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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ㅣ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평점 :
“엄마들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사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소위 ‘아줌마’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다. 신도시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서 학교 이야기, 과외 이야기, 시험 이야기, 유학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느긋한 오전, 향 좋은 커피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마주 앉아도, 아줌마들에게는 결코 자신만의 삶이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욕망, 나의 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다. 아이의 삶을 뺀 나의 삶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방과 후 교사를 하는 어떤 지인은 매일 엄마들이 교실을 얼쩡거리기에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일을 만들어서 매일 오셔요” 하더란다. 일이 없으면 옥수수라도 한 자루 쪄서 온단다. 그렇게 엄마들은 두 번의 유년을 산다. 두 번의 유년. 좋은 점이 있냐고 했더니, 어떤 엄마가 말했다. 어린 시절 읽지 못했던 동화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아요. 옆에 있던 다른 엄마는, 어릴 때 입어 보지 못했던 예쁜 옷을 딸에게 입혀서 좋은데 나는, 호호 책이라니, 아이 부끄러워, 했다. 나도 동화책은 부럽다.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공공 도서관이 없던 때라(내가 몰랐던 것일까?), 언니 오빠의 교과서를 읽는 것 외에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좋은 동화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처음 읽는 어떤 창작동화들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프린들 주세요』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왜 하필 저 높고 푸른 허공을 ‘하늘’ 이라고 부를까?, 달고 시원한 이 과일은 왜 ‘수박’ 이라 이름 붙였을까? 요즘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 할지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욕이나 한바가지 얻어먹고 끝날 질문이었다. 하늘이 하늘이고 수박이 수박이지 그럼 뭐야! 『프린들 주세요』의 닉은 이렇게 순진한 물음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선생님 골탕 먹이기의 천재 닉은 5학년이 되자,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같은 막강한 적수를 국어 선생님으로 만난다. 닉은 겁 없는 아이답게 선제공격한다. “선생님, 이 교실에는 사전이 참 많아요. 특히 저 큰 사전이요. 그 많은 낱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수업 시간 종료를 몇 분 앞두고 닉은 사전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설명에 정신이 팔려 숙제 내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현정 급이다. “여러분도 궁금한가요? 좋아요. 니콜라스가 이 문제를 조사해서 간단히 발표해 보겠니?” 1라운드는 닉의 패배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나면 닉이 아니다. 다음 국어시간, 열심히 준비해 간 닉은 1시간 내내 지루한 발표를 함으로써,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빼앗는다. 눈치를 챈 선생님이 발표를 마무리시키자, 닉은 급한 마음에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낱말은 이런 뜻이고 저런 낱말은 저런 뜻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짓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 누가 그런 거죠?” “누가 개를 개라고 했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너와 나와 이 반에 있는 아이들과 이 학교와 이 마을과 이 주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사전에 나오는 말은 다 우리가 만든 거란다.” 집으로 가던 도중 닉은 말을 못하던 아기 때 ‘과갈라’ 하면 엄마가 노래 테이프를 틀어주던 일을 기억해 내고, “네가 그런 거야” 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닉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친구들과도 문구점에서도 선생님께도 닉은 굽히지 않고 ‘프린들’을 고집한다. 선생님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면 남아서 반성문을 쓰게 하지만, 선생님의 탄압이 계속되면 될수록 프린들은 닉의 반을 넘어 전 학교 그리고 전 지역에 퍼져 나가며, 프린들 열풍을 일으킨다. 10년 뒤 결국 ‘프린들’은 선생님이 사랑하던 사전에까지 실리게 되고, 선생님과의 전쟁은 끝이 난다. 『프린들 주세요』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언어의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언어라니, 마침 며칠 전에 산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생각났다. 천천히 읽으려고 꽂아두었는데, 그 첫 번째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닌가. 『프린들 주세요』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볼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라는 두 권의 책으로 대표된다. 30대 중반에 『논리-철학 논고 』를 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고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6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그러다 『논리-철학 논고 』의 결정적 결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는데, 책은 사후에 출간된다.
비트겐슈타인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아마도 7번 명제인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 것이다. 말 자체가 멋지게 들리니 여기저기 마구 이용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단순히 말 할 용기가 없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쓰일 때가 제일 어처구니없다. 탄압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 것’ 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논리-철학 논고》의 최종 결론인 7번 명제를 통하여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논리-철학 논고》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고의 한계를 긋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사고의 한계 밖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는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라고요. p25」
비트겐슈타인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들” 뿐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참, 거짓이 똑 부러지는 것, 그런 것들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나 진리, 선악 심지어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참 거짓을 구분할 수도 없고, 그 말이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여기 한 사람과 개 한마리가 있다.” 이 문장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착하다.” 이건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논리-철학 논고》의 주장을 “그림 이론” 이라고 한다. 한 명제는 사실이나 현실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게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을 열등한 것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인데, 그는 “말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 이라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며, 자신이 쓴 부분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쓰지 않은 부분인 ‘말 할 수 없는 것’ 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사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했을까?
「《논리-철학 논고》에 따르면 철학은 “언어 비판”을 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명료화와 언어 비판이라는 활동이 필요한가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며, 그리하여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실제 형식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물음들과 명제들이 생겨날 수 있지요. 따라서 그러한 물음들이나 명제들이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는 “언어 비판”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p41 」
“언어 비판”의 비판은 칸트의 “수수이성 비판”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했다. 순수이성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칸트에게 물자체는 현상 너머에 실재하는 것이었다. 비트켄슈타인도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통한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윤리나 미학, 세계, 신 등 ‘말할 수 없는 것’ 들은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것들로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 』는 출판되자마자 떠들썩하게 유명세를 타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요 주장들은 『논리-철학 논고 』의 영향 아래 놓인다. 20세기 영미 철학의 대표자로 단연 비트겐슈타인이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의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 』는 그 작업들의 최종 결과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의 ‘그림 이론’ 을 포기하고 ‘사용의미 이론’과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사용의미 이론의 핵심은 ‘언어 놀이’ 이다. 그림 이론에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문장과 그림은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언어 놀이에서 하나의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의 지시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벽돌’ 이라고 할 때, 공사 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가져 오라’는 의미가 되지만, 태권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격파하라’ 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용의미 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사용의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문장을 도구로 간주하라. 그리고 문장의 뜻은 그 사용이라고 간주하라!” 라고요. P35」
전라도의 ‘거시기’, 경상도의 ‘쫌’ 따위가 바로 언어놀이의 대표적 사례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거시기’나 ‘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이 낱말들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전라도에서, 쫌이 경상도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다 함께 ‘언어놀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 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런데 당신이 ‘거시기’ 라는 말을 정말 그 말의 규칙을 제대로 따라 사용했다고, 즉 이런 뜻이 아니라 저런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개떡 같은 말을 진짜 찰떡 같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가?
「우리는 언어놀이에 참여하면서 예컨대 “하얗다”와 관련된 규칙을 실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배움과 규칙을 따르는 데 있어 생각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실천, 관습, 제도이며, 넓게는 삶의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적으로 규칙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언어놀이, 제도, 삶의 형식과 얽힌 행함과 실천에서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기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의 지배는 “체험의 논리적 조건” 이지요. P39~40」
『프린들 주세요』의 닉과 선생님의 전쟁은 10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닉과 선생님의 직접적 대립은 몇 달을 넘기지 않고 금방 끝났다. 그러나 프린들이라는 이름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놀이는 닉의 손을 떠나 학교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장난꾸러기 닉의 ‘프린들’ 이라는 언어놀이는 사용과 실천을 통해 관습이 되고 드디어 10년 후 사전이라는 제도에 정착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이렇게 『프린들 주세요』에 직접 연결시켜도 되는지 사실 자신은 없지만, 거칠게 이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초기의 비트겐슈타인과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를 위한 “언어비판”이라는 《논리-철학 논고》의 철학관과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마법을 걸려는 것에 대한 투쟁” 이라는 《철학적 탐구》의 철학관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연속성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이 표현되는 언어에 대한 일관된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P42」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라고 하면 한마디로 ‘언어’ 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언어에 대한 감시, 언어가 우리의 사유와 지성을 속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일관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