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1.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4대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BC 1,000년경부터 AD 3세기 무렵 사이, 세계 곳곳에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중해 지역의 로마,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세워졌다.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제국들의 통치도구는 비슷한 것들이 많다. 잘 훈련된 군대, 체계화된 관료조직, 쭉 뻗은 도로망, 정비된 법률 그리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켜주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제국의 탄생과 함께 거의 동시에 각 대륙에 나타났는데, 통치술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제국들은 수 백 년 만에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문화와 종교는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민족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각 대륙을 차지한 고대의 제국들 : 아틀라스 세계사 >
<각 대륙의 종교 : 아틀라스 세계사 >
다리우스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은 페르시아는 효율적인 통치도구와 더불어 식민지민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해주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보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성을 높이 샀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은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대승 불교에 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우리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는 단군신화보다 더 친숙하다. 그만큼 고대 희랍문명은 서양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동양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랍은 고대 그리스의 이름인 헬라스를 한자음을 빌려와 번역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란 말도 헬라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랍의 정신, 문화, 사상 등을 가리킨다. 희랍세계는 여러 개의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아테네는 희랍세계의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 될 만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또 아테네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민주정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민주정치와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희랍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희랍세계의 여러 폴리스들은 두 편으로 나눠 30년 가까이 전쟁을 했고 그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희랍(그리스) 세계와 주변국>
희랍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폴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복했다. 폴리스는 망했지만 희랍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시아와 이집트까지 널리 퍼졌다. 이렇게 전파된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하며, 이 문화를 받아들인 지역을 헬레니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유럽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잊어버렸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가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서양세계에 거꾸로 전해주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을 꽃피워 냈다.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뒤를 이어 헬레니즘 세계를 차지했다. 카르타고까지 물리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의 정치는 귀족 공화정이었으나, 카이사르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 자리 잡았다. 공화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합의에 의해 통치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현대의 민주 공화정과는 달리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이 통치하였다.
<지중해를 차지한 거대한 로마제국 >
로마는 각종 실용문화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로마의 법은 이후 서양 근대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는 속담에서도 로마법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속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서 알 수 있듯, 로마는 토목과 건축 분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크리스트교는 초기의 박해 기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해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드넓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크리스트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억압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브라만교는 카스트 제도를 따르는 인도의 고대 종교이다. 현대의 힌두교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브라만교는 계급 제도를 정당화하며 브라만 계급만이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런 인도 사회에 반대하며,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불교는 천민 보다 왕과 전사 그리고 돈을 많이 번 부유한 평민에 의해 더욱 환영받았다. 무력과 돈을 가진 이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은 브라만 계급의 거만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국가의 지배 세력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은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아소카왕은 잔인한 전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으나, 이후 살생을 크게 반성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의 진리에 기초한 이상 정치를 꿈꾸었다. 아소카 왕에 의해 아시아 각지는 물론 유럽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다. 삼국시대였던 우리나라에도 이 때 불교가 전파되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탑(인도어로 스투파)도 아소카왕의 지시로 세워졌는데, 스투파는 ‘흙으로 만든 무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 넣어 놓아, 이후로 석가모니의 무덤이자 넋이 기린 곳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 신자들은 탑에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주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200여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다투다 말기에는 7개의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혼란한 시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한비자, 묵자들이 그들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자, 이들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국가를 안정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평안케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과 이들의 학문을 가리켜 제자백가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나라의 시황제, 즉 진시황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진Chin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가 쌓아 놓은 성들을 연결하여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성이다.
6.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진나라가 망하자 중국을 차지한 나라는 한漢나라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나라는 문화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중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한문, 그리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한족 등의 단어가 모두 漢에서 따온 것이다.
한나라는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가르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였다. 살아있을 때 공자는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았지만,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내쫒았다. 공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나라 이후 꽃을 피워 지금까지 중국은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이 길을 통하여 각국의 사절과 상인, 승려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동서양을 느슨하게나마 이어주었다. 특히 비단은 멀리 로마까지 운송되었기 때문에, 이 길을 비단길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