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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명 · 청 제국 그리고 동아시아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지난 주말 끝난 드라마 <정도전>의 배경인 여말선초는 중국의 원·명 교체기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하는 권문세가는 북원과의 화친을, 신진사대부들은 명과의 사대외교를 주장하며 서로 대립하였다. 명의 주원장은 북원을 몰아내고 다시 중국 땅에 한족의 통일왕국을 세웠다. 명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이웃 나라에 조공·책봉 관계를 요구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였다. 고려도 명과 사대의 관계를 맺었는데, 사대의 전제조건은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밝힌 바와 같이 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인임을 견제하고 정몽주를 압박하는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한반도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반발을 샀다. 그것은 여말선초에 몇 번이나 시도된 우리민족의 ‘요동정벌’ 에 대한 명나라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거대한 중국대륙의 한쪽 귀퉁이 작은 땅이지만, 우리민족은 끝까지 중국에 맞서 독립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민족은 중국 변방의 호족들과 연합하거나 때로는 대립하면서 국력을 강화했다.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고 명의 후계다툼이 시작되자, 요동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요동정벌의 꿈은 사라졌다.

  

  <출처 :http://study.zum.com/book/15561>

 

조선 건국에 관해서는 어떤 책보다 드라마 <정도전>이 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TV로부터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예 TV가 없는 집들도 꽤 많다. 그러나 EBS의 다큐들 예를 들면 <빛의 물리학>, <수학과 문명>,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코스모스> 등 훌륭한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 나도 어릴 때 이런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고, 요즘 아이들이 부러웠는데, 막상 부모들은 TV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니,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해 수백억을 들여 만든 프로그램 보다 더 잘 가르칠 선생님과 자료를 어디에서 찾을 수있을런지, 참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푹 빠져 본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배운 것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유해한 것도 좀 보고, 시간도 낭비해가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제레미 벤담은 요즘 엄마들이 매우 좋아할 듯하게, “내 인생의 매 순간은 계획되어 있다.” 며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가 남긴 최대의 유산은 ‘판옵티콘’ 이다. 효율성과 유용성의 극단에서 탄생한 것이 숨 막히는 감시체계였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한 시간 달달 외워 조선 -이성계ー1392년 따위나 기억하는 것이 물론 훨씬 효율적인 투자일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정도전>에 분노하고, 가슴벅차하고 또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곱 달의 긴 시간들만이 결국 우리의 삶에 남아 우리와 함게 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1392년 조선이 건국 된지 딱 200년 만인 1592년에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쳐들어 왔다.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 임진왜란이다. 7년 만에 끝난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고, 조선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더욱 쇠약해져 만주족(여진족)이 새운 청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난 조선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없었다.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중국은 한족의 나라라고 하지만, 중국 역사를 통해보면, 농경민족인 한족과 유목민족인 여러 호족들이 번갈아 가며 혹은 서로 대치하며, 왕조를 교체해 왔다. 현재 중국의 틀을 완성한 청나라는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나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유교가치관을 받아들였다. 한족과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국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변발과 만주복 착용을 강제하면서, 반청적인 인사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현재 중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들 중 상당부분이 청나라 때 와서 중국의 영역으로 입되었다. 티베트, 대만, 신강(신장), 서장(시짱) 등을 식민화하였다. 청나 

라는 새로이 편입한 영토에 먼저 한인 관료나 군인을 보내 중국식 체제로 바꾸고 한인들을 그 지역에 이주시켜 민족 융합 정책을 실시했다. 그 외 장족, 후이족, 조선족 등 50여 소수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현재 중국이라는 한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은 티벳 독립 나아가 소수민족의 독립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명〮〮· 청 교체기에 조선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광해군일 것이다. 기울어가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워가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등거리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낸 명에 대한 감사와 사대를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그 결과 조선은 급격하게 명에 기울었지만, 중국의 운명은 이미 청나라에 들어갔고, 조선은 잘못된 선택으로 두 차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병자’년에 ‘오랑캐’에 의해 일어난 ‘난’, 병자호란이다. 이제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의 예를 해야 했다.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양쪽과 다 전쟁을 치렀지만, 이후 200여 년 간은 평화로운 시기로, 청나라에는 연행사를,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내 문물을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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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서양을

     헤쳐 나가는

     유럽

 

 

 

 

 

 

 

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1492년은 콜럼부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날이다. 이 사건이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이유는 단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위상이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수탈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국가들은 야만에 가까웠고, 발달된 과학과 눈부신 문명은 동양에서 만개하였다. 몽골의 대도를 찾아서, 인도와 중국의 진귀한 물품들을 구매하기 위해, 유럽의 종교인, 학자, 상인들이 아시안 드림을 꿈꾸며 먼 길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남쪽의 캘리컷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열었던 것도 이슬람 상인이 차지하고 있는 육로를 피해 직접 인도에 가서 값진 향료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의 입장에서는, 육로는 이슬람에, 인도양 항로는 포르투갈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가도 결국은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서쪽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서쪽 바다 즉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콜럼부스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게 되었고, 지구의 지리적 구조에 무지했던 15세기 유럽인들은 그곳을 서인도, 처음 도착한 섬들을 서인도제도, 그곳에 살던 원래 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 멕시코 및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스텍, 마야, 잉카라는 오래된 문명과 거대한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확연히 밝혀지지 않은 몇몇 이유들로, 이 찬란했던 문명은 겨우 수 백 명의 에스파냐 침략군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 이후 대부분의 지역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어 무자비하게 착취당했다.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만이 스페인어 대신 포르투갈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매일 사용하고 있는 언어 자체가 치욕의 역사를 아프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한글을 소중하게 지켜 낸 우리민족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모든 국민들이 영어에 목을 매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후대에 가면 아마도 이 비정상적인 시대는 희화되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남미 고대 문명의 몰락에 대해서는 총, 칼을 만들 수 있는 철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 원주민 내부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라는 점,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전혀 내성이 없었다는 점들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남미대륙을 차지하고 수많은 은광을 독점하면서 16세기 유럽 세계의 최강자가 되었다. 식민지의 부를 바탕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는 대서양을 호령하며, 스페인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였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에스파냐의 지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세기가 바뀌며 유럽의 강자도 바뀌어 갔다. 16세기가 에스파냐였다면, 17세기는 네덜란드가, 18세기는 프랑스와 경쟁하던 영국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 많은 영토와 은광을 가졌던 에스파냐는 왜 몰락했을까? 에스파냐는 국내 공업을 발전시키지 않고 동양의 사치품과 다른 가의 공산품을 사들이는데 막대한 부를 낭비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펠리페 2세의 극단적인 종교 탄압에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카톨릭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럽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교 전쟁에 끼어들었다. 또 에스파냐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펠리페 2세가 이들을 추방하면서 상업과 금융이 붕괴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종교 탄압에 대항한 끈질긴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사상과 종교 문제로 탄압받던 유럽의 지식인들과 과학자, 종교 지도자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근대철학자들도 네덜란드에서 출판 활동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의 선진 금융기법과 다이아몬드 세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일약 발돋움 하였다. 조선술도 발전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1/3 정도의 비용으로 상선을 건조해 내었다. 그 결과 전체 유럽 상선의 3/4을 가진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었다. 조선으로 표류하여 온 하멜이 하필 네덜란드 사람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럽 한 귀퉁이의 조그마한 나라가 단번에 유럽 패권을 쥐게 된 것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유럽의 우수한 인재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철학은 물론 상업, 금융, 출판 등 다양한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이루어낸 성과야말로 네덜란드가 17세기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초기 영국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에스파냐에 대항하고, 네덜란드 독립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유럽 최대의 해운국이 되자 두 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패권을 다투었다. 17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네덜란드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영국이 우위를 차지했다.

 

17세기 후반에는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국력을 신장했으나, 이후 재정의 고갈로 쇠약해졌다. 이후 유럽의 패권은 영국이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동부 유럽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하며 유럽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발전했다.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다. 표트르는 서유럽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본보기 삼아 러시아를 개혁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의 중·동부 유럽도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서유럽의 정치,경제 체제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들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농노제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서유럽은 봉건제가 붕괴하고, 부르주아가 성장하고, 근대정신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근대적 국가로 발전해 나간 반면, 서유럽을 압축적으로 뒤따른 중·동부 유럽은 철저한 체질 개선을 이루지 못한 채 외양만 쫓아갔던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아시안 드림을 꿈꾸던 야만적 국가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였다. 보통 17세기는 과학의 시대, 18세기는 산업혁명의 시대, 19세기는 부르주아의 시대로 불린다. 뉴턴과 갈릴레이, 증기기관과 방직기계의 발명이 자본주의시대를 선도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 개발의 막대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콜럼부스 이래 서유럽 여러 국가들이 앞 다투어 침탈한 식민지의 희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은광과 대규모 농장,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가 오늘날 서구 문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사의 나라’로 통하는 영국의 이면에는 ‘노예무역’ 이라는 잔혹성이 감추어져 있다.

 

  

 

대규모 은광시대가 끝나자,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각지에서 담배, 커피, 면화, 사탕수수 등의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그런데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으로는 노동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사냥해 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러자 노예 자체가 커다란 상품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사람이 상품이 된 것이다.

 

삼각무역은 세 대륙,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거치며 어떤 상품들을 거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유럽에서 총기와 잡화를 실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하면, 실어온 물건들을 아프리카의 노예와 맞바꾼다. 노예를 실은 배는 다시 아메리카에 상륙해서, 대농장에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과 면화 등을 다시 실어온 노예와 맞바꾼다. 유럽의 공업제품과 아프리카의 노예, 아메리카의 설탕 등을 엮는 삼각무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삼각무역으로 가장 덕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50년 동안 34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을 실어 날랐다. 영국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 전쟁의 책임 등에 대한 독일의 사과를 당연시하는 이들 근대 유럽 열강들은 그러나 아직도 아프리카 노예들의 희생, 남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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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드컵을 보니 남미 국가들은 서로 말이 통해서 (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 전반전 끝나고 들어갈 때 한바탕 싸우고 그랬죠. 말이 통해니 서로 욕하는 게 다 들리는 겁니다. ㅎㅎㅎㅎ. 새삼 한국어'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리 2014-07-0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떨때는 전세계가 단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언어를 둘러싼 별 미친짓거리도 없을라나 싶다가... 글케되면 그게 지구제국화 되는 거겠죠 ㅎ;;

2018-01-2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9. 넓어지는 이슬람 세계

 

 

 

 

 

 

 

 

 

 

1. 이슬람 세계를 누빈 나라들

 

무함마드가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한 이래, 이슬람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제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9세기 ~11세기 초의 이슬람 세계>

 

13세기 몽골제국이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면서 이슬람 세계도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몽골이 물러간 후 이슬람 세계에는 다시 다양한 세력이 활약하며 이슬람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13세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4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이 이슬람 세계의 대표자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은 사파비 왕조가 옛 페르시아의 땅을 차지하였다.

 

 

2. 세 대륙에 걸친 나라,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크리스트교 세계의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손에 넣었다. 동로마제국은 이로써 멸망하고, 오스만제국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과거 이슬람 세계 전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빈 근처에서 이란 국경 너머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일부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에 오스만의 깃발이 꽂혔다.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60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오스만의 문화는 17세기 유럽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에게 유럽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카페와 튤립도 실은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슬람 사제가 처음 마셨다고 알려진 커피는 ‘카파(혹은 카와)’, 카페 하우스는 ‘카웨’로 불리며, 오스만 제국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다. 튤립은 터키가 원산지인 야생화였는데,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의 상징으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바자회(영어로 bazaar) 역시 오스만 제국의 ‘바자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스탄불에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말 그대로 그랜드한-거대한 시장이 있는데, 1461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자르란 원래 ‘덮여 있는 시장’ 이란 뜻으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세계 각국의 선박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자선 모금을 위한 일회적 시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유럽 문화의 뿌리를 이슬람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가 세계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인도의 새로운 전통, 무굴제국

 

16세기에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은 몽골이란 뜻인데, 몽골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티무르는 또한 이슬람교도이다. 그러므로 무굴제국은 인도-이슬람-몽골이 혼융된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어낸 악바르는 힌두교도와 비이슬람인을 억압하지 않고, 종교에 관계없이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를 펼쳤다. 또한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공평하고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실시하려 노력하였다.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성공한 제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통치 원칙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경제적인 평등이다. 민족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한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공평한 세금을 부과했다. 특히 농민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고, 일부 지배층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다른 하나는 사상의 자유이다. 관용을 베풀어 각 민족의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고, 자신이 믿는 가치가 억압받지 않는 한, 제국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무굴제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힌두문화가 점차 융합되어 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은 두 문화의 만남이 꽃피워낸 걸작이다. 이외에도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통합한 시크교, 힌두어와 인도어가 융합된 우르두 어, 아라베스크 무늬에 연꽃무늬를 결합시킨 건축 양식 등 이슬람 풍과 힌두 양식이 결합된 다양한 문화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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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몽골제국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다

 

 

 

 

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에서 처음 나라를 세운 것은, 한나라가 멸망한 후 위진 남북조 시대였다. 이후 수 문제가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은 다시 농경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이어서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다시 중국 대륙에 유목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요나라는 한반도의 고려를 세 번이나 침략한 국가인데,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이를 물리쳤다. 중국의 농경민족은 당나라가 망하자 송나라를 세웠지만, 금나라가 송을 침략하여 송은 강남으로 쫓겨나 남송으로 축소되었고, 화북지방은 금나라가 차지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다시 일어난 송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매우 발달된 경제를 이룩했다. 서민들의 경제력도 커졌고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그런데 군사력은 매우 약했다. 송나라는 이웃의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에게 막대한 재물을 선물하는 대가로 평화를 유지했다. 전쟁 보다는 비용이 적었지만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국가의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귀족사회였던 송나라에서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지배계층은 세금을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이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지배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일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했고 국가의 재정 또한 악화되었다.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하여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중·소상인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하게 된 고위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실패했다. 그 결과 송나라는 더욱 약해져서 결국 금나라에 의해 강남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KBS 사극 <정도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려 역시 송나라와 마찬가지의 귀족사회였고, 대부분의 토지는 일부 지배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집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력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자 하였다. 이 정책을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의 수자를 계산하여 그 수대로 공평히 전답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비록 정도전은 계민수전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완화된 개혁을 실시하여 착취구조를 철폐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도와주었다. 그 결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백성들은 쌀밥을 ‘이밥’이라고 불렀는데, 정도전이 왕으로 내세운 ‘이성계가 준 밥’ 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화북지방을 금나라에 빼앗긴 송나라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켰다.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하였는데, 송나라가 개발한 항로를 통해 이슬람 상인이 고려에까지 들어왔다.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다. Korea라는 명칭은 이 당시 이슬람 상인이 ‘고려’를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칭기즈 칸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유라시아 제국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서쪽으로 이슬람 제국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유럽지역을 단숨에 휩쓸었다. 프랑스 등의 서유럽은 아무 대책 없이 곧 닥쳐올 재앙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서유럽의 코앞에서 기적처럼 몽골 군대가 사라졌다. 칭기즈 칸이 사망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칸을 추대하기 위하여 모든 군대가 정복활동을 중지하고 몽골의 수도로 되돌아 왔다. 그 덕분에 서유럽은 간신히 몽골제국의 포화를 면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사후에도 정복활동을 벌였고, 유럽과 아시아의 양 끄트머리 일부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대륙을 몽골제국의 이름 아래 통합하였다.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아틀라스 세계사 :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제국이 몽골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는 원의 세력권 아래 놓이긴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몽골제국은 그 넓은 땅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EBS 다큐 프라임의 <강대국의 비밀> 몽골제국 편에서는 그 답을 ‘관용’이라고 한다. 몽골제국은 침략 전쟁에서 보여준 무자비함과는 딴판으로, 통치에서는 그 어느 국가도 보여주지 못했던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일단 항복한 모든 민족은 몽골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민족과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루 등용하였고, 피지배지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국에서는 통치 기술과 제도를, 세금걷기나 살림살이는 이슬람에서, 정치와 군사의 주요직은 몽골이 맡았다. 각 민족은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평화 아래 유라시아는 동서 간에 문물을 활발히 교류하였다. 몽골제국 즉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각양각지에서 몰려 온 다양한 인종들로 넘쳐났고, 이슬람 사원, 절, 교회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일종의 ‘종교 배틀’도 열렸는데, 각 종교를 대표하는 수도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논리를 가지고 공격하며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 경우 벌주를 마시는 대회였다. 유럽의 배타적인 종교 국가와는 달리 몽골제국에서는 서로 논쟁하며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관용이야말로 몽골제국을 세계제국으로 만들어준 기본 정신이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드넓은 땅을 하나로 묶는 교통 통신망이 필수적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속담에처럼,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형성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초원지대를 질풍같이 말달리며 살아왔던 몽골민족은 도로대신 역참제를 만들었다. 역참에 말과 식량 숙박시설을 갖추어 두고 관리나 사절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에도 예외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두어 칸의 명령이 대도에서 유럽까지 열흘이면 전달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교통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유럽인들은 죽기 전에 몽골의 수도 대도에 가보기를 꿈꾸게 되었고, 그 중에는 동방견문록을 남겨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유럽이 아시안 드림을 꾸었을 만큼 아시아는 문화와 문물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을 기점으로 유럽은 아시아에 앞서 나가게 되었으니, 역설적이게도 몽골제국은 잠자던 유럽을 흔들어 깨웠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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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6-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골의 칭기즈 칸이 나와 거대한 대륙을 통치하는 것을 보니 정말 위대한 사람 같다.
관용이라는 방법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칭기즈 칸이 그 많은 대륙들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방법이니까.
 

7. 장안에서 나라까지 굽이치는 동아시아

 

1. 통일로 가는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

 

한나라 멸망이후 등장하는 삼국시대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역사이다. 위·촉·오를 이끌었던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했던가.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었는가를 놓고 서로 뽐내기도 하고, 남자는 적어도 세 번은 혹은 열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하튼 삼국의 패권은 조조가 잡았으나, 정작 삼국을 통일한 것은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였다.

  

 

 

 

 

진나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는데, 그 틈을 타서 유목민들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원래 유목민들은 만리장성 바깥에 살았으나 한나라 말기에 장성 아래로 내려와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 유목민들을 오랑캐라는 의미의 ‘호족’이라고 불렀다. 진나라가 허약해지자 중국의 북쪽지방은 다섯 호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워 서로 경쟁하는 5호16국의 시대가 되었다. 중국 땅에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둥지를 튼 것이다. 진나라는 이들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동진을 세웠다.

 

사진에서 ‘푸른색’ 왕조들이 정통 한족이 세운 나라들이고, ‘연두색’ 왕조들은 호족들의 나라들이다. 한족의 나라들을 남조, 호족의 나라들을 북조라 부른다.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삼국시대부터 수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의 360여 년간의 혼란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는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여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경민인 한족과 유목민인 호족이 서로 섞이는 호·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된 것이다. 이 수 문제는 물론 고구려를 침공했던 그 수 문제이다.

 

 

2 .말 달리는 한반도, 일어서는 일본

 

이 시기의 한반도도 삼국시대였다. 패권 다툼의 중심지는 한강이었는데,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가장 강성했다 할 수 있다. 백제는 4세기에, 고구려는 5세기, 신라는 6세기에 각각 한강을 차지했다. 

 

고구려는 한반도를 벗어나 북방의 중국 땅으로 영토를 드넓혀 감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우뚝 자리 잡았다.

 

일본은 백제의 문물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아스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의 팽창>

 

 

3. 백강에서 겨루는 동아시아 삼국

 

7세기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의 통일은 군사력보다는 외교력에 의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협상이 깨지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갔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에게도 고구려는 골칫거리였다. 수나라의 문제가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이후, 당나라의 태종도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요동과 만주 등지로 세력을 넓혀 오는 고구려는 무서운 위협이었다.

고구려를 쓰러뜨려야 하는 당 나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신라는 재빠르게 손을 잡았다. 양국은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 들여 통일을 하는 바람에, 우리 민족의 전체 역사에서 보았을 때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의 막대한 영토가 중국의 손에 넘어가 버리는 뼈아픈 결과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삼국이 한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존폐를 놓고 다투는 경쟁국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움을 떨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6년간에 걸친 나·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676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의 도움을 받아 당군을 격퇴시키고, 통일을 마무리 지었다.

 

통일 후 신라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는 불교의 나라를 꿈꾸었다. 한편 통일의 대가로 당나라에 넘긴 옛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대조영이 만주에 ‘진’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발해이다. 8세기 후반에는 당과 발해, 신라가 서로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4. 비단길에 실려 온 당나라의 봄바람

 

당나라는 측천무후에 이은 현종 때에 세계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의 국제도시로, 많은 학자와 예술가가 배출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개척한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왕래하였다.

 

당나라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수많은 인재가 활약하였는데, 신라의 최치원, 장보고, 혜초 등이 당에서 이름을 떨쳤다. 장보고는 당에서 귀국 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유학승인 혜초는 인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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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6-1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중국 역사는 따분하게만 느껴졌는데 우리 나라의 역사와 조합해서 생각하며 읽어 보니 재미있고 혜초 얘기도 나와서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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