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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의 노예들 ㅣ 바벨의 도서관 9
잭 런던 지음, 김훈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나는 이 단편집에 대해 먼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이 단편집이 아니었다면 잭 런던이 이토록 단편에도 뛰어난 작가였다는 것을 영영 모르고 지냈을 뻔 했다. 보르헤스가 200여편에 이르는 잭 런던의 단편들에서 선별한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한 종합선물상자이자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잭 런던의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의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나이 40에 의문의 죽음(병사인지 자살인지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다.)을 맞아버린 잭 런던이 좀 더 오래 그의 창작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아쉽게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만큼 아주 매력적인 단편들이다. 게다가 그는 우리 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1904년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러일전쟁때 종군기자로 우리 나라(당시 조선)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때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엮어 '조선사람 엿보기'란 제목으로 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도 있고 하니 작가가 좀 더 각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엔 2005년에 국내에도 발간된 '암살주식회사'의 원형이 되는 걸작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까지 있으니 굳이 보르헤스의 추천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단편집이다.
<- 잭 런던 , 조선사람 엿보기(La coree en feu)의 표지
옆에 서 있는 외국인이 바로 잭 런던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단편집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단편집은 무엇보다도 보르헤스가 선집한 단편집이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그가 무슨 이유로 특별히 이 다섯 편을 골랐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다섯 편은 이렇다.
마푸히의 집
삶의 법칙
잃어버린 체면
미다스의 노예들
그림자와 섬광
첫번째 단편 '마푸히의 집'은 자기가 캐온 거대한 진주를 가지고 프랑스 풍의 집을 얻으려는 히쿠에루 환초에 사는 마푸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남태평양 바다를 건너 목자재를 들여오기가 쉽지 않은지라 거래는 잘 성사되지 않고 결국은 협잡꾼에게 걸려 그 진주를 강탈당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마푸이가 진주를 뺏기는가 싶더니 그 날 유사이래로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이 그 섬에 몰아닥친다. 두번째 단편, '삶의 법칙'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 가족들이 겨울철 굶어죽지 않으려고 할머니를 고려장시키듯이 이 단편의 주인공 코스쿠시 노인의 운명도 같은 길을 걷는다. 이 단편은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내버려진 코스쿠시 노인이 그들이 떠나는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거기서 그는 생명력 넘쳤던 젊은 날과 또 그렇게 자신 역시 생존을 위해 아버지를 버렸음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나는 건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큰 사슴의 최후이다. 결국 집요한 늑대의 추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던 큰 사슴 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될 것을 알고 늑대들이 몰려들었을 때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맡기게 된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할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아들에게 오히려 추우니 빨리 돌아가라고 손을 내젖는 것 처럼 자신의 죽음을 자연의 섭리라 여기는 것이다.
세번째 단편 '잃어버린 체면'은 문명의 정복과 야만의 복수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물결에 휘말리는 바람에 죽을 운명에 처해진 수비엔코프가 주인공이다. 그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원주민들이 가하는 끔찍한 고문만은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선택권은 그에게 있지 않으니 곧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거부할 수가 없다. 끝내 그는 기지를 발휘해 단번에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만든다. 대신 그 기지에 휘둘린 원주민의 추장은 그에게 놀아난 댓가를 평생 치욕으로 짊어지게 된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한 자본가에 보내진 협박장이 중심이 된다. 그 협박장은 '미다스의 노예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자들이 보낸 것으로 자본가의 전재산을 기부하지 않으면 그 댓가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뺏겠다고 한다.
"선생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사업을 제안한 데 불과합니다. 선생은 윗멧돌이고 우리는 밑멧돌입니다. 그 두 개의 멧돌이 돌아갈 때 그 노동자 목숨은 갈려버릴겁니다."(p.115)
그저 질나쁜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곧 그들이 정한 시간에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뺏겼다는 것을 알게된다. 계속 날아드는 협박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희생되는 사람은 늘어가고 급기야 그들은 이제 익명이 아닌 구체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인적사항까지 알려주며 그 죄책감을 떠안겨주려 한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자본가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돈과 연줄로 어떻게든 이들의 정체를 파헤치려하지만 사회 곳곳에 점조직으로 스며들어있는 이들이 존재는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시체에 죄책감만 더해갈 뿐이다. 다섯째 단편 '그림자와 섬광'은 라이벌 관계에 빠져 경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두 사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그 어리석은 경쟁은 그들의 모두 목숨을 잃고서야 끝나게 된다.
간단히 다섯 편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왜 보르헤스가 하필이면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차례다. 분명 이 다섯 편엔 공통점이 있다. 아마, 다섯 편을 직접 읽어보면 그게 분명히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이 다섯 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단편을 보자 거대한 진주로 집과 교환하려 했던 마푸히는 인간적 노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그렇게 라울도 교활한 장사꾼 토리키와 레비도 비열한 방법이지만 인간적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 날 그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보복이 개시된다. 그 압도적인 허리케인 앞에서 인간이 했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는 이미 공포의 감정을 넘어서 있었다. 그 다음에 밀려온 파도가 그 땅을 휩쓸면서 당연히 그 인간 잔해들까지도 깨끗이 쓸어갔다. 그가 이제까지 본 어떤 파도보다도 더 거대한 세 번째 파도가 닥쳐와 그 교회당을 호수 속으로 쓸어 넣었다. 반쯤 물에 잠긴 채 바람 부는 쪽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그 교회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대홍수에 쓸려가는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p.38)
그리고 마푸히가 빼앗겼던 진주는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을 스스로 찾아 온다. 여기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잭 런던은 인간의 간교한 노력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심판을 허리케인을 통해 드러낸다. '노아의 방주'가 생각났다는 라울의 고백에도 나오듯이 런던은 그것을 신의 의지로 승격시킨다.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한낱 개미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 단편을 통해 런던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거대한 진주 역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책을 비웃듯이 홀연히 스스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가! 바로 이 첫번째 단편에서 왜 보르헤스가 유독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그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 다섯 단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편 역시 그토록 생명력이 넘쳤던 젊음이 지나고 노쇠해지자 족장이었던 그는 이제 가족의 거치적거리는 짐이 될 뿐이다. 그는 어릴 적 보았던 거대한 수사슴의 최후를 떠올린다. 그토록 집요한 늑대의 추적을 피해 살려고 발버둥 쳤었지만 결국은 늑대들에게 먹혀버린 사슴처럼 그 역시 사멸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의지를 초월하는 삶의 법칙이니까. 세번째 단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최후의 순간만 남았다"로 시작하는 단편답게, 스스로 죽을 방법을 결정할 수 없는 수비엔코프는 기껏해야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자연이 아니라 이제 인간이 만든 사회 자체도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임금 노예'라 부른다. 그들이 자본가에게 전재산을 요구하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말한대로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자본가 계급 때문이고 자본이 없는 이상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계급이고 그래서 개인이 가질수 있는 도덕관이나 사회윤리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단체의 의지는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의미없는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과 상식마저 초월하여 스스로 괴물이 되려한다.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산업적 사회적 악의 정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해 낸 사회와 맞서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시대의 성공적인 실패작들이요 타락한 문명이 가져다준 재앙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사회적 선택이 빚어낸 존재들입니다.(p.130)
이들의 탄생도 활동도 모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잭 런던의 면모가 많이 드러나 있는 이 단편에 이어 다섯번째 단편은 이번엔 '미다스의 노예들'의 표적이 되었던 '자본주의적 인간'들을 다룬다. 바로 자본주의의 동력의 핵심이라 할 '경쟁'을 조명하는 것이다. 잭 런던은 이 단편을 통해 자본주의가 미덕의 하나로 간주했던 경쟁 마저도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를 넘어서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렇게 경쟁에 완전히 지배당해 버렸던 두 남자는 결국 존재가 보이지 않거나 찰라의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림자와 섬광'은 그렇게 그 두 남자의 경쟁으로 변해버린 존재를 의미하고 이 단편은 경쟁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지워나가는지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르헤스가 특별히 뽑은 잭 런던의 다섯 단편들은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의 섭리와도 같은 거대한 자연의 심판이나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 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경쟁 같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물 마저도 이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다스의 노예들'에서 웨이드 애츨러가 했던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일세. 난 불가피한 필연에 맞서 싸울 수 없어.(p.131)
잭 런던의 이런 세계관은 사실 보르헤스의 세계관과도 이어진다. 아마도 그러니까 보르헤스가 특별히 선택했을 것이다. 보르헤스 역시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원형의 폐허들'에서 처럼 인간은 어느 것이 환상이고 진실인지를 파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과연 실체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부족함'의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는 거대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인간을 초월해 있으며 인간은 영원히 전설의 책을 찾아 그 혼돈의 도서관을 방황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잭 런던과 보르헤스는 이렇게 만난다. 이 단편집의 다섯 단편은 바로 그 접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접점'은 언제나 맛닿은 양 쪽을 모두 다 살펴볼 수 있다는 잇점을 갖는다. 그렇게 이 단편집은 우리로 하여금 잭 런던과 보르헤스 양쪽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