속에서 ‘보편적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적 열정 속에서 문화도 또 자연도 아닌 초과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이 두 가지 경우에서 각각의 논리는 다르지만 (천민과 관련해 헤겔은 초과적/불협화음적 요소의 보편적 차원을 간과한다. 섹스와 관련해 그는 초과 그 자체, 자연/문명이라는 대립의 기반이 침식되는 것을 간과한다) 이 두 실패는 연결되어 있다. 초과는 보편성의 자리, 보편성 자체가 자신의 특수한 내용의 장 속으로 자신을 기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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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6_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1. 구체적 보편성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다 어렵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체적 보편성’은 참 까다로운 개념이다. 일단 보편성universality, 특수성particularity, 단독성(개별성,특이성)singularity의 삼항조가 있다. 나는 가끔, 틀린 줄 알면서도 개념들을 짝 짓거나 줄 세우기 해버릴 때가 있다. 너무 복잡하니까, 이해를 위해 일단 가정을 하는 경우도 있고, 기억하기 위해 단순화해서 저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면에서 본다면, ‘구체적 보편성’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단독성? .. 정도로 가정하고 읽어 보자.

 

  일단 지젝은 구체적 보편성이란 주관적 입장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독해의 경우, 독자-해석자의 주관적인 입장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식하는 주체가 외부에 있을 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추상적 보편성에 불과하다. 주체가 내부의 운동에 개입할 때 비로소 구체적 보편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보편성은 그것을 더럽히는 특수한 내용에 시달린다. 반면에, 특수성 역시 내포된 보편성에 의해 잠식당하고 시달린다.

  한때 유행했던 똘레랑스는 이 문제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아랍 여성들이 전통이라는 이유로 음핵 절제 수술을 받고 온몸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할 때, 그것은 아랍의 특수한 문화이므로 존중하고 관용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문제는 인권이라는 보편성이다. 아랍 여성들 역시 그들의 특수한 문화에 보편적 인권으로 저항한다. 특수성은 그 자체로 보편성에 의해 끊임없이 잠식당하는 것이다.

 

  「‘구체적 보편성’은 특수한 것과 좀 더 넓은 전체 사이의 관계, 특수한 것이 타인들 및 그것의 맥락과 관련을 맺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것이 자신과 관련 맺는 방식, 그것의 특수한 정체성 자체가 내부로부터 분열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 보편성’은 정확히 나의 특수한 정체성이 내부로부터 부식되며,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이 나의 특수한 정체성에 내속적임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보편성은 오직 좌절된 특수성을 통해 또는 그것의 자리에서만 ‘대자적’으로 출현한다. 보편성은 특수한 정체성 안에 완전히 자신이 될 수 없는 무능력으로 자신을 새겨 넣는다. 즉 나는 특수한 정체성 속에서 나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한에서 보편적 주체이다... 보편성은 나의 특수한 정체성 안에 그것의 단절로, ‘어긋남’으로 새겨질 뿐만 아니라 보편성 ‘그 자체’는 현실성 속에서 그저 내부로부터 모든 특수한 정체성을 봉쇄하는 이 절단일 뿐이다. 특정한 사회질서 내부에서 보편적 주장은 오직 특수한 정체성을 실현하는 것을 금지당한 집단만이 제기할 수 있다. p650」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만이 ‘우리가 전부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 안에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어긋남, 실패, 불완전성의 표상이기 때문에, 이 몫 없는 자들은  사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 있다. 동일하게 최태섭의 『잉여사회』가 소묘하는 ‘잉여들’ 또한 구체적 보편성이다. 잉여가 우리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서 현실화가 가장 철저히 좌절당한 세력이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의 상처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헤겔의 머리 아픈 개념들 중에는 ‘개념’도 있다. “본래의 ‘개념’은 ‘나’, 주체 자체이다.” 일단 개념이 나다, 개념이 주체다, 를 기억해 두고 다음의 문장을 이해해 보도록 노력해 보자.

 

  「헤겔은 ‘주관적 논리학’의 시작 부분에서 개념의 ‘주관성’을 가장 간결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먼저 개별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개별성은〕개념이 자기의 규정성을 바탕으로 해서 펼쳐나가는 자기 자체 내로의 반성으로 나타난다. 결국 개별성은 개념이 자신을 통해서 행하는 매개이거니와 그 이유는 개념의 외타적 존재가 또다시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화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개념은 자기 자신과 동등한 상태로 회복되면서도 역시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부정성이라는 규정하에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p655 」

 

  웬만하면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전혀 못 알아먹었다. 여기에 드디어 ‘개별성’이 나왔기 때문에 일단 인용해 놓은 것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에 이은 나머지 하나의 삼항조인 그 개별성 말이다. 개념은 나 혹은 주체이고, (그래서?) 주관적인데, 이 개념이 결국 막 운동을 해서 출현한 것이 개별성이라는 뜻인가? ..라고 생각해 보고, 계속 읽어 보기로 한다.

 

 「모든 개념 속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즉 모든 개념은 규정상 보편적인 것으로, 일련의 특수한 것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있는 단 하나의 추상적 특징을 가리키며, 정확히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항상 특수하다. p655」

 

  「보편성과 특수성은 하나의 동일한 개념의 두 측면이다. 즉 그것의 ‘추상적’ 보편성 자체가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은 미규정성과 규정성의 직접적 통일이다. p656」

 

  「왜 그리고 어떻게 개념은 주관적인가? 먼저 그것은 오직 주체, 즉 추상화 능력을 갖춘 사유하는 존재의 정신 속에서만 그러한 것으로 정립된다.... 다음으로 훨씬 더 급진적인 의미에서, 즉 개별성으로의 이행은 주체적 개념으로부터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주체(자아,나) 자체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단독성 속에서의 주체는 키르케고르가 모든 보편적 매개로 환원 불가능한 단독성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656」

 

  여기서 단독성과 개별성이 동일하게 singularity의 번역어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단어들의 번역인지 모르겠다. singularity는 역자에 따라, 단독성, 개별성, 특이성 따위로 옮겨지던데, 원문이 없으니 모르겠다. 이렇게 어려운 문장을 읽어야 할 때는 하나의 단어를 열쇠어로 따라가야 그나마 이해가 좀 쉬운 편인데, 한 단어를 여러 단어로 옮겨 버리면 정말 짜증이 난다. 그런 경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별성은 individuality의 역어일 수도... 아 모르겠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절대적 모순은 오직 개념의 보편성이 그 자체로, 그 타자성, 모든 특수한 규정에 맞서 그 자체로 주장되거나 정립될 때만(또는 출현할 때만) 해결될 수 있으며, 그것들의 직접적 겹침은 매개될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개념은 ‘자신의 피규정성으로부터 자신 속으로’ 돌아오며, 자신을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하지만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복귀시킨다. - 모든 실정적 내용을, 모든 특수한 규정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면서 말이다. 순수한 나 (데카르트적 코기토, 또는 칸트적인 초월론적 통각)는 단지 모든 한정적인 내용에 대한 그러한 절대적 부정일 뿐이다. 즉 모든 규정의 철저한 추상화의 공백, 모든 한정적인 사유가 비워진 ‘나는 생각한다’의 형식이다. 여기서 헤겔 본인이 ‘기적’이라고 언급한 일이 일어난다. 즉 모든 내용이 비워진 이 순수한 보편성은 동시에 ‘나’의 순수한 단독성이기도 한 것이다. p656~7」

 

  결국 코기토가 순수한 보편성인 동시에 순수한 단독성이라는 말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보편성과 특수성, 개별성 혹은 단독성의 관계가 머릿속에 똑 떨어지게 그려져야 하는 건가? 

 

 「이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한 보편성과 순수한 단독성의 일치이며, 철저한 추상화와 절대적 단독성의 일치이다. 그리고 헤겔이 ‘나’ 속에는 개념이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로 겨냥하고 있던 것 또한 이것이다. p657」

 

  앞부분에서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가,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보편성과 단독성의 관계가 논증된다. 그러면 이 두 부분은 어떻게 연결될까? 그래야만 이 삼항조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모순이 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성에 의해 보편성과 나 사이의 모순이 해결된다. 즉 어떻게 순수한 나는 보편성과 단독성이 직접적으로 일치하며, 모든 한정적 내용을 배제하는 철저한 자기관계 맺기적 부정성의 심연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의지와 결단이라는 실천적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순수 개념으로서의 주체는 자유롭게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어떤 한정적인 특수한 내용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한정된 내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주체의 ‘내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에만, 하나의 세계를 안정화시키는 순수한 주체적 결단 또는 선택에만 근거하고 있다. p659」

 

  여기서 지젝이 보편성universality, 특수성particularity, 단독성(개별성)singularity의 삼항조를 연결해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전에 읽은 책들에서 이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서, 이 세 단어를 따라서 한 번 읽어 봤을 뿐이다. 그런데 단독성과 개별성이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 같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여전히 이 삼항조는 안개 속이지만 조금은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하고.... 뭐 그렇다. 어쨌거나 너무 길다. 망함;;

 

 

2. 헤겔, 스피노자 ..... 그리고 히치콕

 

  헤겔과 스피노자 사이의 가장 순수한 대립은 ‘실체’ 에 있다. 스피노자의 절대자는 주체화하는 누빔점 없이 속성들과 양식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실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클리나멘이다. 클리나멘은 들뢰즈의 개념인 줄 알았으나, 지식검색에 의하면 에피쿠로스가 이미 고대에 정립해 놓은 개념이란다. 사전적 의미는 ‘원자이탈’이며, 보통은 ‘관성적인 운동과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으로 정의된다. 지젝은 ‘한정적인 존재자들을 낳는 실체의 휨’ 이라고 설명한다. 직선 운동을 하는 원자가 장애물에 부딪쳐 휘게 되는 현상으로, 이 우연적 휨은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생성과 탈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산적인 힘이다.  그런데 지젝은 클리나멘을 보편화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클리나멘의 핵심적 측면이 소멸되어, 정반대의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만약 존재하는 모든 것이 중단 또는 떨어져 나감이라면 놀라움, 즉 예상치 못한 우연성의 침입의 핵심적 측면은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우연성이 완전히 예견 가능하고 필연적인 지루하고, 맥 빠진 세계 속에 놓일 것이다. p662」

 

  이것이 누빔점이 없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가진 문제점이다. 누빔점은 클리나멘의 연속적 흐름을 중단하고, 소급적으로 장 전체를 재구조화한다. 헤겔적 변증법적 과정이 바로 이런 누빔점, 즉 주인 기표의 도입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문장 속에 언표의 흐름은 무한대로 이어질 수 없다.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언표들의 의미가 소급적으로 고정되고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그러나 마침표가 의미와 해석을 완전히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마침표는 항상 우연적으로 찍혀지면서 잉여를 낳는다. ‘법은 법이다’는 동어반복이 법의 의미를 완전히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이면의 어떤 과잉을 내포하는 것과 같다.

 

  「헤겔을 스피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정식화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클리나멘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이다. 스피노자적 실체는 다수의 클리나멘을 낳는 생산적 역능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신의 산물들에 완전히 내재적이며, 오직 그러한 산물들, 클리나멘들 속에서만 현실적인 잠재적 독립체로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에게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의 클리나멘들은 실체 자체 속의 보다 철저한 클리나멘 -전도 또는 부정성- 을 전제한다. (실체가 또한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75~6 」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한 철저한 독해를 통해 실체는 다름 아니라 그것의 클리나멘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여기서 실체는 일자로 남아 있으며, 원인은 결과들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즉 실체는 없으며, 오직 절대적 간극, 비동일성으로서의 실재만 있을 뿐이며, 특수한 현상들은 이 일자들, 이 간극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다. p677」

 

 

3. 헤겔적 주체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헤겔의 ‘절대자’ 이다. 이것은 ‘실체는 주체’ 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양자는 즉각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는 항상 이차적이다. 주체는 결코 모든 현실을 정초하는 직접적인 원리가 아니다. ‘절대적 자기정립’은 피히테의 개념이다. 헤겔의 ‘실체=주체’라는 생각은 여기에 맞선 무한판단의 작용이다. 무한판단은 ‘정신은 뼈다’, ‘생식기는 배뇨기다’와 같은 것이다. 실체의 불완전성, 내적 불가능성을 구현한 것이 주체이다. 주체가 정초적 원리가 아니라 이차적인 부정성이라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주체는 모든 현실을 낳는 실체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정확히 절단, 실패, 유한성, 환상, ‘추상화’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는 단순히 실체는 ‘실제로’ 주체적인 자기매개의 힘 등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체는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이, 절대적 나의 자기정립이라는 피히테의 개념에서 정점에 달하는 ‘주체주의적’ 전통에 맞서 명확하게 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주체가 먼저 오는 것이 아니며, 주체는 모든 것을 정초하는 일자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일자의 내적 불가능성 또는 자기봉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p681~2」

 

  「요약하자면 주체로서의 실체라는 헤겔적 모티브는 실재로서의 절대자는 단지 유한한 존재자들과 다르거나 구별되어 있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 절대자는 다름 아니라 이 차이이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서 실재는 비동일성 자체이다. X가 ‘완전한 자신’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 실재는 X가 자신과 동일하게 되는 것의 실현을 막는 외적 침입자나 장애물이 아니라 그러한 동일성의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불가능성이다... -불가능성이 먼저 오고, 외적 장애물은 궁극적으로 단지 이러한 불가능성을 실현시킬 뿐이다. 그 자체로서 실재는 불투명하고, 접근 불가능하고, 가닿을 수 없으며 그리고 부인할 수 없으며 우회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 안에서 결여와 잉여가 일치한다. p682~3」

 

  주체는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존재란 무엇일까라는 물음만큼이나 방대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주체란 그럼 사람이 아닌 것일까? 주체가 자기 부정성이며, 공백이며, 혹은 코기토에 불과하다면 사람과 주체의 관계란 무엇일까? 단순히 말해 나는 주체가 아닌 걸까? 내 기억으로는 지젝이 주체와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하여간 여기에 얼마간의 답이 있다.

 

  「주체는 여기서 통상 '사람person'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립된다. 즉 ‘사람’은 ‘자아’의 실체적 풍부함을 대변하는 반면 주체는 부정적인 자기 관계 맺기의 특이점으로 수축된 이 실체이다. 여기서 주체-객체, 사람-물物이라는 두 쌍이 그레마스적인 기호론적 사각형을 형성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즉 만약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두 개의 대립물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물론 자신과 반대되는 것(맞짝)은 ‘객체’ 이지만 그것의 ‘모순’은 ‘사람’이다. (순수한 주체성의 공백과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내적 삶의 ‘병리적’ 풍부함). 이와 대칭적으로 ‘사람’에 대칭적인 맞짝은 ‘물物’이며, 그것의 ‘모순’은 주체이다. ‘물物’은 구체적인 생활세계에 끼워 넣어져 있는 어떤 것으로, 거기서 생활세계의 의미의 전체적 풍부함이 반향 되는 반면 ‘객체’는 ‘추상화’, 즉 생활 세계에 끼워 넣어져 있던 것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진 어떤 것이다. 주체는 ‘물物’(보다 정확하게는 몸)의 상관물이 아니다. 사람은 몸속에 거주하는 반면 주체는 (부분) 대상의, 신체 없는 기관의 상관물이다. 따라서 사람-물은 주체-객체라는 쌍이 추론되는 출발점이 되는 생활세계의 총체성이라는 통념에 맞서 주체-객체(라캉적으로 표현하자면 $-a, 즉 빗금쳐진 주체와 한 쌍을 이룬 소문자 대상a)를 본원적인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 - 사람-물이라는 쌍은 그것의 이차적 ‘순치’ 이다. 주체-객체로부터 사람-물로의 이행에서는 뫼비우스 띠의 안으로 접힌 관계가 사라진다. 사람들과 물들은 동일한 현실의 일부인 반면 객체는 주체 자체의 불가능한 상관물이다. p677~8」

 

 문장 자체로는 이해가 가는데, 그럼 나는 언제 주체가 될 수 있나? 생활세계로부터 벗어나, 몸의 병리적 정념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공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part of no part' 가 되면 주체가 되는 걸까? 혹은 'part of no part' 가 주체의 필요조건인 걸까? 이렇게 철학을 갑자기 삶 속으로 끄집어 들이면 안되는걸까? 철학과 삶을 접목시켜 읽는다는 것은 항상 어렵고 또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왜 철학책을 읽는단 말인가..

 

  「‘투시할 수 없는 원자적 주체성’ 속의 인격성, 나의 모든 긍정적 속성을 넘어선 ‘나’의 심연 또는 공백은 개념적 단독성〔특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의 ‘실제로 존재하는’ 추상화이다. 즉 그러한 추상화 속에서 개념의 부정적 힘은 현실적 실존을 획득하며, ‘대자적인 것’ 이 된다. 그리고 라캉의 $, ‘빗금 처진’ S는 정확히 그러한 개념적 단독성〔특이성〕, 어떠한 심리적 내용도 없는 특이성이다. p689」

 

  이것은 개념의 보편성이 ‘외적 현실’로 이행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보편성은 자신의 대립물의 형태로 즉 현실의 다수성이 순수한 단독성으로 수축되는 형태로 현실적 존재를 얻는다. 일단 단독성과 보편성, 개념과 현실의 관계가 언급되었으므로, 명기해 둔다. 어쨌거나 $가 단독성이네 뭐.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4. 절대적 앎

 

   헤겔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중에 ‘역사의 종말’ 이나 ‘절대적 앎’ 따위가 있다. 물론 헤겔이, 자신이 사는 역사적 순간에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구절들이 충분히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절대적 앎 역시 통상 오인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즉 헤겔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한계, 즉 우연적인 역사적 맥락에 끼워 넣어져 있음에도 우리는 -또는 적어도 헤겔 본인은- 어쨌든 이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절대지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가 절대적 앎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표시 자체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절대적 앎에 이르게 되어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절대적 앎’이란 우리 자신의 ‘단지 주관적인’ 관점의 상대성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외적 참조점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703」

 

  쉽게 말하면 이렇다. 만약 우리 앎은 주관적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 주관성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절대적 관점을 끌어들이게 된다. 헤겔은 이 문제를 거꾸로 해결한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앎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부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 앎은 거기서 모든 앎이 종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만약 헤겔의 절대적 앎을 ‘끝마무리하는 점을 찍는’ 행위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형이상학이 종결되는 계기인 동시에 같은 이유로 헤겔 이후의 사유의 광대한 영역이 열리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헤겔 본인의 체계를 종결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유에서 배제된 다수의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종적 종결이라는 헤겔적 계기를 요약하는 최고의 방법은 청년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사용한 정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길이 끝나고, 여행이 시작된다.” 원은 닫히고 우리는 끝에 다다랐으며, 내재적 가능성은 소진되고, 그리고 이 똑같은 지점에서 모든 것이 열린다. 오늘날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거의 불필요한 짐을 떠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할 능력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704」

 

  절대적 앎은 ‘무한판단’으로 읽을 수 있다. ‘정신은 뼈다’ 는 골상학의 터무니없음이다. 정신을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음에 대한, 그 불가능성에 대한 표현이 무한판단이다. “절대적 앎은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헤겔이 달성했다고 주장하는 우주에 대한 총체적 지가 아니라 그러한 주장의 터무니없음 자체를 가리키는 역설적 이름이다.”

 

 

5. 이념의 변비?

 

  헤겔의 비판자들은 헤겔이 소화시키지도 못할 것을 삼켜 변비에 걸렸다는 것이고, 지젝은 거꾸로 헤겔이 한 일은 정확히 그 반대인 배변이었다고 반론한다.  이념은 변비가 아니라 배설이다. 여하튼 더러운 똥 얘기는 잠깐 미루고 색깔 얘기에서 시작하자.

 

  「생명은 푸르며, 개념들은 회색이고, 개념들은 구체적 현실을 해부하며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본래적인 의미의 철학적 사유는 그러한 ‘추상화’ 과정이 현실 자체에 내속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될 때 시작된다. 경험적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적 규정들 사이의 긴장은 현실에 내재적이며, ‘물 자체’의 특징이다. .... 회색, 맥 빠지고 어리석은 현실인 것은 이론 없는 생명이다. - 그것을 푸른색으로, 진정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현실을 움직이게 하는 매개들과 긴장들의 기저에 깔린 복잡한 네트워크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론뿐이다. p707~8」

 

  풍부한 규정들이 아니라 추상화가 생명을 불어 넣는다. 중요한 것은 개념적 규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름이 사물의 내적 잠재력을 강조해준다. 누구를 ‘선생님’ 이라 부를 때, 그 호칭은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의 개요를 그려준다. 어떤 것을 ‘의자’ 라고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물의 잠재성을 조명해 주는 것은 그것에 대한 호칭이다.

 

  다시 똥 이야기로 돌아와서,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은 헤겔적인 절대적 실체-주체를 변비에 걸린 것으로 본다. 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체계는 ‘정신이 된 배腹’ 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시원한 ‘배변’ 이다.

 

  「주체 자체는 폐기된 또는 깨끗하게 치워진 실체,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성의 텅 빈 형식의 공백으로 환원된, ‘인격성’의 모든 풍부함이 비워진 실체이다. p715」

 

  헤겔이 절대적 앎이라고 부르는 것의 주체는 이렇게 텅 비워진 주체인데, 무슨 변비는 변비냐는 말장난 되겠다. 또한 놓아주는 것, 풀어주는 것, 즉 배변은 헤겔적 개념의 전개가 완결되면서 일어난다.

 

  「개념의 전개가 완결되면서 절대 이념의 원환을 닫을 때 이념은 결심 또는 결단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을”을 자연 속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p715」

 

  「그렇다면 바로 이런 식으로 헤겔의 ‘철학의 세 번째(?번역이 이상한 듯;; 그럼 첫째, 둘째 삼단논법이 있나?;; ) 삼단논법’, 정신-논리학-자연을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사변적 운동의 출발점은 정신적 실체이다. 주체들이 그것 안으로 잠겨든다. 그런 다음 끈질긴 개념적 분투를 통해 이러한 실체의 풍부함이 기저에 깔린 논리적 또는 개념적 구조로 환원된다. 일단 이러한 과제가 완수되면 완전히 발전된 논리적 이념이 자신으로부터 자연을 풀어 놓을 수 있다. p720」

 

  ‘절대자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한다’ 는 ‘주체 없는 과정’ 이라는 명제와 동일하다. 이 둘을 대립시킨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틀렸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주체 없는 과정’ 이다.

 

  「 말년의 저술에서 알튀세르는 이 점을 깨닫게 되지만 여전히 그에게 모호하게 남았던 것은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이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이 정확히 어떻게 헤겔의 기본적인 명제 ‘절대자는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한다’는 명제와 동일한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였다. 순수한 주체가 공백으로 출현하는 것은 체계란 대상 자체가 자신을 추동하거나 이끌 어떠한 주체적 행위자도 필요 없이 자신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엄밀하게 상관적이다. 헤겔적인 자기의식을 일종의 메타주체로, 개별적인 인간 정신보다 더 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정신으로 다루는 것이 오류인 것은 이 때문이다. p726」

 

 

  6장 역시 복잡하지만, 결국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되는 절대자라는 것이 라캉의 대타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빗금쳐진 대타자. W(hole). 여기서 hole은 주체로서 실체의 공백, 불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hole은 대타자의 빗금쳐짐과 주체의 빗금쳐짐이 겹치는 것으로, 대타자의 빗금쳐짐에 직면할 때 주체는 소외에서 분리로 이행한다. 등등... W(hole)은 보편성, 빗금쳐진S - $는 단독성이자  곧 구체적 보편성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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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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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 - 데리다 논쟁’ 이란 것이 있단다. 코기토 - 종교 - 광기가 핵심 쟁점인데, 둘 다 코기토와 광기의 연관성을 전제한다. 푸코는 코기토가 광기의 배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데리다는 코기토 자체가 광기를 통해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데리다 편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세상 전부가 환각이 아닐까 하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의심’ 보다 더 한 광기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코기토는 이런 보편적 의심으로부터 출현한다. 비록 이 모든 것이 환각일지라도 나는 내가 사유한다는 것 자체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이 논쟁의 진짜 핵심은 철학의 외부성이냐, 외-밀성이냐에 있다는데, 복잡하니 통과;;)

 

  광기는 칸트의 ‘난폭함’, 헤겔의 ‘세계의 밤’, 셸링의 ‘수축’, 라캉의 ‘죽음충동’과 상동적이다. 칸트는 훈육과 교육이 인간 안의 동물성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동물적인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칸트가 지적한대로 동물들은 제대로 교육될 수 없다. 본능에 의해 그들의 행동이 이미 운명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누리도록 교육을 받으려면 훨씬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즉 ‘예지체적이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의미에서 이미 자유로워야 함을 의미한다. 이 무시무시한 자유를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용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죽음충동’ 이다. 인간의 탄생에 대한 철학적 네러티브들이 항상 인간(이 될 것)이 더 이상 단순한 동물이 아니지만 또한 아직 상징적 법에 묶여 있는 ‘언어의 존재’도 아닌 인간의 (전)사의 한순간을 전제하도록 강요받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아직 문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도착적이고’, ‘탈자연화되었으며’, ‘궤도에서 이탈한’ 본성이라는 계기를 말이다. 칸트는 인류학적 글들에서 인간의 본성에 내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섬뜩한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동물들에게는 규율을 통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강히 자기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려는 거친, 거리낌 없는 성향이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신을 규율할 주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규율은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본성이 아니라 이 ‘난폭함’을 겨냥한다. p608~9」

 

  동물은 자신에게 유해한 행동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물리적인 위해가 닥치는데도 미친 듯이 고집을 꺾지 않을 때가 있다. 죽음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는 이 ‘난폭함’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속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난폭함을 길들이기 위해 외적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칸트적인 자율성은 이 ‘난폭함’을 외적 주인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가 떠맡는 것에 있다. 아이들이 짜증을 낼 때 그것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해 보이더라도 진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지에 대한 ‘한계’를 정해달라는 것이다. 이 한계가 분명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부모만큼이나 아이들을 혼란과 분노에 빠뜨리는 것은 없다. 한계 혹은 기준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체의 칸트적 자율성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이 때문이다. -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를 위해 그러한 일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자연적 권위’의 어떠한 외적 대리인도 없음을, 나 자신이 나의 자연적 ‘난폭함’에 대해 한계를 설정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진정 계몽된 ‘성숙한’ 인간 존재는 더 이상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체, 기꺼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무거운 짐을 전적으로 떠안는 주체이다. p611」

 

  그렇다면 습관은 자유의 대립물이지 않을까? 습관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채 어떤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겔은 습관이 없이는 자유도 없음을 강조한다. 습관이 자유의 배경과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예로 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온 국민이 목을 매는 영어 공부의 지름길은 사실 영어를 습관화하는 것이다. 자유자재로 영어를 구사하려면, 영어의 문법 따위는 잊어야 한다. 문법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야만, 영어로 말하기는 물론, 사고하고 공부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로 다른 과목을 수업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영어에 신경 쓰다 보니 정작 그 과목 자체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어는 향상될지 모르나 영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배우려는 해당 학문 자체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단 칸 방에 기러기 아빠로 살아도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이유가 사실 영어를 습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는 것은 물론 우리는 이미 충분히 습관화된 훌륭한 사고의 도구, 우리의 언어,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미국으로 필리핀으로 떠나보내고 있다. 여하튼..

 

  「언어를 사용할 때 자유를 행사하려면 습관에 완전히 익숙해야 하며, 그것 속에서(그것에 대해)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써먹는 법을, 그것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습관으로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오직 기계화된 습관들 속에서 배운 것을 외부화할 때만이 주체는 “보다 진전된 활동과 일에 대해서 열릴 수 있다.” 인간 주체가 창조적 사유와 노동이라는 ‘보다 높은 수준’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언어뿐만 아니라 일군의 훨씬 더 복잡한 정신적·신체적 활동들이 습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p615」

 

  약간 엇길로 새자면, 늙는 다는 것은 습관을 잊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건망증은 습관적으로 했던 그 많은 일들을 하나씩 잊는 것이다. 라면을  끓이고 나면 습관적으로 가스를 끄고, 세수를 하고나면 습관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용변을 보고나면 습관적으로 물을 내리고, 현관문을 닫고 나면 습관적으로 열쇠를 돌리던, 그 일들을 하나씩 빠뜨리며 우리는 늙어간다. 늙으면 습관으로 산다고도 하지만, 늙으면 습관을 잊어버리고, 그 잊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

 

  “습관은 광기의 불균형을 안정화시키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인사는 습관이다. “안녕? 잘 있었니?” 할 때, 그 누구도 사실 그 날 그 사람이 안녕한지, 아무 일 없이 잘 살았는지가 궁금해서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인사를 기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협약이다. 습관적인 인사는 여전히 좋은 관계임을 확인해 주는 의례이다. 그런데 광인은 이 ‘진지한 거짓말’ 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체이다. 친구가 “잘 있었니?” 라고 인사할 때 광인은 “그게 왜 궁금한 건데? 정말 내가 안녕한지 알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런 체하는 거야?” 라고 분노를 폭발한다. 아니면 얼마나 안녕한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거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습관에는 사실 아무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헤겔의 급진적인 결론은 이렇다. 즉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기호, 즉 개인의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습관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이상한 기호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기호는 라캉이 ‘시니피앙’이라고 부른 것으로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주체 자체의 공백으로, 따라서 궁극적 참조항의 부재는 이 부재 자체가 궁극적 참조항이며, 이 부재가 주체 자체임을 의미한다. p634」

 

  습관은 우연적인 어떤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처럼, 어떤 습관의 우세는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제사 때 절을 두 번하는 습관이나 오른 손으로 밥을 먹는 습관 따위가 투쟁의 산물이라니 좀 우습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오른 손이 반드시 선택되었어야 할 필연적 근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른 손은 우연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되었을 뿐이다.

 

  「광기에 대한 가장 간결한 규정은 보편성과 그것의 우연성들 사이의 직접적 조화, 이 양자를 분리시키는 간극의 철회가 될 것이다. - 광인에게서 객관적 현실 내부에서 그의 불가능한 대리인인 대상은 잠재적 성격을 잃고, 그러한 현실의 완전히 필수적인 일부가 된다. 광기와 반대로 습관은 가상적 성격 덕분에 직접적 동일시라는 이러한 덫을 피한다. 주체가 어떤 습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긍정적 특징들과의 직접적 동일시가 아니라 성향, 가상성과의 동일시이다. 습관은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그것은 ‘본질’로, 보편적 특수성으로 격상된 우연(성)으로, 그러한 보편성의 텅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다. p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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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5_

병렬 :

변증법적 과정의 형상들

 

 

0

 

  나는 ‘지적 직관’을 불가능한 망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과 이크란이 교감할 때 보이는 그런 지적 직관은 인간에게 가능할 리 없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지젝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고 믿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면서 읽기는 했지만 나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첫 부분을 읽으며, 분명히 ‘지적 직관’을 칸트도 헤겔도 그리고 지젝도 단호히 반대 한다고 생각했다.

논변적 지성과 직관적 지성을 구분하면서, 주체는 오로지 논변적 지성만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TWN p34)

 

  「만약 주체가 직관적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주체는 지성을 직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심연을 메울 것이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의 사물들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논변적 지성 대신 직관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물들(대상들)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허하기는 해도 조리가 있는 주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하게, 자발적인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내 능력 안에서 나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 인가? 만일 내가 “생각하는 사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직관을 소유한다면, 즉 만일 내가 나의 예지적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로써 나를 순수 통각의 “나”로 만드는 바로 그 특질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현실을 구성하는 자발적 초월적 행위자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TWN)』p35」

 

  복잡한데 어쨌든 내가 직관적 지성을 갖고 있다면, 나는 칸트가 말하는 그 “나”가 아니게 된다고 읽어 보자. 조금만 더 인용해 보면 헤겔 역시 직관적 지성에 반대한다.

 

  「한편으로 초월적인 “나”를 예지적 사물-자기와 동일화하는 것을 고수한다면, 예지적 자기는 나에게 현상적으로 외양한다. 그런데 이는 현상적인 것과 예지적인 것의 차이가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는 “직관적 지성”, “자신을 보는 눈”을 통해 그 자신에게 주어지는 단독적 주체-대상이 된다. (피히테와 셸링에 의해 성취된, 하지만 칸트에게서는 무조건적으로 금지된 단계 : 철학하기의 “절대적 출발점”으로서의 지성적 직관). 다른 한 편으로 통각의 “나”-현실 구성의 이 자율적 행위자-가 예지적 사물이 아니라면, 현상적인 것과 예지적인 것의 차이는 다시금 소멸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번엔 전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그러하다. 즉, 헤겔의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은 헤겔이 “지성적 직관”이라는 바로 그 개념을 부적합한 “무매개적” 종합으로서 거부한다는 것이다. 즉 논변적 지성을 직관과 분리시키는 환원불가능한 틈새를 고집한다는 점에서 그는 철저하게 칸트적으로 남아 있다. 칸트적 분열을 단순히 치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오히려 헤겔은 그것을 근본화 한다. 어떻게? (TWN) p39」

 

  도식화하자면 칸트와 헤겔은 직관적 지성을 거부하고, 반대로 피히테와 셸링은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이 마음을 바꾸었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5장의 첫 머리에서 갑자기 “직관적 지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해 버린다.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에서 ‘지적 직관’ 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정통 칸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비판 이전의 형이상학으로의 퇴행의 조짐이 아니다.) 칸트 이후의 관념론자들에게 ‘지적 직관’은 예지체적 현실에 대한 어떤 수동적인 직관적 수용이나 비전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항상 적극적인, 생산적인, 자발적인 능력을 가리키며, 그 자체로서 초월론적 상상력의 적극적 종합이라는 칸트적 주제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칸트는 이 개념을 거부했을까? 그는 어떤 문턱을 넘기를 거부했을까? p481~2」

 

  어렵사리 우겨 넣었던 ‘직관적 지성’ 혹은 ‘지적 직관’에 대한 관념(그것도 지젝 자신이 심어둔;;) 을 이렇게 박살내 버리고 지젝은 염장이라도 지르듯, 딴 길로 돌아간다. 칸트 사유의 전체 운운하며 자유 개념부터 시작하는데, 지적 직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줄지 감감하다. 이장의 마지막에 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일단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여하튼 5장 읽기의 목표는 지적 직관에 대한 새로운 답을 얻어내는 것에 있다! 고 결심.

 

 

1. 오성을 찬양함

 

  칸트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성’ 이다.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은 아무도 읽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철학적 개념은 까탈스러워 단순하게 이해하면 틀리기가 쉽다. 하지만 일반인 독자는 그렇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칸트의 ‘이성’ 역시 복잡하지만 여하튼 ‘오성’ 보다는 한 단계 진보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성이란 오성에 무엇을 더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언가를 뺀 것이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모든 것은 오성과 이성 사이의 이러한 동일성/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성이 오성의 분리시키는 힘에 무엇인가를 덧붙여 오성이 떼어낸 어떤 것의 유기적 통일성을 (‘보다 높은 어떤 단계에서’) 재확립해 분석을 종합으로 보충하는 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은 오성 이상이 아니라 이하이며, 바로 그것이 오성이 활동 속에서 하길 원하는 것 또는 하길 바라는 것과 반대로 자신의 현실성 속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오성의 ‘일면성’을 보충하는 또 다른 능력이 아니다. 오성을 피해 나가는 무엇인가 (분석된 사물의 실체적 내용의 핵심)가, 오성이 미치지 못하는 초합리적 너머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성의 근본적 환상이다. 다시 말해, 오성으로부터 나와 이성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오성으로부터 그것을 구성하는 환상을 빼는 것뿐이다. p501」

 

  지젝이 지적하는 것은 처음 보기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그것의 긍정적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오성은 사물이나 과정의 통일성을 산산조각내고 분리시킨다. 그러나 종합하고 통일시키지 못하는 오성의 부정성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며 긍정적이다.

  이 부정성의 힘에 대해 지젝은 조금 색다른 설명을 한다. ‘적은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 이라는 원리가 책을 읽는데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바야르의 『읽지 않는 책에 대해서 말하는 법』의 요지는 “너무 많은 자료는 단지 명료한 시선을 흐릴 뿐”이며 오히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이 어떤 책의 근본적 통찰이나 성취를 이해하는 데 더 낫다는 것이다.

 

  「칸트나 헤겔에 관한 저서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거기서 진짜 꼼꼼한 지식은 종종 단지 지루하기만 할 뿐인 전문가의 주해를 낳을 뿐 살아 있는 통찰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헤겔에 대한 최고의 해석들도 항상 부분적〔당파적〕이다. 즉 사유 또는 변증법적 운동의 특수한 면모로부터 총체성을 추론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헤겔 본인의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가 어떤 놀라운, 상세한 -종종 틀린 또는 적어도 일면적인- 점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헤겔의 사유를 살아 있는 순간 속에서 포착할 수 있다. p507」

 

  기쁘다. 일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지젝을 읽으면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까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은근한 압박감에 눌리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니, 만세다! ㅎㅎ ;;

 

  지젝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게 보는 것이 힘이라고 한다. 눈멂은 통찰로 가는 길이다.

 

  「어떻게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혼란스러운 인상들의 망으로부터 개념이 출현할 수 있을까? ‘추상화’의 힘을 통해, 즉 대상의 대부분의 양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적 측면들로 대상을 환원시키는 것을 통해 그렇게 된다. 우리 정신의 가장 큰 힘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식으로 더 적게 보는 것이며, 현실을 그것의 개념적 규정들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오직 그러한 ‘눈멂’만이 사물들의 진상에 대한 통찰을 낳는다. p506」

 

  오성과 이성의 관계 역시 눈멂과 통찰의 상호 의존적 관계와 동일하다.

 

 

2. 현상체, 예지체, 한계

 

  예지체가 무언지 선뜻 이해할 사람이 많을까? 현상체와 예지체는 영어로 바꿔놓으면 훨씬 분명하게 대비된다. phenomenon 과 noumenon. 어원은 잘 모르겠는데 뭔가 noumenon에 접두어가 붙어 phenomenon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phen’이 ‘보이고 있는’이란 의미를 가진 연결형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여하튼 noumenon은 본체라고도 해석된다.

  현상체와 예지체에 관한 칸트의 정식은 단순하지 않다.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으니 일단 지젝의 문장을 직접 읽어 보자.

 

  「헤겔이 『현상학』에서 도저히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바에 따르면, 현상의 장막 뒤에는 오직 우리가 거기에 놓아둔 것밖에 없다. 따라서 부정성이 초월적 실정성에 선행하며, 현상체의 자기한정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선행한다. - 이것이 칸트의 다음과 같은 명제의 심오한 사변적 의미였다. “그래서 현상들을 현상체들과 예지체들로 분류하고, 세계를 감성 세계와 예지 세계로 구분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전혀 허용될 수 없다.” 현상체와 예지체 사이의 한계는 대상들의 두 실정적 영역 사이의 한계가 아니다. 오직 현상들 그리고 그것들의 (자기) 한정, 부정성만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파하는 순간, 예지체의 소극적 사용에 대한 칸트의 명제를 칸트 본인보다 훨씬 더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칸트로부터 헤겔로, 헤겔적 부정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p511」

 

  칸트는 현상체와 예지체를 구분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지만, 현상 너머에 무언가 물 자체가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현상 뒤에는 우리가 놓아 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놓아두었을까? 바로 장막 뒤에 무언가, 물 자체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천국에는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이다. 비록 칸트는 물 자체와 예지체를 실정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했지만, 칸트 자신 역시 이것들은 오직 부정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오성은 먼저 예지체를 (즉 현상적 세계,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의) ‘감성’의 외적 한계로 정립한다. 우리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대상들의 또 다른 영역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것은 ‘자신을 제한한다.’ 그것은 예지체는 초월적이므로 결코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을 적법하게 실정적 대상으로 다룰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즉 예지체와 정신(? 현상체를 오역한 것일까?)을 두 개의 실정적 영역으로 구분하려면 우리의 오성은 메타언어의 위치를, 즉 현상의 한계로부터 면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분의 위 어딘가에 자리 잡은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주체는 현상체 내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은 어떻게 현상들의 한계를 지각할까? 유일한 해졀책은 현상의 한계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다시 말해 현상들의 장은 그 자체로서 결코 ‘전부’, ‘완벽한’, 일관된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p512」

 

  우리 경험의 한계는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그런 한계와는 다르다. 우리 인식의 능력이 확장되면 현실 자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아직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런 관점과는 달리 헤겔에게 이 간극은 개념적이며 범주적이다.

 

 

3. 부정의 부정

 

  바그너의 “결혼은 간통이다.” 와 프루동의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 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식이다.

  바그너의 희곡 『나사렛 예수』의 대본을 잠깐 보자.

 

  「십계명에서 말씀하길 간통하지 말지어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사랑 없이는 결혼하지 말지어다. 사랑 없는 결혼은 결혼하자마자 깨지며, 사랑 없이 구혼한 사람은 이미 결혼을 깨어버린 것이다. 나의 십계명을 따른다면 어찌 감히 결혼을 깰 수 있겠는가? 너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바라는 바를 하라고 명하는데 말이다. - 하지만 사랑 없이 결혼하는 곳에서 너희는 신의 법의 변덕에 너희를 묶게 되니 네 결혼에서 너희는 신에 반해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이 죄는 다음에는 네가 인간의 법에 맞서도록 함으로써 복수를 해올 것이다. p536」

 

  간통은 통상 결혼에 대한 부정이다. 두 사람만이 서로 사랑하겠다는 결혼제도의 내용을 부정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정식화한 것처럼 사랑 없는 결혼이야 말로 가장 죄질이 나쁜 간통이다. 이번에는 결혼이라는 제도, 그 틀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처음은 내용을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헤겔의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은 “어떤 개념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그러한 개념을 구성하는 왜곡으로, 즉 왜곡 그 자체로서의 그러한 개념으로 결정적으로 전환하는데 있다.” ‘재산은 도둑질한 것’ 이라는 프루동의 변증법적 좌우명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부정의 부정’은 재산의 왜곡으로서의 도둑으로부터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 안에 새겨진 도둑질의 차원으로의 전환이다. (누구도 생산수단을 완전히 소유할 권리가 없다. 생산수단은 본성상 내속적으로 집단적인 것이면,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라는 모든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방금 살펴본 대로 범죄와 법에 대해서도, 법의 왜곡으로서의 범죄로부터 법 자체를 지탱하고 있는 범죄, 법은 보편화된 범죄 자체라는 생각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의 부정’ 이라는 이러한 개념에서 두 대립항을 아우르는 통일성은 ‘가장 낮은’, ‘위반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법의 자기매개의 한 계기인 범죄가 아니다. 범죄와 법 사이의 대립은 범죄에 내속적이며, 법은 범죄의 아종, 범죄의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이다. p537~8」

 

  이런 독법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과 충돌한다. “첫 번째 부정은 내적 본질의 분열 또는 특수화, 외화이며 두 번째 부정은 그러한 분열의 극복이라는” 통념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모든 문제를 행복하게 해결해 주는 마술적 메커니즘이 된다. 헤겔에 대한 조롱은 이런 통념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헤겔적인 변증법적 ‘종합’은 ‘대립물의 종합’ 모델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두 대립적인 원리의 균형 잡힌 조화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 오류이다.

 

 

  4. 내실 없는 부정

 

  ‘대립물의 일치’ 는 헤겔의 유명한 정식 중 하나다. 통상 정-반-합으로 설명되지만, 대립적인 힘들의 이 영원한 조화/투쟁은 헤겔과 어떤 관련도 없다. 대립되는 두 가지 실체와 그것들이 통일되어 나타나는 제3의 형태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삶의 규범 같은 것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냥 자연적인 것, 중립적인 것, 비이데올로기적인 상식으로 인식된다. 결혼이 그렇고 재산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중립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대립물의 일치는 이런 것이다.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비이데올로기로 전화하는 것, 최악의 간통이 결혼으로, 가장 큰 도둑질이 사유 재산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회적·상직적 폭력이 그것의 대립물로,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가 그렇고 법이 그렇다. 언어 역시 폭력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헤겔적 ‘부정의 부정’에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지평이 말 그대로 뒤집어져 ‘동일한’ 내용이 대립물로 나타날 뿐이다.

  ‘대립물의 일치’를 조금 색다르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매드>라는 잡지에 실린 패션에 관한 분석이다.

 

  「패션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입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중하층 계층은 패션을 따르려고 하지만 항상 뒤처진다. 중상층 계층은 최신 패션에 맞추어 입는다. 패션의 선도자들인 최상층 또한 어떻게 옷을 입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입는 방식이 패션이기 때문이다. p566」

 

  법도 마찬가지다. 사회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은 법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산다. 실용주의자들은 이익에 따라 법을 대충 지키며 대충 피해간다. 도덕주의자들은 딱 법대로 산다. 그런데 절대 군주 같은 최정상의 사람들은 법 없이 산다. 그들이 행위 하는 것, 말하는 것 자체가 법이 되기 때문이다.

  패션이든 법이든 최상위의 것과 최하위의 것, 이 두 대립물이 일치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 4단계는 ‘부정의 부정’을 위한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는 완전히 소외되지 않은 태도(나는 원하는 것을 한다)로부터 시작하며, 그런 다음 부분적 소외(나는 나를, 나의 이기주의를 자제한다)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전면적 소외(나는 규범이나 법에 나를 완전히 맡긴다)로 이어지며, 마침내 주인의 형상 속에서 이 전면적 소외는 자기 부정되어 대립물과 일치하게 된다. p567」

 

  헤겔에 대한 또 하나의 통념은 ‘화해’ 다. 외적 대립물을 내화해서 통합한다는 식의 생각 말이다. 그러나 헤겔은 화해를 ‘외화’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주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외화되는 것은 주체의 내적 모순으로, 그것은 주체가 자신을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사회적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화해라는 긍정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소외이다. 즉 나의 행위의 의미는 나에게, 나의 의도에 달려 있지 않으며, 나중에 소급적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받아들여지는 것, 주체가 떠맡아야 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의 그것의 철저한, 구성적인 탈중심화이다. p578」

 

  그런데 이런 제스처가 어떻게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줄 수 있을까? 헤겔은 철학의 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황혼녘에 날개짓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철학은 오직 ‘회색 위에 회색’을 칠할 수 있을 뿐이다.” ‘회색 위에 회색’ 이라는 동어반복은 새로운 것의 등장으로서의 순수 반복이라는 들뢰즈적 개념과 연결된다.

 

  「동일한 현실적인 회색의 반복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그것의 잠재적 차원,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의 잃어버린 ‘대안적 역사’ 들이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혁명이다’는 어떠한 새로운 긍정적 지식도, 어떠한 새로운 긍정적 규정들도 덧붙이지 않지만 이 혁명이 환기시켰던 결과에 의해 좌절된 희망들의 유령 같은 차원들을 상기시킨다. p580」

 

  「순수 반복으로서의 화해는 우리를 어떤 신비로운 시작이 아니라 시작 직전의 순간, 하나의 운명으로 조직되어 다른 대안적 가능성들을 지워버리는 사건들의 흐름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다시 데려 간다. p581」

 

 

0. 다시 처음으로...

 

  역시나, 예감은 했지만 너무하다. 결국 ‘지적 직관’ 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지적 직관이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으로의 퇴행이 아닌 이유는 도대체 뭐라는 건가? 100여 쪽이 넘는 본문 전체가 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서두에 한 번 던져본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지, 약이 오른다. 전자라면 내가 이 5장의 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될 터이다. 아마도 그렇겠지만 여하튼 “왜 칸트는 이 개념을 거부” 했냐고!!! 요! 그리고 지젝 자신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는 왜 지적 직관에 반대했냐고요. 반대한 적 없다고요? 그 책의 내용과 이 책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고요? 칸트는 물론 헤겔도 지적 직관을 거부했다고 하셨잖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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