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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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3주가 넘게 걸렸다. 예상대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철학, 독일철학, 미국철학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서양 현대철학에서 더 나올 것이 없지 싶은데, 철학아카데미 측의 의중은 모르겠다. 각각의 책은 나라이름에서 느껴지는, 그런 일반적 특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철학은 화려하고, 독일철학은 깊이 있고, 영미철학은 건조하다. 프랑스철학의 현란한 언어 속에는 다양한 사유가 거침없이 뻗어있고, 독일철학의 묵직한 언어에는 근원에 대한 질문과 현실의 고뇌가 녹아있다. 영미철학의 또박또박한 언어는 곧장 공리와 실용을 향해 나간다.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의 11편 중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리처드 로티, 그리고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철학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 없이는 영미철학 자체를 말할 수 없고, 제임슨은 라캉주의 좌파(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로 지젝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고, 로티는 그의 철학 자체 보다는 이유선의 로티 소개가 아주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난번에 대략 요약했고, 오늘은 리처드 로티의 <문화정치로서의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려 한다.

 

 

 

바로 로티에 의해 박사후 과정을 지도받은 이유선은 로티의 핵심개념을 한마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라고 정의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란 책에서 로티 자신이 사용한 어휘이다.

 

로티는 서양철학에 대한 분석을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플라톤 이래 근대철학의 인식론, 현대의 언어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로티가 볼 때는 이게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구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는 말의 뜻을 로티식으로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이런 표상관계를 변형해온 역사라는 것이죠. 로티는 표상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플라톤이 썼던 하나의 은유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이 틀 안에서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에서의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된 것이죠.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따지지 않으면 철학자가 아닌 게 돼버려요. p239~240」

 

플라톤은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 혹은 거울상 즉 표상이라고 보았다. 근대 인식론의 핵심 역시 인간이 어떻게 객관세계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즉 인식 주관과 객관 세계와의 거울상에 대한 탐구이다. 언어적 전회를 겪은 현대철학도 이 표상관계에 천착한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분석철학의 기본 테제이다. 로티가 보기에 근대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여전히 진리 찾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표상의 방식만이 변했다. 로티는 이에 반해 반표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 등이 모두 표상주의가 맞는 것인지에 조금 의문이 든다. 원본 없는 다양한 복제품들, 진리가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진리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 답은 ‘진리’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진리문제’의 틀 속에 놓여있다. 로티가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계기는 철학이 이 진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로티는 처음에 분석철학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중심의 비엔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 미국의 강단철학은 급속히 분석철학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교수가 되고나서 로티는 분석철학에 회의를 느낀다. 분석철학은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는 건데, 백날 해봐도 철학자가 아니라 마치 변호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법정의 논리싸움과 비슷했다. 로티가 어렸을 때 플라톤을 읽으며 꾸었던 꿈, 현자가 되어서 세상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로티는 듀이, 헤겔, 니체, 프로이트, 데리다, 하버마스, 가다머 등 분석철학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이유선은 로티의 대표작으로『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를 꼽는데, 이 책은 소설 작품을 분석하면서 철학 얘기를 하는 파격적인 서술로 쓰인 책이다. 유럽에서는 아니겠지만,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글쓰기 방식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인데, 여기서 로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뜨린다. 로티는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욕망, 헤겔이 그 대표자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헤겔은 철학의 종결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위버멘쉬를 통해 진리의 세계는 없다고 선언한다. 초인은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긍정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상을 긍정하는, 절대 긍정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에게 이런 초인의 모델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바로 자율성을 획득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를 서술해 줄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씀으로써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자이다.

 

로티는 이런 시인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시인의 불안’이 그를 아이러니스트로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시를 복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 속에 산다. 시의 복제는 삶의 복제이다. ‘내가 혹시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닐까?’ 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이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로티는 프루스트를 가장 뛰어난 아이러니스트로 평가하는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자기 자신의 어휘로, 자기 자신을 재 서술한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 소설 작업을 통해 비로소 프루스트가 된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프루스트는 프루스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세계 밖의 어떤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재서술을 통해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은 사적인 욕망이다. 아이러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타쿠도 아이러니스트이다. 로티는 여기서 아이러니스트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굉장히 넓어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약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실천을 하는가, 이게 자유주의자의 골자입니다. 자유주의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아이러니스트의 핵심은 자기완성에 대한 욕망이에요. 근데 이 두 가지는 사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p252」

 

여기서 로티는 혹은 이유선은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잔인한 것인가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적 정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철학적 정초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실천과는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로티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실천은 잘못된 제도와 관습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와 관습을 고쳐나감으로써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가?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을 중계방송으로 보았다. 신자가 아닌데도 교황의 인자하고 환한 얼굴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무것도 곧바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유민이 아빠는, 승현이 아버지는, 그리고 세월호의 가족들은 교황과의 그 공감각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것 같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그 기준으로만 말하자면 교황은 훌륭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런 공감각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감성인가? 세월호 참사의 파국적 전개 과정을 보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학생들 그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해경 구조대 123정은 ‘당황해서 깜박 잊고’ 선내 진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내 진입을 하지 않은 것도 기가 막히지만, 변명보다 조롱처럼 들리는 ‘어머 깜박, sorry’ 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종자를 바다에 두고도 경제를 위해 이제 그만하자던 대통령의 말은 벌써 언제였는지도 가뭇하다. 거기에 국민들은 ‘7.30 재보궐선거 새누리당 압승’ 으로 화답했다. 15곳의 재보궐 선거 지역민들이 별난 괴물이거나 냉혈한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기껏해야 수천에서 수만 정도의 여론조사보다는 훨씬 정확한 민심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유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인간들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무엇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복잡한 것이 아닌가? 물론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초기에, 우리 국민들은 앞 다투어 분향소로 몰려갔다. 40일 만에 안산 합동분향소는 55만 명이 넘게 조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 연예인들도 수억씩 쾌척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눈물은 흘려줄 수 있고, 돈도 던져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감각적인 눈물과 돈 몇 푼에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눈물과 감상적 동정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나의 즉각적인 감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때서야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진상 규명이며, 돈이 아니라 재발방지 대책이다. 유민이 아빠가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도, 승현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장정을 떠났던 것도, 그것들 없이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이 우리에게 벌써부터 사라져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유선에 의하면 로티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를 역설했다. 그러나 이유선의 강의에는 어떻게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건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에의 공감이란 단순히 눈물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관점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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