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세상이 편치 않던 내게도 치기에 찬 시절이 있었나 싶은데,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한글로 쓰인 책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한국말도.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삶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책들과 부딪히며 세계의 불투명성과 스스로의 한계를 깨쳐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해하지 못한 책들 중에도 단연 최고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다. 2011년 여름 무렵 지인들과 『정신현상학』 세미나를 했다. 나만 빼면 나름 학문이 업인 사람들인데, 이 책에 대해서만은 별반 그럴듯한 이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발제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해설서를 찾아보았는데 만만해 보이는 책이 없었다. 도서관에 있던 한자경의 『헤겔 정신현상학의 이해』는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할 정도로 횡설수설이었다. 그 세미나는 차라리 인내심의 시험이었는데, 한 문장을 열 번 되풀이 읽어도 그 말뜻이 머리는커녕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책이라,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분량도, 두 권으로 나뉜 한길사판이 총 832쪽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은 『정신현상학』읽기의 최고 성과는 다른 책에 대한 독해력이 높아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하튼 지금도 『정신현상학』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횡설수설 외에 조리있는 말은 한마디도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명성은 끝 간 데가 없는지, 인문학 책들 여기저기에 수시로 출몰한다.

 

 

 

그러다 이번에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을 발견했다. 일본 저자라 좀 탐탁찮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아직 하루키도 한번 읽어 보지 않았다, 도서출판 b 의 <헤겔총서> 시리즈라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이후 헤겔이라면 넌더리가 나면서도, 한편 도전정신이 잠복해 있던 터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게 된 책이다. 영어로 책을 쓰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라는데, 헤겔 사상의 핵심을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흡인력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현상학』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들을 읽으며, 매우 궁금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개념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고 다시 구매해서 또 읽었는데도 아주 좋았다.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은 기대와 달리 혹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일단 일본식 문장을 직역한 한글 번역문은 어쩔 수 없이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살짝 윤색을 하면 나았지 싶을 정도인데, 이건 뭐 개인 취향이다. 내용으로 말하자면, 다 덮어두고, 이 책을 통해 『정신현상학』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원서의 혼란에 해설의 혼란을 더한 것도 같고,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이 된 것도 같은데, 전체적으로, 아! 헤겔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주지 못한다. 게다가 또 눈에 밟히는 것은 역자인데, 이신철은 바로 바이저의 『헤겔』 역자이기도 하다. 철학박사로 헤겔에 관한 몇몇 책들을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인지 약간 의문이 든다. 원래 일본식 문장을 안 좋아하니까 번역문도 눈에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일을 뒤져보니 처음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 웹에서 찾은 그림이 있는데, 출처가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 의하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여행’ 이다. 절대적 앎을 향해 가는 지도 없는 여행 말이다. 혹은 내 생각에는 아이가 사고를 배워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첫 단계는 그저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것을 인지하는 감성적 확신 즉 감각이다. 의식의 첫 단계가 감각이란 말이다. 두 번째는 지각이다. 사물을 인지하는 단계. 세 번째는 지성 혹은 오성이다. 이 세단계의 의식을 통틀어 그냥 ‘의식’ 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자기의식’이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에 대한 인정과 투쟁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성’ 이다. 이성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정의로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가 있다. 마지막 단계는 정신이다. 정신의 단계에서 공동체와 세계가 중심을 이룬다. 정신은 공동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개별자로서의 정신이 공동체 정신 내부를 자유롭게 오고가며, 역사라는 정신의 마당도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그러한 정신의 운동이 앎과 사유에 이끌려 전개될 때, 정신은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 ‘C.(DD) 절대지’ 의 경지에 놓인다. p198」

 

「종교와 연결하여 말하자면, 절대지란 신의 관점을 스스로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서는 앎을 가리키며, 교양 및 도덕과 연결하여 말하자면,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교양과 도덕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 앎을 가리킨다. p199」

 

의식의 최고 형태인 정신이 여행의 끝에 도달하는 곳은 ‘절대지’, 절대적인 앎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 사회적· 윤리적· 법적 토대를 형성하고 조망하는 경지가 절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의식의 여정을 서술한 『정신현상학』의 핵심은 ‘부정성’이다. 의식은 끊임없는 투쟁과 부정을 통해 절대지에 도달한다. 부정성은 여정을 이끄는 에너지, 동력이다. 『정신현상학』서문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이기도 한 이 구절이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자기의 외부에 맡겨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 p71,72」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를 통해 주체가 탄생하고, 주체의 정신은 절대적 앎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하세가와 히로시가 설명하는 헤겔 주체사상을 잠깐 읽어보자.

 

「세계 전체를 확고부동하고 완성된 질서로 파악하는 것이 스피노자식의 ‘실체’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분열과 대립과 부정을 가지고 들어와 질서의 해체와 재생의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참된 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 헤겔의 ‘주체’의 사상이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거니와, 완성된 질서를 이루어 내고서 긴장을 푸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해명할 것까지도 없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체이다.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 속에 일정한 질서가 주어졌을 때 거기에 안주할 수없는, 그리하여 그것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산출하고자 하는 힘을 지니는 것 - 그러한 것을 헤겔은 모두 ‘주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현실 세계의 이르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부정의 힘을 보기 때문에, 세계 그 자체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속의 형태를 지닌 모든 것도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39」

 

이렇게 주체와 부정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 부정성은 즉각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고 있듯 헤겔의 변증법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정-반-합’의 도식이 아니다. 『헤겔』저자 프레드릭 바이저는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고 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개진은 원래 칸트의 것이다. 헤겔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심지어는 사이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지젝은 헤겔 변증법을 부정과 ‘부정의 부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은 소위 정-반-합에서 말하는 행복한 합일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의 극단이며, 관점의 전환이다. 첫 번째 부정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을, 부정의 부정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차적 관점으로 전환할 뿐이다. 불가능성의 조건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바꾸어 보는 것, 그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12척박에 없는 것이 전쟁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 여겨졌지만, 이순신 장군에게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헤겔의 변증법을 실행 했다.

 

 

사족으로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전하며,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세가와 히로시에게도 어려웠던 듯하다. 사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은 <『정신현상학』의 난해함> 이란 장으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이 쓸데없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을 쓸 당시의 헤겔이 기백과 패기에 넘친 젊은이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넘치는 의욕을 사유가 따라잡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군데군데 사고의 모순과 관념의 비약이 있다고 하세가와 히로시는 보고 있다. 더 큰 이유는 ‘의식의 여정’ 이 순탄할 수 없고, 절대지라는 목적이 호락호락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은 물론이다. 여하튼 어렵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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