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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혼의 강 인도, 바다로 열린 동남아시아

 

 

 

1. 힌두 세계의 울타리를 세우다

 

기원후부터 AD 1,000년 사이의 인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큰 관련이 없어, 사실 책의 내용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러했듯이 왕조들의 흥망이 있었고, 나름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살아왔다. 카스트 제도는 더욱 강화되어 신분의 벽은 더욱 단단해졌다.

 

굽타왕조 때 힌두교가 만들어졌다. 힌두는 인더스 강 끄트머리의 ‘신드’라는 지방에서 비롯된 말로 신드가 힌두로 바뀌고, 힌두가 다시 인도라는 그리스 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간단히 말해 힌두교란 인도의 종교라는 의미다. 힌두교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에다 불교와 민간 신앙이 합쳐진 것으로, 인도인에게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인도인의 생활 방식이자 힌두 문화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는 ‘영’의 발명이다. 비어있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無’에 ‘0’이라는 기호를 부여하여 존재하게 함으로써, 수학의 역사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무한대∞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이 시기의 인도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라비아 숫자 역시 인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인도에 찾아 온 이슬람 세력

 

10세기 말 중앙아시아 튀르크 계통의 이슬람 세력이 인도 쪽으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 아프카니스탄에 터를 잡은 이들은 틈틈이 인도를 침입하였고, 북인도 지역은 하나씩 이슬람 세력에 넘어갔다. 현재의 이란과 인도 사이에 있는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도 이때부터 이슬람교 지역으로 편입된 것 같다. 아프카니스탄 반군으로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뿌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초창기 이슬람 세력은 힌두교 신전을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개종을 강요하거나 힌두사원을 공격하지는 않았고, 힌두교 행사를 관대하게 눈감아 주기도 했다. 이런 관용 정책에 힘입어 인도의 하층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반겼다. ‘알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간 평등의 정신은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의 신분 차별에 신음하던 하층민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3. 더 넓은 인도를 찾아서

 

남인도 지역은 기원전 6세기부터 상업이 활발하였다. 인도 상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금은과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역의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무역 활동을 했다. 특히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이 유명했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떠난 이유가 바로 이런 발달한 교역과 문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도양 교역권>

 

 

4. 뭍과 바다를 품은 동남아시아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인도차이나라고도 부른다. 인도와 차이나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이 두 문명권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지역>

 

그러나 동남아시아 지역은 유교문화와 힌두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유지하였다. 모계 중심 사회가 계속되었고, 카스트 제도 같은 신분 제도도 멀리하였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13세기까지도 여성의 사회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지역은 인도 상인들을 통해 인도인과 매우 자주 교류하면서 결혼도 많이 하였다. 인도네시아란 말 자체도 ‘인도인 의 섬’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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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라비아 숫자와 인도 숫자를 비교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도 나와서 좋았다.
 

5.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게르만족이 훈족을 피해 몰려오면서 위기를 맞은 로마제국이 제국 내의 사정까지 겹치면서 분열된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게르만족의 이동이 가라앉았을 즈음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만 살아남았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당시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의 이동>

 

근대의 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서유럽을 문화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유럽은 중세까지만 해도 거의 야만의 상태에 있었다. 고대 희랍·로마 문명 역시 서유럽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이슬람 제국으로 전파했다.

크리스트교도 동로마제국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이후 서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지 교회로 분열되었다. 서유럽의 로마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교회는 각각 ‘보편적인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와 ‘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그리스 정교회)’를 자처하며 갈라졌다.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서유럽으로 몰려온 게르만족들 중 프랑크족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원래 카톨릭 교를 믿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프랑크족은 순식간에 서유럽의 강자로 등장했다.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서유럽의 교회는 게르만족들 사이에 빠르게 침투했고, 서유럽의 많은 교회가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지도자, ‘교황’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바티칸을 다스리는 ‘교황’제도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9~10세기, 바이킹의 침입과 기사 세력의 강화>   

 

 9~10세기, 서유럽은 또 다시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유목민인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이 세 갈래에서 각각 침입해 온 것이다. 이 중 바이킹족이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하며 100여 년 간 서유럽의 지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또한 왕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라는 영주(기사)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지로 나뉘어졌다. 왕은 이름만 가지고, 실질적 통치권은 지방의 영주들이 행사하는 ‘봉건제’가 시행된 것이다.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사회에서 농민들은 영주(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부역과 세금을 내고 재판을 받는 등 영주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영주들은 아래에 하급 기사를 두고 전쟁을 하고 자신들의 농민 즉 농노를 보호하였다.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교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이다. 카톨릭 교는 농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과 경쟁하며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11세기 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성문 앞에서 맨발로 엎드려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은 황권을 압도한 교황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200년 간 ‘교황은 해 황제는 달’ 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기사도 정신’, ‘백마 탄 기사’ 등의 말은 중세 봉건제도의 ‘기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사들은 거의 약탈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을 공격하고, 포로의 몸값을 요구하고, 농촌을 약탈하는 등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현재의 ‘기사’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기사들에게 여성을 존중하고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보호하며 교회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에 나설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슬람 세계를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는 비잔티움으로 진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서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1096년 이슬람 세계와 카톨릭 세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약 200년간 서유럽 국가들이 7차례에 걸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부유한 동방 세계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심이 작용했다.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이라는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발전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날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힘이 크게 약해졌다. 그 결과 서유럽은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집권 국가

 

부르주아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언제쯤일까? 부르주아는 11세기 이후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부르그’ 안에 사는 상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작은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피렌체와 같이 대도시로 성장한 곳도 있었다.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투쟁이나 돈을 통해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봉건제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부르주아는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부르주아는 직접 왕에게 세금을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과 관리를 고용하여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부르주아 또한 상업 활동의 독점권을 얻고,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영주 세력에 대항하여 왕과 부르주아가 손을 잡은 것이다.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 프랑스, 영국,에스파냐>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영주가 몰락하고, 부르주아와 힘을 합친 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100년 전쟁이다. 잔 다르크 때문이든 어쨌든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이후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00년 전쟁 패배 후 곧 바로 두 귀족 가문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역시 프랑스와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 재편되었다. 1453년 프랑스, 1485년 영국을 뒤이어 1492년 에스파냐 왕국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서유럽은 이렇게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492년에 콜롬부스는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이로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서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의 패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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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명작 돈키호테에 나온 영주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지만
고달픈 농민들의 삶도 나와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종교와 잔 다르크도 나와서 재미있었다.
 

4. 사막과 초원을 품은 이슬람 세계

 

1. 동·서 교역로의 강대국, 페르시아

 

   희랍 세계와 전쟁을 하며, <300>이라는 영화에 등장했던 그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망했다. 그러나 이란 민족은 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를 잇달아 세우며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지중해 세계는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로마제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충돌의 실제 목적은 영토 다툼보다는 동·서 교역로의 확보에 있었다. 교역의 요충지를 차지하면 평화 시에는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무역을 봉쇄하여 로마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 교역의 결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에는 세계 여러 곳의 문화가 전해졌다. 그리스의 철학과 자연과학이 페르시아에서 발전하였고, 인도 문학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 아랍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다

 

   같은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랍세계는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다. 이슬람교를 믿는 친척도 (거의) 없고, 아랍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TV의 여행 프로그램도 아랍세계를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중동 건설 붐에 대한 70년대의 신화도 지금 세대에게는 가뭇한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아랍세계는 테러, 근본주의, 걸프전 같은 무서운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아랍세계는 진짜 이런 음습한  세계일까?

 

   고대 제국들이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세워지기 시작한데 반해, 아라비아 인들은 1,500년 정도가 지난 기원후 6세기가 될 때까지, 국가 없이 부족단위로 살았다. 사막이 대부분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목생활을 하거나 오아시스 주변에 소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 아라비아 인들의 삶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와 로마가 다시 전쟁을 하면서 동서교역로가 막히자, 상인들은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이 필요해 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잇는 뱃길과 육로의 중심해 위치해 있어, 무역의 요충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아라비아 인들도 유목과 농경에서 벗어나 무역에 뛰어들었고, 부를 축적한 이들 상인들은 세계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아라비아 반도 : 아틀라스 세계사 >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의 상인이었다.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아 “신 앞에서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 고 주장하며 유일신 알라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630년 무렵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여 아라비아인이 중심이 된 국가를 세웠다. 이슬람 공동체는 종교 공동체인 동시에 정치 공동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공동체는 칼리프라는 선출된 지도자가 통치하다가 곧이어 왕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때부터 갈라진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핏줄을 인정하는 시아파와 왕조시대를 연 우마이아 가문을 인정하는 수니파로 나뉘었다. 가끔씩 해외 뉴스에 나오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극한 대립은 이슬람교의 초창기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3. 세 대륙을 품은 이슬람

 

   우리나라도 그런 것처럼 이슬람 세계도 한 왕조가 계속 지배한 것은 아니다. 우마이아 왕조가 아바스 가문에 의해 망하고, 이슬람은 세 대륙을 품은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걸친 아바스 제국 역시 곧 여러 왕조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에스파냐 지역을 차지한 후우마이야 왕조는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후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이슬람, 비잔티움, 그리스의 문화가 한데 어울려 수준 높은 문화를 남겼다. 우리가 잘 아는 알함브라 궁전은 훨씬 후대에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지배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로 남아있다.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나일 강 주변의 풍부한 자원과 무역으로, 이슬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는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이다. 바그다드는 동서교역의 최대 거점지로 활발한 국제 무역을 벌였다. 바그다드는 ‘세계의 시장’ 이었고, 10세기에는 인구 15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 교역로를 통해 전 세계의 우수한 문화가 이슬람으로 흘러들었고, 이슬람의 문화가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이슬람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라는 잘못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 라는 뜻을 가진 아라비카 역시 아프리카가 원산지 이지만, 커피 문화 그 자체가 이슬람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남미 대륙에서 재배된 커피콩을 지금도 우리는 아라비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커피가 아라비아에 정착한 것은 14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이슬람 세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라 미리 언급하였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7세기부터 11세기 무렵까지 이슬람세계의 주인은 아라비아인이었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삼았지만, 민족 차별을 폐지하고 누구나 이슬람법에 따라 평등하게 통치되었다. 종교적 자유도 보장되었고, 천문학과 의학이 꽃을 피우고, 전 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모여들고 퍼져나가는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금 우리가 연상하는 테러, 근본주의, 내전, 기아 같은 무섭고 어두침침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4. 이슬람 세계에 부는 바람

 

   11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 몽골 초원에서 질풍같이 달려온 셀주크 튀르크라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칼리프는 이름뿐인 종교 지도자로 밀어내고, 대신 정복자 토글리 베그 자신이 이슬람의 실질적인 제왕이 되었다. 그는 술탄이라고 불렸는데, 우리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은 그 술탄이 아마 이때부터 이슬람의 황제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슬람을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

 

   여러 왕조로 나뉘었던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튀르크 아래 다시 하나로 통일 되어갔다. 그 와중에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사로잡혔고, 이 때문에 유럽과 이슬람의 20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다.

  

 

  <유라시아를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 몽골제국  : 아틀라스 세계사>

 

   그러나 이슬람 제국은 다시 한 번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당했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파도처럼 몰려온 것이다. 1258년 바그다드가 점령당하고 칭기즈칸의 손자가 세운 일한국이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다. 몽골제국은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을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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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0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랍세계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시대의 아랍에 대해 알게 해 줍니다.
또한 아라바아 숫자, 커피와 같이 잘못 알았던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말리 2014-05-0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서가 '편견'이란 말도 알구 있구나. 그런데 사람들은 왜 편견을 갖게 될까? 윤서가 살면서 '아! 난 편견으로 그것을 대했구나' 란 생각을 했던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 맨 처음 이런게 편견이었구나 생각하게 만든 일이 있으면 댓글을 달거나 (글을 써도 되고 ㅎ) 다음 시간에 한번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쓴 2장 3장도 찾아서 읽고, 댓글 부탁한다~ 어린이날 잘 보내고~~
 

 

   3.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1.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4대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BC 1,000년경부터 AD 3세기 무렵 사이, 세계 곳곳에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중해 지역의 로마,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세워졌다.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제국들의 통치도구는 비슷한 것들이 많다. 잘 훈련된 군대, 체계화된 관료조직, 쭉 뻗은 도로망, 정비된 법률 그리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켜주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제국의 탄생과 함께 거의 동시에 각 대륙에 나타났는데, 통치술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제국들은 수 백 년 만에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문화와 종교는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민족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각 대륙을 차지한 고대의 제국들 : 아틀라스 세계사 >

 

 

 

 <각 대륙의 종교 : 아틀라스 세계사 >

   

다리우스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은 페르시아는 효율적인 통치도구와 더불어 식민지민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해주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보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성을 높이 샀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은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대승 불교에 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우리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는 단군신화보다 더 친숙하다. 그만큼 고대 희랍문명은 서양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동양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랍은 고대 그리스의 이름인 헬라스를 한자음을 빌려와 번역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란 말도 헬라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랍의 정신, 문화, 사상 등을 가리킨다. 희랍세계는 여러 개의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아테네는 희랍세계의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 될 만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또 아테네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민주정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민주정치와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희랍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희랍세계의 여러 폴리스들은 두 편으로 나눠 30년 가까이 전쟁을 했고 그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희랍(그리스) 세계와 주변국>

 

희랍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폴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복했다. 폴리스는 망했지만 희랍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시아와 이집트까지 널리 퍼졌다. 이렇게 전파된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하며, 이 문화를 받아들인 지역을 헬레니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유럽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잊어버렸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가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서양세계에 거꾸로 전해주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을 꽃피워 냈다.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뒤를 이어 헬레니즘 세계를 차지했다. 카르타고까지 물리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의 정치는 귀족 공화정이었으나, 카이사르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 자리 잡았다. 공화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합의에 의해 통치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현대의 민주 공화정과는 달리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이 통치하였다.

 

 

  <지중해를 차지한 거대한 로마제국 >

 

로마는 각종 실용문화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로마의 법은 이후 서양 근대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는 속담에서도 로마법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속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서 알 수 있듯, 로마는 토목과 건축 분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크리스트교는 초기의 박해 기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해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드넓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크리스트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억압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브라만교는 카스트 제도를 따르는 인도의 고대 종교이다. 현대의 힌두교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브라만교는 계급 제도를 정당화하며 브라만 계급만이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런 인도 사회에 반대하며,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불교는 천민 보다 왕과 전사 그리고 돈을 많이 번 부유한 평민에 의해 더욱 환영받았다. 무력과 돈을 가진 이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은 브라만 계급의 거만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국가의 지배 세력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은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아소카왕은 잔인한 전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으나, 이후 살생을 크게 반성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의 진리에 기초한 이상 정치를 꿈꾸었다. 아소카 왕에 의해 아시아 각지는 물론 유럽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다. 삼국시대였던 우리나라에도 이 때 불교가 전파되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탑(인도어로 스투파)도 아소카왕의 지시로 세워졌는데, 스투파는 ‘흙으로 만든 무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 넣어 놓아, 이후로 석가모니의 무덤이자 넋이 기린 곳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 신자들은 탑에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주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200여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다투다 말기에는 7개의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혼란한 시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한비자, 묵자들이 그들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자, 이들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국가를 안정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평안케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과 이들의 학문을 가리켜 제자백가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나라의 시황제, 즉 진시황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진Chin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가 쌓아 놓은 성들을 연결하여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성이다.

 

 

6.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진나라가 망하자 중국을 차지한 나라는 한나라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나라는 문화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중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한문, 그리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한족 등의 단어가 모두 漢에서 따온 것이다.

한나라는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가르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였다. 살아있을 때 공자는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았지만,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내쫒았다. 공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나라 이후 꽃을 피워 지금까지 중국은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이 길을 통하여 각국의 사절과 상인, 승려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동서양을 느슨하게나마 이어주었다. 특히 비단은 멀리 로마까지 운송되었기 때문에, 이 길을 비단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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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잘 알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도 나와서 재미있었고
많이 들어 보았지만 뜻을 잘 알지 못했던 카스트 제도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이해를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윤서와 함께 공부하는 세계사 교재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이다. 초등 6학년이라 아직 어렵지만 윤서가 하고 싶다고 해서 1주일에 한 장씩 공부하는 중이다. 몇 백년에 걸친 여러 대륙의 역사를 한시간 남짓에 훑어 보려니 나도 벅차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넘어가야 할지 어렵다. 한 시간 내내 열심히 떠들지만 과연 윤서에게 어떤 공부가 되고 있을지 고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매주 정리해 두려고 한다. 나도 생각을 가다듬고, 윤서도 복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1장은  역사관에 대한 내용이라 건너뛰고 2장부터 정리한다.

 

 

 

2.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빚으니

 

1.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

 

지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13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해서 46억 년 전 태양과 지구가 생겨나고, 그 후에도 상상하기 힘든 오랜 시간이 지나 약 500만 년 전에 인류가 출현했다. 인류의 고향은 아프리카다. 사람들이 가장 뒤떨어진 대륙이라 생각하는 아프리카가 사실 가장 일찍 인류의 삶이 시작된 선진 대륙인 것이다.

 

<검은 색 원 안은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 : 인류의 고향>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채집과 수렵으로부터 벗어나 목축과 농경을 하는 신석기 시대로 접어든다. 풍요와 함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배세력이 발생하고, 불평등과 자연 환경 파괴의 문제 또한 시작되었다.

 

 

2. 역사가 시작된 땅 수메르

 

물은 농경에 필수적이다. 인류의 4대 문명은 물이 풍부한 큰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서남아시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최초의 국가가 등장했다. 문명이 발생한 곳의 국가 형태는 4대 문명 어디나 비슷하다. 강물을 다루는 시설과 기술이 발달했고,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도시에 큰 건축물이 세워지고, 지배세력이 등장한다. 세력을 키운 국가는 전쟁을 일으켜 땅을 점점 넓혀가다 마침내 제국을 형성한다.

   

 

<4대 문명의 발상지 (붉은 색 원안에 표시) : 아틀라스 세계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함무라비 법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가 냉혹하고 엄격한 인상을 주지만, 이 법의 목적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학대하는 일이 없고, 피붙이가 없는 여자 아이와 과부에게 정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서라 한다.

 

 

3. 지중해를 밝히는 문명의 빛

 

지중해는 말 그대로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둘러싸인 지중해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로마 같은 서양 문명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대 지중해 문명의 시작은 아프리카 대륙의 이집트-나일강 문명이다. 전성기의 고대 이집트는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나일 강의 범람에 의한 비옥한 토지가 고대 이집트의 밑바탕 이었다. 이 지역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 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중해 동쪽 현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이 지금 유럽 여러 민족이 사용하는 알파벳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4. 인더스 강에서 황허까지

 

인도 문명은 히말라야의 물줄기가 모여든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인도를 지배했던 아리아인들이 만든 카스트 제도(인도인들은 바르나라고 부른다)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황허강 유역의 중국문명은 하·은·주라는 국가를 차례로 세웠다. 주나라가 만든 ‘봉건제도’는 춘추시대의 공자가 실현하려 했던 정치제도 이다. 천자가 임명한 제후는 각자 자기 지역의 나라를 다스리되, 천자국은 제후국들이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다스리는지 감독하고 징벌하는 권한을 가진다. 천자와 제후, 백성은 하나의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는다. 천자는 백성을 자식처럼, 백성은 천자와 제후를 어버이처럼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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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브라만과 크사트리아, 바이사 그리고 수드라만도 못한 불가촉천민을 연관지을 수 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4대 문명인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 문명, 황허 문명을 알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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