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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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쥬'라는 게 원래가 자신의 창작적 혈통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려는 것임과 동시에 일종의 작품 창작의 동지적 선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문학에서도 '오마쥬'라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둘 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테마로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 자신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쓰는데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두 작품은 시기적으로도 비슷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1886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나왔죠. 이렇게 두 작품은 공히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 역시 19세기의 유럽을 휩쓴 격변의 물결을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달로 귀족사회는 점증하는 신흥 부르조아지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의 바람 또한 중세 이래로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사회체제를 마구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드보르작은 귀족사회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한창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신세계 교향곡'을 지었고,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대변하던 낭만주의는 척박한 노동과 빈곤한 삶의 질곡을 담아내고 있는 사실주의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겠죠.

바로 그러한 정신적 혼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들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 였다고 생각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로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수 있는 약을 먹으려 결심하면서 한 생각입니다. 지킬은 이렇게 그 약을 먹음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두 존재로 인한 갈등과 번민에서 해방되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킬은 본래 쾌락을 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고결한 척 해야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과 행동의 괴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싶지만 남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양심의 가책은 모두 '초상화'에 떠 넘긴 채, 쾌락을 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플라톤의 대화 중에 '사람들이 왜 도덕적이 되느냐?'에 '기게스의 반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기게스의 반지'는 약지에 끼고 돌리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신기한 반지입니다. 플라톤과 대화하는 상대방은 바로 이 '기게스의 반지'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는 것은 바로 남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남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 누구도 도덕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킬' 역시 그러합니다. 그가 그의 추한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하이드'를 만들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나중에 H.G 웰즈에게 문자 그대로 중요한 주제로서 쓰여지게 됩니다. 그 작품이 바로 '투명인간'이죠.

 스티븐슨과 웰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에서 중요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죠. 그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이 초상'에서도 똑같습니다. 바질은 도리언에 대한 온갖 추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도리언을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모든 추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일을 하면 아무리 감추려해도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데 도리언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순수했기 때문이죠.

 

 이 시선,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이 그들 모두에게는 중요했습니다. 그걸 이른바 '명예'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렇게 그 시선들은 '신사다움'을 보는 것이고 그건 그가 '얼마나 매너를 지키느냐?'하는 것을 판별하는 시선에 다름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은 그 매너, 사교 예절 등등을 수립한 '서양 문명'으로 부터 오는 시선이었습니다.

 로베르토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그런데 이 문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이 문명은 자연발생적이 아닙니다. 문명이라는 말은 1760년 미라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렇게 그건 근대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은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중세의 '궁정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문명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중세 당시 왕들은 많은 영주를 거느리고 있는 체제였습니다. 왕은 그 많은 영주를 주로 토지를 나눠줌으로서 지배했는데 아시다시피, 귀족이 많아지면 나눠줄 수 있는 땅은 점점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왕은 언제까지고 땅을 통해 귀족들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낸 귀족 지배 방법이 바로 매너(예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매너(예절)이란 왕과 귀족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거기에 맞는 격식, 예절들을 만들고 교화시킴으로서 스스로 자기 자리의 본분을 지키도록 해 나가도록 만든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죠. 이 프로그램은 성공했고 격식과 예절을 지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 신분을 알려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잡자 마자 신흥부르조아지들은 혈통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귀족과의 차이를 이 격식과 예절을 흉내냄으로서 상상적으로 따라잡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격식과 예절이 주는 '신분적 기호' 덕분에 그건 유럽 전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들은 그 기원과 상관없이 문화가 되고 미라보에 의해 '문명'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로베르토 엘리아스가 보았던 것 처럼 '권력 유지를 위한 지배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엔 자연 억압 효과가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매너'라는 것이 곧 자신을 나타내는 잣대이므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거기에 맞출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고 자연, 외부로 부터 강요된 문명이라는 것에 맞춰 자신의 본성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스카 와일드, 웰즈가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피하고 싶었던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이 그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 바로 자신을 억압하는 시선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19세기에 몰아닥친 격변 때문이었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가 그 이중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것을 수직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킬은 자주 그의 하이드를 '저급한 존재'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나타나듯이 그는 하이드를 자신보다 덜 발달한, 아직 진화론적으로 미숙한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수 동물... 말하자면 서양 문명이 자신에게 맞지않는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 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지요. 여기서 지킬이 아직
그 거대한 문명적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건 단적으로 서문에 드러납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리얼리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비친 얼굴을 보지 못해 화가나서 미친듯이 날뛰는 것과 같다


 여기서 캘리번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을 말합니다. 그는 프로스페로에 의해 길들여지는 야수이기도 하죠.

 오스카 와일드가 일부러 캘리번을 언급한 것은 스티븐슨의 '하이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스티븐슨이 하이드의 비문명성을 저급한 것으로 보았던 것을 비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아예 인간의 본성이 비문명적인 것이며 이중성이란 바로 '어디서 바라보느냐?'란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리얼리즘과 낭만주의가 삶과 예술을 다르게 바라보듯이 말이죠.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스티븐슨이 애써 다른 존재로까지 만들어서 감추고 지우려 했던 문명화되지 못한 본성들을 당당히 존재의 본성으로 선언합니다. 모든 존재는 캘리번이고 문명적이라는 것은 그에 덮어씌우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그는 더이상 '기게스의 반지'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더이상 문명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개인의 삶 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예술과 삶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렇게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사조의 명칭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리얼리즘은 그냥 '현실적인 삶', 낭만주의는 그냥 '예술'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 예술은 '도리언'으로 '삶'은 바로 도리언의 초상화로 형상화됩니다. 그렇게 '도리언의 초상화'는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짊어져야 하는 책무, '양심'에서 떠오르듯 윤리...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윤리라고 해도 좋겠죠. 하지만 이것은 문명적인 것을 넘어선 것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원초적 배려'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자유로운 예술(서문에도 나와있듯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가 그걸 말하고 있죠)과 거기에 책임을 지우려는 윤리적인 삶과의 투쟁입니다.

 사실 이건 오스카 와일드가 하나의 우화로서도 얘기한 바가 있지요.

 그게 바로 우리들이 잘 아는 '행복한 왕자'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모든 사람들이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적으로 완벽한 그 왕자는 타인들의 삶을 신경쓰게 되고 그렇게 윤리적인 선행을 베푼 나머지 모든 예술적 환영을 망가뜨리고 퇴락한 존재로 돌변해 버립니다.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바라보는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아주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윤리'라는 것은 예술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리는 예술을 좀먹는 것이며 결국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반복됩니다. 결말도 그렇지만 특히 도리언이 그토록 매혹되었던 시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를 선언하는 장면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도리언이 시빌과 절교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은 시빌이 도리언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삶의 진정성을 깨닫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기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빌은 예술적 환영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줄 연기를 도리언이 보는 앞에서 마치 그것이 가상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려는 듯 일부러 엉성하게 만들어 버리죠. 행복한 왕자가 자신의 눈부신 금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듯이...  그렇게 행복한 왕자가 사람들에게 버려졌듯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시빌 역시 도리언에게 버림받게 되는 것이죠.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네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적 격변에 의해 균열이 벌어진 틈 사이로 문명의 억압적 시선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스티븐슨은 자신도 모르게 알게된 그 비문명적인 것을 감추기 바빴고, 오스카 와일드는 비웃으며 그걸 가볍게 벗겨버리고는 비문명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자기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 

 그렇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예술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혹은 '윤리가 예술에게 지울수 있는 책무는 어디  까지인가?"하는 질문에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가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보는 사유의 과정의 산물이라 정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적 시선'을 벗어난 인간은 과연 어디 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의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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