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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간주곡 3
왕, 천민, 전쟁 ..... 그리고 섹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가 헤겔의 ‘왕’ 이다. 프랑스는 왕의 목을 잘라버렸는데, 헤겔은 군주제를 지지했다. 그것도 멍청한 왕, 그냥 서명만하는 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질서가 확고하게 잡혀있어 법률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국가에서 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왕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왕의 혈통 때문이다. (하긴,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그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순전히 형식적인 이 결단의 주체는 라캉의 주인기표와 같다고 지젝은 설명한다. 주인기표 없이 하나의 장場은 누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왕이란 말인가? 그것이 헤겔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젝은 왜 그것을 누누이 강조할까? 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물론 지젝이 현대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는 의미로 되풀이 ‘왕’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왕’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EBS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들으니,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제일 덕목이 ‘지식’ 이라고 했다는데, 헤겔은 그런 것 하나도 필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대통령에게 도대체 지식은 필요한 걸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제제는 18~9C 헤겔이 생각한 군주정에도 미치지 못하고, 차라리 16C 피렌체 공화국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헤겔과 플라톤은 왕에 대해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철인-왕을 최고로 생각했다. 현명한 지식을 가진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최고의 정치체이다. 헤겔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흔히 군주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군주가 교양을 제대로 갖추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국가의 정점을 차지할 만한 값어치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국가가 어떤 운세에 처하느냐는 군주로 인한 우연에 좌우된다느니 하면서 그와 같은 상태를 이성적인 상태로 현실에 존재하게끔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주장이 내세워지곤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성격의 특수성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전제는 지금 여기에 전혀 합당치 않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에서는 오직 형식적 결단을 행하는 정점만이 중요할 뿐이며, 오직 군주의 최측근에 있는 단 한 사람만이 ‘그렇습니다’ 라는 한마디로 끝마무리하는 점을 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결코 성격의 특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질서가 잡혀 있는 군주제에서는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만 귀속되어 있고 군주는 다만 이 법률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는 의지한다’라는 것을 덧붙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762~3」
헤겔의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 무언지 모르지만, 조금 짐작은 된다. ‘확고한 질서’ 가 잡혀 있고 ‘객관적인 면은 오로지 법률에 귀속’ 되어 있으니, 사실 왕은 있으나마나다. 그런데도 헤겔은 왜 굳이 ‘덧붙이기만’ 하는 왕의 존재를 역설할까?
라캉적 용어로 말하자면 S2와 S1의 차이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전적으로 S2 즉 지식담화라면 헤겔의 군주정은 S2에 S1 즉 주인담화을 덧붙인 것이다. 본래 S1이란, 권위란, 어떤 이유도 필요 없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이다. 아버지에 복종하는 것은 아버지가 유능하고 정직하고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며, 진정한 부권에 대한 부인이다. 종교적 의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학담화는 ‘이유’들을 필요로 한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학담화의 문제점은 그것이 정치가 아니라 ‘기술 관료적’ 인 권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세계사가 겪은 관료제의 가장 큰 재앙은 전체주의 정권이다. 헤겔은 이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주인담화와 대학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라캉적 용어를 빌리자면, ‘자연적’ 권위로부터 이유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권위로의 이러한 이행은 물론 주인의 담화로부터 대학의 담화로의 이행이다. 정당화된 권력 행사라는 이러한 세계는 또한 대단히 반정치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기술 관료적’ 이다. 즉 나의 권력 행사는 모든 합리적인 인간 존재에게 접근 가능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승인된 이유들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는 권력의 대리인으로서 전적으로 대체 가능하며, 나는 모든 사람이 내 입장이라면 행동했을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 경쟁적인 투쟁의 영역으로서의 정치, 환원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성)의 명료화로서의 정치는 직접적으로 보편적 이익을 구현하는 합리적 관리〔행정〕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p768」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르브륀’ 이라는 ‘헤겔의 최상의 독자’마저 헤겔의 ‘국가 관료제’라는 개념을 위와 같이 해석했다. 이런 관점은 헤겔을 플라톤의 ‘철인-왕’ 전통에 줄 세운다. 그러나 지젝은 헤겔이 ‘정당화된 권위’ 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헤겔은 진정한 권위는 항상 동어반복적인 자기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 권위의 행사는 찬반의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무한한 연쇄를 깨뜨리는 우발적 결정의 ‘비합리적’ 행위이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군주제를 옹호하는 근본적 이유 아닌가? 합리적 총체성으로서의 국가는 정상에 ‘비합리적’ 권위라는, 자질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권위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 다른 모든 공복〔공무원〕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만 왕은 바로 왕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해 정당화된다.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를 표현하자면, 국가 행위들의 수행적 측면은 왕을 위해 남겨진다. 국가 관료제는 국가의 행위의 내용을 준비하지만 그것을 실현해 사회에 강요하는 것은 왕의 비준이다. 헤겔은 ‘전체주의적’ 유혹에 맞서 사회체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국가 관료제 속에 구현되어 있는 ‘지식’과 왕 속에 구현되어 있는 주인의 권위 사이의 이러한 거리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전체주의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인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권위를 강요하고 합리적 지식의 제안들을 무시하는 정권이 아니라 지식이 즉각 ‘수행적 권력’을 떠맡는 정권을 말한다. -스탈린은 주인이 아니었으며(그렇게 자임하지 않았으며), 지식과 능력에 의해 정당화되는 인민의 최고의 공복이었다. p769」
여기서 전체주의 정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식의 왕조정권이 아니다. 그리고 헤겔의 군주제 역시 그런 전근대적 왕조정치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겪었을 뿐 아니라 제3세계 빈곤국이 겪고 있는 일인 독재의 유형과도 다르다. 스탈린은 인민의 의지를 직접 대변하는 최고의 관료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국가 관료제는 왜 전체주의가 되는 걸까? 여기서 지젝이 명료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는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의지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전도가 일어난다. 영도자가 인민의 의지를 완전히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으로 영도자의 의지가 곧 인민의 완전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대학담화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는 헤겔 역시 마찬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완성된 국가 조직’ 이나 ‘확고한 질서’ 가 가능할까? 객관적인 면들이 완전히 ‘법률에 귀속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헤겔의 왕은 실로 불가능한 국가의 불필요한 왕이 아닌가? 여하튼 조금 더 인용해 보자.
「헤겔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전통적 권위의) 주인의 담화와 (이유들에 의해 또는 주체들의 민주적 동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근대적 권력의) 대학의 담화 사이에서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헤겔은 주인의 권위의 카리스마는 가짜이며, 주인은 사칭자라는 것을 간파했다. - 그를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그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다(그의 신민들이 그를 주인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헤겔은 또한 만약 그러한 초과를 제거하고 전문가적 지식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된 자기투명한 권위를 부여하려 한다면 결과는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비합리성’은 국가의 상징적 수반에 국한되는 대신 사회적 권력의 몸체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카프카의 관료제란 바로 그처럼 주인의 형상을 박탈당한 전문적 지식 정권이다. -벤야민이 일기에서 보고하고 있듯이 카프카가 ‘유일하게 진정 볼세비키적 작가’라는 브레히트의 주장은 옳다. p769~770」
헤겔의 왕은 말하자면 ‘단독성’ 이다. 우연성이 필연성의 핵심 자체에 기입되는 지점인 주인 기표다. 민주주의적 선거가 보편적인 현대에도 이런 우연성은 작동한다.
「그리고 뒤피가 지적하듯 선거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즉 선거 과정에서도 또한 우연성, 운, ‘인기몰이’의 계기가 핵심적이다. 완전히 ‘합리적인’ 선거는 도대체 선거가 아니라 투명한 객체화된 과정일 것이다. 전통(근대적) 사회는 이 문제를 결과를 ‘입증해 주며’,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선험적 원천(신,왕)을 환기시킴으로써 해결했다. 바로 거기에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 즉 근대 사회들은 자신을 자율적이며, 자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더 이상 외적인 (선험적) 권위의 원천에 의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거 과정에서는 ‘운’ 이라는 계기가 여전히 작동해야 하는데, 정치 해설가들이 툭하면 ‘비합리성’을 역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영원한 여론조사로 환원된다면 민주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기계화되고 양화되며 ‘수행적’ 성격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p766」
우리가 선거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핵심이 된다. 그 우연성이 없다면 선거는 그냥 여론 조사에 불과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끝이 나지 않는다. S2들의, 지식의 끝없는 연쇄이다. 상황은 너무 복잡하고, 항상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남고, 찬반을 따지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S1, 주인기표는 여기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내가 그랬으니 그런 것이다.” 는 끝없는 찬반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다. 그 내용의 결과는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우연성이 없이는 ‘행위’ 역시 없다.
「르포르가 지적하듯이 투표는 (희생적) 의례로, 의례를 통한 사회의 자기파괴와 재탄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운 자체가 투명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으로 외부화되고/물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인민〕의 의지’는 고대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의지 또는 운명의 손으로 간주했던 것의 현대적 등가물이다. 사람들이 직접적인 자의적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즉 순수한 운의 결과를 사람들은 만약 그것이 최소한의 ‘실재’를 가리키면 받아들일 수 있다. - 헤겔은 오래전에 이것을 알고 있었으며, 군주제를 옹호하는 그의 논점은 이것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p767」
헤겔의 왕이나 선거의 결과는 모두 이 최소한의 ‘실재’ 이다. 순수한 ‘운’을 운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해 줄 수 있는 실재, 그것이 ‘왕’ 에게 필요한 것이 오직 혈통뿐인 이유이다.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혈통이기 때문에 토를 달 수 없는 ‘실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왜 헤겔이 다만 ‘덧붙일’ 뿐인 왕을 필요로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역사가 말하듯 그것이 오로지 왕일 필요는 없지만, 그런 역할을 할 무언가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험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합리적인 이성 국가’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역으로 지젝이 헤겔의 ‘왕’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완전히 투명한 합리적인 이성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헤겔이 구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 조차 그 정점에 불합리한 요소인 ‘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불합리한 요소는 바로 체계의 ‘초과’ 이다.
그런데 지젝은 여기서 헤겔의 한계를 지적한다. 체계의 불완전성을 구현하는 그 ‘초과’는 최상위의 ‘왕’의 존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하위의 ‘천민’에도 있다는 것을 헤겔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천민’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보편성이 되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섹슈얼리티’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천민은 잉여, part of no part 이다.
「여기서 쉽게 천민과 섹슈얼리티 사이의 유사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국가 관료제 보다는) 천민 속에서 ‘보편적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적 열정 속에서 문화도 또 자연도 아닌 초과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록 이 두 가지 경우에서 각각의 논리는 다르지만 (천민과 관련해 헤겔은 초과적/불협화음적 요소의 보편적 차원을 간과한다. 섹스와 관련해 그는 초과 그 자체, 자연/문명이라는 대립의 기반이 침식되는 것을 간과한다) 이 두 실패는 연결되어 있다. 초과는 보편성의 자리, 보편성 자체가 자신의 특수한 내용의 장 속으로 자신을 기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