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들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와『파씨의 입문』의 작가 황정은이 직접 나왔다. 약한 허스키에 성큼성큼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품보다 나는 더 매력적이었다. 상기된 두 호스트는 작품의 내용보다 작가와 그 주변 이야기 그리고 작품의 형식에 열을 올렸다. 사실 내용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흔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에는 훨씬 끔찍하고 잔혹한 아동살해, 아동학대 사건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물론 작가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떻게 폭력을 내화하고 폭력 속에 매몰되는지 아니면 폭력에 맞설 수 있는지 질문하며, 독자를 그 물음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폭력은 특히 가정폭력은 인간을 파괴한다. 어린 피해자가 불가항력일 때 당연히 그렇지만, 피해자가 분연히 주먹을 쥐고 돌아서 그 폭력을 되돌릴 때 더욱 그렇다. 존속상해는 근친상간에 못지않은 금기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러므로 세계사에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를 향한 무자비한 발길질로 파괴되는 것은 아버지의 육체가 아니라 발길질하는 자식의 영혼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차마 발길질 대신 씨발년이라는 욕설로 이 되갚음의 폭력을 승화한다. 황정은은 백번이 넘는 ‘씨발’ 질에도 불구하고, 앨리시어를 극한으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차라리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더 독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고 특이했던 것은 작품의 시점이었다. 나는 빨간책방의 수다스런 호스트들이 굉장히 파고들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작가 황정은은 무심하게 그렇게 써야할 것 같아서 그랬단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사실은 1인칭 이다. 앨리시어는~, 앨리시어는~ 하고 앨리시어를 따라가는 제3의 시선이 말을 하지만, 이 삼자는 사실 앨리시어 자신이다. 이 책의 첫 머리에 앨리시어의 두 인칭으로의 분리가 마치 회화적 아니 영상처럼 표현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 본다. 부채꼴로 펼쳐진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까지 천천히 훑어본다. 고깃집과 카페와 각종 대리점과 백화점이 있다. 사거리 중앙엔 이 지점에 무언가 묻혔다는 표식처럼 열십자로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사방으로 사람들이 길을 건널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들 가운데서 기다린다.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첫째 줄의 두 문장은 1인칭 앨리시어다. 그리고 둘째 줄부터 앨리시어는 3인칭으로 서서히 분리되어 마침내 여섯째 줄에 이르면 완벽하게 3인칭으로 변해있다. 마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영혼이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횡단보도 위의 3인칭 육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앨리시어의 영혼과 육체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의하면, 여기에 또 하나의 인칭이 호출되고 있다. -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 2인칭 독자를 향한 1인칭 앨리시어의 부름이다. 단순히 보자면 이 책은 앨리시어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자 추궁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

 

시점의 분리라는 특이한 서술법을 나는 처음 보았는데, 요즘 문단에서 드물지 않은 기법인지 굉장히 독창적인지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 내용의 주체’ 혹은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된 주체’ 의 분리이다. 말하자면 1인칭 앨리시어는 발화행위의 주체이고 3인칭 앨리시어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나는 밥을 먹고 있다’ 라는 단순한 문장에서도 주체의 분리를 볼 수 있다. 밥을 먹고 있는 ‘나’는 발화 내용의 주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발화행위의 주체다. 이 두 주체가 하나인 것 같지만, 사실 주체는 말을 통해 분열된다. 주체의 분열은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발화내용이 참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다. 이번에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참이므로, 발화행위의 주체인 나는 진실을 말했다. 발화행위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는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말을 통해서 뚜렷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다. 진실은 어느 쪽에 있을까? 이번에는 발화내용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이 말은 발화행위의 주체가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다. 이 문장이 거짓이므로, 문장 속의 주어 즉 발화내용의 주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결국 누가 되었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주체는 이렇게 거짓말하는 주체와 거짓말 하지 않는 주체로 분리된다. “발화행위의 나는 결코 발화내용의 나가 아니다.”

 

조금 더 흥미로운 사례는 가장 능란한 사기꾼의 수법에 있다. 깔끔한 사기꾼은 엄청난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함으로써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성공은 사실 사기꾼의 혀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달려 있다. 속지 않으려는 자가 더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의 말을 거꾸로 받아들인다. 탈무드에 이런 대화가 있다.

 

“네가 가는 곳은 크라코비인데, 네가 렘베르크로 가고 있다고 내가 믿도록, 크라코비로 간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왜 너는 거짓말을 하니?”

 

크라코비로 간다고 한 ‘너’의 말은 진실이다. 즉 발화내용의 주체인 너는 진실을 말했다. 그런데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크라코비로 간다고 하면 렘베르크로 간다고 내가 믿을 것임을 ‘너’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화행위의 주체인 너는 실제로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있다. 청개구리 동화다. 엄마 청개구리는 뭐든지 반대로만 하는 아기 청개구리에게 “내가 죽거든 개울가에 묻어라”고 말했다. 발화내용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는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발화행위의 주체로서의 엄마 청개구리의 욕망은 개울가에 절대로 묻지 말라는 것이다.

 

욕망이 발화 ‘행위’ 속에 드러나는 것은 말 즉 발화 ‘내용’이 주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답답함은 말이 욕망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함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멋지게 패러디한 것이 “남자에게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빵법이 없네~” 라는 광고가 아닐까. 표면적으로는 광고규제에 대한 우회적 패러디이지만, 실제로는 언어학적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주체의 분리를 훌륭히 은유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고백하는 발화내용의 실패는 발화행위의 차원에서 제품의 특징을 강타하며, 성공한 발화(광고)의 전형이 되었다.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차이는 언어학적인 구분이다.

 

「방브니스트 같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발화 행위énonciation 차원과 발화 내용énoncé의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 관례가 되어 있다. 발화 내용 차원의 담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발화의 수신자가 품게 되는 의문, 즉 발화의 송신자가 전달하는 표면적 발화 내용 너머에 ‘그는 과연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Che vuoi?’와 같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발화 행위 차원의 담론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언어 행위 속에 내재한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존재를 말해준다. 언어 행위 속에는 딱히 구체적으로 요구 조건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라캉 : 재현과 그 불만(이하 인용은 모두 이 책)> p135~6 」

 

라캉은 언어학적 문제를 정신분석학으로 끌어왔다. 라캉의 후기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특징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언어학을 읽은 결과이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담론이 갖는 두 측면, 즉 발화내용과 발화행위의 구별은 의식적 담론과 무의식적 담론의 구별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라캉은 이 구분법을 ‘말하여진 것 let dit’ 과 ‘말하는 것 le dire’ 사이의 차이로 설명하고, 주체의 진실은 ‘반쯤 말하여진 것 un mi-dit’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p91 」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다. 언어의 세계, 상징계로 들어와야만 주체가 탄생한다. 언어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부른다. 언어의 세계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주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조각의 대상a, 주체의 진실이다. 의식의 주체에게 이 진실은 억압되는데,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라캉의 명제에 따라 상실된 진실은 무의식의 주체를 통해 얼핏얼핏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존재의 진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언어의 음성적 발성, 즉 발화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주체, 욕망의 주체는 바로 발화 행위의 주체의 차원과 연결된다. 라캉의 말대로 “대타자의 영역에 위치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존재는 담론의 발화 행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말하는’ 발화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 ‘말하여진’ 발화 내용 속에서는 자신을 은폐한다. 주체의 진리, 무의식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한 주체의 전략은 그것을 반쯤 말하는 것이다 .p91~2 」

 

다시 ‘나는 밥을 먹고 있다’로 돌아가 보자. 밥을 먹고 있는 ‘나’와 그 말을 하는 ‘나’는 다르다. 발화내용의 주체와 발화행위의 주체가 분열된 것인데, 라캉에 따르면 진정한 주체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앨리시어는 비실비실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간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놓친 채로 밤 속에 남는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딱 다시 한 번 불쑥 1인칭 앨리시어가 나타난다. 1인칭 앨리시어는 책 첫 문장에서 한 번 나왔다 사라지고 앨리시어는 내내 3인칭으로 서술되었다. 그런데 1인칭 앨리시어 나는 3인칭 앨리시어 나를 놓치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그때서야 나(이 글을 쓰는 말리;;)는 이 이야기의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시어 자신인 것을 깨달았다.

 

왜 여기서 1인칭 앨리스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걸까? 이 무의식의 주체는 어떤 욕망의 주체인가? 여장을 한 부랑자 앨리시어는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한다. 자신을 현시한다. 여장과 악취로 사람들의 눈과 코에 들러붙는다.

 

그대의 무자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발화행위의 주체, 1인칭 앨리시어의 욕망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 우리가 앨리시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장으로든 악취로든 혹은 아직도 떨어지고만 있는 잔혹 동화 속의 소년 앨리스로든. 그러고도 불안한 앨리시어의 욕망은 중간 중간 우리를 호출하며 확인한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나를 놓치지는 않았나,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하는 앨리시어의 불안함. 그 불안함은 3인칭 앨리시어의 뒷모습을 놓치고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아마도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앨리시어도 앨리시어를 의식에서 놓아버리는데, 우리들은, 그대들은 정말 앨리시어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3인칭 앨리시어의 뒤에 감추고 있던 1인칭 앨리시어의 얼굴을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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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세상이 편치 않던 내게도 치기에 찬 시절이 있었나 싶은데,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한글로 쓰인 책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한국말도.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삶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책들과 부딪히며 세계의 불투명성과 스스로의 한계를 깨쳐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해하지 못한 책들 중에도 단연 최고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2011년 여름 무렵 지인들과 『정신현상학』 세미나를 했다. 나만 빼면 나름 학문이 업인 사람들인데, 이 책에 대해서만은 별반 그럴듯한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발제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해설서를 찾아보았는데 만만해 보이는 책이 없었다. 도서관에 있던 한자경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는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이었다. 그 세미나는 차라리 인내심의 시험이었는데, 한 문장을 열 번 되풀이 읽어도 그 말뜻이 머리는커녕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이라,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분량도, 두 권으로 나뉜 한길사판이 총 832쪽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현상학』읽기의 최고 성과는 다른 책에 대한 독해력이 높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하튼 지금도 『정신현상학』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횡설수설 외에 조리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명성은 끝 간 데가 없는지, 인문학 책들 여기저기에 수시로 출몰한다.

 

 

 

그러다 이번에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을 발견했다. 일본 저자라 좀 탐탁찮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아직 하루키도 한번 읽어 보지 않았다, 도서출판 b 의 <헤겔총서> 시리즈라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이후 헤겔이라면 넌더리가 나면서도, 한편 도전정신이 잠복해 있던 터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영어로 책을 쓰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라는데, 헤겔 사상의 핵심을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흡인력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현상학』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들을 읽으며, 매우 궁금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개념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구매해서 또 읽었는데도 아주 좋았다.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은 기대와 달리 혹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일단 일본식 문장을 직역한 한글 번역문은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살짝 윤색을 하면 나았지 싶을 정도인데, 이건 뭐 개인 취향이다. 내용으로 말하자면, 다 덮어두고, 이 책을 통해 『정신현상학』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원서의 혼란에 해설의 혼란을 더한 것도 같고,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이 된 것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아! 헤겔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주지 못한다. 게다가 또 눈에 밟히는 것은 역자인데, 이신철은 바로 바이저의 『헤겔』 역자이기도 하다. 철학박사로 헤겔에 관한 몇몇 책들을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인지 약간 의문이 든다. 원래 일본식 문장을 안 좋아하니까 번역문도 눈에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일을 뒤져보니 처음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 웹에서 찾은 그림이 있는데,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 의하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여행’ 이다. 절대적 앎을 향해 가는 지도 없는 여행 말이다. 혹은 내 생각에는 아이가 사고를 배워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첫 단계는 그저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것을 인지하는 감성적 확신 즉 감각이다. 의식의 첫 단계가 감각이란 말이다. 두 번째는 지각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단계. 세 번째는 지성 혹은 오성이다. 이 세단계의 의식을 통틀어 그냥 ‘의식’ 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자기의식’이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에 대한 인정과 투쟁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성’ 이다. 이성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정의로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가 있다. 마지막 단계는 정신이다. 정신의 단계에서 공동체와 세계가 중심을 이룬다. 정신은 공동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개별자로서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 내부를 자유롭게 오고가며, 역사라는 정신의 마당도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그러한 정신의 운동이 앎과 사유에 이끌려 전개될 때, 정신은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 ‘C.(DD) 절대지’ 의 경지에 놓인다. p198」

 

「종교와 연결하여 말하자면, 절대지란 신의 관점을 스스로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서는 앎을 가리키며, 교양 및 도덕과 연결하여 말하자면,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교양과 도덕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 앎을 가리킨다. p199」

 

의식의 최고 형태인 정신이 여행의 끝에 도달하는 곳은 ‘절대지’, 절대적인 앎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 사회적· 윤리적· 법적 토대를 형성하고 조망하는 경지가 절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의식의 여정을 서술한 『정신현상학』의 핵심은 ‘부정성’이다. 의식은 끊임없는 투쟁과 부정을 통해 절대지에 도달한다. 부정성은 여정을 이끄는 에너지, 동력이다. 『정신현상학』서문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이기도 한 이 구절이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자기의 외부에 맡겨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p71,72」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를 통해 주체가 탄생하고, 주체의 정신은 절대적 앎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세가와 히로시가 설명하는 헤겔 주체사상을 잠깐 읽어보자.

 

「세계 전체를 확고부동하고 완성된 질서로 파악하는 것이 스피노자식의 ‘실체’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분열과 대립과 부정을 가지고 들어와 질서의 해체와 재생의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참된 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 헤겔의 ‘주체’의 사상이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거니와, 완성된 질서를 이루어 내고서 긴장을 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해명할 것까지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 속에 일정한 질서가 주어졌을 때 거기에 안주할 수없는, 그리하여 그것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산출하고자 하는 힘을 지니는 것 - 그러한 것을 헤겔은 모두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현실 세계의 이르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부정의 힘을 보기 때문에, 세계 그 자체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속의 형태를 지닌 모든 것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39」

 

이렇게 주체와 부정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부정성은 즉각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고 있듯 헤겔의 변증법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정-반-합’의 도식이 아니다. 『헤겔』저자 프레드릭 바이저는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고 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개진은 원래 칸트의 것이다. 헤겔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심지어는 사이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지젝은 헤겔 변증법을 부정과 ‘부정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소위 정-반-합에서 말하는 행복한 합일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극단이며, 관점의 전환이다. 첫 번째 부정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을, 부정의 부정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차적 관점으로 전환할 뿐이다. 불가능성의 조건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바꾸어 보는 것, 그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12척박에 없는 것이 전쟁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 여겨졌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헤겔의 변증법을 실행 했다.

 

 

사족으로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전하며,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세가와 히로시에게도 어려웠던 듯하다. 사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은 <『정신현상학』의 난해함> 이란 장으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이 쓸데없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을 쓸 당시의 헤겔이 기백과 패기에 넘친 젊은이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넘치는 의욕을 사유가 따라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군데군데 사고의 모순과 관념의 비약이 있다고 하세가와 히로시는 보고 있다. 더 큰 이유는 ‘의식의 여정’ 이 순탄할 수 없고, 절대지라는 목적이 호락호락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은 물론이다. 여하튼 어렵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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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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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3주가 넘게 걸렸다. 예상대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철학, 독일철학, 미국철학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서양 현대철학에서 더 나올 것이 없지 싶은데, 철학아카데미 측의 의중은 모르겠다. 각각의 책은 나라이름에서 느껴지는, 그런 일반적 특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철학은 화려하고, 독일철학은 깊이 있고, 영미철학은 건조하다. 프랑스철학의 현란한 언어 속에는 다양한 사유가 거침없이 뻗어있고, 독일철학의 묵직한 언어에는 근원에 대한 질문과 현실의 고뇌가 녹아있다. 영미철학의 또박또박한 언어는 곧장 공리와 실용을 향해 나간다.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의 11편 중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리처드 로티, 그리고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철학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 없이는 영미철학 자체를 말할 수 없고, 제임슨은 라캉주의 좌파(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로 지젝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고, 로티는 그의 철학 자체 보다는 이유선의 로티 소개가 아주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난번에 대략 요약했고, 오늘은 리처드 로티의 <문화정치로서의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려 한다.

 

 

 

바로 로티에 의해 박사후 과정을 지도받은 이유선은 로티의 핵심개념을 한마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라고 정의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란 책에서 로티 자신이 사용한 어휘이다.

 

로티는 서양철학에 대한 분석을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플라톤 이래 근대철학의 인식론, 현대의 언어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로티가 볼 때는 이게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구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는 말의 뜻을 로티식으로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이런 표상관계를 변형해온 역사라는 것이죠. 로티는 표상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플라톤이 썼던 하나의 은유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이 틀 안에서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에서의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된 것이죠.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따지지 않으면 철학자가 아닌 게 돼버려요. p239~240」

 

플라톤은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 혹은 거울상 즉 표상이라고 보았다. 근대 인식론의 핵심 역시 인간이 어떻게 객관세계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즉 인식 주관과 객관 세계와의 거울상에 대한 탐구이다. 언어적 전회를 겪은 현대철학도 이 표상관계에 천착한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분석철학의 기본 테제이다. 로티가 보기에 근대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여전히 진리 찾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표상의 방식만이 변했다. 로티는 이에 반해 반표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 등이 모두 표상주의가 맞는 것인지에 조금 의문이 든다. 원본 없는 다양한 복제품들, 진리가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진리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 답은 ‘진리’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진리문제’의 틀 속에 놓여있다. 로티가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계기는 철학이 이 진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로티는 처음에 분석철학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중심의 비엔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 미국의 강단철학은 급속히 분석철학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교수가 되고나서 로티는 분석철학에 회의를 느낀다. 분석철학은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는 건데, 백날 해봐도 철학자가 아니라 마치 변호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법정의 논리싸움과 비슷했다. 로티가 어렸을 때 플라톤을 읽으며 꾸었던 꿈, 현자가 되어서 세상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로티는 듀이, 헤겔, 니체, 프로이트, 데리다, 하버마스, 가다머 등 분석철학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이유선은 로티의 대표작으로『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를 꼽는데, 이 책은 소설 작품을 분석하면서 철학 얘기를 하는 파격적인 서술로 쓰인 책이다. 유럽에서는 아니겠지만,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글쓰기 방식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인데, 여기서 로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뜨린다. 로티는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욕망, 헤겔이 그 대표자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헤겔은 철학의 종결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위버멘쉬를 통해 진리의 세계는 없다고 선언한다. 초인은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긍정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상을 긍정하는, 절대 긍정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에게 이런 초인의 모델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바로 자율성을 획득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를 서술해 줄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씀으로써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자이다.

 

로티는 이런 시인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시인의 불안’이 그를 아이러니스트로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시를 복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 속에 산다. 시의 복제는 삶의 복제이다. ‘내가 혹시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닐까?’ 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이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로티는 프루스트를 가장 뛰어난 아이러니스트로 평가하는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자기 자신의 어휘로, 자기 자신을 재 서술한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 소설 작업을 통해 비로소 프루스트가 된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프루스트는 프루스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세계 밖의 어떤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재서술을 통해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은 사적인 욕망이다. 아이러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타쿠도 아이러니스트이다. 로티는 여기서 아이러니스트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굉장히 넓어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약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실천을 하는가, 이게 자유주의자의 골자입니다. 자유주의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아이러니스트의 핵심은 자기완성에 대한 욕망이에요. 근데 이 두 가지는 사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p252」

 

여기서 로티는 혹은 이유선은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잔인한 것인가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적 정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철학적 정초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실천과는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로티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실천은 잘못된 제도와 관습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와 관습을 고쳐나감으로써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가?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을 중계방송으로 보았다. 신자가 아닌데도 교황의 인자하고 환한 얼굴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무것도 곧바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유민이 아빠는, 승현이 아버지는, 그리고 세월호의 가족들은 교황과의 그 공감각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것 같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그 기준으로만 말하자면 교황은 훌륭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런 공감각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감성인가? 세월호 참사의 파국적 전개 과정을 보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학생들 그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해경 구조대 123정은 ‘당황해서 깜박 잊고’ 선내 진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내 진입을 하지 않은 것도 기가 막히지만, 변명보다 조롱처럼 들리는 ‘어머 깜박, sorry’ 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종자를 바다에 두고도 경제를 위해 이제 그만하자던 대통령의 말은 벌써 언제였는지도 가뭇하다. 거기에 국민들은 ‘7.30 재보궐선거 새누리당 압승’ 으로 화답했다. 15곳의 재보궐 선거 지역민들이 별난 괴물이거나 냉혈한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기껏해야 수천에서 수만 정도의 여론조사보다는 훨씬 정확한 민심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유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인간들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무엇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복잡한 것이 아닌가? 물론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초기에, 우리 국민들은 앞 다투어 분향소로 몰려갔다. 40일 만에 안산 합동분향소는 55만 명이 넘게 조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 연예인들도 수억씩 쾌척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눈물은 흘려줄 수 있고, 돈도 던져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감각적인 눈물과 돈 몇 푼에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눈물과 감상적 동정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나의 즉각적인 감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때서야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진상 규명이며, 돈이 아니라 재발방지 대책이다. 유민이 아빠가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도, 승현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장정을 떠났던 것도, 그것들 없이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이 우리에게 벌써부터 사라져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유선에 의하면 로티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를 역설했다. 그러나 이유선의 강의에는 어떻게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건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에의 공감이란 단순히 눈물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관점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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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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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왠지 무서웠다. 『감시와 처벌』『광기의 역사』『성의 역사』『지식의 고고학』『말과 사물』. 어느것 하나 만만해 뵈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안전, 영토, 인구』라는 책이 번역되었는데, 덜컥 세미나 책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제목만 봐도 한숨이 탁 나오는데, 그것도 푸코의 책이라니. 나의 첫 푸코가 하필 ... 
 
 
푸코는 1971년부터 1984년까지 한해만 빼고, 13년 동안 해마다 12주씩, 1주에 한 번,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다. '사유체계의 역사' 라는 명칭 아래 진행된 이 강의에는 5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들었는데, 학생, 교사, 연구자 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찬 일반인들, 외국인들이 원형강의실 두 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중강의 혹은 공개강좌였다. 이 강의들은 많은 청강생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푸코 사후에 유가족의 동의 아래 강의록의 형태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강의록은 총 13권이다. 출판사 '난장'에서는 2011년 『안전, 영토, 인구』를 처음으로, 2012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그리고 올해 『정신의학의 권력』을 번역 출간하였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번역한 것들도 있다. 
 
『안전, 영토, 인구』는 재미있었다. 강의여서 그런지 어렵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강의의 치밀함이 놀라웠다. 사실 콜레주드프랑스의 강의들은 강의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강의들은 한 해동안의 연구업적을 공개강좌를 통해 설명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이름값으로 설렁설렁하는 그런 강의와는 다르다. 강좌의 문이 열리자, 천정까지 쌓여 있던 기록들, 자료들, 문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것들을 다 모으고 읽고 분석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궁금했다. 푸코의 탐구 방법을 흔히 고고학과 계보학이라고 한다. 무슨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푸코의 강의들을 읽다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구성' 되는가 이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 푸코의 고고학이다. 그렇게도 시시콜콜 세부적인 기록들과 그렇게도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들이 푸코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안전, 영토, 인구』는 '통치' 개념의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 작업이며, 『정신의학의 권력』은 '정신의학'적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19세기 정신의학의 규율권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재미로는 『안전, 영토, 인구』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좀 있는 편이라, 기대값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푸코는 정신분석학에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은듯한 느낌이다. 
 
난장 출판사의 또 다른 강의록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연결되는 강의이다. 푸코를 '감시와 처벌' 즉 규율사회를 강조한 학자로만 알고 있다면, 통상 푸코가 인용되는 방식이 그러니,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무척 새로울 것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푸코는, 벤덤의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규율체제가  '생명관리정치' 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때 처음으로 푸코는 생명관리권력, 혹은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인구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전면화된 규율사회'라는 자신의 가설에 수정을 가했다." " '폐쇄된 규율들로부터 무한히 일반화가 가능한 판옵티콘 체제의 메커니즘에 이르게 되는 규율사회'라는 『감시와 처벌』의 가설을 수정함으로써 푸코는 『앎의 의지』의 두 번째 축인 생명의 축,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이라는 축, 다시 말해서 인구에 대한 생명관리정치의 축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세기와 21세기를 각각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로 구분한 후,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 규율사회는 말하지 않아도 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벤덤의 '판옵티콘'에 닿아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 때가 막 『안전, 영토, 인구』를 읽고 난 후였다. 푸코에 대한 (당연히 얻어들은 것 뿐인) 선입관과는 판이하게,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에 신기해하고 있던 차에, 20세기를 규율사회로 규정한 한병철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푸코는 이미 규율사회의 개념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는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있었다. 그때도 참 놀라웠다. 70년대 말에 벌써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거론하다니, 우리나라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도 아마 없었을 텐데. 개발독재 아래 웅크리고 있던 그 때, 신자유주의를 알고 있던 학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여하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이어서 읽으면 꽤 재미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기대만큼의 재미는 없었는데, 나는 『주체성과 진실』이나 『주체의 해석학』등 80년대 초반의 강의들이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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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전 지식의 고고학 읽다가 정말 난해해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쉽게 접할 양반이 아니구나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푸코가 좋습니다.감시와처벌,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는정말 탁월했으니 말이죠. 안전, 영토, 인구.. 이거 세일하길래 사둘려고 장바구니 담았다가 포기하고는 했는데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워야겠군요..

말리 2014-08-06 09:38   좋아요 0 | URL
유명한건 다 읽으셨네요 ㅎㅎ. 전 지젝을 통해 철학에 가까워진 터라 좀 편향되어 있어요. 지젝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철학은 잘 안 읽는 ㅋ;; 그런데 푸코 강의는 정말 좋았어요. 이런 공개강좌가 우리에게도 열리면 어디든 쫓아가고 싶어요. 12시간에서 13시간 정도 강의분량이라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아요. 추천드리고 싶어요.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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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사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소위 ‘아줌마’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다. 신도시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서 학교 이야기, 과외 이야기, 시험 이야기, 유학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느긋한 오전, 향 좋은 커피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마주 앉아도, 아줌마들에게는 결코 자신만의 삶이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욕망, 나의 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다. 아이의 삶을 뺀 나의 삶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방과 후 교사를 하는 어떤 지인은 매일 엄마들이 교실을 얼쩡거리기에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일을 만들어서 매일 오셔요” 하더란다. 일이 없으면 옥수수라도 한 자루 쪄서 온단다. 그렇게 엄마들은 두 번의 유년을 산다. 두 번의 유년. 좋은 점이 있냐고 했더니, 어떤 엄마가 말했다. 어린 시절 읽지 못했던 동화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아요. 옆에 있던 다른 엄마는, 어릴 때 입어 보지 못했던 예쁜 옷을 딸에게 입혀서 좋은데 나는, 호호 책이라니, 아이 부끄러워, 했다. 나도 동화책은 부럽다.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공공 도서관이 없던 때라(내가 몰랐던 것일까?), 언니 오빠의 교과서를 읽는 것 외에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좋은 동화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처음 읽는 어떤 창작동화들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프린들 주세요』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왜 하필 저 높고 푸른 허공을 ‘하늘’ 이라고 부를까?, 달고 시원한 이 과일은 왜 ‘수박’ 이라 이름 붙였을까? 요즘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 할지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욕이나 한바가지 얻어먹고 끝날 질문이었다. 하늘이 하늘이고 수박이 수박이지 그럼 뭐야! 『프린들 주세요』의 닉은 이렇게 순진한 물음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선생님 골탕 먹이기의 천재 닉은 5학년이 되자,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같은 막강한 적수를 국어 선생님으로 만난다. 닉은 겁 없는 아이답게 선제공격한다. “선생님, 이 교실에는 사전이 참 많아요. 특히 저 큰 사전이요. 그 많은 낱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수업 시간 종료를 몇 분 앞두고 닉은 사전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설명에 정신이 팔려 숙제 내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현정 급이다. “여러분도 궁금한가요? 좋아요. 니콜라스가 이 문제를 조사해서 간단히 발표해 보겠니?” 1라운드는 닉의 패배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나면 닉이 아니다. 다음 국어시간, 열심히 준비해 간 닉은 1시간 내내 지루한 발표를 함으로써,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빼앗는다. 눈치를 챈 선생님이 발표를 마무리시키자, 닉은 급한 마음에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낱말은 이런 뜻이고 저런 낱말은 저런 뜻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짓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 누가 그런 거죠?” “누가 개를 개라고 했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너와 나와 이 반에 있는 아이들과 이 학교와 이 마을과 이 주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사전에 나오는 말은 다 우리가 만든 거란다.” 집으로 가던 도중 닉은 말을 못하던 아기 때 ‘과갈라’ 하면 엄마가 노래 테이프를 틀어주던 일을 기억해 내고, “네가 그런 거야” 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닉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친구들과도 문구점에서도 선생님께도 닉은 굽히지 않고 ‘프린들’을 고집한다. 선생님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면 남아서 반성문을 쓰게 하지만, 선생님의 탄압이 계속되면 될수록 프린들은 닉의 반을 넘어 전 학교 그리고 전 지역에 퍼져 나가며, 프린들 열풍을 일으킨다. 10년 뒤 결국 ‘프린들’은 선생님이 사랑하던 사전에까지 실리게 되고, 선생님과의 전쟁은 끝이 난다. 『프린들 주세요』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언어의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언어라니, 마침 며칠 전에 산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생각났다. 천천히 읽으려고 꽂아두었는데, 그 첫 번째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닌가. 『프린들 주세요』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볼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라는 두 권의 책으로 대표된다. 30대 중반에 『논리-철학 논고 』를 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고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6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그러다 『논리-철학 논고 』의 결정적 결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는데, 책은 사후에 출간된다.

 

비트겐슈타인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아마도 7번 명제인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 것이다. 말 자체가 멋지게 들리니 여기저기 마구 이용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단순히 말 할 용기가 없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쓰일 때가 제일 어처구니없다. 탄압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 것’ 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논리-철학 논고》의 최종 결론인 7번 명제를 통하여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논리-철학 논고》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고의 한계를 긋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사고의 한계 밖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는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라고요. p25」

 

비트겐슈타인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들” 뿐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참, 거짓이 똑 부러지는 것, 그런 것들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나 진리, 선악 심지어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참 거짓을 구분할 수도 없고, 그 말이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여기 한 사람과 개 한마리가 있다.” 이 문장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착하다.” 이건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논리-철학 논고》의 주장을 “그림 이론” 이라고 한다. 한 명제는 사실이나 현실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게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을 열등한 것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인데, 그는 “말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 이라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며, 자신이 쓴 부분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쓰지 않은 부분인 ‘말 할 수 없는 것’ 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사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했을까?

 

「《논리-철학 논고》에 따르면 철학은 “언어 비판”을 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명료화와 언어 비판이라는 활동이 필요한가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며, 그리하여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실제 형식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물음들과 명제들이 생겨날 수 있지요. 따라서 그러한 물음들이나 명제들이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는 “언어 비판”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p41 」

 

“언어 비판”의 비판은 칸트의 “수수이성 비판”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했다. 순수이성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칸트에게 물자체는 현상 너머에 실재하는 것이었다. 비트켄슈타인도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통한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윤리나 미학, 세계, 신 등 ‘말할 수 없는 것’ 들은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것들로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 』는 출판되자마자 떠들썩하게 유명세를 타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요 주장들은 『논리-철학 논고 』의 영향 아래 놓인다. 20세기 영미 철학의 대표자로 단연 비트겐슈타인이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의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 』는 그 작업들의 최종 결과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의 ‘그림 이론’ 을 포기하고 ‘사용의미 이론’과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사용의미 이론의 핵심은 ‘언어 놀이’ 이다. 그림 이론에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문장과 그림은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언어 놀이에서 하나의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의 지시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벽돌’ 이라고 할 때, 공사 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가져 오라’는 의미가 되지만, 태권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격파하라’ 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용의미 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사용의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문장을 도구로 간주하라. 그리고 문장의 뜻은 그 사용이라고 간주하라!” 라고요. P35」

 

전라도의 ‘거시기’, 경상도의 ‘쫌’ 따위가 바로 언어놀이의 대표적 사례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거시기’나 ‘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이 낱말들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전라도에서, 쫌이 경상도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다 함께 ‘언어놀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 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런데 당신이 ‘거시기’ 라는 말을 정말 그 말의 규칙을 제대로 따라 사용했다고, 즉 이런 뜻이 아니라 저런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개떡 같은 말을 진짜 찰떡 같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가?

 

「우리는 언어놀이에 참여하면서 예컨대 “하얗다”와 관련된 규칙을 실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배움과 규칙을 따르는 데 있어 생각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실천, 관습, 제도이며, 넓게는 삶의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적으로 규칙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언어놀이, 제도, 삶의 형식과 얽힌 행함과 실천에서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기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의 지배는 “체험의 논리적 조건” 이지요. P39~40」

 

 

『프린들 주세요』의 닉과 선생님의 전쟁은 10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닉과 선생님의 직접적 대립은 몇 달을 넘기지 않고 금방 끝났다. 그러나 프린들이라는 이름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놀이는 닉의 손을 떠나 학교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장난꾸러기 닉의 ‘프린들’ 이라는 언어놀이는 사용과 실천을 통해 관습이 되고 드디어 10년 후 사전이라는 제도에 정착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이렇게 『프린들 주세요』에 직접 연결시켜도 되는지 사실 자신은 없지만, 거칠게 이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초기의 비트겐슈타인과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를 위한 “언어비판”이라는 《논리-철학 논고》의 철학관과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마법을 걸려는 것에 대한 투쟁” 이라는 《철학적 탐구》의 철학관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연속성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이 표현되는 언어에 대한 일관된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P42」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라고 하면 한마디로 ‘언어’ 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언어에 대한 감시, 언어가 우리의 사유와 지성을 속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일관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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