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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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과정의 형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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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적 직관’을 불가능한 망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과 이크란이 교감할 때 보이는 그런 지적 직관은 인간에게 가능할 리 없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론 지젝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고 믿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면서 읽기는 했지만 나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첫 부분을 읽으며, 분명히 ‘지적 직관’을 칸트도 헤겔도 그리고 지젝도 단호히 반대 한다고 생각했다.

논변적 지성과 직관적 지성을 구분하면서, 주체는 오로지 논변적 지성만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TWN p34)

 

  「만약 주체가 직관적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주체는 지성을 직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심연을 메울 것이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의 사물들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논변적 지성 대신 직관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물들(대상들)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허하기는 해도 조리가 있는 주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하게, 자발적인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내 능력 안에서 나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 인가? 만일 내가 “생각하는 사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직관을 소유한다면, 즉 만일 내가 나의 예지적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로써 나를 순수 통각의 “나”로 만드는 바로 그 특질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현실을 구성하는 자발적 초월적 행위자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TWN)』p35」

 

  복잡한데 어쨌든 내가 직관적 지성을 갖고 있다면, 나는 칸트가 말하는 그 “나”가 아니게 된다고 읽어 보자. 조금만 더 인용해 보면 헤겔 역시 직관적 지성에 반대한다.

 

  「한편으로 초월적인 “나”를 예지적 사물-자기와 동일화하는 것을 고수한다면, 예지적 자기는 나에게 현상적으로 외양한다. 그런데 이는 현상적인 것과 예지적인 것의 차이가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는 “직관적 지성”, “자신을 보는 눈”을 통해 그 자신에게 주어지는 단독적 주체-대상이 된다. (피히테와 셸링에 의해 성취된, 하지만 칸트에게서는 무조건적으로 금지된 단계 : 철학하기의 “절대적 출발점”으로서의 지성적 직관). 다른 한 편으로 통각의 “나”-현실 구성의 이 자율적 행위자-가 예지적 사물이 아니라면, 현상적인 것과 예지적인 것의 차이는 다시금 소멸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번엔 전적으로 다른 형식으로 그러하다. 즉, 헤겔의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은 헤겔이 “지성적 직관”이라는 바로 그 개념을 부적합한 “무매개적” 종합으로서 거부한다는 것이다. 즉 논변적 지성을 직관과 분리시키는 환원불가능한 틈새를 고집한다는 점에서 그는 철저하게 칸트적으로 남아 있다. 칸트적 분열을 단순히 치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오히려 헤겔은 그것을 근본화 한다. 어떻게? (TWN) p39」

 

  도식화하자면 칸트와 헤겔은 직관적 지성을 거부하고, 반대로 피히테와 셸링은 철학하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이 마음을 바꾸었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5장의 첫 머리에서 갑자기 “직관적 지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해 버린다.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에서 ‘지적 직관’ 이라는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정통 칸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비판 이전의 형이상학으로의 퇴행의 조짐이 아니다.) 칸트 이후의 관념론자들에게 ‘지적 직관’은 예지체적 현실에 대한 어떤 수동적인 직관적 수용이나 비전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항상 적극적인, 생산적인, 자발적인 능력을 가리키며, 그 자체로서 초월론적 상상력의 적극적 종합이라는 칸트적 주제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칸트는 이 개념을 거부했을까? 그는 어떤 문턱을 넘기를 거부했을까? p481~2」

 

  어렵사리 우겨 넣었던 ‘직관적 지성’ 혹은 ‘지적 직관’에 대한 관념(그것도 지젝 자신이 심어둔;;) 을 이렇게 박살내 버리고 지젝은 염장이라도 지르듯, 딴 길로 돌아간다. 칸트 사유의 전체 운운하며 자유 개념부터 시작하는데, 지적 직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줄지 감감하다. 이장의 마지막에 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일단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여하튼 5장 읽기의 목표는 지적 직관에 대한 새로운 답을 얻어내는 것에 있다! 고 결심.

 

 

1. 오성을 찬양함

 

  칸트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성’ 이다.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은 아무도 읽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철학적 개념은 까탈스러워 단순하게 이해하면 틀리기가 쉽다. 하지만 일반인 독자는 그렇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칸트의 ‘이성’ 역시 복잡하지만 여하튼 ‘오성’ 보다는 한 단계 진보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성이란 오성에 무엇을 더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언가를 뺀 것이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모든 것은 오성과 이성 사이의 이러한 동일성/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성이 오성의 분리시키는 힘에 무엇인가를 덧붙여 오성이 떼어낸 어떤 것의 유기적 통일성을 (‘보다 높은 어떤 단계에서’) 재확립해 분석을 종합으로 보충하는 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은 오성 이상이 아니라 이하이며, 바로 그것이 오성이 활동 속에서 하길 원하는 것 또는 하길 바라는 것과 반대로 자신의 현실성 속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오성의 ‘일면성’을 보충하는 또 다른 능력이 아니다. 오성을 피해 나가는 무엇인가 (분석된 사물의 실체적 내용의 핵심)가, 오성이 미치지 못하는 초합리적 너머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성의 근본적 환상이다. 다시 말해, 오성으로부터 나와 이성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오성으로부터 그것을 구성하는 환상을 빼는 것뿐이다. p501」

 

  지젝이 지적하는 것은 처음 보기에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그것의 긍정적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오성은 사물이나 과정의 통일성을 산산조각내고 분리시킨다. 그러나 종합하고 통일시키지 못하는 오성의 부정성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며 긍정적이다.

  이 부정성의 힘에 대해 지젝은 조금 색다른 설명을 한다. ‘적은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 이라는 원리가 책을 읽는데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바야르의 『읽지 않는 책에 대해서 말하는 법』의 요지는 “너무 많은 자료는 단지 명료한 시선을 흐릴 뿐”이며 오히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이 어떤 책의 근본적 통찰이나 성취를 이해하는 데 더 낫다는 것이다.

 

  「칸트나 헤겔에 관한 저서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거기서 진짜 꼼꼼한 지식은 종종 단지 지루하기만 할 뿐인 전문가의 주해를 낳을 뿐 살아 있는 통찰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헤겔에 대한 최고의 해석들도 항상 부분적〔당파적〕이다. 즉 사유 또는 변증법적 운동의 특수한 면모로부터 총체성을 추론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헤겔 본인의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가 어떤 놀라운, 상세한 -종종 틀린 또는 적어도 일면적인- 점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헤겔의 사유를 살아 있는 순간 속에서 포착할 수 있다. p507」

 

  기쁘다. 일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지젝을 읽으면 칸트와 헤겔, 하이데거까지 읽어야 할 것 같은 은근한 압박감에 눌리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니, 만세다! ㅎㅎ ;;

 

  지젝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게 보는 것이 힘이라고 한다. 눈멂은 통찰로 가는 길이다.

 

  「어떻게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혼란스러운 인상들의 망으로부터 개념이 출현할 수 있을까? ‘추상화’의 힘을 통해, 즉 대상의 대부분의 양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그것을 구성하는 핵심적 측면들로 대상을 환원시키는 것을 통해 그렇게 된다. 우리 정신의 가장 큰 힘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식으로 더 적게 보는 것이며, 현실을 그것의 개념적 규정들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오직 그러한 ‘눈멂’만이 사물들의 진상에 대한 통찰을 낳는다. p506」

 

  오성과 이성의 관계 역시 눈멂과 통찰의 상호 의존적 관계와 동일하다.

 

 

2. 현상체, 예지체, 한계

 

  예지체가 무언지 선뜻 이해할 사람이 많을까? 현상체와 예지체는 영어로 바꿔놓으면 훨씬 분명하게 대비된다. phenomenon 과 noumenon. 어원은 잘 모르겠는데 뭔가 noumenon에 접두어가 붙어 phenomenon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phen’이 ‘보이고 있는’이란 의미를 가진 연결형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여하튼 noumenon은 본체라고도 해석된다.

  현상체와 예지체에 관한 칸트의 정식은 단순하지 않다.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으니 일단 지젝의 문장을 직접 읽어 보자.

 

  「헤겔이 『현상학』에서 도저히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바에 따르면, 현상의 장막 뒤에는 오직 우리가 거기에 놓아둔 것밖에 없다. 따라서 부정성이 초월적 실정성에 선행하며, 현상체의 자기한정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선행한다. - 이것이 칸트의 다음과 같은 명제의 심오한 사변적 의미였다. “그래서 현상들을 현상체들과 예지체들로 분류하고, 세계를 감성 세계와 예지 세계로 구분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로는 전혀 허용될 수 없다.” 현상체와 예지체 사이의 한계는 대상들의 두 실정적 영역 사이의 한계가 아니다. 오직 현상들 그리고 그것들의 (자기) 한정, 부정성만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파하는 순간, 예지체의 소극적 사용에 대한 칸트의 명제를 칸트 본인보다 훨씬 더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칸트로부터 헤겔로, 헤겔적 부정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p511」

 

  칸트는 현상체와 예지체를 구분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지만, 현상 너머에 무언가 물 자체가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현상 뒤에는 우리가 놓아 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놓아두었을까? 바로 장막 뒤에 무언가, 물 자체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천국에는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이다. 비록 칸트는 물 자체와 예지체를 실정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했지만, 칸트 자신 역시 이것들은 오직 부정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오성은 먼저 예지체를 (즉 현상적 세계,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의) ‘감성’의 외적 한계로 정립한다. 우리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대상들의 또 다른 영역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것은 ‘자신을 제한한다.’ 그것은 예지체는 초월적이므로 결코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을 적법하게 실정적 대상으로 다룰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즉 예지체와 정신(? 현상체를 오역한 것일까?)을 두 개의 실정적 영역으로 구분하려면 우리의 오성은 메타언어의 위치를, 즉 현상의 한계로부터 면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분의 위 어딘가에 자리 잡은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주체는 현상체 내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은 어떻게 현상들의 한계를 지각할까? 유일한 해졀책은 현상의 한계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다시 말해 현상들의 장은 그 자체로서 결코 ‘전부’, ‘완벽한’, 일관된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p512」

 

  우리 경험의 한계는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그런 한계와는 다르다. 우리 인식의 능력이 확장되면 현실 자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아직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런 관점과는 달리 헤겔에게 이 간극은 개념적이며 범주적이다.

 

 

3. 부정의 부정

 

  바그너의 “결혼은 간통이다.” 와 프루동의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 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식이다.

  바그너의 희곡 『나사렛 예수』의 대본을 잠깐 보자.

 

  「십계명에서 말씀하길 간통하지 말지어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사랑 없이는 결혼하지 말지어다. 사랑 없는 결혼은 결혼하자마자 깨지며, 사랑 없이 구혼한 사람은 이미 결혼을 깨어버린 것이다. 나의 십계명을 따른다면 어찌 감히 결혼을 깰 수 있겠는가? 너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바라는 바를 하라고 명하는데 말이다. - 하지만 사랑 없이 결혼하는 곳에서 너희는 신의 법의 변덕에 너희를 묶게 되니 네 결혼에서 너희는 신에 반해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이 죄는 다음에는 네가 인간의 법에 맞서도록 함으로써 복수를 해올 것이다. p536」

 

  간통은 통상 결혼에 대한 부정이다. 두 사람만이 서로 사랑하겠다는 결혼제도의 내용을 부정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정식화한 것처럼 사랑 없는 결혼이야 말로 가장 죄질이 나쁜 간통이다. 이번에는 결혼이라는 제도, 그 틀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처음은 내용을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헤겔의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은 “어떤 개념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그러한 개념을 구성하는 왜곡으로, 즉 왜곡 그 자체로서의 그러한 개념으로 결정적으로 전환하는데 있다.” ‘재산은 도둑질한 것’ 이라는 프루동의 변증법적 좌우명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부정의 부정’은 재산의 왜곡으로서의 도둑으로부터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 안에 새겨진 도둑질의 차원으로의 전환이다. (누구도 생산수단을 완전히 소유할 권리가 없다. 생산수단은 본성상 내속적으로 집단적인 것이면,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라는 모든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방금 살펴본 대로 범죄와 법에 대해서도, 법의 왜곡으로서의 범죄로부터 법 자체를 지탱하고 있는 범죄, 법은 보편화된 범죄 자체라는 생각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의 부정’ 이라는 이러한 개념에서 두 대립항을 아우르는 통일성은 ‘가장 낮은’, ‘위반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법의 자기매개의 한 계기인 범죄가 아니다. 범죄와 법 사이의 대립은 범죄에 내속적이며, 법은 범죄의 아종, 범죄의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이다. p537~8」

 

  이런 독법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과 충돌한다. “첫 번째 부정은 내적 본질의 분열 또는 특수화, 외화이며 두 번째 부정은 그러한 분열의 극복이라는” 통념 말이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모든 문제를 행복하게 해결해 주는 마술적 메커니즘이 된다. 헤겔에 대한 조롱은 이런 통념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헤겔적인 변증법적 ‘종합’은 ‘대립물의 종합’ 모델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두 대립적인 원리의 균형 잡힌 조화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 오류이다.

 

 

  4. 내실 없는 부정

 

  ‘대립물의 일치’ 는 헤겔의 유명한 정식 중 하나다. 통상 정-반-합으로 설명되지만, 대립적인 힘들의 이 영원한 조화/투쟁은 헤겔과 어떤 관련도 없다. 대립되는 두 가지 실체와 그것들이 통일되어 나타나는 제3의 형태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삶의 규범 같은 것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냥 자연적인 것, 중립적인 것, 비이데올로기적인 상식으로 인식된다. 결혼이 그렇고 재산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중립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대립물의 일치는 이런 것이다.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비이데올로기로 전화하는 것, 최악의 간통이 결혼으로, 가장 큰 도둑질이 사유 재산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회적·상직적 폭력이 그것의 대립물로,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가 그렇고 법이 그렇다. 언어 역시 폭력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헤겔적 ‘부정의 부정’에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지평이 말 그대로 뒤집어져 ‘동일한’ 내용이 대립물로 나타날 뿐이다.

  ‘대립물의 일치’를 조금 색다르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매드>라는 잡지에 실린 패션에 관한 분석이다.

 

  「패션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입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중하층 계층은 패션을 따르려고 하지만 항상 뒤처진다. 중상층 계층은 최신 패션에 맞추어 입는다. 패션의 선도자들인 최상층 또한 어떻게 옷을 입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입는 방식이 패션이기 때문이다. p566」

 

  법도 마찬가지다. 사회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은 법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산다. 실용주의자들은 이익에 따라 법을 대충 지키며 대충 피해간다. 도덕주의자들은 딱 법대로 산다. 그런데 절대 군주 같은 최정상의 사람들은 법 없이 산다. 그들이 행위 하는 것, 말하는 것 자체가 법이 되기 때문이다.

  패션이든 법이든 최상위의 것과 최하위의 것, 이 두 대립물이 일치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 4단계는 ‘부정의 부정’을 위한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는 완전히 소외되지 않은 태도(나는 원하는 것을 한다)로부터 시작하며, 그런 다음 부분적 소외(나는 나를, 나의 이기주의를 자제한다)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전면적 소외(나는 규범이나 법에 나를 완전히 맡긴다)로 이어지며, 마침내 주인의 형상 속에서 이 전면적 소외는 자기 부정되어 대립물과 일치하게 된다. p567」

 

  헤겔에 대한 또 하나의 통념은 ‘화해’ 다. 외적 대립물을 내화해서 통합한다는 식의 생각 말이다. 그러나 헤겔은 화해를 ‘외화’로 특징짓는다.

 

  「여기서 주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외화되는 것은 주체의 내적 모순으로, 그것은 주체가 자신을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사회적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화해라는 긍정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소외이다. 즉 나의 행위의 의미는 나에게, 나의 의도에 달려 있지 않으며, 나중에 소급적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받아들여지는 것, 주체가 떠맡아야 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의 그것의 철저한, 구성적인 탈중심화이다. p578」

 

  그런데 이런 제스처가 어떻게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줄 수 있을까? 헤겔은 철학의 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황혼녘에 날개짓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철학은 오직 ‘회색 위에 회색’을 칠할 수 있을 뿐이다.” ‘회색 위에 회색’ 이라는 동어반복은 새로운 것의 등장으로서의 순수 반복이라는 들뢰즈적 개념과 연결된다.

 

  「동일한 현실적인 회색의 반복 속에서 출현하는 것은 그것의 잠재적 차원,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의 잃어버린 ‘대안적 역사’ 들이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혁명이다’는 어떠한 새로운 긍정적 지식도, 어떠한 새로운 긍정적 규정들도 덧붙이지 않지만 이 혁명이 환기시켰던 결과에 의해 좌절된 희망들의 유령 같은 차원들을 상기시킨다. p580」

 

  「순수 반복으로서의 화해는 우리를 어떤 신비로운 시작이 아니라 시작 직전의 순간, 하나의 운명으로 조직되어 다른 대안적 가능성들을 지워버리는 사건들의 흐름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다시 데려 간다. p581」

 

 

0. 다시 처음으로...

 

  역시나, 예감은 했지만 너무하다. 결국 ‘지적 직관’ 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지적 직관이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으로의 퇴행이 아닌 이유는 도대체 뭐라는 건가? 100여 쪽이 넘는 본문 전체가 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서두에 한 번 던져본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지, 약이 오른다. 전자라면 내가 이 5장의 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될 터이다. 아마도 그렇겠지만 여하튼 “왜 칸트는 이 개념을 거부” 했냐고!!! 요! 그리고 지젝 자신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는 왜 지적 직관에 반대했냐고요. 반대한 적 없다고요? 그 책의 내용과 이 책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고요? 칸트는 물론 헤겔도 지적 직관을 거부했다고 하셨잖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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