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7_

헤겔의 한계들

 

 

1. 하나의 목록

 

  헤겔을 ‘총체성’ 의 철학자로 본다면, 헤겔은 ‘비전체’라는 라캉의 개념을 사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적 총체성의 진정한 본성을 고려한다면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헤겔적 총체성은 “전체적인 것 더하기 그것의 모든 ‘증상’을, 그것의 틀에 맞지 않는 초과를, 그것의 정합성을 무너뜨리는 적대성 등등을 가리킨다.”

  어쨌거나 헤겔이 사유할 수 없다고 알려진 일련의 목록이 있다. “반복, 무의식, 중층결정, 대상a, 수학소/문자(과학과 수학), 언어, 적대성(시차), 계급투쟁, 성적 차이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죠, 헤겔은 할 수 없었죠.”라고 딱 부러지게 긍정할 수 없게 만드는 미묘하고 지각 불가능한 뭔가가 있다.

  이 절의 내용은 “그렇죠.” 다음에 지젝이 덧붙이는 “하지만....” 들이다. 헤겔이 무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헤겔에 대한 비판들에 이미 헤겔의 대답이 맹아의 형태로 들어 있다는, 뭐 대충 그런 말인 듯하다.

 

 

2. 자기지양된 우연성으로서의 필연성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최종성의 관점’ 을 비판했다. 현재를 마치 과거인 것처럼 바라본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지젝은, 헤겔의 관점이 “정확히 미래가 과거로 열려있음을 재도입하는 것을, 존재했던 것을 생성 과정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지금 존재하는 필연성을 낳았던 우연적인 과정을 보는 것” 이라면 어쩔래? 라고 응수한다.

  여하튼 이쯤에서 지젝의 주 레파토리 중 하나인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 나온다. : ‘과거의 반복을 통한 구원’

 

  「마르크스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자코뱅파의 터무니없는 혁명적 희망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열광적인 해방의 수사학은 단지 천박한 상업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수립하기 위해 역사적인 ‘이성의 간지’가 이용한 수단일 뿐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처럼 배신당한 철저한 해방적 잠재력들이 어떻게 혁명의 기억을 계속 사로잡는 역사적 ‘유령들’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러한 잠재력의 실현을 요구하는지 -그리하여 후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또한 이러한 과거의 유령들까지 구원해 했다-를 설명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하려 했던 것이다. 유령 같은 형태로 지속되는 과거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버전들이 역사적 과정의 존재론적 ‘열림’을 구성하는데... p827」

 

  프랑스 혁명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을 부르주아 집권을 되풀이 하자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수립에 의해 배신당한 자유·평등·박애를 구원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닌을 반복하자고 할 때 그 반복은 우리가 경험했던 소비에트 체제가 아니다. ‘commons’ 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지젝이 Ooccupy Wall Street' 현장에서 역설했던 그런 ‘공통적인 것’ 말이다. 과거가 고정된 채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미래다. 그것이 벤야민의 혁명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필연의 관계는 다시 사고되어야 한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의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과 같은 의미로 양자의 접합 방식을 파악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우리는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자유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객관적 상황에 의해 부과된 좌표들 내부에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자유가 소급적으로 객관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정립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한 조건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위의 전제로서 출현한다. p829~830」

 

  과거는 반복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고, 그렇게 구성된 과거가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즉 필연이다.

 

  「그렇다면 필연과 우연에 대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적 통찰은 무엇인가? 헤겔은 우연성의 필연성 - 즉 이념이 필연적으로 진정 우연적인 현상들 속에서 어떻게 외화되는지- 을 연역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측면은 종종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소홀히 되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의, 이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명제를, 즉 필연성의 우연성이라는 명제를 발전시킨다. 즉 ‘외적인’ 우연적 현상으로부터 ‘내적인’ 필연적 본질로의 진전, 자기반성을 통한 현상의 자기내화를 묘사할 때 헤겔은 그것을 통해 어떤 선-재하는 내적 본질,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던 것의 발견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 구조화되는 ‘수행적’ 과정을 묘사한다. 헤겔 본인이 『논리과학』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반성 과정에서 잃어버린 또는 숨겨진 근거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이 복귀하고 있는 것을 생산한다. p831~2」

 

  필연성의 우연성, 또한 반복과 마찬가지로 소급성과 관련된다. ‘근거’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복귀라는 행위 자체가 ‘근거’를 소급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필연성은 우연성,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에 도달한 우연성의 ‘진리’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헤겔이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대로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이야기를 완전한 존재론적 폐쇄에 대한 주장으로 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단지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것, 또는 존재하던 것의 완전한 실현일 뿐이다. 하지만 이 동일한 진술은 또한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즉 변증법적 과정에서 사물은 ‘항상 이미 전에 있었던 것’이 된다. 즉 어떤 사물의 ‘영원한 본질’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현하며, 열린 우연적인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 영원히 지나간 본질은 변증법적 과정의 소급적 결과이다. 칸트가 사유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소급성이었으며, 헤겔 본인도 오랫동안 힘들게 고생한 끝에 그것을 개념화할 수 있었다. p834」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근거 즉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연성의 소급적 결과라는 것이 이 절에서 주~욱 역설되고 있는 지젝의 주장인 것 같다. 프로이트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데.

 

  「내적 필연성은 증상의 우연성을 통해서만 자신을 분절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러한 필연성은 오직 그러한 분절화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필연성은 말 그대로 우연성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앞뒤라는 말로 라캉이 암시하고자 했던 바로 (억압된 내용의) 필연성은 (증상들 속에서 그것의 분절화의)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비판자들은 첫 번째 측면만, 즉 우연적 표현들을 지배하는 내적 원리로서의 필연성만 강조하고, 두 번째 측면, 즉 이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필연성의 형태로 끌어올려 진 우연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무시된다. p839」

 

 

3.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의 이형태들

 

  말도 참 어렵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 이란 끙끙 읽고 나니, ‘부정의 부정’ 이다. 그 다양한 형태들의 예로 ‘라비노비치-모체’, ‘아도르노-모체’, ‘이르마-모체’를 꼽고 있는데, 요약하긴 그렇고 직접 읽어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4. 형식적 측면

 

  「들뢰즈의 가장 급진적인 반헤겔적 주장은 이 순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즉 헤겔은 동일성 또는 모순의 지평 바깥에 놓인 순수 차이를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p857」

 

  순수 차이, 극소 차이, 최소 차이. 뭐가 됐건 헤겔에게 차이는 모순이고, 이 모순은 변증법을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 통념이기 때문에 순수 차이는 가장 반헤겔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젝은 여기에 순순히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적 반박은 아마 이러할 것이다. 즉 ‘순수한’, 잠재적 차이는 현실적인 자기동일성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 자체가 아닐까? 그것은 현실적인 동일성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보다 정확하게,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 차이는 현실적 동일성의 잠재적 토대 또는 조건이다. 즉 존재자는 그것의 잠재적 토대가 순수 차이로 환원될 때 (오직 그럴 때만)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지각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순수 차이는 잠재적 대상(라캉적 대상a)의 보충과 관련되어 있다. p858」

 

  순수 차이는 아마 들뢰즈의 개념인 듯한데, 그의 대표작 『차이와 반복』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최소 차이는 순수 반복 속에서 출현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상a의 보충과 관련 있다는 말은 이렇게 적용된다.

 

  「라캉을 헤겔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이는 최소 차이, 작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특징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헤겔 대 다른 인물이 아니라 헤겔과 그의 유령 같은 분신이다. - 헤겔로부터 라캉으로의 이행에서 우리는 하나의 헤겔에서 또 다른 하나의 라캉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헤겔+그의 대상a이다. p856」

 

  이것들이 ‘순수차이가 자기동일성의 토대이자 조건’이라는 까다로운 언명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여기서는 그냥 헤겔과 들뢰즈가 예상 외로 훨씬 가깝다는 것을 수긍한 척하고 넘어가자. 여하튼 차이는 반복 속에 출현하므로, 새로운 것 역시 오직 반복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것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만 관련된 변화들은 정말 새로운 어떤 것의 출현이 아니라 오직 기존의 틀 내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 새로운 것은 오직 현행적인 것의 잠재적 토대가 변할 때만 출현하며, 이 변화는 정확이 어떤 것이 현행성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반복 형태로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사물들은 A가 B로 변형될 때가 아니라 A가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알아차릴 수 없게 ‘완전히 변할’때 정말로 변한다. 이 변화가 최소 차이며, 이론의 과제는 주어진 다수성의 장에서 이러한 최소 차이를 빼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빼내기는 또한 헤겔적 지양 또는 부정의 부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p859」

 

  이제 헤겔과 들뢰즈의 관계가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이 아니다. 첫 번째 부정은 사물의 현실적 측면과 관련된 변화다. 기존의 틀 내에서 내용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첫 번째 부정의 내용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적 측면은 그대로 둔 채 형식적 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부정으로 보았던 것 혹은 불가능으로 보았던 것을 단순히 관점을 바꾸어 긍정성으로 혹은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현실적 속성들과 관련해서는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틀을 보지 않고 현실적 속성들만 보는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틀 자체를 뒤집어 보는 눈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것이 헤겔적인 지양, 부정의 부정이며 들뢰즈의 극소 차이다. 그러나 물론 들뢰즈와 그 의 후계자들은 들뢰즈의 반복과 차이가 헤겔의 지양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헤겔 이후는 오히려 “지양의 지배로부터의 반복의 해방” 이다.

 

  한편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비슷하다고 했다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통에 결론이 뭔지 헛갈리지만, 결국 헤겔은 ‘죽음 충동’을 사유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부정의 부정 보다 더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것이 아마 죽음 충동인 듯하다.

 

  「헤겔과 프로이트의 유사성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이다. 만약 헤겔이 이성의 한가운데서 비이성(모순, 모든 합리적 질서를 동요시키는 대립물들의 미친 춤)을 발견한다면 프로이트는 비이성(말실수, 꿈, 광기)의 한 가운데서 이성을 발견한다. 헤겔에게서 일자는 그것의 상실의 소급적 효과로, 잃어버린 일자로의 복귀 자체가 그것을 구성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는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가 일치하며, 억압된 것은 그것의 복귀의 소급적 효과이다. p862」

 

  이성과 비이성의 일치, 그리고 소급적 효과가 헤겔과 프로이트에게 공통적이다. 뿐만 아니라 더 흥미로운 것은 ‘무의식’ 의 공통성이다. 헤겔에게도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의 개념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프로이트적 무의식과는 분명히 반대로 헤겔적 무의식은 형식적이다. 그것은 언표된 내용 속에서는 보일 수 없는 언표의 형식이다... 즉 말실수 속에서 드러나는 우연적인 ‘병리적’ 욕망이 아니라 주체가 부지불식중에 의지하는 보편적인 상징적 형식 속에 있다. 헤겔의 무의식은 자기의식 자체의 무의식, 자기 자신의 필연적 비투명성, 자신이 직면하는 내용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형식을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특수한 내용의 보편적 형식이다. 진리는 내가 의미하려는 바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 속에 들어 있다는 헤겔의 말의 의미는 진리는 특수한 의도와는 반대로 말의 의미의 보편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p862」

 

  그러나 프로이트적 무의식 또한 형식적 측면을 갖고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진정한 비밀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해몽을 통해 꿈의 내용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 즉 꿈 사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꿈의 진짜 비밀은 꿈-작업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와 헤겔의 무의식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지젝은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질문은 ‘헤겔은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지만 그 역인 ‘프로이트는 헤겔적 무의식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역시 필요하다고 한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갈등, 투쟁, ‘자기모순’, 내재적 적대성의 사상가이다. 하지만 헤겔과는 분명히 반대로 프로이트에게서 갈등은 자기모순이 극단화되어 자기 은폐되는 식으로,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이 출현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갈등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은 정점에 이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연되며, 타협의 형성물이라는 형태로 일시적으로 멈춘다. 이러한 타협은 ‘부정의 부정’ 이라는 헤겔적 의미에서의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실패한 부정, 방해된, 탈선된, 왜곡된, 뒤틀린, 옆길로 새버린 부정, 일종의 부정의 클리나멘이다. 다시 말해 헤겔을 빠져나가는 것은 중층결정이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에서 부정성은 항상 철저하거나 철저화되며 정합적이다. p866~7」

 

  뭔가 프로이트보다 헤겔이 낫다는 것도 같고, 반대로 프로이트가 헤겔보다 낫다는 것도 같다. 부정의 클리나멘 즉 실패한 부정이 부정의 부정 보다 못하다는 것 같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중층결정을 사고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헤겔과 프로이트가 어쨌건 이 구불구불 복잡한 길을 계속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살짝 짜증이 나지만 기왕에 온 것 계속 가보자.

 

  「따라서 프로이트는 추가적 비틀기, 나사로 다시 한 번 꽉 조이는 것으로써, 즉 부정을 철저화 한다는 ,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 관계 맺기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헤겔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좌절시키고 부정적인 것의 완전한 전개에 장애물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 ‘부정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헤겔의 부정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할까? 부정성과 관련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의 차이는 헤겔이 부정성을 자기 파괴적인 극단으로까지 철저화 하는 반면 프로이트는 부정성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타협-형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로 환원될 수는 결코 없다. p870~1」

 

  프로이트가 ‘타협’ 한다고 볼 수는 없단다.

 

  「여기서의 주요한 요점은 프로이트에게서 부정성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들의 수렁은 추상적인 개념적 규정들에 저항하는 풍부한 경험적 현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부정적인 것의 개념적 힘에 대한 현실의 외적 초과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부정성’ 그 자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수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적 변증법의 부否를 보충하는 프로이트적인 Ver-시리즈(억압, 폐제, 부정, 부인)는 단지 그러한 부의 복잡화인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부, 헤겔을 빠져나가고 순수 반복에 대한 헤겔 이후의 여러 상이한 버전들에 흔적을 남긴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p871~2」

 

  속되게 말해 프로이트가 이긴 건가? 여하튼 조금만 건너뛰거나 정신을 놓아도, 뭐라는 건지 알기 힘들게 둘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여하튼 헤겔 부정성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라는 말씀인 듯.

 

 

5. 지양과 반복

 

  헤겔이 죽음충동을 사유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겔이 직접 주제화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충동이란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이다.

 

  「즉 헤겔 본인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헤겔적 변증법의 핵심은 헤겔 이후의 단절에서나 가시적으로 된 반복적인 (죽음)충동이다. 하지만 변증법의 토대에 변증법과 변증화될 수 없는 그것의 핵심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충동 또는 반복강박은 헤겔이 채 주제화하지 못한 전제인 부정성의 핵심이다. p876」

 

  헤겔 이후의 단절에는 두 측면이 있다. “개념적 매개와는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실정성에 대한 주장과, 지양이라는 관념론적 운동 속에는 담길 수 없는 순수 반복에 대한 주장이다.” 첫 번째가 훨씬 주목받았지만, 진정한 철학적 혁명은 두 번째에 있다.

 

  「반복은 직접적인 적극적 긍정의 봉쇄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877」

 

 

6. 반복에서 충동으로

 

  라캉 정신분석의 틀에서 설명할 때 지젝은 늘 ‘욕망에서 충동으로’ 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절의 제목은 ‘반복에서 충동으로’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순수 차이와 상관적이고, 차이는 반복을 통해 출현한다. 그러므로 이 제목은 헤겔에서 라캉으로의 이행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7장은 ‘2부 헤겔’의 마지막 장이며, 8장부터는 ‘3부 라캉’이 시작된다. 한국판으로 하자면 ‘헤겔 레스토랑’ 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라캉 카페’에서의 차 한 잔이 준비되어 있다. 잔뜩 집어넣은 배속이야 물론 소화도 못 시킨 채 부글거리지만, 여하튼 이제 마무리 할 때이다.

 

  「실제로 욕망과 반대로 충동은 규정상 만족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충동 속에서 만족은 대상에 도달하려는 반복된 실패 속에서, 대상 주위를 반복해서 빙빙 도는 가운데 획득되기 때문이다. 밀레를 따라 여기서 결여와 구멍 사이의 구분을 도입해야 한다. 결여는 공간적이며 공간 내부의 공백을 가리키는 반면 구멍은 보다 철저한 것으로 그러한 공간적 질서 자체가 (물리학의 ‘블랙홀’에서처럼) 무너지는 지점을 가리킨다. 바로 거기에 욕망과 충동의 차이가 있다. 즉 욕망은 자신의 구성적 결여에 근거하는 반면 충동은 구멍 주위를, 존재의 질서 속의 간극 주위를 빙빙 돈다. p882」

 

  칸트에서 헤겔로의 전환과 욕망에서 충동으로의 전환은 비슷한 면이 있다. 욕망은 만족될 수 없다. 물 자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물 자체는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간극 자체이다. 충동의 목적은 표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표적 주위를 반복해서 도는 것 자체에 있기 때문에 만족될 수 있다. 자본의 순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으로서의 돈의 순환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충동의 양식에 들어간다. 가치의 확대는 오직 부단히 갱신되는 이러한 운동 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충동은 어떤 특수한 개인에 속하지 않는다. - 오히려 자본의 직접적 ‘대리인들’ (자본가들 자체, 최고 경영자들)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p883」

 

  욕망과 충동의 관계는 라캉의 대상a를 통해 더욱 분명히 살펴 볼 수 있다.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우리는 원래 잃어버렸으며, 자신의 상실과 일치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출현하는 대상을 갖게 되는 반면 충동의 대상으로서의 대상a의 경우 ‘대상’은 직접적으로 상실 그 자체이다. -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의 전환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대상으로부터 대상으로서의 상실 그 자체로 이동한다. p884」

 

  인간적인 차원은 바로 이 충동에 있다.

 

  「인간들은 그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초과해서 즐기려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히며, 눈에 띄며 사물의 일상적 흐름을 탈선시키는 잉여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본적 역설은 특별히 인간적인 차원 -본능과는 대립적인 충동- 은 원래는 단지 부산물에 불과했던 것이 자율적 목표로 격상될 때 출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 더 ‘성찰적인 것’ 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동물에게는 아무런 고유한 가치도 없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지각한다.... 우리는 동일한 제스처를 반복하며, 거기서 만족을 찾는 폐쇄된, 자기추진적인 고리에 사로잡히게 될 때 ‘인간’ 이 된다. p886~7」

 

  지젝은 헤겔의 한계를 단순히 무시해 버려도 되는 어떤 것으로 버려두지 않는다. 헤겔 이후의 사상인 키르케고르-프로이트적인 순수 반복에 대해서 말하자면, 오직 헤겔적 문제 틀 안에서만 제대로 위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단순히 무시될 수 없다. 헤겔을 무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몹시 고되게 헤겔을 돌파한 연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젝은 말한다. “헤겔을 반복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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