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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1. 영원히 잃어버린 '소년' 시절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새해 처음으로 읽었다.
몰랐는데, 5년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벌써 5년이라니? 어느새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해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 날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G-그리핀의 노래 가사 처럼 난 또 그만큼 소년에서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혹시 린타로가 감독한 ’은하철도999’ 극장판을 본 적이 있는지?
본 적이 있다면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마지막은 이렇다.
어쩔 수 없이 메텔과 헤어져야만 하는 철이는 이윽고 메텔이 탄 기차가 점점 멀어지자 마구 따라 뛰어간다. 애타게 메텔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절규하듯 소리쳐도 메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는 기차의 이별을 통보하는 듯한 비정한 기적소리 뿐...
가버린다.... 그렇게 사라진다.... 영원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 속에 그런 느낌이 가득찬다. 영원한 상실감... 그래서 혹시 감독인 린 타로 자신도 이 '철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년 시절에 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이지만,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어린 시절 그 만화를 보면서 우주의 동경을 꿈꾸던,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시절 열광했었던 만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기분을 맛볼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메텔’은 우리가 소년시절에 한번쯤 꿈꾸어봄직 했던 이상화된 첫사랑의 ’연인’으로 ’은하철도 999’는 '소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모험으로 나타나 주었던 그 시절의 ’낭만’ 으로 체화된다. 그 시절 소년이었던 우리들이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우주 저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 속 '태수'처럼...
그 때문일까?
실은 나도 메텔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달리는 철이의 모습과 저 먼 우주 속으로 가느다란 실이 되어 끝끝내 사라지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년 시절은 완전히 끝났어... 하면서... 이건 진짜다.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소설 읽기가 아주 힘들었다.
여기엔 이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소년 시절이 활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우가 아무리 힘들어도 태수가 아무리 방황해도 채영이 아무리 고독해도... 내게 느껴지는 건, 감정에 이입되기 보다는 때로는 질투심으로 까지 변질되곤 하는 부러움이 만들어 낸 거리감이었다. 딱 김종삼 시에 나오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 든 아주 가난한 아이 같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자신의 초라함만 더욱 더 강조되는...
게다가 위로를 바란다는 연우는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엄마에 듬직하고 의리있는 친구에 거기다 매력적인 연인까지... 소년 시절의 우리들이 한번쯤 꿈꾸어보곤 했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까지 했으니, 정작 소년시절 그 무엇하나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연우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나는 완전히 폼 좀 잡으려다 무리해서는 결국 마라톤을 포기하고 '회수버스'에 실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열심히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욕의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재욱 딱 그 꼴인데 말이다. 그 때의 재욱처럼 그렇게 나 역시 완주를 해낸 연우에게 오히려 위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부턴, 채영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이미 입어버린 그리고 길들여져 벗기도 힘이드는 우리 세대의 하소연을 좀 하려고 한다.
17살... 소설속 연우의 나이... 부끄럽지만 내겐 그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나타나는 건 그저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듯 학교로 가고 다시 그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별도 없는 어둔 밤, 가로등 불빛을 축쳐진 어깨로 힘없이 받으며 귀가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만 그득할 뿐이다. 가슴 설레는 '풋풋한 첫사랑'은 커녕 사진첩에 끼워두고 이따금 펼쳐보며 흐뭇해질 수 있는 추억 조차 변변찮다. 일본 영화에서 흔히 가장 눈부신 '여름'으로도 표현되곤 하는 십대 후반의 청춘이란 게 가질 수 있는 낭만은 그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엎드리면 내 상반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은 책상에 붙박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이탈과 탈주의 유혹과 욕구는 언제든 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 평범한 성격으로 태어난 죄로 그마저도 상상적으로 충족할 뿐, 부모와 선생님으로 그렇게 이중으로 둘러싼, 넘어야 할 울타리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용기가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을 읽고 입안에 머금고 채 되새기도 전에 서둘러 뇌리속에 새겨야 했던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게 뭐가 있었을까?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그 말들을 우리 자신의 말인양 착각하고 읊조리던 우리들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우리에 오래도록 갇히면 우리 자체가 온전한 세계가 된다.
연우는 스스로를 '도화선이 없는 폭발물'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아예 불발탄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벽돌이 되어 들어갈 자리에 딱 알맞게 들어가 하나의 벽이 되는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재욱이 말했던 안전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른들이 먹기 좋은 소시지가 되는 것... 그게 흔히 '모범생'이라는 태그가 붙어지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였다.
그렇게 연우가 G-그리핀의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신의 말로, 관계로, 형형색색의 계절의 색깔로 채워가던 그 시기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커다란 공백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때문에 나는 소설 속 '마리'에게 더욱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모범생'의 태그를 붙인, 좋아하는 연우와 이어지지도 못하고(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게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사실은 자신의 정답만 강요할 뿐인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어쩌면 유일한 의지처였을 수도 있는 오빠 태수 마저 잃어버린 마리에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커다란 위로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빠를 잃고 난 후의 마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깨라도 토닥이려 들어올린 손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처할 뿐이다.
물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독과 아픔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나 역시 연우와 채영 그리고 엄마 신민아와 재욱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물엔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위로 또한 시스템 바깥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행히 작가는 채영의 아버지와 마리의 속내를 밝혀 그 내부의 자들에게 까지 배려해 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내게 온전히 질투의 산물이 될 뻔 했으리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해서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면 다시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벗는 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맞지 않는 옷은 누구보다도 입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는 건 절절히 느낀다. 어쩌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우도 연우의 엄마도 태수도 채영도... 물론 시스템으로 부터 이탈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계기였을 뿐, 바깥에 머무르는 건 모두 그들 자신의 의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우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우의 '심드렁'이 그렇고 태수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그렇다. 채영은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욱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힙합 무대를 일부러 찾아 다닌다.
하지만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 자들의 경우, 그들에겐 애초부터 선택이란 게 있지 않았다. 마리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 음... 꼭 선생님 지시만 기다리는 착실한 반장 같아요. 그런 애들, 자기 생각은 거의 없거든요. 정해진 정답만 열심히 찾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안 행복한 거 같아요.(P. 416)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 고백...
-나는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무조건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생깁니다.... 나한테는 생존방식이랄까요, 그렇게 안 하면 불안해요. 농촌 가난한 집의 우수한 장남, 이런 얘기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쩔 수 없이 납니다....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 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어버린 걸. 다른 옷을 입어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 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P. 439)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보여지듯 이들에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들의 가능성의 영역은 외부로 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이 입혀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했던 것이다. 자의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타의로 억지로 입어졌다면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 그 타의로 입혀진 옷을 입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나를 보는" 끔찍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채영의 아버지는 연우 엄마의 어쩌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한 마디에 그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던 흉중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 만큼 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정도의 말이라도 충분할 만큼, 진심어린 어떤 자그마한 위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대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대로,
각 자만의 삶의 무게와 그 짓눌림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목인 '소년을 위로해줘'의 소년은 '연우'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아직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는 재욱의 에세이의 결말을 일부러 이렇게 맺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p.389)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어디에 서 있든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해주자,
태수가 말했듯, 아픔은 겪는 각자에겐 다 그 무게가 있으니 그 원인이나 크기는 상관말고.
그냥 위로해주자.
3. 결여의 존재들 그리고 위로
그건 우리가 잘 나서도 더많이 가져서도 아닌, 우리 모두가 '결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렇고
재욱이 굳이 우리를 '소년들'로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또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년'이란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건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결여의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비행기, 공항, 우주정거장 등등 그토록 비상과 비행에 관련된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거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도 '결여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연우의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연우와 채영 그리고 마리, 마리의 엄마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태수를 잃는 것도 그렇다. 태수 역시도 과거 미국에서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으며 연우 엄마와 재우는 소설의 후반까지 내내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관계로 남는다.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존재론적 결여'는 우리가 위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그래서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자체가 일으켜 세워 달라는 작은 아이가 내미는 손이 된다.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 내미는 작은 아이의 손이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원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족한 결여들을 메워가면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존재론적 결여'는 잡아주는 손길, 즉 위로가 상대와 처지와 이유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로 되어야 하는 것까지 요청한다.
이러한 결여된 존재로서의 조건이 위로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소설에서 연우 엄마가 자기가 가장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한 꿈을 꾸고 난 후에 한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어. 짧았고 조용했고 피할 수 없는 것,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 사라져버리는 어떤 찰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어. 유한한 존재들을 스쳐가는 짧고 날카로운 빛... 그런걸까. 무력한 어린 존재가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무력하고 철없는 젋은 엄마에게 모든 빛은 내쏘며 전 존재를 의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없이 초라하고 피곤한 젊은 엄마의 가슴 뜨거운 찰나 같은 것. 연우야 생각해 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거야. 응. 너무 행복했어. (P. 404)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도 한 이 독백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우 엄마의 고백 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 존재를 의지하는 가련한 소년들이다. 그건 당신이 어디에 있어서건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건 상관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겁디 무거운 삶의 중력을 등에 지고 버텨야 하는 고독한 '아틀라스'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 자체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무언의 호소이듯이 날개를 잃어버린 채 내리누르는 중력으로 버거워하는 우리 '소년'들의 존재 자체가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권리도 그리고 아낌없이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역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며 난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년시절을 떠 올렸고 그 상실감에 소설 속의 연우를 질투하기도 했다. 거기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17살. 그래서 소설 속 연우의 여정은 그의 아픔과는 별도로 나 역시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보는 가난한 아이'처럼 괴로움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마리의 얘기가 없었다면 그나마 재우의 넋두리와 채영 아버지의 속내가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왠지 어느결에 바로 앞에서 길게 인용한 연우 엄마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소년에게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가 느껴졌다. 사실 그 대부분은 연우 엄마, 신민아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왜 연우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신민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엄마라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신민아라는 별개의 단독자로서 위로를 건넨다는 그런 의미일까? 하긴, 엄마라서 위로를 한다면 그건 위로에 조건을 부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위로가 전 존재적 호소이자 응답'이라는 소설의 주제에서 보자면 끝까지 신민아로 남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경구처럼 주옥같기도 했지만 공백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는 아팠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퍼즐카페의 주인 아저씨까지 응원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리의 뒷 얘기를 읽지 못하는 것은 그지없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지막의 연우와 채영 처럼 봄눈을 맞으며 '돌아오지 못할 것들은 그만 보내주고(이건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다른 별에 온 것' 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